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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인도의 통일왕조-마우리아와 쿠샨왕조 그리고 불교의 발생
임광자 추천 0 조회 264 08.05.15 2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대 인도의 역사와 브라만사회의 변천         (이길상)

가. 인도의역사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영역(기원전 250년경)

고대 인도인들은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도史라고 하는것도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단편적인 서술이나 유물과 유적, 비문,화폐 등을 비롯해서 중국,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의 기록을바탕으로 근대에 역사가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인도인 자신들은체계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고대문명을일으켰고 종교, 철학, 문학 등 각 분야에 걸쳐서 놀라운 발전을 하였으면서도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사상, 즉 브라만교의윤회라는 굴레에서 우주관을 설정했기 때문에 현세의 삶보다 내세를중시한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른 쪽의지도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때의 영역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도 기록에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가 남긴 석주나 석비에 근거해서 추정한 것입니다.(그림이 안 나타나면 화면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클릭하면 화면이뜨는데, 왜(?) 그런지.... 아직은 그림 편집에 자신없는 나로서는 그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분 계시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輪廻란수레바퀴가 돌아가듯 누구나 이승과 저승을 生과 死를 통해서 수 없이오고 가기를 반복하는데 그때 마다 인과응보에 따라 저승에서의 업보가이승에서 짐승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육체로 태어나고, 이것을 신의섭리로 받아들이고 지금은 비록 노예라 할 지라도 열심히 공업을 딲으면죽어서 저승에 들어가 한 단계 높은 육체로 태어날 수 있으나, 이를가볍게 생각하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거나 나쁜 행동을 하면 짐승을비롯해서 이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지요.

듣기에따라서는 어른이 철모르는 어린애를 달래는 말보다 더 유치(?)할 수도있지만 이것이 믿음으로 받아지면 소중한 목숨도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세상은 역시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에의하면 이승은 윤회의 나그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쉼 터로서 찰라(刹那:themoment)에 불과 하지만 저승은 헤아릴 수 없는 겁(劫)의 세계로 한없는세월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찰나에 불과한 이승에서 잘 못일을 그릇치면 저승에 가서는 나락(奈落: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지못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카스트제도를 유지하는이념적인 근거라고 합니다. 현세를 우습게 본 이런 생각은, 연대나 역사적인기록이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고, 조금 남아 있는 그들의 옛 문헌도사실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시적인 기교나 신화적인 표현으로 서슴없이왜곡하여 쉽고도 분명한 것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고대인도 인들이 역사를 남기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는 인도가 그 광대한다양성과 특이한 사회 구조 때문에 자기들의 손으로 완전 무결한 통일국가를한 번도 세워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인의 통일에 대한 자각이나국민적인 의식을 높일 만한 역사(국사)의 편찬이 없는 것도 이런 것과연관 지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석가모니의 출생시기도 짐작만할 뿐 남방불교, 중성점기(하안거 때 율에 찍는 점), 북방불교, 브리태니커,통도사 발간 불교사전 등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다른 것도 연대기적인사료의 불명확이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힌두교들이 성스러운 강이라고 부르는 Ganges강 중류지역으로 고대 아리아인들이 이동한 기원전 6세기 경에는 그들의 사회에도 크다란 변화가일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원주민과 혼혈이 심해서 별종(?)인 혼혈족이 나타나고 이 혼혈 족은 전통적인 의식, 풍속, 신앙을 지키지 않고속어를 사용하는 등 브라만교의 전의(典儀)에서 많이 벗어났으며,

생산이늘어나고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도시가 발달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영역국가가 등장하여 그들간의 패권 다툼이 심해지고, 영역국가간의다툼에서 전사(戰士)들이 새로운 지배층인 이른바 크샤트리아 계급을형성하여 그들은 브라만의 의식 보다는 현실적인 힘을 중요하게 여기게되고, 브라만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브라만의 권위가 옛날 같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기원전 6세기 전후에 사용된 화폐가 지금도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고고학적으로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겨난 영역국가(도시국가)가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초까지 북부인도에 16개 국가가 있었는데이들간에 패권을 다투다가 코살라와 마가다에 의해서 통합되고 다시두 나라간에 패권쟁취가 벌어져 결국 마가다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고합니다. 이후 마가다 왕국의 왕권은 증대되고 왕위도 세습되어 마우리아왕조가 등장할 때 까지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시수나가(Sisunaga)왕조등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다고 하는데 사료나 전승된 내용이 어긋난것이 많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나. 브라만사회의 변화

