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은해사 주지 덕조 스님
“불교, ‘함께 하는 삶’ 지향하기에 이 시대에도 가치 있어!”
개신교 신자였던 청년, 결핵요양소서 출가 원력
동곡일타 스님 친견 후, 혜인 스님과 은사 인연
법랍 40년 여정 성찰하며, 1167km 인도 성지순례
“쉬우면 기도 아냐” 말씀, 새기며 ‘묵언’패 걸고 정진
뜨거운 길에서 ‘불이’ 체득, “전법 여정은 끝나지 않아”
시민도 편안히 쉴 수 있는 도량 내 공간 최대 확보
“산사에서의 좋은 기억이 불교 인연 맺는 계기 될 것”
“나라면 이렇게…” 말 지양 ‘다름’ 인정할 때 배려 가능
은해사 주지 덕조 스님은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행복해지는
‘함께하는 삶’에 눈을 돌리면 좀 더 품격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八公山銀海寺(팔공산 은해사)!’
은해사 사천왕문의 편액이 길손들을 맞는다.
땅에서 ‘툭’, 한 번의 날갯짓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학의 자태를 닮은 듯한
아주 독특한 서체. 한눈에 보아도 동곡일타(東谷日陀·1929∼1999) 스님의 글씨다.
짙은 안개 드리워지거나, 구름이 피어오르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여
은해사(銀海寺)라 했는데, 신라의 진표 율사도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라며 감탄했다.
절 마당으로 이끄는 누문(樓門) 보화루(寶華樓)의 편액은 추사가 썼다.
그의 묵향을 유독 많이 간직하고 있는 은해사인데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산해숭심(山海嵩深)’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제주 유배에서 돌아온 직후 서울에 머물 때 쓴 작품이라고 한다.
한때는 현 극락보전 자리에 추사가 쓴 ‘대웅전’ 편액이 걸렸을 것이다.
아쉬워할 건 없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들어서면 추사와 만날 수 있다.
우향각에는 출입문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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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을 마주하며 오른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주지실인 우향각(雨香閣)이 보인다.
그런데 들어서고 나서는 경계를 짓는 출입문이 없다.
담 한 쪽을 툭 털어 낸 듯 뻥 뚫려있는데 그 앞에 작은 팻말 하나 보인다.
‘은해사 오신 분들 들어오셔서 사진 찍고 쉬시다 가셔요 *^^*’
마음 편히 산사를 둘러보시라는 은해사 주지 덕조 스님의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마산 국립결핵요양소에 입원했었다.
결핵을 앓던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그곳이다.
요양소 내에는 환자들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위해 천주교의 해운성당 가포공소,
개신교의 벧엘 교회, 그리고 관해사(觀海寺)가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터라 교회에 나가곤 했는데 그날따라 전도사가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하여, 교회 뒤에 자리한 절로 향했다.
‘괜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일전의 교회 설교 시간 때 관해사 험담 얘기를 들었는데
‘지나치다’라고 생각했었더랬다.
상담받으러 왔다고 하니 당시 주지 소임을 보던 정빈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라 했다.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제 병 낫게 해 주세요. 불교계를 위해 한평생 힘쓰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가 어떻게 병을 낫게 해요? 병은 저 아래의 의사가 치료해 주시지요.”
그 답 한마디가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님이 병을 낫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라며 받은
안수 기도 때와는 분명 다른 심적 요동이었다.
“이것이 불교구나!”
틈만 나면 절로 올라갔다. 그냥 앉아만 있다가 와도 좋았다.
병은 의사의 노고에 힘입어 치유되어갔고, 그사이 출가를 향한 마음도 단단해져 갔다.
당시 마산대학을 다니던 시견 스님이 청년의 뜻을 알아채고는 해인사 지족암으로 안내했다.
당시 암자에 주석하고 있던 일타 스님은 청년을
상좌 혜인(1943∼2016‧은해사 전 조실) 스님에게 보내 은사 인연을 맺게 해 주었다.(1984)
우향각(雨香閣)!
‘비와 향기’ ‘비의 향기’ 어떻게 해석하던 시적이다. 툇마루에도 작은 팻말 하나 놓여 있다.
‘여기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와요.’
툇마루에 걸터앉아 은해사의 정취를 만끽해 보라는 뜻일 터다.
“‘인생 샷’ ‘인증 샷’ 유행이 시작된 지 오래입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기억하기 위함일 겁니다.
언젠가 우향각을 기억해 내면 은해사로 또 걸음 하겠지요.
‘들어오지 마시오’ ‘출입 금지’ 등의 팻말은 가능한 안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폐쇄적 산사’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산사를 찾은 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최적의 공간을 확보해 드리려 합니다.”
산사를 찾은 사람들이 촬영을 청하면 기껍게 응한다.
스님들의 고유 공간을 개방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을 것 같아
파라솔부터 갖다 놓았더랬다. 사중의 큰스님들에게는
“마당에서도 차 한 잔 드리고 싶어 마련했다”라고 에둘러 말씀드렸다.
이후 벤치도 하나둘 갖다 놓았다.
“처음엔 ‘정말 들어가도 되나?’ 싶어 조심스레 들어선 분들이
금세 함박웃음 짓고는 촬영하시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웁니다.”
큰 나무 아래, 계곡을 마주한 자리 곳곳에 벤치를 설치했고,
산사의 풍경을 벗 삼아 차 한 잔 마시려는 사람들을 위해 북카페도 열었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향각으로 초청해 차담을 나눴다.
“은해사는 지난해인 2022년 문화재관람료를 전액 면제했습니다.
