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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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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근대역사의 숨결이 서린 곳 2
무기장터 추천 0 조회 73 14.12.15 11: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박물관으로 변한 근대건축

 

 

흘러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버텨내고 남은 사람과 물건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등록문화재 제324호)은 현재 강경역사관으로 활용한다. 붉은 벽돌건물은 한여름 태양 빛을 머금어 더욱 강렬한 색채를 뽐냈다. 전체 건물 규모보다 소박하게 낸 출입문은 보안에 신경 써야 할 은행건물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이 건물은 이름도 많았다. 그 사실이 정문 바로 위 현판으로 사용한 화강석에 옅은 흔적으로 남았다. 이 건물은 1913년 신축했다. 1931년 1월 21일 호서은행과 합병하여 동일은행으로 변경했으며, 1943년 10월 조흥은행 강경지점으로 변경, 1954년 11월 서창동 51-1번지로 신축이전했다. 이후 중앙독서실, 충청은행으로 사용했고 개인소유의 젓갈 창고였다가 시에서 사들여 지난 2012년 9월, 강경역사관으로 문을 열었다.

 


강경역사관은 흘러간 시간을 오롯이 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건을 기증한 시민의 이름이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물건을 기증한 시민에게 고마움을 담아 물건 앞에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기록했다. 타자기, 전화기, 다리가 달린 TV 등은 그 시대를 함께 한 사람에게는 향수를 불러오고, 생경한 사람에게는 상상을 펼치게 한다. 벽에는 강경의 역사와 강경에서 볼 수 있는 근대건축물을 소개했다. 강경역사관에서 소개한 강경 근대건축물 여행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강경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 연수당 한약방(강경 중앙리 구 남일당한약방)
강경장 길목에 선 한약방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장이 열린 길목에서 그때를 추억하는 건물 하나를 볼 수 있다. 그 옛날 장이 들어서던 길목에 있는 연수당 한약방(강경 중앙리 구 남일당한약방, 등록문화재 제10호)은 강경 하시장(아랫장터)이 번성했던 때 그 중심에 있어 호황을 누렸다. 현재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은 처음 연수당 한약방을 지은 유진순 선생의 손자 유한근 교수다. 유 교수는 주말마다 내려와 이곳에서 지낸다.

“1920년대 찍힌 강경장 전경사진 속 건물이 ‘남일당 한약방’이라 이곳을 구 남일당한약방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에도 변경신청을 하려고 합니다. 사진 속 건물은 남일당한약방이 맞지만, 그곳은 사라졌습니다. 이곳은 1923년 저희 할아버님이 지은 건물로 처음부터 연수당 한약방이었습니다.”
이어 유 교수는 지붕 내부 상량문을 보여주며, 1923년 지은 건물임을 확인했다. 2002년 문화재로 지정된 후, 2004년 뼈대를 그대로 놓고, 집안 이곳저곳을 보수했다. 연수당 한약방은 일본양식에 한옥양식을 더한 독특한 구조다. 복층 구조로 문화재 지정 전부터 자손들이 보존해 온 약장과 주렁주렁 매달린 약봉지, 상장, 사진 등이 남아 있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며 보존해온 물건으로 내부를 꾸몄다. 어릴 적 집안에 있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할아버지를 부르고, 뛰어다녔던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유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집은 그냥 집이 아니라 추억을 담고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2층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에 모두 장이 섰습니다. 남사당패도 오고, 약장수도 왔지요. 볼거리가 다양했어요. 모두 모여 놀면서 장사도 하고, 물건도 사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아주 즐거운 문화였죠. 강경 오일장도 유명했지만, 난장도 아주 유명했습니다.”
2층에 앉아 예전 난장이 섰다는 창밖을 내다본다.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인 것이 시원하다. 한약방을 운영할 때는 2층에 약재 등을 보관했고 1층에서 진료를 하고 약 처방을 했다. 옛날엔 한약방 건물 말고도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입원실과 안채까지 있었다. 아쉽게도 한약방 건물을 제외한 안채는 모두 헐린 상태다.

 


-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학교 옆 남은 관사

 

 

학교 안에 있는 관사는 대부분 기다란 학교 건물에 몸을 숨긴 채 은둔한다. 1931년 지은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등록문화재 제322호)도 작은 공원을 사이에 두고 본관 건물과 내외한다.
관사는 1931년 신축한 것으로 근대 기술을 주택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장관사로 또는 학생합숙소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상주하는 사람은 없고 가끔 교장 숙소로 사용한다.
구 강경공립상업학교는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는 강상고등학교다. 마침 관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최병현 교장을 만났다.
“단층 건물인데도 높이가 높아서 아주 시원합니다. 바람이 잘 통하죠. 신기한 것이 하나 더 있어요. 그리 넓지 않은 데도 관사 안에 화장실이 세개나 있죠. 현관에 하나, 방에 하나, 거실에 하나 이렇게요. 제를 지내던 ‘단’도 아직 있어요. 원래 일본식으로 복도가 죽 있었는데, 지금 그 복도는 허문 것으로 보입니다. 바닥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 강경 황산포구 등대
돌산에서는 아직도 푸른 나무가 자란다

 

강경읍을 둘러보니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짠한 가슴은 금강을 바라보는 황산포구 등대에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바다도 아닌 강에 세운 등대는 강경의 옛 모습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알려주는 거울이다. 황산포구 등대는 1915년, 금강 하류에서 서해 어물을 싣고 들어오던 어선과 맞은편 세도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던 장사꾼들의 야간 운항을 도와주었다. 역으로 논산평야에서 나온 수많은 쌀이 이 강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후 철도 운송의 증가와 고속도로 건설 등 육로교통 운송 발달로 기존 수로 유통 체계 상권이 수그러들었다.
1987년, 황산대교가 놓이고 배가 끊기며 철거됐다가 2008년, 이 자리에 복원했다.
황산포구가 놓인 돌산은 황산리의 이름 유래인 ‘황산’이다. 지금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그냥 돌덩이로 보인다.
돌산 옆 산책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다.
“여기 도로 생기기 전에 다 이어져 있었어. 이게 돌산이여. 산 부셔서 군산항구 만드는 데 썼지. 돌이 많이 필요하니께.”
길게 뻗은 도로를 바라보며 아직도 야트막한 돌산이 놓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돌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푸른 나무를 보며 그 생각은 더욱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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