상공업과도시의 발달은 자유와 평등사상, 그리고 술과 여자를 쫓는 향락에 취하여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죄악이 난무하여 브라만교의 가르침은 허공에맴돌게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는 다양한 학파가 원시불교 경전에는 62개라하고 자이나교 문헌에는 더 많은 이단 제파를 전하고 있어서 춘추전국시대의제자백가를 능가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후세에 전하는 유물론, 회의론,쾌락론, 운명론, 윤회설, 수행법, 유가행, 고행 등이 이 시대에 기운을타고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브라만교를 무시하고두 크샤트리아 계급에 의해서 윤회해탈을 앞세운 자이나교와 불교가등장할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하비르 좌상바르다마나(Vardhamana)에의해서 창시된 자이나교(Jainism)는 지나(耆那:Jina) 즉 승자의 종교라는뜻으로 비 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입니다.불교경전(佛典)에 나오는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Nataputta)가 이 바르다마나로서 나타족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그를마하비라(Mahavira)라고 부른 것은 위대한 영웅(대용사)이라는뜻이라고 합니다.

마하비라의가르침에는 만물은 생명(jiva)과 비생명(ajiva)으로 이루어져 있고,비생명은 다시 공(空:운동의 원리)과 비공(非空:정지의 원리), 물질재료, 허공,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선악을 포함하여 7가지 또는 9가지를수양을 통한 윤회로부터의 해탈 방법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즉 생명·비생명·선·악·누(漏)·박(縛)·차(遮)·멸(滅)·해탈(解脫)이바로 그것으로, 생명은 외적 영향을 받은 물질재료가 생명 속에 스며들고(漏),그것이 물질적 욕심(業)을 형성하여 생명을 속박하며(縛). 육체적 정신적으로수양을 통하여 모든 욕심이 스며드는 것을 정지시키고(遮), 높은 경지에도달하여 모든 욕심을 없애면(滅) 이 상태가 해탈이라고 보았습니다.

욕망을버리고 해탈에 이르게 하는 덕목(德目)으로는 정견(正見)·정지(正知)·정행(正行)으로요약되거니와, 오금서(五禁書:브라다), 삼기율(三紀律:구프티), 오용심(五用心:사미티)을가르쳐, 누구나 깨끗한 영혼을 지키며 정신적인 자율성에 의한 해탈을위해 살생을 금하는 등 엄격한 계율을 세우고 금욕과 고행을 중요시하였습니다.

바르다마나의활동 연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으나 기원전 400년대에 활동한 것만은확실하고 30세에 출가하여 12년간 고행 끝에 완전한 지혜를 깨달아 자이나가되고 마하비라로서의 명성과 많은 신자를 얻고 30여년간 포교를 하다가72세로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불교가인도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180만 정도가 있으며, 비록 숫자는 많지 않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인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영향력 또한 막강하고, 그 실천생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하여 불살생(不殺生:ahinsa)이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2. 불교의 성립 (Sakyamuni:釋迦牟尼 / 563 ?~ 483 BC?)

가. 출가, 고행, 성도,설법

기원전 6세기 중엽 지금의네팔 국경과 가까운 중인도 히말라야 산 기슭에 있던 카필라 성주 정반왕의 비 마야 부인이 만삭이 되어 첫 애기는 친정에서 낳는 당시 인도의풍속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産氣를 느껴 룸비니(Lumbini)동산에서출산을 했는데 이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로서 불교를창시한 "샤카(Sakya)족의 지혜로운자"라는 뜻을 가진 석가모니입니다.

마야 부인은 산고가 심했던지싯다르타를 낳은 1주일 후 돌아가시고 비록 어머니 없이 자랐으나 왕자로서많은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고,부인 야쇼다라(耶輸陀羅)사이에 아들 라훌라(羅羅)도 얻었다고 합니다.그러나 그의 나이 29세가 되어 가족과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윤회로부터해탈의 길을 찾아 출가했다고 합니다.

