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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이스라엘 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thinktank
유대인의 교육
룻 아라지 교수와 최명덕 교수의 대담
최명덕 교수; 아라지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같은 학과 동료 교수로서 선생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독자들을 위하여 교수님에 대하여 소개할 필요성이 있겠군요. 교수님은 건국대학 히브리학과 교수로 한국 학생들에게 현대히브리어와 히브리 문학을 가르치고 계신데요. 남편이 주한 이스라엘 대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친한파 인물로 한국에 알려져 있지요. 한국에 계신지는 얼마나 되셨는지요.
아라지 교수; 벌써 5년째 들어섭니다.
최명덕 교수; 그간 교수님께서는 한국에 대하여 이스라엘에 많이 소개 주시고 또 이스라엘의 교육 등에 대하여 한국에 많이 소개하여 한국에 많이 알려지셨는데요. 유대인 교육에 대하여 한국어로 책도 출판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간 신문, 방송 등에 자주 출연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아라지 대사님보다도 더 많이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간 한국에 대하여 보여주신 사랑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최근에 한국 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이스라엘에서 출판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요.
아라지 교수; 예,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허영자씨 등의 한국 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이스라엘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곧 출판될 예정입니다. 이스라엘에 소개되는 최초의 한국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인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최명덕 교수; 그간 한국 사람들은 이스라엘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성경에 있는 시편이 곧 이스라엘 시가 아닙니까? 이제 한국의 현대시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읽을 기회가 왔군요. 이스라엘에선 한국에 대한 소개가 일천한 상태인데 한국인의 정신 세계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조금 전에 시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요, 한국 교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성경이지요. 오늘의 주제는 성경과 성경공부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으며 어떻게 성경 공부를 하여왔는지,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등...
아라지 교수; 그렇군요, 그럼 본론에 들어갈까요?
최명덕 교수; 그렇게 하지요. 성경은 인류 문화의 수원지와 같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서구 문화의 양대 기둥을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이라 할 때, 성경은 특히 히브리 사상의 원천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기독교의 사상적 근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성경을 제외하고 서구 문화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겠지요. 성경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성경과 관계가 깊은 민족을 들라면 단연 이스라엘 민족이 첫 번 째로 오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로부터 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 세계사에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아라지 교수님, 유대 민족과 성경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말할 수 있겠는데, 유대 민족과 성경의 관계에 대하여 유대인의 입장에서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라지 교수; 맞습니다. 성경이 인류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성경을 빼놓고 문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지요.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흔히 유대민족을 가리켜 ‘성경의 민족(People of the Bible)’이라고 부릅니다. 그 만큼 이스라엘 민족과 성경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곧 성경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과 성경의 관계는 성경 시대보다도 오히려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멸망 한 후인 성경시대 이후에 더 강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잃어버린 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집도, 토지도, 사회적 신분도, 사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나라를 유랑하며 모든 것을 빼앗긴 유랑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을 히브리어로 ‘갈룻’이라고 부르는데 ‘뿌리가 뽑혔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흔히 영어로 ‘엑자일(exile)'이라고 번역하여 포로로 끌려간 것이 강조되어 표현되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뿌리가 뽑힌 사람들로 살아야 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었지요. 오늘날의 이민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민 가는 사람들은 재산을 가져 갈 수 있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 없었지요. 뿌리째 뽑힌 것이지요, 뿌리째 말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져 간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성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그들이 가져 갈 수 있었던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배워야 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되는지, 등등, 모든 것, ..... 모든 것이 말입니다.
최명덕 교수; 그러니까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한가지 보물을 간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성경이었다, 그런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 성경 안에 삶에 관한 모든 해답이 들어있었다, 그런 말씀인가요?
아라지; 그렇지요, 삶에 관한 모든 해답이 거기에 들어 있었지요.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역경을 이겨내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모든 비밀이 이 성경에 들어있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세요. 지난번에 제가 글을 쓰다가 교수님께 한글 성경에는 그 부분이 어떻게 번역되었냐고 문의했던 구절 기억나세요?
최명덕 교수; 아, 출애굽기에 있던 성경 구절 말인가요?
아라지; 맞아요, 거기에 보면 유월절에 관한 규례가 들어있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이렇게, 대답하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사실은 그게 다 교육입니다. 조금 있으면 유대인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옵니다. 아마 이 잡지가 나갈 때쯤이면 그 명절이 이미 끝나 있겠지요.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성경의 명령에 따라서 그 날 밤 유월절 식사를 나누며, 왜 이 밤은 다른 밤과 다릅니까? 왜 이 밤에 우리는 무교병을 먹습니까?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 등등의 질문을 아버지에게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셨는지 모든 과정을 설명합니다. 무교병을 먹으며 당시 얼마나 상황이 긴급했으면 빵에 효모를 넣지 못할 정도였는가를 설명하며, 구원의 화급성을,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으며, 우리의 선조가 얼마나 쓰디쓴 노예의 삶을 살았으며, 얼마나 괴로운 소금물 같은 눈물을 흘렸는지 설명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배우고, 조국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배웁니다. 단순히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지요. 이 이상의 성경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시청각적 교육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확인하고, 혀로 맛보고, 머리로 기억하고 깨달으며,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요.
