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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우리가 돌보아 주어야 할 이웃이다.
아니ㅡ 그건 우리의 생각이고, 주님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으로 도와 줄 이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자인가?
(1) 그는 가까이에 있다.
(2) 그는 우리 눈에 보인다.
(3) 그는 곤경에 처해 있다.
(4) 그는 옷도 없이 죽기 일보직전이다.
(5) 그는 긴 시간의 치료와 돌봄을 필요로 한다.
(6) 그는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
(7) 그는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희망도 없는 자이다.
(8)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자이다.
(9) 그가 도움을 받아 회복된 후 보답을 할 수 있을지 불분명한 자이다.
(10) 그가 곤경에 처하게 된 배경과 이유, 그리고 과정은 알아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11) 그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 그리고 상황에 상관없이 도움을 받아야 할 자이다.
(12) 그를 돕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 당시 그는 유대인으로 생각되었다.
누가가 이 비유의 말씀을 기록했을 당시 그는 유대인이거나 소아시아와 로마에 이르는 지역의 이방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성경에서 읽고 있을 때 그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종족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피되고 멀리함을 받는 자이며
그를 돕는 것에 대한 이 세상의 보상은 전혀 없는 그런 자이다.
(이 부분은 로버트 펑크(R. Funk)의 저서 Honest To Jesus 에 나와 있는 비유 해설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준우 박사가 번역해서 예수에게 솔직히 라는 제목으로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사실 강도 만난 자가 누구냐? 의 문제는 예수님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자들만이 하는 일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당시 청중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이웃관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지만 깊은 영적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이 깨달은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너무 쉽게 우리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한다. 기독교 사상가들의 말을 보자.
이 부분은 비유해석의 역사적 내용으로 {{ 추병선, "예수님의 비유 해석 방법 - 선한 사마리아인 중심으로."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계약신학대학교, 2008. }}에서 정리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따로 표시할 것이고 다른 곳에서 인용한 것도 출처를 밝힐 것이다.
(1) 이레니우스 : 그의 [이단자들에 대한 반박] 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성령과 예수의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다룬다. 인간에게는 고소자가 있는 반면 또한 변호자, 곧 보혜사가 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성령에게 추천하셨다. 인간이 "강도들 가운데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동정하사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두 데나리온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성부와 성자의 표상과 형상을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맡겨진 데나리온을 열매맺어 많은 이익을 주님께 갚을 수 있게 된다(3권 17:3).
* 나의 평가; 이레니우스는 강도 만난 자를 죄에 빠진 인간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유대인으로 여겼지만 복음이 전파되고 누가가 이 글을 적은 주후 70년경에는 더 이상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이 없어져서 이 길이 위험하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주후 130~200년 사이에 살았던 이레니우스는 예수님의 극적인 반전이 있는 이 비유에서 당시의 율법사와 같은 양심의 찔림과 당황스러운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레니우스에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방인이 아니었다. 당연히 강도 만난 자도 그가 유대인이건 사마리아인이건 이레니우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죄 가운데 빠진, 그래서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다.
(2) 클레멘트 :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람으로 기독교 신학을 희랍 철학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 해석은 신비적이고 알레고리적이었다. 특히 클레멘트는 헬라 철학의 신적 기원을 믿었고 "믿어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모토로 삼았기에 성경에 감추어진 참 진리는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역사적, 교리적, 예언적, 철학적, 신비적 의미).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와 이웃을, 강도는 어둠의 지배자들, 상처는 공포나 성욕, 진노, 고통, 사기, 쾌락 등이고 포도주는 다윗의 포도나무의 피, 기름은 성부 하나님의 동정, 싸맴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나타낸다고 했다. {{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p.39 }}
* 나의 평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이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일반계시는 롬 1:18~23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완전한 계시, 즉 특별계시는 바로 성경이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클레멘트는 불완전한 일반계시인 철학에 집착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헬라철학이다. 헬라철학의 가장 큰 이슈는 만물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데아의 개념으로 정리된다. 그래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허상인 포도주는 그 실상이 다윗의 포도나무의 피라는 식으로 찾아가고 있다. 클레멘트도 강도 만난 자는 이레니우스의 견해와 같이 죄에 빠진 인간으로 보고 있다.