고행 2-3세기 작품. 라호박물관 소장그의 출가 동기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괴로움의 연속, 즉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과 늙은이, 병든 이,죽은 사람, 그리고 승려를 보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고하는데 이를 불가에서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합니다.

生老病死를끝없이 되 풀이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했다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보고 있습니다.

당시의인도는 영역국가간에 벌어진 양육강식의 살벌한 생존원리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못지 않았고, 그것은 그의 생전에 그가 태어난 가필라 국이 코살라에게멸망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석가모니는29세 때 출가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을 건너 마가다국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선정(禪定)을배웠으나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윤회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깨닫고,

다시 부다가야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을했는데 , 그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으로 맹수가 득실대는 산중에서결가부좌를 하여 명상에 들기도 하고, 머리털이 다 없어질 때 까지 한올 씩 뽑기도 해보고, 등가죽을 뚫고 끈과 연결하여 돌을 달고 산에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식으로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이룰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6년간의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부처(Buddha)가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깨달음이란인생에는 4가지 진리가 있으니,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노병사의괴로움과(苦), 괴로움의 원인인 욕심에서 생기는 번뇌(集), 번뇌의 멍에를벗고 해탈할 수 있는 가능(滅),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가능의 방법(道)등으로이를 4제라 하며,

도를 얻기위해 여덟 가지 바른길(8正道)을 행하면 누구나 生老病死의 고통스러운윤회로부터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정(禪定)에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으로서,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면, 공포에도 고통에도, 애욕에도산란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은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에 놓이게되는데 이를 해탈(解脫:moks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ana)이라고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석가모니가 최초의 설법을 한 녹야원석가모니는 성불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해탈의 법열(法悅)과 법열에서 생기는 원광(圓光)을 얻고 기쁨에 잠겨있었는데,

우주의본질인 브라만(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에 따라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rgadava)에서,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였고,

그들은모두 법을 깨달아 그의 제자가 되어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성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고, 제자의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어 교세가 늘어났는데가르침의 핵심은 열반과 자비(慈悲)로서 일체중생의 평등을 주장하였다고합니다.

혹서의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석가모니는,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다가80세의 고령에 이르러 마침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때,

심한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한 몸으로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sari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고 알려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석가의 탄생은 4월8일, 성도는 12월8일, 입멸은 2월15일로 하고 있으나남방불교에서는 4월과 5월의 보름에 행한다고 하며 그의 일생을 8시기로구분하여 이를 팔상(八相)이라 하는데 조각과 회화등에 소재가 되고있습니다.

브라만교의 바탕에서브라만에 반기를 든 자이나교나 불교 모두 윤회이탈을 목적으로 한 해탈주의로서한 때는 인도에서 번성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교단자체가 카스트에 흡수되어 서브카스트나 아웃 카스트(不可觸民)로 전락하였는데그래도 자이나교는 베다의 전수 방법인 비밀교의(우파니샤드)의 원칙을따랐기 때문에 인도내에서 명맥이남아 유지하고, 불교는 대중설법을행하여 인도에서는 설자리를 잃고 다른 지방에 양자로 가서 그곳의 토착신앙과밀착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니 남방불교, 티벳불교, 중국 한국 일본의불교등이 이에 속합니다.

