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윤동주의 시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현재 연변 용정시 명동촌)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은 일제 말기의 시인입니다. 살아서는 무명 시인이었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내성적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간도 용정에서 간행되던 <카톨릭 소년>(1936)에 「오줌싸개 지도」 등의 동시 몇 편을 발표하였고, 서울에 와서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며 앙드레 지드, 발레리, 릴케, 프랑시스 잠, 도스토예프스키 등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칠 무렵 19편의 자작시를 묶은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려고 영문학자인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으나, 이양하 교수가 출판을 보류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왜 보류하라고 했을까요? 아무튼 그 뒤에 윤동주는 일본 립교대학 및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유학을 하였으나, 유학생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혀있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화장이 되어 북간도(용정시 동산 그리스도교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알려진 그의 시들은, 그가 내성적 성격이어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고백적으로 성찰하는 시가 많이 보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전문
이 시는 창작자 자신을 ‘한’ ‘그’ ‘사나이’ 등으로 객관화시키고 있습니다. 자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자기성찰의 시입니다. 달, 구름, 하늘, 바람, 구름은 천체적 심상입니다. 이런 심상이 전원 심상과 만나 시 전체에 서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기애(나르시즘)적인 자아성찰이 이루어집니다. 자기애적인 자아성찰은 이 시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됩니다. 들여다보니 밉고, 돌아가니 가엾고, 도로 들여다보니 밉고,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립다는 과정을 보면, 시인이 고도의 계산을 하며 쓴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윤동주는 굉장히 많은 국내외 시를 읽으면서 시의 기법을 열심히 공부한 시인입니다.
위시는 ‘그’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그’ 시점으로 쓰기는 삼인칭 시점, 화제중심 말하기입니다. 이애, 그애, 저애, 이이, 이 사람, 그이, 그 사람, 저이, 저 사람, 이분, 그분, 저분, 이 어른, 그 어른, 저 어른, 이. 그. 저 등은 화자와 청자 이외에 이야기를 듣는 제3자에 대응하는 인칭대명사입니다. 이를 삼인칭 또는 타칭이라고 합니다. 삼인칭 대명사는 앞에 나온 사람을 대용하는 기능도 띠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삼인칭대명사는 일, 이인칭과는 달리 고유한 형태가 없고 지시관형사와 의존명사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사람' '그 사람''저 사람'은 관형사에 자립명사가 붙어 있는 것이고 '이이' '그이’ '저이'는 관형사에 의존명사가 붙은 것입니다. '이애' '그 애' '저 애'는 '얘, 걔, 쟤’로 축약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삼인칭 대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문인들은 삼인칭 여성대명사로서 ‘그녀’를 사용합니다. 지시관형사와 명사의 결합으로 성립된 제 삼인칭대명사는 화자와 청자를 축으로 하여 이야기의 현장에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열은 화자에게 가까이 있는 인물을, '그' 계열은 청자에게 가까이 있는 인물을, '저' 계열은 화자와 청자로부터 비슷한 거리에 있는 인물을 가리킬 때 각각 나타납니다.
삼인칭에는 미지(未知), 부정(不定), 재귀(再歸)의 대명사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누구' '어느 분' '어느 어른' 등 관형사와 명사의 합성으로 된 미지칭, '아무' '아무 분' '아무 어른' 등 관형사와 명사의 합성어로 된 부정칭, '자기' '저(저희)' '당신' 등 앞에 나온 제 삼인칭 주어가 되풀이되는 재귀칭(재귀대명사)이 있습니다.²⁹⁾
제3자인 '그'를 지칭하는 삼인칭 시점은 화자가 체험한 부분이 아닌 유형입니다. 화자가 시의 세계 밖에서 시의 세계를 진술하는 경우입니다. 화자는 타인의 체험을 진술합니다. 여기서 화자는 전지적 시점이거나 보고자로서의 관찰자 시점이 됩니다.³⁰⁾ 정보전달에 적합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어조를 띠기 마련인 서사시는 대개 삼인칭 시점을 즐겨 사용합니다.³¹⁾
'나'인 일인칭, '너' '당신'인 이인칭, '그' '그녀' 등의 삼인칭은 일정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반인간 즉, '인간'을 표시할 때 총인칭으로 개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 총인칭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반생이 지나간다.” 나 “사람은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등, '사람'은 일반인간을 의미합니다.³²⁾ 시 속에서 일반인간의 시점으로 서술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일반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의인화된 사물의 시점으로 서술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에 있어서 사랑은 자기에 대한 사랑의 문제가 가장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의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자아 고백적 시는 「서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이 시는 국민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부끄럼, 둘째는 바람-괴로움, 셋째는 별~사랑, 넷째는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도 창작자가 상당히 계산을 하여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각각 2행이 한 단락으로 네 번을 반복한 가운데 2연에서 연을 바꾸어 상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하늘을 보고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것은 순결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람 앞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대응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 나름대로의 현실에 대한 저항의 방식입니다. 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상에 대한 열망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연을 바꾸어 별이 바람에 스친다는 것은 현실의 고난이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참회록」 전문
1연에서는 역사적인 삶으로서 자기 자신을 치욕스러워하며 자책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무력감에 시달리는 심리적 치욕감의 표현입니다. 왕조의 유물이므로 이미 망한 나라의 유물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의미입니다. 2연에서는 지금까지의 삶이 기쁨 없이 살았다는 현실인식입니다. 삶의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3연에서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후대의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4연에서 거울은 자기 반영의 매체인데,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는다는 행위는 자기반성이기도 하고 자아를 갈고 닦는 일밖에 식민지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5연에서는 고독하고 슬픈 자아의 모습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자기혐오의 감정과 참회의 격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김상봉은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들이 많았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시기 시인들은 철학자 대신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또 그 물음은 대개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했고 자기소외, 만남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고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l 《한겨레》, 201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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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남기심, 『표준국어문법론』, 탑출판사, 1985, 7~81쪽 참조.
30) 김준오, 202~203쪽 참조.
31) 이지엽, 378~379쪽 참조.
32) 총인칭(Generic person)은 필자가 영문법에서 착안한 것으로 인칭대명사 We, You, They, One 등이다.(유진, 『영어구문론』, 288쪽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5. 2. 1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