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남자는 밀입북을 꿈꾼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한 실업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비공식적 소식통에 의하면 천신만고 끝에 넘어간 그는 북에서도 추방당했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만 냉혹한 게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자는 깨끗이 포기했다. 그땐 결혼하기 전이었고 딸아이도 없었고 아직 20대였다. 그리고 겨우 첫 번째 직장을 관둔 직후였다.
남자는 가끔 생각한다. 그땐 내가 정말 단순했지, 라고.
1.
남자는 아침 7시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냉장고에 넣어둔 치커리 등 신선한 야채들을 녹즙기로 가는 것이다. 녹즙 한잔과 찰떡 한조각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아내를 위해선 커피도 새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딸아이를 깨우고 아몬드후레이크를 우유에 말아 먹이고 칫솔질을 돕고 오늘은 우리 아영이 무슨 옷을 입을까, 하며 옷장 안의 옷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아이와 도란도란 의논을 하고있으면 이때쯤 일어난 아내가 적당한 옷을 골라준다. 남자는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준다. 아이는 엄마보다도 아빠가 묶어준 머리가 더 예쁘다고 한다. 남자는 그 말을 믿는다. 옷입는 시간보다 머리를 두갈래로 묶고 도나스처럼 동그랗게 만 후 예쁜 핀으로 장식하는 시간이 더 걸린다. 아이는 거울보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공주님 차암 예쁘다, 하는 아빠의 감탄을 서너번은 들어야 거울앞에서 물러났다. 옆에서 아내는 옷을 다입고 마스카라를 뺀 나머지 화장을 다 마친 상태다.
남자는 아이를 먼저 데리고 차에 올라탄다. 차안이 훈훈해지길 기다리며 아이와 곰세마리나 꼬마자동차붕붕 등을 부르고 잇으면 아내가 마침내 차에 탄다. 아내가 마스카라를 거의다 바를 때쯤 남자의 차는 아파트 입구를 나온다. 5분 뒤 아이는 빠이빠이를 하며 어린이집 앞에 내리고 선생님이 아일 데리고 가는 걸 지켜본 후 출발한다. 15분 뒤, 아내의 학교에 도착하고 이따봐 당신, 하고 아내도 차에서 내린다.
이때 시각이 8시 30분, 이렇게 남자의 아침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이제 그가 출근할 시간이다.
*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 전원을 켜고 이메일을 체크한다. 기다리는 답메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는다. 그리고 경제섹션을 클릭한후 환율, 코스닥, 나스닥, 다우존스, 닛케이지수등의 업종별 등락을 꼼꼼히 살피고 새로 들어온 경제뉴스들 역시 세세하게 검색해본다. 그리고 남자의 개인 파일 속에 담긴 여러항목들과 비교분석에 들어간다.
큰일이야. 철강만 살아남고 이러다 남아나는 게 없겠는걸.
남자는 진심으로 근심한다. 투자계획도 호재가 있어야 탄력을 받겠건만 요즘 같아선 제대로 된 맞춤형플랜이란 그저 요식에 불과하다. 정보통신, 그 말많은 IT버블이 꺼지면서 경제는 내리막길이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미국의 영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전세계적인 불경기는 우리 수출까지 주춤하게 하고 잇다. 내수는 당분간 살아나기 어려울 듯 싶다. 다시말해 장기침체는 이제 불가피하다. 일본과 같은 복합불황을 겪게될진 아직 미지수다. 400만의 신용불량자, 400조원의 가계부채, 400조원의 부동자산… 이것은 마치 집안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내보낼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고 그냥 놔둘 수도 없어 그냥 외면하며 하루하루 견디는 그런 존재.
한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더니 어깨가 뻐근해졌다. 남자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나온다. 11시 40분, 일이십분 뒤면 근처 샐러리맨들이 쏟아져나올 시간이다. 남자는 집밖에선 간단하게 요기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다. 오늘도 참치김밥 한줄에 약식우동 한공기를 시켜먹는다. 단골식당 주인은 얼굴도 익었건만 오늘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가 우동국물을 후루룩거리며 다 마셨을 즈음, 식당 안은 손님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남자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고 식당을 나온다.
점심시간의 빌딩 로비는 늘 혼잡하다. 남자는 집에서부터 들고온 경제신문 2부를 말아쥐고 어슬렁거리며 로비 한구석 휴게실에 자리를 잡는다.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며 느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 시간은 여유롭다. 급한 점심을 먹고 벌써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제야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오는 사람들...목에 걸린 아이디카드는 이제 막 입사한 몇몇 신입사원들의 가슴에선 자랑스러운 듯 빛나지만 그나머지 사람들에겐 먹이를 먹고온 강아지들의 개목걸이처럼 처량하게 빛난다. 끌고다니는 주인은 보이지않지만 그들은 하루종일 손바닥만한 사무실, 협소한 개집에 묶여 있어야한다. 자기가 속할 공간은 선택되어진다. 연금과 종신보험과 의료보험과 각종 세금에 뜯기고 남은 얼마 안되는 돈으로 먹고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그 공간으로 돌아가야한다.
남자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로비가 조금씩 한산해지면 그도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한다. 늘 복도 끝에 앉아있던 중년수위는, 고이즈미 총리처럼 곱슬거리는 반백의 그 수위는 오늘도 자리에 없다.
남자는 빌딩 밖으로 나와 테헤란로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한다. 오후 시간을 지탱하기 위해 이 오후의 선책은 남자에게 필요하다. 1시 반, 남자는 자리로 돌아와 오늘의 물품들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접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잠시 기다리라며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오늘은 거리도 좀 멀고 단가도 얼마 안되는 것들이라 쉽진않겠다고 말한다. 남자는 몇군데 주소지를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은 관두고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며 핸드폰을 끊는다.
전에는 사람들이 경매까지 넘어오면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요몇달새 상황은 부쩍 나빠졌다. 중산층에서도 좀 산다는 이들까지 자포자기한듯 보고만 있으니 통 거래가 돼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 중산층 다 죽어가요. 남의 일이 아녜요.