나. 대서사시

베다가한 때의 위력은 잃었으나 인도 인들의 뇌리에 입력된 유전적인 형질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다는 신전에서 신관만이 암송하고왕족은 제례에 동참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듣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으며,그 전수 방법도 자식이나 특별한 제자에 한해서 밀폐된 좁은 공간에스승과 제자가 대면하여 구술하고 암송하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베일에가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불교가등장할 시기에 일반들도 부르고 들을 수 있는 서사시가 절실히 필요하게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마하바라타와 야마나야로서 이른바산스크리트 문학의 정수요 세계문학사에 불후의 보물로서 추앙받고 후일 힌두교의 경전이 된 이 서사시는, 물론 그 원전이 베다에서 시작되어교양 높은 궁정시인에 의해 노래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다가정복자 아리아 인들의 신화인  반면, 이 힌두의 신화는 아리아인과선주민의 혼혈에서 나온 토착 인도의 신화며 도시에서 거리로 거리에서마을로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비파를 뜯으며 낭랑하게 낭송한 방랑시인들의전승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바라타족의 전쟁을 읊은 대사시(大史詩)란 뜻으로 비야사 선인이그의 다섯 제자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口傳)되어오는 사이에 정리·수정·증보를 거쳐 4세기경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8편 10만송(頌)의 시구(詩句)와 부록 (하리바니사:Harivanisa)1편 10만 6000송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은옛날에 바라타족의 후예인 쿠르족의 왕가에서 처음에는 착한 다섯 왕자를둔 동생이 왕위에 올랐다가 일찍 죽고 그 배다른 형이며 백 왕자를 둔장님 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장님이며 늙은 왕은 죽은 동생을 생각해서지용이 뛰어난 다섯왕자 중 맏이를 왕위에 계승시키려고 하자 이에 백왕자들이 반발하고, 십 수년간 반목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사촌들간18일동안의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 다섯 왕자가 승리하는 전말이 주제이며,본제(本題)는 전편의 약 5분의 1밖에 되지 않고, 그 사이에 신화·전설·종교·철학·도덕·법제·사회제도등에 관한 삽화(揷話)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하바라타에있은 것은 세상에 있고 거기에 없는 것은 세상에도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고합니다.

티베트의 라마(비시누)라마야나(Ramayana)는"라마의 기행"이라는 뜻으로, 7편, 2만 4천 구(句)로 이루어져있으며,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세계 최장편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BC 3세기경의시인인 발미키(Valmiki)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하게 말하면그는 단순한 편자(編者)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작품의 성립 연대나기원은 BC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 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갖춘 것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전 7편 중에서 제1편과제7편이 첨가되었다고 전해지며, 작품의 내용은

코살라국의왕자인 라마는 비시누의 화신으로 태어나 왕위를 이었으나 4년이 지난어느날 다른 왕자의 어머니들의 음모에 의해서 왕위를 잃고 14년간 숲속으로추방된 후 파란만장한 그의 무용담(武勇談)을 주제로 삼고 있으며, 정절(貞節)의화신이라 할 왕자비(王子妃) 시타의 기구한 수난, 동생 바라타의 지극한효성, 원왕(猿王) 하누마트의 활약, 악귀(惡鬼) 라바나의 포악 등을엮어서 일대 서사시편으로 완성해 놓았고,

여기에수 많은 삽화를 곁들임으로써, 이 역사시에 종교적인 의의를 부여하고라마 숭배를 왕성하게 하여 후세의 문학과 종교 및 사상면에 커다란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른 쪽의 조각상은 티베트인들의 라마신앙이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문체가 기교적으로 매우 세련되고 전아(典雅)하며. 고전 산스크리트문학작품 중에는 라마야나에서 취재한 것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근대 인도의 여러 방언(方言)으로 이루어진 문학에도 그 영향은 고루파급되고 있다고 하며,

또한 인도문화가 외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라마야나도 각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어,남쪽으로는 자바·말레이·타이·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등지에 전해져번역·번안되는가 하면, 그것을 극화·무용화하고 그림자극(shadow play)에까지수용하였다고 하며, 북쪽으로는 티베트·중국등지에 전해졌는데, 중국에서는육도집경(六度集經) 잡보장경(雜寶藏經) 등 불전류(佛典類)에 수록하기도하였습니다.

