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仁川港口
1954년도 많이 부렸던 노래 이별의 인천항구는 작사 세고천 작곡 전오승 노래 박경원이다.
이별의 인천항
1.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2.등대마다 님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친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3.마도로스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밤도 그라스에 맺은 인연은
항구마다 끊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짓는 이별의 인천항구
우리나라 중서부, 황해에 접하여 있는 광역시. 서울의 외항(外港)으로, 해산물·흑연·금속·기계류
따위를 수출한다. 목재·섬유 따위를 수입하며,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명승지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 해수욕장 따위가 유명하다. 면적은 954.93㎢.이다.
朝鮮時代 仁川을 邵城(소성)이라 했다. 소론계 명신 崔錫鼎(최석정:1645-1715)은 蘇來山(소래산)
아래 전장에 머물면서 두 살 아래 崔後徵(최후징)의 산우물 집을 찾고 시를 주고 받았다. ‘종숙의
시에 화운하다(和宗叔)라는 시에.
江海身將隱, 雲煙氣自舒.
강해신장은, 운연기자서.
剡溪廻棹日, 彭澤賦歸初.
섬계회도일, 팽택부귀초.
歲稔猶防盜, 村貧尙有魚.
세임유방도, 촌빈상유어.
淸譚宵媚媚, 勝似讀詩書.
청담소미미, 승사독시서.
바닷가에 몸을 숨기려 하매 운영 속에서
기운이 절로 펴지네.
왕자유처럼 배 띄웠다가 흥 다해 돌아가고
도연명처럼 귀거래를 노래한다네.
풍년 들어 오히려 도적이 방비되고
마을이 가난해도 생선 반찬 있구나.
한밤에 청담을 진진하게 나누나니
시 서를 읽음보다 낫고야 말고.
인천항 - 박팔양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잿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제.
축항 카페에로부터는
술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쎄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오?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사이로
물결을 헤치며 나가는 배의
높디높은 마스트 위로 부는 바람,
공동환의 기빨이 저렇게 퍼덕거린다.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조선지광 1928. 7)
조선지광 (朝鮮之光)1922년 11월 창간된 월간 종합잡지. 1930년 11월 통권 100호로 종간되었다.
편집·발행인은 처음에는 장도빈(張道斌)이었으나 뒤에는 김동혁(金東赫)이었다. 초기에는 민족주
의 성향을 띠었으나 점차 급진적인 사회주의 색채로 옮아갔다. 《개벽(開闢)》의 뒤를 이어 일제
강점기의 주요 잡지로 떠올랐고, 학술논문과 문학작품으로 지면을 채웠다. 자주 압수처분이 취해
지는 등 당시 여론을 형성해 갔던 중요 매체의 하나였다. 유진오(兪鎭午)·이효석(李孝石)·임화
(林和)·정지용(鄭芝溶) 등의 문인과, 선우전(鮮于全)·강매(姜邁) 등의 글을 실었다.
박팔양 (朴八陽 1905∼1966) 경기 수원출생으로 정지용 박제찬 등과 함께 등사판 동인지 `요람""에
참가했으며 문인활동을 하다가 1946년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담한 뒤 월북했다.
시인이 이 시를 썼을 당시 인천항은 제물포를 중심으로 연간 1백30만t의 화물을 하역할 수 있는
근대적 갑문식 전천후 항만시설로 발돋움하고 있다.
월미도(月尾島)
갈매기에 길물어
여객선 항구에 닿으면
기적소리 맞추어
한꾸러미 짐챙겨
올사람 맞이하고
가는손님 손흔드네
떠나가는 배
남겨둔님 못잊어
기약없는 이별에
고개들지 못하고
흰 물살 가르며
멀어져간 저배
님 그리는
뱃고동만 슬피우네.
월미도(月尾島)인천광역시 중구(中區)에 있는 육계도다
작약도(芍藥島) 한 하 운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 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래소리
해미(海味)가에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꼽놀이
어느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Aloha oe>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Aloha oe>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Aloha oe> 또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芍藥島 :인천광역시 동구(東區) 만석동(萬石洞) 앞바다에 있는 섬
작약도(芍藥島) 글쓴이: 보리파파 1967. 4. 3.
아스라한 수평선 사알짝 타고
동그슴히 솟아 핀 두리 동근 섬
멀리선 시침떼기 어숙한 자태
가까이선 오히려 요염한 절경
오호라, 네 이름이 작약도인가.
뱃사공도 흥에 겨워 덩실 노 젓고
돛 폭도 덩달아 퍼덕이는데
백옥 튀는 파도 위에 무지개하며
더 좋을손 작약도 기암이로고.
어화, 네도 흥이 있어 꿈틀 하누나.
아 인천항 서선택
울면서 헤어진 인천항엔
오늘도 장미꽃 피었습니다.