같이 다니는 법원집행관 한명은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남자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이메일을 체크한다. 습관에 가깝다. 오전에 분석하고 검토한 투자계획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점심때 보다만 경제신문과 경제주간지들의 기사를 자신에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다. 지금은 정보싸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굴러다니는 정보들이지만 누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는 걸 남자는 안다. 당장 내일이라도 어떤 자리에서 갑자기 보이게 될지모른다. 그래서 항상 포트폴리오을 작성하는 자세로 준비한다. 긴장없이 이 생활은 지탱할수 없다.
어느덧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 남자는 노트북을 닫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대로 앉아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30분, 길게 1시간 그렇게 눈을 붙이고 나면 다시 활력이 솟는 것 같다. 이제 6시, 집에 가는 길에 딸애를 데려와 씻기고 먹이고 함께 블록을 쌓으며 놀아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간간이 아이가 원하는 뿡뿡이 비디오도 틀어주고 인형놀이도 해주어야 한다. 저녁을 먹은 후엔 아내의 저녁설겆이를 돕고 음식물쓰레기를 갖다버리고 아내와 못다한 대화를 나누며 보기싫은 저녁 연속극도 함께 봐야한다. 9시뉴스를 본후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재우고, 미니시리즈까지 본 아내가 잠들고나면 11시, 그는 다시 한번 노트북을 열고 이메일을 체크해본 뒤 잠자리에 든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2.
“윗층 아저씨가 집을 나갔데.”
토요일 낮의 놀이터, 아이와 모래성을 쌓으면서 아내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누가 어떻게 됐다고?”
“왜, 전에 봤쟎아. 우리집 바로 윗층으로 이사왔다고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구, 지지난준가? 집에 떡도 돌리고…점쟎고 키큰 아저씨.”
“음…그런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냥 어느날부터 안 들어온다네. 회사나 친구들한테도 말한마디 안하고. 아줌마도 아무 낌새도 못챘대는데... 아파트 사람들이 다 그 얘기뿐이야. 여보, 내말 듣고있는 거야?”
“그래, 듣고 있쟎아.”
딸아이는 흙장난에 싫증이 났는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들고온 작은 물뿌리개로 이리저리 물을 흩뿌리며 쌓아놓은 모래성을 단숨에 뭉개버렸다. 아이들은 잔인한 데가 있어, 남자는 물방울을 피하며 생각했다. 아내가 좀 조리있게 말할 수있다면 좋으련만. 늘 아내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도무지 알수가 없데. 아들도 곧 장가보내야 된다는데.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세상에 이해 안되는 일들이 한둘이야.”
남자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아내가 갑자기 공부를 더 하고싶다며 보건대학원인가 하는 데를 다니겠다고 했을 때도 남자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중학교 양호 선생이면 노난 자리지, 무슨 공부를 더한대? 그거 나오면 교감이라도 되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이죽거렸지만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아내는 체육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영어로 심리학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적성에 안맞는 공부를 왜 하려하는지 그는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엔 이해안되는 일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법이니까. 양호실에 혼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보내는 게 세상 어느 일보다도 싫다면 할수 없는 일이다. 아내는 악한 사람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아니다. 선천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결핍됬을 뿐이다. 자기 때문에 남자가 할 집안일이 많아져 아내는 늘 미안해했다. 그런 마음은 충분히 있으면서 생각은 더 이상 못한다는 것, 이런 쓸데없는 얘길 늘어놓는 게 남자에게 더 피곤한 일이라는 걸, 아내는 아직도 모른다.
“그런데 여보....”
“응, 왜?”
“당신은 별일없는 거지?”
“그럼.”
“…”
이럴때 아내는 더 이상 묻지 않는게 현명하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남자는 약간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남자는 아내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부부간에 그래선 안되지만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말하지 않았다.
남자는 더 이상 윗층 남자 얘기를 들어주고 싶지않다. 불경기니 실업, 가출, 사고, 가족붕괴 등등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들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남자가 지금 가야할 곳에선 더 험한 꼴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건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않다. 왠만하면 토요일 오후엔 일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주 내내 허탕을 쳤기에 오늘은 꼭 건수를 올려야한다.
남자는 친구애 돌잔치에 간다며 손을 털고 일어났다. 아이는 아빠를 보내기 싫어 손을 잡고 놔주지않았다. 아이를 겨우 떼어놓고, 옆 공사장은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아이에게 단단히 이른 후 남자는 놀이터를 나왔다.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선 재개발 신축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시공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몇주째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엉성한 울타리를 쳐놓긴 했지만 놀이터 바로 옆이라 개구쟁이들은 거길 넘어가곤 했다. 언젠가 딸아이도 아는 오빠들을 따라 쫄래쫄래 개구멍으로 들어갔었다고 자랑스레 말한 적이 있었다. 그날 남자는 처음으로 딸아이에게 매를 들었다.
에이, 뭐라도 지어져야지, 저게 뭐야. 동네 양아치들이나 들끊고…
남자가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중늙은이 하나가 다가와 그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남자는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말상대를 찾는 늙은이에게 혹 잡힐까봐 남자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돌렸다. 황량한 공사장엔, 임금도 제대로 못받고 떠났다는 인부들이 버리고간 소주병, 목장갑, 쇠파이프나 삽, 벽돌 등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위험한 것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큰일이야… 이대로 놔두면 안되는데…
그리고 남자는 북부지원으로 향했다.
3.
법원 집행관실 밖에 걸려있는 매각공고문엔 이미 손때가 꽤 묻어있었다.
일이 없을 때는 달랑 1장에 목록도 단촐하지만 그런 날은 퍽 드물었다. 오늘은 빽빽하게 넉장이나 된다. 주소와 물품목록만을 확인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다.
남자에게 그날그날의 매물 현황을 전화로 알려주는 박씨는 오늘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거간을 하며 사는 이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담뱃값 정도 받고 이런 일을 해주는 사람을 구한 것도 운이 좋아서다.