짧은 기간의 통계이지만 입장객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불자가 아닌 일반 시민도 많이 오신다는 방증입니다.
절을 찾는 분들에게 무엇을 선사할까 사중의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장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쉴 곳을 마련하고
친절하게 마중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충분히 쉬고, 마음껏 머물다 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은해사 참 잘 다녀왔다’라고 생각할 정도면 충분합니다.
언젠가 다시 절을 찾으면 아들, 딸, 손자, 손녀와 함께 성보박물관의 성보도 보실 수 있습니다.
좀 더 긴 여유를 두고 백흥암, 기기암 등의 산내 암자도 오를 겁니다.”
‘불자 감소’ ‘무종교 시대’를 고뇌한 흔적이 엿보인다.
지난 3월에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회향했다.
“하양포교당, 진불암, 중앙암, 불굴사, 약천사 주지 소임을 보았습니다.
중앙종회의원, 초심호계원장직도 맡고
은해사 재무·포교국장을 거쳐 주지 소임까지 보게 됐습니다.
문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았지만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더 많았던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올해 5월이 저의 ‘출가 40년’이 되는 달이었습니다.
총 43일의 일정 중 성지를 걷는 날은 딱 40일이었습니다.
하루를 1년으로 삼으며 저의 발자취를 성찰해 보고자 순례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는 1167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고행은 필연이었다.
“은사 큰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일화입니다.
해인사에서 100만배 정진을 할 때입니다.
하루 삼천배를 하는데 2주가 지나니 쉽더라는 겁니다.
‘기도가 쉬우면 기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던 은사 스님은
하루 오천배를 하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인도순례 대장정은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묵언 패를 달았다.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함이 아닐 터였다.
회상을 위해서라면 그 뜨거운 인도 땅이 아니라
이곳 팔공산에서도 얼마든 가능하지 않은가.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심연으로
좀 더 깊이 들어서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터다.
비하르주 쉬브람푸르 야영지에서의 일화를 전했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곳이었다. 점심 공양까지는 40여 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중들이 서로를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아 줄 때,
덕조 스님은 텐트 속으로 들어가서는 출입문의 지퍼를 올렸다.
텐트 밖의 온도가 평균 35도를 넘나들었으니 텐트 안의 체감 온도는 50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공양 전까지 꿈적 않고 정진했다.
“이 길에 들어서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습니다.
‘덕조, 너 괜찮은 스님이다!’”
운무가 피어나면 ‘은빛 세계’가 펼쳐지는 은해사 전경.
환희가 차올랐고 눈가에 이슬도 맺혔다. 정진 끝에 한 글귀가 떠올랐다.
‘땅이 노래하고 하늘이 춤추니 수미산이 사바세계다.’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이 천막결사 당시 보드에 썼던 글이다.
천막 밖은 흥겨운 노랫소리로 ‘왁자지껄’한데
천막 안은 침묵 속 정진의 열기만이 가득해 고요했다.
방선 죽비가 내려지자 회주 자승 스님은 보드에 저 게송을 적었다.
“텐트 속으로 들어갈까 말까 했던 그 순간이 사바의 세계이고,
환희의 눈물 흘린 이곳이 수미산이니 두 세계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머무는 곳에서 피안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걸 새삼 알게 됐습니다.”
‘불이(不二)의 이치’를 왜 몰랐겠는가. 좀 더 명료하게 체득했다는 뜻일 터다.
가장 기억에 남은 성지를 물으니 부처님의 열반지를 꼽았다.
“쿠시나가르로 들어섰을 때 참 많은 분이 저희를 마중해 주셨습니다.
꽃가루가 뿌려지는 그때 한 불자님이 우시며 저희를 향해
‘스님, 대단하십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순간 ‘내가 저리도 깊은 정성이 담긴 감사의 인사를 받을 만큼,
저 눈물 속에 녹아들 만큼 잘 살았나?’ 싶었습니다.
그후 서산휴정 스님의 선시 ‘답설(踏雪)’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선시 ‘답설(눈을 밟으며)’은 이렇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밟고 가는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습니다.
저 혼자 인도 순례 대장정을 떠나라 하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제 앞의 스님이 한 발을 옮기셨기에 저도 한 걸음 뗄 수 있었습니다.
차디찬 파미르공원을 넘은 혜초(慧超) 스님이 계셨기에 저희가 그 길을 걸었습니다.
순례길은 마쳤으나 전법의 여정은 남아 있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으며 조건 없이 베풀고 돕겠습니다.’
‘교만과 분노가 아닌 존중과 용서를 실천하겠습니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동물과 미물이라고 해서 하찮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인도 순례길에서 제안한 ‘상월결사 108원력’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 합니다.”
평소 지침으로 삼는 명구를 청하니 ‘감인대(堪忍待)’를 전했다.
“인위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떫은맛을 뺀 감에 비해 오랜 시간을 거쳐
자연 숙성된 홍시가 더 깊은 맛을 냅니다. 참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올곧게 살고, 큰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저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 합니다.
좀 더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려 합니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살아온 환경도 각자 다릅니다.
‘나라면 이렇게 한다’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위로가 아닌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행복해지는 ‘함께하는 삶’에 눈을 돌리면
좀 더 품격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하기에 이 시대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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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조 스님은
1983년 해인사 출가. 1987년 통도사 승가대학 졸업.
1998년 제주 약천사, 하양포교당, 중앙암, 진불암, 불굴사 주지.
2011∼2018년 조계종 제15∼16대 중앙종회의원.
2020년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2021년 조계종 호계원 초심위원장.
2023년 6월 14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