3. 통일 왕조의 등장

가. 인도의 새로운 역사시대

인도 인들이 역사적인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옛 문헌에는현실과 공상, 역사와 문학 그리고 신화나 전설이 혼동되어 있어서 모든것을 사실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과응보라는 테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史料의 채택에도 신중을 기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믿을 만한 정치사가시작된 것은 불교와 자이나교를 보호했던 빔비사라왕과 그 아들의 치세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연대에 의한인도사의 기초는 마우리아왕조의 시조 찬드라 굽타(321 ~ 297 BC?) 이후로보고 있는데, 그것은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원정(327 ~ 324 BC)이라는기록이 분명하게 그리스측에 있기 때문인데 정작 인도에서는 문헌적으로흔적도 찾을 수 없고 고고학적인 유물이 출토되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인도원정은서북인도의 펀자브일대에 그쳤고 그것도 3년에 불과해 인도의 변화에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원정이 동서간의교통로를 개척한 것은 사실이고 이 길을 따라서 동서간의 문화교류도활발하게 이루어져 인도에서도 간다라미술의 발생이라든지 천문학의전래, 마가다왕국의 변화 등 미세하나마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 마우리아왕조(Mauryadynasty)((BC 317∼BC 180)

알렉산더의원정시기 인도에서는 갠지즈강 유역에 있었던 마가다왕국의 난다왕조가계속적인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럴 때 등장한 것이 찬드라굽타마우리아로서, 그의 가계가 난다왕조와 연계되어 있으나 어머니가 미천한출신으로 혼혈로 알려져 있습니다

군의 장교출신인 그가 반란에 연루되어 망명생활중 인도에 침입한 알렉산더와접촉하고 그 웅대한 계획에 매료되어 군대를 일으켜 마가다국을 정복,난다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317 BC) 왕이 된 그는 강력한힘으로 영토를 넓혀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도역사상 처음으로통일왕조를 세웠는데 이 왕조를 그의 이름에 따라 마우리아(공작:孔雀)왕조라고합니다.

정통 왕위를계승하지 못하고 쿠데타에 의한 그의 통치 24년은 자연적으로 피비린내나는 보복과 살육으로 계속되었는데, 그 자신도 암살을 두려워 해 낮잠을자지 못했고 밤에 잠을 잘 때도 잠자리를 여러 번 옮겼다고 하니 친위대가삼엄하게 지키는 궁정도 안전하지 못한 제왕의 생활을 일반 민중은 어떻게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그가 만년에 이르러 자이나교에귀의하고 고행 끝에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제위 25년간은 브라만교를 신봉하고,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더 많은영토를 넓혔다고 합니다.

아소카왕아들에이어 손자 아소카(Asoka :272 ~ 232? BC)가 왕위를 계승하여 36년간통치하였는데, 이 시대가 왕조의 최성기로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기록된아육왕(阿育王)·아수가(阿輸迦)는 한자의 음역이고, 무우왕은 그의이름 아소카가 아(無) 소카(憂) 즉 "근심이 없다"는 뜻을담고 있는 한자의 의역입니다.

불경이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부왕은 수 많은 부인과의 사이에 101명의 배다른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모든 면에서 아소카가 가장 뛰어 났으나부왕의 미움을 사 무기와 차량의 사용을 금지 당한 체 반란군 진압의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로서는 이 보기 싫은 아들이 전사하기를바랬다는 것이지요. 후대에 그려진 오른쪽의 그의 초상은 매우 예지적이고사려 깊은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부왕의 의도와는 달리 맨손으로 반란을 진압하여 전공을 세우고, 왕의급사 소식을 듣고 수도로 돌아온 그는 99명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올랐다고 합니다. 살아 남은 한명은 임신 중의 왕비가 천민이 사는 마을로숨어서 유복자를 낳았다고 하며, 이 아이가 자라서 아소카를 불교에귀의케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는 부왕의 신하 5백명과궁녀 5백명을 불태워 죽였다고 하는데 어디 까지가 사실인지? 불교의선교를 위한 후세의 가필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고대의 제왕들이 사람을많이 죽였다는 공통점에서 그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부찬드라굽타 시절에 이룩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미치는광대한 영토를 이어받은 그는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남동부,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중지하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法)에 의한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여 영역 내에 석주(石柱)를세우거나 암석에 그의 조칙(詔勅)을 새겨서 이를 실현코자 하였습니다.