남자는 꼼꼼하게 리스트를 보며 수첩에 메모도 한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 집이 있을지 몰라 중간중간 기억을 더듬어 이름과 주소를 다시 확인한다. 가능하다면 알만한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확실히 해야한다. 그렇게 해도 예상못할 변수가 생기곤한다. 한번은 일산에 있는 빌라를 찾아갔는데 남자를 보고 알아보는 듯한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의 처제라는 여자였는데 하필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여러명 우르르 소개할 때 분명 끼여있던 얼굴이었다. 다행히 여자는 어디서 봤드라… 하며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울고불고 하며, 아이고 나죽네, 하는 언니를 달래느라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렇게 미련해보이는 인상은 쉽게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입찰을 포기하고 얼른 나와버렸다.
집근처나 아내의 학교근처도 혹시나 해서 가급적 피한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아는 수가 종종 있다. 가까운 친척들이 서울에 안 산다는게 이렇게 다행일수 없다. 친한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남자에게 정말 다행이다.
대치동, 반포, 양재동, 압구정동, 일원동의 주상복합아파트나 삼성래미안아파트 … 이런 데도 생각보다 재미못보는 곳이다.
“그까짓것 얼마나 한다구! 야 가져가, 다 가져가…돈벌어서 다 다시 사면 돼!” 이러면서 집행관이나 입찰자를 거지보듯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강짜를 부리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아무리 수십억원대 아파트에 살아도 여자들은 살림살이에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리 뻣뻣한 여자들이라도 밀고당기기를 잘만 시도하면 가까이 사는 친구나 이웃을 불러 입찰자로 나서게한다. 채무자는 직접 입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낙찰가가 더 높아지므로 남자에겐 더 유리하다. 남자가 낙찰받으면 그 제3자는 체면 때문에라도 꼭 되살려고 기를 쓴다. 그러지 않는 경우란 정말로 현금이 모자란 경우다. 그걸 파악하는 능력 즉 돈냄새를 맡는 것, 그것은 남자에게 아직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400만원짜리 지펠냉장고를 150만원에 낙찰받아 입찰관들이 가고난 뒤 흥정을 해 200만원에 되파는 것,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거래다. 이런 건수가 1주일에 1번만 있어도 그는 별 걱정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점점 채무자들이 뒷거래에 의욕도 보이지 않고 입찰물건들이 너무 초라해 푼돈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바닥에도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골프채 하나만 잘 잡아도 앉은 자리에서 수십만원을 뚝딱 번다는 소문이 퍼져 어떤 날은 법원 집행관실이 돗떼기시장처럼 버글거린다. 액정TV, DVD, 500만화소 최신핸드폰, 구찌 시계, 발리 구두, 루이뷔똥 핸드백, 심지어 나이키 운동화까지, 잘 팔리는 것들은 다 쓸어다 옥션 같은 인터넷 시장에 내놓는 이들이 늘어서다. 남자는 그렇게까지 하고싶진 않다. 당일흥정을 원칙으로 삼는다. 온갖 악다구니와 원성을 들으며 산 물건들을 또 보고 싶지도 않고 그것들을 집에 가져다 두기도 마땅챦다.
남자가 오늘 찍은 집은 여의도의 한 아파트. 평수로 보나 뭐로 보나 적당하다. 보나마나 카드빚이 불어나 이지경까지 왔겠지. 카드사 똘마니들이 들이닦쳐 행패를 부려도 배째라 버텼겠지. 그러다 이제 법원집행관들이 도착해 “동산 집행하러 왔습니다” 하며 빨간 딱지를 꺼내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실감이 나겠지. 어떻게든 막아볼려고 손도 싹싹 빌고 읍소도 하며 바짓가랑이도 붙잡고 늘어지다가 압류딱지가 하나둘 붙기 시작하면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게 되겠지. 법원집행관, 그것도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할 짓이 아니다.
남자는 그들 중 얼굴이 익은 젊은 입찰관 한명과 담배까지 나누어 피고, 함께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빚많은 사람들은 대개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집은 드물게도 금방 문이 열렸다. 자기들끼리 이미 피터지게 싸우다 지쳐 누가 와도 대꾸할 기운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도 아닌듯했다. 친절하지 않다뿐, 예의바르게 커피까지 내오며 그저 어서 끝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보통 집행관들을 저승사자 보듯 한다면 따라온 경매입찰자는 벌레보듯 하는데 이들은 남자를 봐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42평 아파트치곤 살림이 퍽 검소했다. 목록리스트를 너무 대충 봤나보다. 골프채나 명품가전은커녕 고가의 양주조차 없었다. TV는 남자네 집만도 못한 25인치 구형인데다 에어컨 쇼파 오디오 등도 죄다 10년은 훌쩍 넘었음직한 싸구려 고물들이었다. 오늘은 피봤군, 하고 남자는 혼자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남자가 최소한 건져가는 건 냉장고와 오븐이었다. 기가막히게도 이 집 부엌엔 오븐은 고사하고 화덕 2개짜리 가스렌지만 덜렁 놓여있었다. 다행히 양문달린 디오스냉장고가 부엌 모퉁이 끝에 보였다. 곧 시작된 경매입찰에서 남자는 냉장고를 100만원에 낙찰받았다. 건질게 없는 집이라 다른 입찰도 금방 끝났다. 너무 일찍 끝나 집행관들마저 약간 머쓱한 듯 주인부부를 흘깃거리며 눈치를 보다 곧 일어났다. 이제 남자의 차례였다. 젊은 집행관은 이미 남자의 행태를 아는지라, 빨리 자리를 비켜줬다.
남자는 조용히 한구석으로 주인부부를 데려갔다.
“20만원만 더 얹어서 1시간 안에 주시면 냉장고 넘겨드리겠습니다”
이런 경우, 감정이 폭발하는 사람들 중엔 남자의 멱살을 잡는 이도 간혹 있다. 이놈아! 그돈이 있으면 내가 빚을 갚지, 먹고 죽을래도 없다! 칼만 안 들었지 이거 다 도둑놈들 아냐? 에이 빌어먹을 놈! 뭐 할짓이 없어서 젊은 놈이 이딴 짓이나 하고 살아? 필요없다 이놈아…등등.
그런 반응들은 이제 무섭지 않다. 그저 눈한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부부는 정말 희한한 사람들이었다. 한숨을 쉬거나 빤히 노려보거나 먼산을 쳐다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그래도 당장 뭐라도 해드실려면 냉장고는 꼭 필요할텐데요.”