월미도 거리엔 다정한 연인
오늘도 부러워 바라봅니다.
언제 오시나요 언제 오시니요.
뱃고동 고동소리
내 가슴을 파고드는데
아 울면서 헤어진 인천항
울면서 헤어진 인천항엔
지금도 갈매기 슬피 웁니다.
둘이서 거닐던 이 거리는
오늘도 변한 것 하나 없어요.
언제 오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뱃고동 고동소리
내 가슴을 파고드는데
아 울면서 헤어진 인천항
6.25때 맥아더원수가 인천상륙 작전을 계획했을 때, 미군 수뇌부는 동경회의('50년 8월 25일)에서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와 항공지원의 항속거리밖에 있다는 이유 등으로 크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 때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군의 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것이며,
따라서 인천은 방비가 소홀할 것이다.
그러니 이 허점을 이용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은 유엔군 제7 합동 상륙기동 부대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전함 “미조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총 261척의 함정과 연합상륙군인 미 해병 제1사단과 한국 해병 제1연대, 미 육군 제7사단
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총병력은 7만5천명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곳이다.
인천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상을 철거하자는 사람들 그들은 전쟁의 아픔을 진정 알고 있는지...
제물포 (濟物浦)
인천광역시 해안에 있던 옛 지명.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까지 중국의 동진(東晉)·
송(宋)·북위(北魏)와 내왕하던 근거지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서·남해안지역과 개성(開城)을 잇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제물포 처녀 - 김희정
석양이 가물가물 사라지는 수평선에
슬피 우는 갈매기만 내 심정을 아는구나.
포구에 흘린 눈물 아가씨의 순정인데
그 정성 모르는 체 떠나가는 사나이
눈물짓는 제물포처녀
파도에 밀려가는 내님 실은 돛단배는
모래 씻는 물결만이 내 미음 아는구나.
포구에 뿌린 눈물 아가씨의 순정인데
온다는 기약 없이 흘러가는 사나이
슬피 우는 제물포처녀
富平
경기도(京畿道) 부평 평야(平野)의 남서쪽(南西-)에 위치(位置)하는 경인선(京仁線)의 한 요역(要驛).
8ㆍ15전에는 병기(兵器). 기계(機械) 공업(工業)이 성하였음. 6ㆍ25사변으로 각종(各種) 공장(工場)이
파괴되었으나 현재(現在)는 복구되었음. 각종(各種) 과일 및 채소의 재배(栽培)가 성하며 경찰학교
(學校) 등이 있음. 1949년 인천시(仁川市)에 편입(編入)되었다.
부평(富平)」이란 행정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제26대 왕인 충선왕(忠宣王) 2년(1310)
전국의 여러 목(牧)을 없앨때, 길주목을 강등시켜 「부평부(富平府)」로 만든 것이 최초이다.
부평의 지명유래는 「넓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넓은 곡창지로 만들었는데 농지가 넓어 수확이 많이
나는 풍요로운 평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부평(富平)은 옛날에는 호랑이가 대낮에 나타나고 모기는 해지기 전에 극성을 부렸다.
그래도 이규보(李奎報)는 부평(富平)의 집이 좋아 스스로 먼지를 털고 집을 지어 自娛堂(자오당)
으로 지었다 한다.
부평(富平)은 서울에서 가까워 별장이 많았던 곳이다.
李湜(이식:1458-1488. 世宗의 孫子며 成宗의 從叔인 富林君(부림군)은 富平을
我有數椽廬, 富平西?西.
아유수연려, 부평서엄서.
槐柳自成村, 洞戶分角圭.
괴류자성촌, 동호분각규.
?寂墟落靜, 短籬過蔬?.
격적허락정, 단리과소휴.
?馬絶不到, 境僻無塵泥. 산길험할 허
허마절부도, 경벽무진니.
山如玉芙容, 水似靑??.
산여옥부용, 수사청파려.
南浦半?深, 游魚大如犀.
남포반고심, 유어대여서.
釣來爲玉膾, ?萍爲香?.
조래위옥회, 구평위향제.
淳朴別乾坤, 壺酒爭携堤.
순박별건곤, 호주쟁휴제.
나의 선 칸 오두막이 부평 서산 서쪽에 있네.
느티나무 버드나무가 마을을 이루고,
골짝의 집들이 어긋져 있는 곳 괴괴할 만큼
부락은 고요하고 낮은 담은 채마밭에 걸쳐 있다.
귀한 분의 말과 수레 이르지 않고
외진 곳이라 진흙 먼지 없다네.
산은 옥 연꽃 같고 강물은 푸른 유리
남쪽포구는 삿대가 잠길 정도 노니는 물고기는 물소리 크기
그걸 낚아다 회를 뜨고 부추로 나물을 만드나니.
순박한 이 별천지로 다투어 술병 들고 온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