한 가지 클레멘트의 이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의 깊은 심오한 의미를 그는 신비적 의미라고 했는데 신비라는 말 자체가 신이 감춘 것이고 그래서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찾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경험, 그리고 지적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전해 들은 말이지만 (총신연구원 수업 중에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한얼산 기도원의 고 이천석 목사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강도 만난 자를 6.25 전쟁 중에 부상 당한 상이군인들이라고 했다지 않는가? 이 의미야 말로 클레멘트에게도 감추어진 것이다. 이 의미가 맞다면 클레멘트는 이러한 신비적인 의미를 몰랐으므로 선택된 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결론인가? 물론 클레멘트나 이천석 목사님을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자신의 시대에서 치열하게 신앙의 삶을 살아 낸 고귀한 믿음의 선배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고 깨닫고 와 닿았던 말씀의 감동들을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시하는 태도가 문제다.
(3) 오리겐
클레멘트의 후계자였던 오리겐은 성경이 풍유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라는 부분에 착안하여 성경의 세 가지 의미로 연결했다.
<1> 몸의 의미는 문자적, 표면적, 외적 사건들을 말한다.
<2> 혼의 의미는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와 경험을 다루는 도덕적 의미를 말한다.
<3> 영의 의미는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자신, 그분의 세계, 특히 인류와의 관계를 말한다.
이 중에서 혼과 영의 의미는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4)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네스토리우스, 제롬
이처럼 클레멘트와 오리겐으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경향에 반발한 것이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성행했던 안디옥 학파이다. 안디옥 학파에는 데오도르와 크리소스톰이 있다.
당연히 데오도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풍유적 해석에 맞서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추구하였다. 특히 크리소스톰은 모든 건전한 주석은 문자적 의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유 해석에 관한 그의 입장은 비유가 한 가지 요점을 밝히려고 의도된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잔치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잔치, 소, 살찐 송아지 같은 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데오도르의 제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여 양성의 교통을 부인하는 바람에 안디옥 학파는 정통에서 떠난 이단으로 비난받았고 이로 인해 비유 해석에 관한 주장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벌게이트 성경을 번역한 제롬은 처음에는 풍유적 해석을 따랐으나 후에는 이의 약점을 발견해서 공격했다. 하지만 그 역시 풍유적 해석을 버리지는 못했다.
(5)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마니교는 문자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특히 어거스틴 그가 극심한 문자주의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암브로스가 풍유적 해석으로 구약의 많은 부분을 이해시킨 것에 영향을 받아 성경의 많은 부분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강도 만난 사람은 아담이고, 예루살렘은 하늘의 평화, 여리고는 사망을 상징하는 달, 강도는 악마와 그의 사신들, 여리고로 내려 가던 사람의 옷을 벗기는 것은 그의 영생을 빼앗는 것, 그를 때리는 것은 그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 거의 죽게 된 것은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으나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하여 아직도 반은 살아 있는 것, 제사장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직과 율법, 레위인은 구약 시대의 사역자들, 즉 선지자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상처를 싸매어 준 것은 범죄를 제한시킨 것, 기름은 선한 소망의 위로, 포도주는 영적인 일에 대한 격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귀는 그리스도의 몸, 여관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두 계명,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 선한 사마리아인이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 나의 평가
어거스틴의 이러한 해석은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기독론적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모든 성경의 본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지 못하면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주장과 닿아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설정하자 강도 만난 자는 대표성의 문제로 인해 아담이 되고 말았다. 이런 해석에서 얻는 교훈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원죄로 인해 영생을 빼앗겨 거의 죽게 된 수많은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해 내는 것이 된다. 매우 선교지향적이고 전도지향적인 해석이고 그래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추구하는 강단에서 외쳐질만한 해석이다. 그런데도 왜 요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이런 식의 풍유적 해석을 비판하고 회피하는가? 언뜻 드는 생각은 풍유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해석의 근간을 이루는 의도와 기준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주님도 밭의 비유에서 이런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사용하지 않으셨는가? 성경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지 말고 사람의 뜻으로 하지 말며 성령의 감동으로 풀 것을" (벧전1:20, 21) 강조하고 있다. 성경 해석에 관한 한은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말고 또 인간적이지도 말며 역사적이고 문화적이고 등등 이런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성령적이어야 한다. 해석하는 자도 듣는 자도 모두 성령의 감동과 도움으로 깨달아 알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흔히들 말하기를 말씀만 강조하면 차가워지고, 성령만 강조하면 뜨겁기만 하고 말씀의 깊이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을 제대로 본다면 성경이 이르는대로 뜨겁게 기도할 것이고, 성령에 올바로 붙들려 있다면 성령께서 말씀을 사모하게 하셔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표출은 생활의 열매로 나타나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듯 우리도 말씀과 성령 그리고 열매 맺는 생활이 일체되어 나타나야 한다.