남자가 다시한번 조심스럽게 타진을 했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주 조금, 주인남자의 목울대가 울리는 듯하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필요없답니다. 저흰 어디로 멀리 떠날 거라서요.”
순간, 이사람들이 큰일을 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 곧 물건을 실으러 올거라 알려준 뒤 조용히 그집을 나왔다. 이런 물건은 다른 아는 업자에게 넘겨준다. 그러면 별로 남는 게 없다. 오늘 일진 정말 안좋구나, 그나마 차라도 안가져오길 잘했지…
남자는 아파트 입구를 나가며 생각했다. 낫살먹은 사람들이 겨우 저정도 엎어졌다고 다 산듯한 표정이라니, 헛살았어… 남자는 저런 사람을 한 두 번 본게 아니다. 당장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아 흥정은 뒷전이고 자기돈 털어 채무자와 소주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다. 이제 남자는 그러지 않는다. 지위나 돈 나이 고하에 상관없이 저런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리광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정글자본주의다. 한치의 양보도 없다. 살 자신이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 실패를 겪지 않고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고 남자는 믿는다.
4년전, 남자도 그 땐 꽤 순진했었다.
정리해고라니 내가 왜… 이건 뭔가 잘못됐어… 나 같은 인재가 짤리다니 말이 돼?
서울대는 아니지만 명문대라고 빡빡 우기면 그러려니 할 서울의 4년제 대학, 그곳의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남자는 그 때까지 재수 한 번 겪어보지 않았었다. 그때도 취직은 어려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 뿐이라는 걸 그 때 남자는 몰랐다. 나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자만했었다.
그래서 실직의 좌절감은 컸다. 수십군데 이력서를 넣고 두달 동안 면접 오라는 데가 단 세군데 밖에 없었을 때 남자는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조울증 초기까지 갔다. 생전 처음으로 빽 없는 부모, 돌아가신 부모를 욕했고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생각이 바로 밀입북었다. 남자는 대학 재학시절, 운동권 근처에도 안갔었다. …미친 놈들 빨갱이가 뭐가 좋길래 … 그런 무식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동조하기 힘들었다. 특히 조국통일 운운하는 친구들과는 같이 밥도 먹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제서야 남자에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시스템의 문제야.
한국 사회의 경쟁원리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모든 조건을 싹 바꿔 새로 태어날 수 없는 문제라면 이 경쟁원리 안에서 일생동안 챗바퀴돌 듯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결심했다. 그 안에서 살지 않기로. 밑천도 없으니 이민은 글렀고 그러면 지구 상에 남은 길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땐 그것만이 살 길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굳히고 어떻게 하면 넘어갈 수 있을까, 바다로? 아니면 육로로? 궁리하던 도중, 남자보다 먼저 실행에 옮겼던 사람이 결국 실패했다는 뉴스를 듣게된 것이고, 그와 동시에 기대 안했던 모그룹 공채에 덜컥 합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흐지부지 된 것이다.
그리고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남자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무난했다. 바로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낳았다.
*
남자는 지하철 역을 찾지 못해 결국 택시를 집어탔다. 국회 근처에선 여기 저기 천막 농성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국회 안쪽 공사장에선 ‘비정규직 차별 철폐’라는 플랫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높다란 크레인 위에서 사람들 몇명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저게 바로 고공크레인 농성이구나, 하고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자 택시 기사가 한 마디 했다.
“경제도 어려운데 무슨 파업이냐고 사람들은 다 그러지만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수다. 현대 같은 재벌회사가 하면 귀족 노조라고 안되고 공무원들이 하면 편한 새끼들이라고 안되고 비정규직이 하면 노동자가 아니라 안된다고 그러면, 도대체 누가 파업할 수 있다는 거요? 그렇지 않소? ”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까지 해야되는 그들이 진심으로 안되어 보였다. 전의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해도 남자는 자기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존재의 이유다. 나는 노동자다. … 남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전같으면 국회에서 저렇게 천막치고 데모하는 건 상상도 못했을 일 아뉴?”
택시기사의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 들릴때 쯤 남자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저렇게 진화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차 안의 훈훈함 때문에 남자는 바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결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4.
“위층 아저씨는 아직도 연락이 없데.”
일요일 오전,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남자에게 아내는 아침을 차려주며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파트 여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긴데 … 어떻게 열흘이 넘도록 신고도 안하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지 이상하다고… 여기 이사오기 전엔 정말 장난아니게 치고 박고 싸운 부부였다고 …”
“맞아. 부부 문제일거야. 그러니깐 관심 끄라구.”
남자는 이 한가한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런 얘기나 듣는게 짜증스러웠다.
“남자들이 집에 오면 통 자기 얘기를 안한다니까, 나도 좀 걱정이 돼서 그렇지…”
“내가 당신한테 숨기는게 뭐가 있겠어?”
“…”
남자는 아내 어깨를 톡톡 도닥여주며, 제발 저렇게 입좀 내밀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아내는 언제 철이 들까, 아니 부자집 딸로 컸으면서 아내는 왜 저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요즘 여자같지 않은 흐리멍텅하고 우물쭈물한 성격 때문에 아내는 서른 넘어서까지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봤다고 돌아가신 장인이 개탄을 했었다. 가진 것도 없는 남자가 청혼을 했을 때 그렇게 쉽게 승낙을 받은 것도 남자가 잘나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장인은 남자의 결혼 직후 갑자기 대장암이 도져 투병생활을 시작했고 2년전 운명했다. 아내는 외동딸이었다. 장모는 이미 고향 땅에 제법 아담한 과수농장을 꾸며놓고 있었다. 장인은 그리 큰 재산도 못모았지만 그렇다고 빚도 없었고 나름대로 깔끔하게 유산을 정리해 이렇다 저렇다 할 잡음도 없었다. 외동딸인 아내는 장인 장모가 살던 아파트를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코딱지만한 충청도 구석의 땅도 조금 물려받았다. 남자는 만족했다. 게다가 물려받은 코딱지만한 그 땅이 행정수도 거품 때문에 10배의 값이 올랐고 남자는 아내를 설득해 잽싸게 팔아치웠다. 그러자마자 행정수도 위헌 판결이 나서 땅값은 푹 떨어졌다. 사람들은 역시 투자전문가라 다르긴 다르다고 남자를 부러워했다. 그건 그냥 타이밍이 좋았을뿐이라고 남자가 겸손하게 말했지만 아내의 친척들 몇은 직접 자신들의 재산관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런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2년. 남자에게 길다면 긴 시간이다.