최명덕;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먹고, 기억하고, 느끼고,... 와, .... 유대인들은 성경공부에 관한 한 요즈음 흔히 말하는 ‘멀티 시청각 체험‘을 옛날부터 하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그럼,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아리지 교수;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은 가족마다 다르고, 종파마다 다르지요, 정통파 유대인의 경우는 다른 유대인들보다 성경 교육을 더 많이 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을 성경에 투자한다고 해서 꼭 더 성서적이라고는 말할 순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 유대인들의 경우, 물론 정통파 유대인처럼 많은 시간 성경을 가르치진 않지만, 성경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책이지요. 유대인들은 만 세 살이 되면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세 살이 되면 성경 읽기를 가르치지요. 재미있는 것은 처음 성경을 배울 때 아이들에게 꿀을 먹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최명덕 교수; 세 살이면 상당히 어린 나이인데요. 그 나이에 성경을 읽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요? 아직 너무 어려서 성경을 읽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이 생각되는데요.
아라지 교수; 그래요, 보통 아이들은 5, 6살이 되어야 성경을 읽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3살에도 가능해요. 물론 아주 초보지요. 또 아이들에 따라 학습 능력에 차이가 있어서 실제로 못 읽는다해도 문제가 안 되요. 듣기만 해도 되니까요. 읽는 것을 듣는 것만도 큰 교육이 됩니다. 자꾸 읽어주면 듣게되고, 자꾸 듣다보면 읽게되지요.
최명덕 교수; 그 말엔 저도 동의합니다. 흔히 말 못하는 분들은 벙어리라고 부르는데, 그 분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성대와 발성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학적으론 말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이지요. 단지 그 분들이 말을 못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히브리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히브리어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귀가 터져야 입이 열리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을 자꾸 들려주어서 귀를 뚫어 주는군요. 언어학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성경 독법으로 자꾸 읽어주다 보면, 정확한 발음을 들을 것이고, 정확한 독법을 계속 듣다보면, 확실한 발성으로 성경을 읽을 것이고, 어때요, 제가 제대로 해석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꿀을 먹인다고 하였는데, 왜 꿀을 먹이는지요. 꿀에 무슨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까?
아라지 교수; 듣고 보니까 교수님의 해석이 그럴 듯 하군요. 아 꿀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죠? 아이들은 단 것을 가장 좋아하지요. 그런데 단 것 중에 가장 단 것은 꿀이 아니겠어요? 뭐 건강에도 좋고, 설탕보다야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옛날에 특별히 단 음식이 무엇이 있었겠어요. 꿀은 매우 귀중한 음식이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아끼지 않고 사용하였지요. 기억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나이인 세 살에 먹은 꿀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경험하는 첫 번 째 가장 좋은 단 맛이 아닐까 여겨지는데요. 그런데, 꿀맛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지요. 꿀맛과 함께 성경을 기억하게 되지요. 성경을 읽을 때 먹어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성경 하면 꿀맛 아니겠어요? 성경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교육적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명덕 교수;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꿀을 먹게 하나요?
아라지 교수; 그렇지요,
최명덕 교수; 성경과의 첫 번째 만남이 꿀맛이라, 기발하군요. 어린 나이의 경험은 평생을 간다는데, 그렇다면 모든 유대인들은 평생 성경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살겠군요.
아라지 교수; 그래요.
최명덕 교수; 꿀 이야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저도 그 방법을 써보는 건데, 우리 아이들이 이미 커버려서 이젠 불가능하겠군요. 혹 이 다음에 손주들에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저는 자기 전에 녹음기를 틀어서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곤 했어요. 제가 먼저 이스라엘에 유학을 떠났고 큰 아이가 세살 때 이스라엘에 왔는데 그 후 이스라엘에 사는 동안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글로 된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지요. 성경도 배우고 한글도 배우고 일석이조였지요. 조금 크고 나선 다윗의 이야기 등을 제가 직접 재미있게 각색해서 속편으로 들려주곤 했어요. 흥미가 있었는지 빨리 다음 편을 들려달라고 조르곤 했지요. 글을 배우 때쯤 되어선 영어로 된 어린이 성경을 읽게 하였지요. 영어 성경은 아이들을 위한 것들이 좋은 것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이야기는 주로 제가 많이 했고 아이 엄마는 책을 많이 읽혔지요. 그런데 유대인 가정에서는 주로 누가 성경을 가르치나요,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어머니인가요?
아라지 교수; 교수님 가정의 이야기를 들으니, 교수님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같군요. 이스라엘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성경교육에 관심이 많지요. 그러나 가정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더 많은 책임을 집니다. 특히 정통파 유대인 가정의 경우는 아버지가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 같아요.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요. 히브리어로 성경을 ‘토라’라고 말하는데 ‘토라’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뜻 외에 공부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성경을 보는 것은 곧 공부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떠나서는 공부를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최명덕 교수; 네, 그렇지요, 그러면 가정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성경 공부를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언제 성경 공부를 한다든지, 얼마나 한다든지.