(6) 중세 시대의 성경 해석
중세에는 성경이 감추어져 있어서 라틴어역과 교부들의 문헌에 의존하는 것만이 성경을 아는 길이었다. 따라서 교부들의 교훈과 교회의 교훈을 발견하는 것이 지혜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또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된 관심은 성경의 주석이었으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주된 관심은 조직신학이었다. 그리고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겐의 문자적, 도덕적, 영적 의미에 덧붙여서 본문의 종말론적 의미를 가리키는 신비적 의미를 추가했다. 예루살렘을 해석하면서 문자적으로는 유다의 성읍을, 도덕적(비유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영적(알레고리적)으로는 교회를, 신비적(종말론적)으로는 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성경의 사중 의미를 중요시한 이들이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도사들이었지만 알베루투스 마그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문자적 의미가 다른 세 의미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 그레고리 대제
그레고리는 세 가지 의미를 성경 해석에서 중요시 했다. 역사적 의미, 알레고리적 의미, 그리고 도덕적 의미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해석하면서 부자는 유대인, 거지 나사로는 이방인, 그리고 나사로의 상처는 이방인의 죄, 개가 상처를 핥는 것은 그 죄를 치료하는 설교자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 중세 교황 제도의 아버지인 그레고리의 성격 해석은 어거스틴과 매우 유사하다.
(8)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 역시 사중 의미와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랐다. 실제로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다른 교부들의 해석을 나란히 인용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여리고로 가는 사람, 예루살렘, 여리고 등 어거스틴의 해석을 그대로 인용하고 그레고리 대제의 해석을 덧붙여 소개하면서 포도주는 압제의 날카로움, 기름은 자비의 부드러움이라고 했다. 또 데오필락터스의 견해를 따라서 포도주는 하나님과의 교제, 기름은 사람과의 교제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 옳은지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는 않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영적 생활에 대한 묘사이며 세 가지 종류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3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평균적인 완성이고, 60배는 보통 이상이며, 100배는 영적으로 완전히 성장한 사람을 상징한다고 했다. 비록 그가 문자를 중시하기는 했지만 비유의 해석에서는 여전히 알레고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9) 종교 개혁 시대와 포스트 종교 개혁 시대 (1) , 마틴 루터
마틴 루터는 사중 의미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자연히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옹호했다. 루터에게 성경은 오직 한 가지 의미만 있었고 그것은 곧 문자적, 문법적 의미였다. 한편으로 그의 해석은 기독론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성경 해석의 근본이 되는 열쇠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기독론적 해석은 어느 정도 원칙을 유지했으나 문자적 해석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한 것을 보면 여리고로 가는 사람은 아담과 모든 인류, 강도는 우리를 상처입히고 강탈하는 마귀, 제사장은 노아와 아브라함, 레위인은 구약의 제사직,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 기름과 포도주는 복음, 기름은 은총, 포도주는 십자가, 나귀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여관은 교회, 여관 주인은 하나님 말씀의 설교자로 묘사했다.
(10) 종교 개혁 시대와 포스트 종교 개혁 시대 (2) , 존 칼빈
칼빈의 주석 (마태, 마가, 누가 주석 제3권) 에서 이 비유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30. And Jesus answering said. Christ might have stated simply, that the word neighbor
extends indiscriminately to every man, because the whole human race is united by a sacred
bond of fellowship. And, indeed, the Lord employed this word in the Law, for no other
reason than to draw us sweetly to mutual kindness.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이웃이란 말은 차별없이 모든 사람으로 확장된다고 단순히 말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전 인류가 거룩한 공동체의 결속으로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주님은 율법에서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상호 친절로 부드럽게 이끄시고자 하는 목적 외에는 없으셨다.
The commandment would have run more clearly thus: Love every man as thyself. But as men are blinded by their pride, so that every man is satisfied with himself, scarcely deigns to admit others to an equal rank, and withholds from them the duties he owes them, the Lord purposely declares that all are neighbors that the very relationship may produce mutual love. To make any person our neighbor, therefore, it is enough that he be, a man; for it is not in our power to blot out our common nature.
계명은 이점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모든 사람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자만심으로 눈이 멀어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자기자신에 만족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서열로 거의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에게 빚 진 의무를 못하게 막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모두가 이웃들이고 그 관계는 상호 사랑을 만들어야 함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 우리의 이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통적인 천성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더러 사람이 아니라고 할 권한이 없다는 의미)
But Christ intended to draw the reply from the Pharisee, that he might condemn himself.