“여보”
“왜?”
“당신 그 회사 계속 다닐거야? 2년이 넘도록 그대로잖아. 정규로 발령날 때 안됐나?”
“그게 내 마음대로 돼? 어차피 가져오는 돈은 비슷하니까 재촉하지마.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
정말 아내는 말을 못알아듣는 여자다. 벌써 이 얘기만 100번은 한 느낌이다. 남자는 너무 큰 소리를 냈구나 싶어 헛기침을 한번 하고 물 한잔을 들이켰다. 아내는 선생님에게 꾸중들은 어린아이마냥 기가 팍 죽어 꾸역꾸역 밥숟갈을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아내를 들쑤셨겠지. 귀가 얇고 줏대가 없는 아내는 늘 그런식이다. 뭘 담아놓고 있질 못한다.
… 아내에게 말 안하길 정말 잘했지.
사실 남자는 아내에게 숨기는게 하나 더 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비밀이다.
사라진 윗층 남자, 사실 그 사람을 남자는 전부터 잘 알고 있다. 그가 여기 이사왔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지만, 거의 3개월전부터 남자는 그를 매일 본 사이였다. 아내가 알 리가 없다.
*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면 남자는 더 정신이 없다. 메일을 확인하고 주말에 소홀히 한 국내외 정보검색 등 할 일도 많고 아내와 아이에게 쏟았던 집중력을 다시 일로 되돌리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출근한 후엔 다른 생각은 완전히 잊고 일에 몰두하는데 익숙한 남자지만 가끔은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날이 추워지니 더 그렇다.
보낸 편지의 수신확인 여부를 주욱 검색하던 남자는, 지난주 하이투자신탁에 보낸 메일이 아직도 확인이 안됐다는 걸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자식들 일을 어떻게 하는거야… 모그룹 인사부에 있었던 동창 녀석이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력서 받으면 보지도 않고 그냥 엑셀에 넣고 돌려버린다니까. 출신학교별로 정렬해서 딱 나오게… 그럼 그 중의 90%는 들춰보지도 않는 거지”
처음엔 단순히 오기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에겐 그 이상의 일이 되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 내가 너희같은 회사에 모욕을 받을 일이 없다는 걸 보여주지…
남자가 그 회사에서 면접을 본 것은 근 2년전, 장인이 돌아가신 그 직후였다. 최종 면접에서 전문와 이사라는 작자들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이쪽 경력이 전무한데 그토록 자신있어 하는 이유는 뭐냐? 자기 소개서가 특이한데 설명을 해봐라, 그러면서 그들은 겨우 이틀 후 남자에게 불합격을 통지해왔다.
“귀하는 본 회사의 분위기와 융화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사유에 남자는 큰 소리로 웃고말았다. 그 때부터 남자는 2주에 한번씩 그 회사에 이력서를 계속 보내왔다. 자기소개서도 그때마다 고쳐 써서 보냈다.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투자전문가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채용이 된다면 출근하고 바로 하루만에 박차고 나온다는 것이 남자의 즐거운 계획이었다. 그 뿐이었다. 정말 그 회사에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기에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답답한 회사따위, 지금 이 생활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남자는 점심을 먹고 빌딩 로비의 제일 구석자리, 늘 앉는 그 자리에 앉아 역시 늘 마시는 커피 한잔을 음미하고 있었다. 날은 추웠지만 화창했다. 창 밖의 파란 하늘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앉아 있는 남자에게 제복을 입은 한 사람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 다니시는 사무실이 이 건물에 있나요?”
그는 새로운 수위였다. 남자는 느긋하게 수위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아뇨.
“그럼 출입증이라도 갖고 계신가요?”
남자는 이 신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미리 대비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30대 후반의 젊은 수위는 집요했다 사냥개처럼. 냄새만 맡을 줄 알지 사람을 보는 안목은 전혀 없는, 그저 그런 수위들 중 하나였다. 남자는 이런 사람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삼성역, 선릉역, 역삼역으로 주욱 이어지는 테헤란로의 그 수많은 빌딩의 수위들, 그들 대부분 그런 불쌍한 사냥개 근성 때문에 발탁된 이들이었다.
그 수위는 몇 가지 더 조목조목 얘기하기 시작했다. 썩 무례하진 않았다. 자기가 여기 온 처음부터 나를 쭈욱 봐왔는데 … 점잖은 분 같지만 계속 이렇게 무단 출입하는 걸 방치하면 자신한테 문제가 생긴다… 이해해달라… 등등. 남자는 그런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그냥 날 밖으로 내보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날씨가 그럭저럭 괜찮으니 오늘은 좀 멀리까지 순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윽고 남자는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 한대에 불을 붙였다. 원래 출근한 뒤엔 절대 담배를 피지 않는 남자였다. 생활이 흐트러지면 안된다고, 스스로 정한 규율일수록 잘 지켜야 한다고 늘 자신을 다그치는 남자였지만 이럴 땐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다고 남자가 심하게 맥이 빠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난 당당해,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2년 전 남자는 또 직장을 관둬야 했다. 정리해고는 아니었다. 해보지도 않은 제약 영업을 하라니 기가 막혔다. 그런 발령은 나가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 마침 장인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정신없는 아내에게 차마 자신의 실직을 알릴 수 없었고 딸 아이는 한참 걸음마를 배우며 크고 있었다. 이력서를 뿌리고 기다리는 시간에 마냥 놀수 만은 없어 마트에서 채소를 나르거나 막노동도 가리지 않고 했다. 직장이 새로 구해지기 전까지는 아무한테도 관뒀다는 소리를 하기 싫었다. 겉으로는 멍쩡한 듯 보였겠지만 4년전보다도 오히려 남자의 상실감은 컸다. 아니, 상처처럼 쓰라렸다. 왜 하필 날까… 이제 …나는 별 가망이 없는 놈일까… 공인회계사나 자격증 공부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젠 그것도 너무 많아 별 비젼이 없다는 얘길 듣게 되었다. 하루하루 남자는 시들어갔다. 가끔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었다. 이력서를 200통까지 쓰고 그 이후엔 세는 걸 포기했다. 별 거지같은 회사에서도 면접에서 미끄러졌다.