아소카왕의 석주 머리부분이런석각 조칙 중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나 아마르어로새겨진 것도 있어서 그 명문이 해독되었는데, 이 조칙의 내용에는 그가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하고 있으며, 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치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에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이집트·마케도니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영역은 아소카 비문(碑文)의발견 장소에서 추정컨대, 동쪽은 벵골만 연안, 남쪽은 북부 마이소르,서쪽은 소파라·사우라스트라, 북서쪽은 탁실라, 북쪽은 히말라야 산록까지미치는 광범한 지역으로, 이 광대한 영토는 군(郡:자아나파다)이라고하는 행정구역으로 구획되고, 군에는 최고의 실권자로서 태수가 임명하였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중요한도시나 변경(칼링가·우자이니·탁실라 등지)에는 왕자나 왕족을 태수로파견하여. 치안과 조세징수를 포함한 광범한 행정권이 주어져, 아소카왕사후 제국의 분열과 붕괴를 가져온 중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각 지방의태수들을 감독하고 지방의 정보를 군주에게 직접 보고하는 관리와 밀정들이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전국에 파견되어 중앙집권적인 통제도 시도되었습니다.왕은 다르마(보편적 윤리)에 의거한 고대 제왕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고하였으나, 아소카왕의 사망으로 세력을 잃고 BC 180년 푸샤미트라(슝가왕조의시조)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그의 치세(治世) 중에는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또한 불교도들은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하여많은 설화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가 불교를`위해서 수도에1천명의 승려를 소집하여 불경편찬사업을 하였고, 선교사를 각지에 파견하여불교를 전 인도는 물론 다른 나라에 보급시켜 세계종교로 발전케 하였으며,특히 아들 마힌다(Mahinda)를 獅子國(스리랑카)에 보내 선교케 한 것이오늘날 남방불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각국에는 1사 1탑을 세우게 하였는데그 수가 8만 4천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 세워진 사리탑은 다른나라가 사리탑을 세우는 본보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 쿠샨왕조(Kushan Dynasty)

기원전2세기 후반부터 약 1세기 동안 마가다에서 너르버다 까지 지배한 것으로알려진 숭가(Sunga)왕조는 불교를 박해하고 브라만의 제사를 부활하여브라만국가가 열릴 수 있는 문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옛마케도니아 영토를 지배했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Seleucos)왕조는 내부분열로 기원전 3세기경 박트리아(Bactria:大夏)와 파르티아(Parthia:安息國)가떨어져 나가고 이집트와의 전쟁으로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자문화권인파르티아는 이란고원에서 일어나 기원전 248년 경부터 기원후 226년까지약 500년간 서남아시아를 지배한 강국이었습니다. 박트리아는 아무강과힌두쿠시 산맥사이의 자원이 풍부한 땅을 차지하고 일부 그리스계의사람들이 펀자브지방에 침입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175년경BC)

펀자브지방에들어온 그리스계의 독자 정권은 메난더(Menander:Milinda)왕 때 번성하였고,그는 불교를 옹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박트리아에 관해서는체계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고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메난더왕이 죽고 나서 월지에게 쫓겨서 남하한스키타이족에게 점령 당하고 스키타이의 한 종족인 샤카(saka)족은 이지역에서 그리스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월지 또한 나머지 박트리아를점령하여 박트리아는 망하였습니다(75년경)

대월지(大月氏)가서(西)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반부를 지배했을 때에 영지(領地)안에 설치한 5제후(諸侯)의 하나인 스키타이계통의 쿠샨(貴霜:귀상)족이강성해 져서 추장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 10 ~ 51?)는나머지 네 부족을 멸하고 쿠샨왕조를 세웠다고 합니다(45년경) 그는파르티아를 침략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캐시미르 간다라에서 펀자브지방에 걸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북부인도를 지배하였습니다.

카니슈카왕의 금화쿠샨왕조는제3대왕으로 알려진 카니슈카(Kanishka)(?~?)왕 때 최성기를 맞이하여,푸루샤푸라(페샤와르)를 도성으로 정하고 간다라를 중심으로 사방을정복하여 판도를 넓혀, 동으로는 마가다의 도성 파탈리푸트라에 원정하여총독을 두었고, 파르티아인의 잔존 세력을 정복하고 서북 인도를 통일하였으며,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영유하여, 결국 불교의동아시아 전파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간다라 미술 등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대승불교도 이 때 성립발전하였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왕의 칭호로서 화폐에는 "PAONANO PAO KANHPKI KOPANO"라고 새겼는데 "왕중의 왕 쿠샨의카니슈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비석에는 "샤히, 무로다, 마하라자, 라자 아디라자, 디바프트라,카이사르"라는 긴 칭호를 이름 뒤에 달고 있는데 이 중 앞의 둘(샤히,무로다)은 월지와 샤카족 추장의 호칭이고,