For in consequence of the authoritative decision being generally received among them, that
no man is our neighbor unless he is our friend, if Christ had put a direct question to him,
he would never have made an explicit acknowledgment, that under the word neighbor all
men are included, which the comparison brought forward forces him to confess.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될 답변을 끌어내시려는 의도이셨다. 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던 권위있는 결정은 우리의 친구가 아닌 이상은 그 누구도 우리의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직접 질문하셨다면 이 비유가 그에게 고백하도록 힘을 행사했던 내용인 이웃이란 단어 아래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분명한 인정을 그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The general truth conveyed is, that the greatest stranger is our neighbor, because God has bound all men together, for the purpose of assisting each other. He glances briefly, however, at the Jews, and especially at the priests; because, while they boasted of being the children of the same Father, and of being separated by the privilege of adoption from the rest of the nations, so as to be God’s sacred heritage, yet, with barbarous and unfeeling contempt, they despised each other, as if no relationship had subsisted between them.
여기서 일반적인 진리로 전달되는 것은 전혀 낯선 사람도 우리의 이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서로 돕도록 함께 묶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들을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점과 나머지 나라들로부터 구별되어 입양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유업이라는 점을 자랑하면서도 그들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이 야비하고 냉혹한 경멸로 서로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를 멸시한다고도 해석되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서로를 멸시한다고도 해석된다.)
For there is no doubt that Christ describes the cruel neglect of brotherly kindness, with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chargeable. But here, as I have said, the chief design is to show that the neighborhood, which lays us under obligation to mutual offices of kindness, is not confined to friends or relatives, but extends to the whole human race.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알고 있는 형제간의 친절을 잔인하게 게을리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여기서의 주된 고안점은 우리가 서로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이웃이란 친구와 친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To prove this, Christ compares a Samaritan to a priest and a Levite. It is well known
what deadly hatred the Jews bore to the Samaritans, so that, notwithstanding their living
close beside them, they were always at the greatest variance.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인을 제사장과 레위인가 비교하신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에게 얼마나 큰 증오심을 갖고 있는 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옆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사이가 나빴다.
Christ now says, that a Jew, an inhabitant of Jericho, on his journey from Jerusalem, having been wounded by robbers, received no assistance either from a Levite or from a priest, both of whom met with him lying on the road, and half-dead, but that a Samaritan showed him great kindness, and then asks, Which of these three was neighbor to the Jew?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의 한 주민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돌아오다가 강도들에 의해 부상을 당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로부터는 둘 다 그가 길에 누워 반 쯤 죽게 된 상태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지만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커다란 친절을 베풀었는데 이 셋 중 누가 그 유대인의 이웃이냐? 하고 물으신다.
This subtle doctor could not escape from preferring the Samaritan to the other two. For here, as in a mirror, we behold that common relationship of men, which the scribes endeavored to blot out by their wicked sophistry; and the compassion, which an enemy showed to a Jew, demonstrates that the guidance and teaching of nature are sufficient to show that man was created for the sake of man. Hence it is inferred that there is a mutual obligation between all men.
이 교묘한 (율법) 박사는 사마리아인을 다른 둘보다 더 낫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거울로 보듯이 서기관들이 그들의 사악한 궤변으로 제거하려고 했던 인간의 공통의 관계와 적이 이 유대인에게 보여준 동정은 천성의 인도와 가르침만으로도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상호 의무가 있다고 추론된다.
The allegory which is here contrived by the advocates of free will is too absurd to deserve
refutation. According to them, under the figure of a wounded man is described the condition
of Adam after the fall; from which they infer that the power of acting well was not wholly extinguished in him; because he is said to be only half-dead.
자유 의지의 옹호론자들이 꾸며낸 이 부분에 대한 알레고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에 의하면 부상당한 사람의 모습 아래에 타락 이후의 아담의 상태가 있고 여기서 추론해서 그가 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그가 반 쯤만 죽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As if it had been the design of Christ, in this passage, to speak of the corruption of human nature, and to inquire whether the wound which Satan inflicted on Adam were deadly or curable; nay, as if he had not plainly, and without a figure, declared in another passage, that all are dead, but those whom he quickens by his voice, (John 5:25.)
인간 본성의 타락과 사탄이 아담에게 감염시켰던 상처가 치명적인지 아니면 치료할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 단락에서의 의도였던 것처럼; 아니 다른 구절에서 (요5:25) 그의 음성으로 촉진되는 자 말고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리고 비유없이(직설적으로) 선언하지 않으신 것처럼 말이다.