참 그 때 암담했지, 남자는 어느 덧 현대백화점을 돌아 선릉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테헤란로의 새로운 상징, 스타타워 빌딩이 눈앞에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둘러본 빌딩도 여나믄 개. 십여층짜리 작은 빌딩이라도 관리사무실이 떨어져있고 휴게실이나 로비가 약간이라도 독립적으로 꾸며져있으면 시도해 볼만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곳은 드물었다. 그 건물 소유주인 듯한 늙은 사냥개가 수위실에서 직접 눈을 부라리고 있는 곳도 있었다. 지나치게 큰 빌딩은 너무 소란하거나 까다로운 남자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로비의 자리도 그리 많은 게 아니라 점심 시간마다 자리 하나 잡느라 시간이 다 갈수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조건을 가진 빌딩은 이미 한번씩 머물렀던 곳이라 다시 가기 내키지 않았다. 설령 그곳 수위가 남자를 못알아본다 하더라도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테헤란로의 이 별처럼 많은 빌딩 중에 내가 있을 곳이 없다니.
남자는 잠깐 우울해졌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곧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담배가게가 보이는 골목으로 한발 들어선 순간, 골목 입구에서 불쑥 사람 한명이 튀어나와 남자를 놀래켰다. 이 일대를 돌아다니는 거지였다. 남자도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듯 했지만 구걸만은 잘 했다. 담배 가게 주인은 담배를 팔고 바로 안채로 쑥 들어가버렸고 점심 시간이 지난 테헤란로의 외진 골목은 적막했다. 모두가 낮잠에 빠진 듯한 시간이었다.
늙은 거지는 누더기같은 장갑 사이로 빠져나온 꼬질꼬질한 손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렇지않아도 남자는 전부터 이런 거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어. 들어봤어? 도대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라니, 말이 돼?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사회의 해충이야!”
그러나 그런 말이 입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남자는 조용히 거지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만일 그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남자는 들고 있던 신문을 단단히 말아쥐고 사정없이 거지의 등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거지는 꺄악 꺄악 소리를 지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땀을 뻘뻘흘리며 구타를 하던 남자가 동작을 멈춘 것은, 골목으로 누군가 걸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봐, 정신병자나 살인자보다도 더 못한 인간이 누군지 알아? 바로 실업자야. 아무것도 못하는 무지랭이들! 실업자! 실업자!”
그리고 남자는 넥타이를 바로 잡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얼른 골목을 빠져나왔다. 문득 복잡한 꿈을 꾼 듯한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전에 어디서 본듯한 이상한 기분. 그리고 한숨 돌리고 나니 어서 집에 가 딸아이를 보고 싶어졌다.
남자는 라이터를 꺼내려고 코트 안쪽 주머니를 뒤지다가 명함 몇 장을 발견했다. 언젠가 홧김에 만든 명함이 남아있을 줄 몰랐다. 다 버린 걸로 기억하는데. 명함엔 이런 글씨가 박혀 있었다. ‘앞서가는 금융, 하이투자신탁 대리 김철수’ 오랫만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명함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남자는 유쾌한 얼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5.
그 시각 여자는 양호실에 혼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친하다면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촌이었다. 사촌은 2년전 여자의 남편이 권한 대로 주식과 부동산에 분산 투자를 했는데 지금은 반의 반 토막도 안된다고 흥분해 있었다. 어떻게 된건지 알아보려고 회사로 전화를 걸면 늘 불통이었고 핸드폰으로 겨우 통화가 되면 그는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고 전문가의 말을 믿으라고만 할 뿐, 뚜렷한 설명이나 대안을 내놓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기는 별 관심이 없다는데 하도 졸라 맡겼더니 이렇게 됐다고 여자의 사촌은 한탄했다.
여자는 전화를 끊고서 한동안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해 낮인데도 밖은 어두웠다. 여자의 마음도 먹먹했다. 이런 전화가 처음은 아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적절하게 팔아 재미를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기화로 남편은 너무 의기양양해졌다. 친척들을 만나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믿어보라며 권유하는 듯 했다. 그 때 막 회사를 옮긴 직후였다. 신출내기 투신 직원일뿐인 남편이 왜 저럴까 싶었지만 워낙 경제엔 문외한이라 여자는 참견하지 못했다. 남편이 그런 회사에 들어갔다는 것도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남편 말로는 스카웃 제의가 와서라고 했지만, 그는 전에 일반 홍보팀 업무를 담당했었는데 어떻게 스카웃이 됐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난지 딱 석달만에, 남편이 결혼 안해주면 죽어버리겠다며 난리를 쳐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사람이 투명해보이지 않고 덕도 없고 복도 없어 보이는 관상이라며 돌아가신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딸애를 임심하는 바람이 어쩔 수 없었다.
출산 후 한동안 여자도 만족했었다. 남자는 결벽증 증세가 좀 있었지만 가정적이었다. 집안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집에 막 들어온 남편에게 딸아이가 반가와 냉큼 안기다가 분유를 몽땅 토한 적이 있다. 아이는 그 때 돌도 안됐을 때였다. 갓난아기들은 잘 토한다는 걸 남편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날 남편은 회사에서 아주 안좋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알 리가 없다. 말을 안하니. 그렇다 하더라도, 돌도 안된 어린 자기 딸을 집어 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게 뭐야, 에이 씨발!” 하며 그는 아이를 피구공처럼 냅다 던졌다. 다행히 두터운 담요가 바닥에 깔려있어서 아이는 다치진 않았다. 놀래서 경기를 일으켰을뿐. 여자가 놀란 건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남편은 그러고도 너무 멀쩡했다. 그는 문을 탁 닫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TV를 켰다. 그리고 몇 분 후, 갑자기 놀란 얼굴로 여자에게 물었다.
“아니, 애가 왜 이래? 어디 아퍼? 왜 그렇게 우는거야?”