마하라자는인도식 대왕, 라자 아디라자는 이란 파르티아 계통의 왕중왕을 뜻하며,디바프트라는 중국의 천자를 산스크리트 어로 옮긴 것이고, 카이사르는로마의 실력자 이름으로서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쿠샨왕조의자신감 넘치는 포용정책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오른쪽(위쪽)의 사진은카니슈카의 여러 금화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인도의 역사 특히 스키타이족은 자기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체계적인 연대를 비롯해서 사실을 규명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합니다. 그의 즉위 시기에 대해서도 143∼152년 사이, 78년설 등이 있고,왕 이후의 왕통(王統)에 대해서도 학자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그 치세도 25년설·30년설·42년설 등으로 갈리고 있는데, 왕이 2세기에생존하였다는 것은 학계가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왕의죽음에 대해서도 암살이 유력할 뿐 내용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226년파르티아를 대신에 사산왕조가 이란에서 발흥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쿠샨왕조는 그의 속국이 되었다가, 사산왕조의 세력이 이완되자 한 때세력을 회복하였으나(기타라쿠샨왕조), 5세기 후반 에프탈에게 멸망되었습니다.

보살입상 2-3세기경 간다라 미술. 도교 네스박물관소장우리들이 카니슈카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것은 이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여 이른바 대승불교가 이룩되고 간다라미술로 대표되는 불상의 조상이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Mahayana)니소승불교(Hinayana:小乘佛敎)니 하는 것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해탈(解脫)을얻도록 하는 불교 유파(流派)로서. 소승은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개인의수양에 의한 해탈을,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보살신앙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라. 소승불교와대승불교

인도의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석가모니 멸 후(滅後),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힌 약 2세기 간의원시불교,

셋째,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대됨과 동시에교단분열이 일어나 보수파의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크게 두 파로갈라지는데 이것을 부 파(部派)불교라 하며,

넷째,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기원 1세기~ 2세기 ?)에 의해서 성립된 대승불교로 대별됩니다.

대승불교는보살 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전통적,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자칭하고 기성불교(부파불교)를 상대적으로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고,전통불교인 부파불교가 그들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습니다.

소승불교는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보수적인 모든 부 파만을 일컫는 경우가 있는데, 부 파는 석가모니 사후몇 세기를 지나면서 18부의 부 파로 분열하였다가 다시 입장을 같이하는 부파를 모아 상좌부와 대중부로 크게 나누게 됩니다. 각 부 파는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편집 집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고,석가모니의 설법을 경(경장)이라 하고, 그 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논장(論藏)즉 아비달마(阿毘達磨:Abhidharma)가 정비되어 이른바 불교의 삼장이완성되었습니다.

이에 즈음하여카니슈카왕은 5백명의 불교학자들을 뽑아 캐시미르 사원에서 12년에걸쳐 불교의 여러 이론을 통일하여 이른바 제4회 결집을 성취케 하여대승불교(Mahayana)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티벳,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져 크게 번성하였는데 북쪽으로 전파되었다하여 북방불교라고도 하며, 스리랑카를 본거지로  미얀마, 태국,베트남등으로 전파된 소승불교를 남방불교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파키스탄의페샤와르 지방에서 기원 전후 경부터 5세기경 사이에 만들어진 그리스·로마풍의 불교미술을 간다라미술(Gandhara art)이라고 합니다.

마. 간다라미술 - 그때까지 부처는 오직 보리수, 스투파(탑), 법륜(法輪), 보좌(寶座)등으로 상징적 표현만 되었을 뿐이 였는데, 간다라 지방에 와 있던 그리스인들의천부적인 조각술에 의해서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것을일반적으로 간다라불상이라고 합니다. 간다라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 언저리가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사람과 같다는 점이고, 또 얼굴의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으로 즉, 간다라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다고 합니다.