아라지 교수; 가정에서는 매일 성경을 읽지요. 그리고 월요일, 목요일에는 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습니다.
최명덕 교수; 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는다고요?
아라지 교수; 예, 히브리 성경을 보면, 성경을 읽기 좋도록 단락별로 혹은 주제별로 나누어 놓았는데요, 순서에 따라서 성경을 읽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성경 읽기라기보다는 공통체 성경 읽기의 성격이 강하지요.
최명덕 교수; 그렇군요, 그러니까 다같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는다는 말이군요. 마쏘라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3년 반에 한번 읽도록 특별한 표로 성경 전체를 표시하여 놓았는데 그렇다면 성경을 한 번 읽는데 3년 반이 걸리겠군요.
아라지 교수; 아니예요. 제가 알기로는 일년에 한 번 읽지요. 그러니까 매년 한 번 씩은 성경을 다 읽는 셈이지요. 해마다 성경을 다 읽으면 축하 잔치를 하는데 그것을 씸핫 토라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 읽기 달력이 정해져 있고 일년이면 완독하게 되고 완독한 날을 해다마 유대인의 명절로 지킵니다. 그날은 회당에서 큰 잔치를 합니다. 성경 토라 두루마리를 들고 회당을 한 바퀴 돌며 성경 전체를 다 읽은 것을 기념하는 잔치입니다.
최명덕 교수; 성경을 다 읽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 해마다 있다는 말이지요? 성경을 다 읽은 날을 명절로 지키는 민족은 유대민족 밖에는 없는 줄로 압니다. 대단하군요. 그러니까 해마다 한번씩 성경을 읽는다는 말인데, 그 전통을 따르다보면 평생 수십 번 성경을 읽게 되겠군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은 성경을 어떻게 실제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유대인들은 읽은 성경 말씀을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요. 소개하여 줄 수 있을까요?
아라지 교수; 글쎄요, 성경 읽기 자체가 적용이 아닌가요? 유대인들은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적으로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다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모든 명절이 성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달력 자체가 성경의 절기를 따라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성경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최명덕 교수; 그렇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 등 유대인의 주요 절기가 다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그 절기들을 지키고 있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그들의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지요?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성경 지식이 필요할 터인데요, 평균적인 유대인에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보통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적용하며 사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지요.
아라지 교수; 그럼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지요. 아는 만큼 적용하는 겁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란 영화를 보셨는지요. 격변기 러시아에서 세 딸을 키우며 사는 유대인의 애환을 그린 영화인데요, 그는 격변하는 세상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떤 일이건 그 일의 해결 방법을 성경과 연관시키려 애쓰고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학자는 아니었거든요. 물론 랍비도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의 평범한 유대인이었지요. 그래도 그는 매사를 성서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러한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인이 볼 땐 좀 모자라 보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성경을 잘 못 적용할 수도 있겠고요. ‘지붕위의 바이올린’의 주인공이 그랬지요. 그가 부닥치는 문제에 대한 그의 성서적 해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지요, 아니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그를 측은하게 보이게 만들지요. 그래도 성경을 그의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 까요? 그 영화는 하시딤적인 유대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수준이 높아야만, 성경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져야만, 성경의 교훈을 삶에 적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의 수준에서 적용하는 거지요. 대부분의 유대인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최; 맞습니다, 그는 대단한 랍비나 성경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성서적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노력은 적어도 합리적인 사고로 관찰해보면 실패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나 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서적 적용의 삶을 사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의 세 딸들을 차례로 데려가는 똑똑한 그의 사위들 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이지요. 그런데 교수님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요. 자라면서 어떤 성경 교육을 받았는지요.
아라지 교수: 저의 부모님은 유럽에 사셨는데 그렇게 종교적인 가정은 아니었어요. 조부, 조모님은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매우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셨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선생님이셨는데, 학생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저에게도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지요. 특히 요셉 이야기를 즐겨 하시곤 했어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곤 했어요. 우리 집은 정통파 유대인의 가정 같지는 않았지만 성경이 우리 가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어요. 늘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예레미야서를 공부하며 예례미야의 시를 감동하며 읽었던 것과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욥의 철학에 대하여 부모님과 나누었던 토론 등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집에서 성경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던 부모님의 성경 이야기, 학교 수업에서 지속되었던 성경공부 등이 저의 삶 속에 성경이 깊이 들어오게 하였지요.
최명덕 교수; 그러니까 정통파 유대인 가정같이 매일 철저하게 성경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였고 결국은 그러한 성경 공부가 교수님의 삶의 원리나 철학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겠군요.
아라지 교수; 그렇지요.
최명덕 교수; 약속한 시간이 벌써 다 되었습니다. 교수님과의 이야기를 통하여 유대인과 성경과의 밀접한 관계가 보다 선명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모든 것을 되찾은 민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하여 되찾았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라 없이는 살 수 있었어도 성경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민족, 그 민족이 다름 아닌 유대 민족이군요. 교수님의 대담에 감사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