여자는 소름이 끼쳤다. 남자의 표정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빽빽우는 아이를 다정하게 안고 달래는 모습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그런 일은 이후에도 잊을만 하면 한번씩 띄엄띄엄 일어났다.
여자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즈음, 무엇때문인지 남편은 더 예민해져있었다. 친구가 선물로 준 카나리아 한쌍이 거실에 걸려 있었는데 남편은 새똥 냄새가 싫다며 새를 선물한 여자의 친구를 욕하고 새를 없애버리자고 여자를 계속 졸랐다. 여자는 알았다고 하고 어떻게 할까 결정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젯밤까지 멀쩡하던 새들이 죽어있었다. 목이 부러진 듯 했다. 남편이 옆에 와 여자를 보며 너무 즐겁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것들, 어디다 갖다 버릴까 여보?”
그 외에도 남편은 가끔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너무 천연덕스럽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가 친구들을 만난다며 가끔 늦게 들어오곤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걸 여자는 알고 있었다. 과연 평소에 연락을 하는 친구가 있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웠다.
절대로 자기 앞에서 노트북을 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무슨 대단한 게 들어있길래 하고, 한번은 여자가 밤에 몰래 그것을 열어본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알만한 경제 뉴스들을 잔뜩 모아놓은 흔적 외엔 별다른 게 없었다. 문서란엔 쓰다만 자기 소개서나 투자 계획 나부랭이들이 있었고 메일을 확인해보니 여러 회사에 보낸 이력서가 수두룩했다. 이이가 또 다른 데로 옮기고 싶은가보구나,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메일의 수신자 중엔 남편이 다니고 있는 하이투자신탁도 있었다. 자기 회사에 무슨 이력서를 또 보내? 그게 아닌가? 하고 자세히 보려는데 아이가 자다가 깼다. 여자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방을 나와버렸다.
그 회사를 다니는 건 정말 맞는지 하는 의심은 전부터 했었다. 물론 어디나 계약직이 있겠지만 그래도 뭔가 아구가 안맞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무슨 큰 프로젝트나 거물들의 재산을 관리한다는 얘기를 종종 했는데 남편 정도의 직원이 그럴 수 있다는 건 허풍처럼 들렸다. 회사에 전화를 하면 늘 통화중이었고 어느 날인가부터는 아예 불통이었다. 남편에게 물어보면 아 그때, 외근중이었어, 사무실이 바뀌었어, 아니면 프리젠테이션 중이라서 …라며 당신이 이런 일을 알기나 해? 하며 여자를 무시했다.
여자를 무시하는 남편의 태도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여자가 썩 공부 체질이 아니란 걸 스스로도 아는 바였지만 남편은 아주 집요하게 여자를 놀렸다. 나중에 아영이가 크면 창피하다고 할지 몰라 좀 배워놔… 발음이 그게 뭐야? 이거 읽을 줄 알아? 참, 양호선생이 한문을 알아서 뭐하겠어… 당신은 딱 보기엔 노력파처럼 보이는데 어쩜 그렇게 다르냐? 당신 아이큐 몇이나 돼, 90은 돼나? 반은 농처럼 말했지만 남편의 입매는 잔인하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진담과 농담의 경계선상에 있는 아슬아슬한 태도 때문에 여자는 딱 부러지게, 이게 문제다, 하고 꼬집어 낼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은 바로 그날 밤 이후였다.
그 날, 늦게 들어온 여자는 세탁이를 급히 돌리고 있었다. 그 때 모기 한 마리가 여자 눈 앞에 나타났다. 이 겨울에 웬 모기… 하며 여자는 뒷 베란다 이중창 사이에 낀 모기를 잡으러 창 하나를 살짝 열었다. 그 바깥 창 사이로 아파트 옆의 중단된 공사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밤이지만 남자 두사람이 서 있는 것은 보였다. 그곳은 여자의 집에서만 잘 보이는 모퉁이였다. 밤이 으슥해 얼굴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갑자기 한 사람의 허리가 푹 꺽어지며 쓰러지는 것만은 똑똑히 보았다. 나머지 한 사람은 삽같은 뭔가를 들고 있었다. 여자는 못 볼 것을 본 듯 바깥창을 그냥 닫아버리고 나와버렸다. 그러나 30분 후 빨래가 다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여자는 조심조심 베란다로 다시 나가 슬그머니 바깥을 내다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공사장 바로 옆 아파트 울타리를 막 넘어온 듯한 한 사람이 보였다. 여자는 빨래들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뭘 봤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무서웠다. 몇 분 뒤 남편이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사왔다면서.
여자가 조금 전 본 사람은, 공사장 울타리를 넘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은, 다름아닌 남편이었다.
며칠 후 윗층 남자가 가출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윗층 남자는 반백의 고수머리가 아주 어울리는 온화한 중년이었다. 마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연상되는 인상이었다.
그 집이 처음 이사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는 남편을 보자 매우 반가운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차갑게 굳은 표정이었다. 거의 쏘아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음 날 이사떡을 가져온 윗층 부부에게 여자는 잠시 들어오라고 권했지만 남편은 그들 앞에서 무례하게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무안해진 부부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여자의 눈에 비친 그는 분명 남편과 아는 사이 같았다. 부인의 말로는 삼성동의 큰 빌딩 수위라고 했다. 남편 회사도 그쪽 어디였다.
여자가 공사장의 어떤 두 사람을 본 그날, 날짜를 따져보니 바로 그날 이후 윗층 남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는 남편에게 제대로 물어보기가 겁났다. 왜 그를 모른다고 했는지. 그날 공사장 울타리를 넘고 있던 사람은 당신이 맞는지.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무슨 일을 숨기고 있는지.