불법설도 3-4세기경 간다라 미술. 라호박물관 소장불교의 전파 지역을 따라 불상도 이동하여 파미르고원을넘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를 불교화하고, 툰황을 지나 중국의윈깡석굴에 이르러 그 모습이 중국화되긴 하였으나 그리스적인 냄새를풍긴 체 계속 동진하여 경주의 석굴암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불상의등장은 불교계의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와 불상과 보살상이 예배의 대상이되어 토속적인 원시신앙에 머물던 의식을 발전시켰고, 사원과 탑의 장엄한건립은 불교 예술의 발달을 낳게 되었습니다.

간다라조각의주제로서 중요한 것은 불전도(佛傳圖)와 불타상으로, 보살도 많지만특정한 보살은 관음(觀音)과 미륵(彌勒)뿐이고, 조각은 거의가 부조(浮彫)이고대개는 스투파(탑)의 기단(基壇)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주재료는 청흑색의각섬편암(角閃片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석회상(石灰像)은 간다라불상의말기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간다라계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이와같은 간다라 조각은 쿠샨왕조(40~ 245년경)의 카니슈카왕(2세기 중엽)때에 가장 활기를 띠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 이야기 요약

다소복잡한 내용을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전6세기경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도시의 등장으로 브라만의 세력이 약해지고크샤트리아라는 전사계급이 등장하여 사회를 주도하였는데, 그들에 의해서정치적으로는 왕정을, 종교적으로는 자이나교와 불교를 만들었고, 베다를대신한 마하바라타와 야마나야 같은 대서사시가 등장하여 브라만시대를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브라만이 독점했던 제정일치에서 제정이분리되고 제사에서도 윤회해탈과 출가주의를 내세운 이단이 등장하여지도 이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다왕국으로대표되는 인도의 고대왕정은 찬드라굽타에 의해서 마우리아 왕정이 되었고,정복에 의해서 인도의 대부분이 통일되는데 그 과업을 수행한 것은 3대왕아소카로서 그는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석주나 석비에 조칙을 새겨교화에 힘썼으며, 불교를 크게 장려하여 그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이런 것이 기원전 4세기말에서 2세기 초까지의 인도의 역사가 됩니다.우리가 마우리아 왕조라고 하는 것은 편의상 붙인 이름이고 정작 그들은마가다의 왕이라고 자칭했다고 합니다.

기원전후해서는스키타이계의 유목민 쿠샨족이 서부인도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는데,3대왕이라고 알려진 카니슈카라는 왕은 불교를 장려하고 모든 문화를폭 넓게 수용하여 한 때 전성기를 마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불교는이 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다음에 나타나는 굽타왕조에이르러서는 브라만교를 핵으로 힌두교가 등장하여 인도에서는 자취를감추고 다른 지역에서 번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생몰 연대는 잘 알 수 없지만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보고 있고,그가 직접 전도했거나 그 제자들이 전도한 시기를 근본불교 혹은 원시불교시대라하여 전승이라는 뜻이 담긴 아함경을 중심으로 포교가 계속되었고, 아소카왕의불교 장려와 불경 결집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는 여러 곳에 사원과 사탑이세워지고 특히 부파불교시대라 해서 경전의 해석을 두고 여러 종파로갈라졌습니다. 그 후 經, 律, 論이 정리되어 이른바 3장이 이룩되었습니다.(팔리어로쓰여진 것이 많음)

그 후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때 다시 불경의 결집과 불교의 장려로 보수적인부파불교에 대항해서 나타난 것이 대승불교로서 이는 개인의 해탈에앞서 미련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부처의 참 뜻이라 하여 보살신앙을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보살이란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열반에들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윤회를 계속하는 불교적인 용어입니다.그리고 3장(三藏)이 산스크리트어로 정리되어 쿠샨왕조의 영토를 따라이동하다가 중앙아시아에 이르러 그리스인들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 지는데이것을 간다라미술이라고 합니다.

보살신앙으로대표되는 이른바 대승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전해져 부동의 자리를 굳히고, 대승에 반대 개념으로 소승불교란 이름의부파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월남 등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여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중국의 분열시대 - 위진남북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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