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 矢婁)이다. 부왕인 서천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으며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의심이 많고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봉상왕은 곧바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크게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먼저, 숙신을 격파하여 고구려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숙부인 달가를 죽이고, 자신의 동생인 돌고( 固)를 다음해에 죽였다. 또한, 훗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돌고의 어린 아들인 을불(乙弗)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을불은 서천왕의 뒤를 이어 뒷날 미천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자신에게 위협적인 인물을 제거한 봉상왕은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의 궁궐 증축 사업을 벌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다링강(大凌河)하류 방면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해가던 선비(鮮卑) 모용부의 모용외와 충돌하였다. 그리하여, 293년과 296년 모용외가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였으나, 293년에는 신성태수(新城太守)인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이들을 무찔렀고, 296년에는 침략군이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다가 무덤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들은 당시 모용외의 세력이 아직 요하(遼河)를 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사실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던 중, 300년에 왕이 궁실을 수리하려고 백성을 동원하려 하였다. 이 때에 가뭄이 심해 백성들이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국상(國相)인 창조리(倉助利)가 이같은 사업이 옳지 않다고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자,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함께 왕의 폐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꾸미게 된다. 결국, 상황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된 봉상왕은 마침내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하였고 시신은 봉산원(烽山原)에 묻혔다
첫댓글 14대 봉상왕,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삶이었군요..잘 읽고 갑니다..하늘빛님..^*^
*^^* 포용의 왕도를 걸어도 시기의 독화살이 빗발치건만..권위를 위해서 핏줄도 내친 봉상왕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했음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