As little plausibility belongs to another allegory, which, however, has been so highly satisfactory, that it has been admitted by almost universal consent, as if it had been a revelation from heaven.
그러나 타당성이 거의 없는 매우 만족스러운 다른 알레고리와 마찬가지로 그런 해석이 하늘로부터의 계시인 것처럼 누구나 다 인정해 오고 있다.
This Samaritan they imagine to be Christ, because he is our guardian; and they tell us that wine was poured, along with oil, into the wound, because Christ cures us by repentance and by a promise of grace.
이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라고 그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인도자이므로. 그리고 상처에 기름과 함께 포도주가 부어졌다고 그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회개와 은혜의 약속을 통해 우리를 치료하시므로.
They have contrived a third subtlety, that Christ does not immediately restore health, but sends us to the Church, as an innkeeper, to be gradually cured. I acknowledge that I have no liking for any of these interpretations; but we ought to have a deeper reverence for Scripture than to reckon ourselves at liberty to disguise its natural meaning. And, indeed, any one may see that the curiosity of certain men has led them to contrive these speculations, contrary to the intention of Christ.
그들은 세 번째 교묘한 궤변, 그리스도가 즉시 건강을 회복시키지 않고 우리를 교회인 여관주인에게 점진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보내신다는 것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런 해석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지 말고 본문에 깊은 외경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누구나 다 이런 자들의 호기심이 그리스도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런 생각들을 꾸며내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비유의 내용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비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한 가지 요점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요점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이 갖는 영원한 행복에 대한 열심보다 덧없는 이익에 대해 더욱 열심이다"라고 했고 가라지 비유의 요점은 "교회가 세상 순례를 계속하는 한 나쁜 사람과 위선자들이 선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인내하고 무장하고 견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10) 종교 개혁 시대와 포스트 종교 개혁 시대 (3) , 리챠드 트랜취
알레고리적 해석을 배격하고 비유를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했지만 그도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탕자 비유 해석에서 그는 아버지가 탕자에게 준 옷을 그리스도가 베풀어 준 의 또는 연혼의 신성성 회복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열 처녀 비유 해석에서는 어리석은 처녀는 외적 의무만 감당할 뿐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리고 등은 외적인 것, 기름은 내적인 것인데, 이를 야고보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등은 믿음이고 기름은 행함이며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등이 행함이고 기름이 믿음이라고 했다.
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해석을 보면, 여리고로 가는 사람은 인류, 예루살렘은 천성, 여리고는 저주의 도성, 강도들은 마귀, 옷을 벗기는 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의의 옷을 빼앗기는 것, 반쯤 죽은 것은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것,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 상처를 싸매는 것은 영혼의 상처를 고치는 성례전, 기름은 성령의 기름 부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 여관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모든 은사와 은총, 부비는 의로운 봉사에 대한 보상을 가리킨다고 했다.
(11) 종교 개혁 시대와 포스트 종교 개혁 시대 (4) , 브루스
Alexander Balmain Bruce (January 31, 1831 – August 7, 1899) was a Scottish churchman and theologian. He was a minister of the Free Church of Scotland.
1882년 출판된 그의 비유 연구서 The Parabolic Teaching Of Christ: A Systematic and Critical Study of the Pables of Our Lord 는 예수님으 비유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이론적 비유, 둘째 복음적 비유, 셋째 예언적 비유가 그것이다. 이론적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것, 복음적 비유는 구원의 요인과 기독교인 생활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언적 비유는 윤리적 의미의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마태의 비유는 이론적이고 예언적인데 누가의 비유는 복음적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비유 해석을 영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팔레스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은전 비유는 실생활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거기서 느껴지는 인간적 정서를 통한 자연계와 영적 세계와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천국을 리츨식으로 이해했고 예수를 "가장 그럴듯한 인간다운 모습"으로 보았다.
첫댓글 이 글은 아직 작성중입니다. 여러 날이 걸릴지, 아니면 여러 달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시작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했다.
(눅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의 시각에서 보면 강도 만난 자가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따라서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 라는 생각은 그 율법사의 생각대로라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같아진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 앞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의도는 제거해야 한다.
사실 오늘날의 성경 해석은 위에서 말한 알레고리적 해석과 문법적 본문 해석이 섞여 있다. 여기에다가 율리허, 다드, 예레미야스 등의 19세기 초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비평적 성경 연구와 그 이후의 신학적 작업에 따른 해석들 역시 혼재해 있다. 게다가 비유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넘어서 계시의 독단적 해석(내가 받은 계시를 말한다)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을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느낀 점은 어떤 해석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해석을 하는 목적과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