여자는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까부터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눈이 팍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알고 있었다. 기다리는 눈은 쉽게 오지 않고 오늘 하루도 그냥 저물 것이다. 여자는 그런 나날을 계속 겪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남자가 다른 날보다 다소 긴 산책을 마치고 차로 막 돌아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경매 건수를 알려주는 박씨의 전화였다. 왠일인지 내일 아침 괜찮은 매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고 했다. 요근래 낙찰 받은 물건들이 시원찮아 걱정이 많던 남자였기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름값까지 나날이 오르는데 수입은 전보다 줄어 어떤 달은 딸아이 과자사줄 돈 밖에 남지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아내에겐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 통장관리를 해왔고 아내는 돈 문제만큼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살고 있는 집이 대출을 낀 것도 아니고 카드빚이나 남에게 큰 돈을 꾼 것도 없었다. 금리가 낮다고는 하지만 장인이 물려준 땅을 판 돈이 착실히 불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됐다. 이건 한달동안 출근하고 일한 나에 대한 급료인데 이것밖에 안되다니. 원통했다.
1년 반쯤 전 어느날, 간만에 푹자고 일어난 날 아침이었다.
이력서를 이백 몇 통까지 쓴 이후 남자는 밤에 잠을 통 잘 수 없었고 아침까지 쾡한 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남자는 수면제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는 불안해 다른 안정제도 같이 복용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날 아침은 유난히 정신도 맑고 아주 상쾌했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아주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도 날 안써주면 어때? 내가 날 고용하면 되잖아. 그래… 그깟 돈 어떻게든 벌어서 내게 월급을 주는 거야. 그럼 나는 꼬박꼬박 출근해서 일을 해주지… 그래 맞아, 이 거지같은 경쟁원리 속에서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없쟎아?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 앞으로 내 노동 시간은 내가 정한다!’
내 노동의 시간을 내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남자에게 유레카와 같은 발견이었다. 그렇게 맘먹고 나니 9시에 출근해 6시까지 일을 한다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경매 입찰 현장을 들락거려야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내는 그 시간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좀스러운 상사도 없거니와 하기 싫은 야근이나 부담스러운 술자리도 없고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을 하기 때문에 전문성은 고양되고 스트레스를 느낄 새 없이 시간 낭비 또한 없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효율적인 시간이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마구 떠올라 그냥 썩히기 아까운 투자계획도 많이 세웠다. 그래, 사람이 혼자만 잘 살면 되나 돕고 살아야지… 싶어 남자는 그 기회에 주변 사람들 몇의 자산관리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자신에게 이런 숨은 자질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 기쁘기도 했지만 전의 직장에서 쓸데없는 허드렛일이나 하고 살았다는 게 더 분했다.
남자는 내일 새로운 빌딩 근처로 옮겨야 하고 입찰 현장에도 나가봐야 하므로 오랜만에 좀 일찍 퇴근해 쉬기로 했다. 탄천주차장을 나와 가는 길에 아까 자신을 내몰았던 그 빌딩 앞을 남자는 다시 지나갔다. 그 새로운 수위가 로비에 서서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는 광경이 멀리서도 보였다.
참, 아직도 젊은데 벌써 수위질이라니.
남자는 여유롭게 그 앞을 지나가며 빵빵 크락션을 울렸다. 꼭 들으라고 한 건 아니었다.
남자의 차가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갈 때, 새로운 수위는 공교롭게도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수위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 친군 뭐하는 사람이랍니까?”
“모르지… 그러니까… 그게 한 석달 됐나… 점심 때만 되면 여길 기어들어오더라구. 전에 있던 백씨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잊을만 하면 또 들어오고 잊을만 하면 또 들어오고… 그래서 백씨도 아예 손을 들어버렸지. 뭐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얌전히 앉아서 똥폼만 잡다 가니까… 백씨 말로는, 자기 혼자서 여기로 출근한대나 뭐래나. 언뜻 보면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 젊은 사람이, 안됐어… 그래서 백씨가 저 치하고 술도 한잔 하고 그랬지? …아이구, 저런 미친 놈이 문제가 아니야… 자네 여기 들어온게, 그 백씨가 나가서 그런거 아냐.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홱 집을 나가버려서…”
“왜요?”
“그걸 모르니 답답하지. 2년이나 같이 근무했는데 나한테도 한마디 말도 없이… 뭐 사고가 난건지… 바람이 난건지 그냥 감감 무소식이래요”
6.
평소보다 두어시간이나 일찍 자기를 데리러 온 아빠를 보고 아이는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어린이집의 다른 아이들도 아빠를 따라 일찍 집에 가는 아이를 부러운듯 쳐다보았다.
남자는 아파트 상가에 들러 아이가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다가오는 생일에는 꼭 뿡뿡이 인형을 사주겠다고 아이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이는 오늘 아빠의 기분이 좋은 날이란 걸 눈치챘다. 그래서 놀이터에서 조금만 놀다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놀다보면 아이 옷에 꼭 뭐가 묻을 테고 그러면 분명 아내는 잔소리를 할테지만 남자는 오늘만큼은 그냥 아이 하자는대로 해주고 싶었다.
아이는 아빠와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하다가 모래사장에 아이들 몇을 발견하고 냉큼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는 그 옆, 바로 몇 발자국 밖에 있는 공사장 울타리엔 못보던 푯말이 걸려 있었다.
시공사가 바뀌어 곧 공사가 재개될 예정이니 인근 아파트 주민들은 출입을 자제해달라, 는 내용이었다.
공사가 시작되면 엄청 시끄럽겠군 안그렇소? 하고 윗층 남자는, 아니 백씨는 말했었다.
전에 살던 집은 아파트 정중앙에 위치해 그런 걱정이 덜했는데 새로 이사온 집은 제일 바깥 라인이라 외풍도 세고 소음도 더 심하다고 백씨는 불만이었다.
남자는, 누가누가 더 모래성을 높이 쌓나 겨루느라 이제 아빠는 안중에도 없는 딸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 그가 우리 아파트 윗층으로 이사 오지만 않았더라면… 주제넘게 내 일에 간섭만 하지 않았더라면… 마누라에게 다 털어놓고 다시 멀쩡한 직장을 알아보라는, 그런 하나마나한 참견만 하지 않았더라면… 실업자 생활 오래 하면 그거 벗어나기 힘들텐데, 라는 소리만 안했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공사장 안쪽, 어느 한 구석을 응시하는 남자의 손이 잠깐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 시선을 거두고 남자는 딸아이 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남자를 쳐다 본 딸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어 보였다. 아이에게 환하게 웃어보이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던 남자는 인생이란, 하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새파란 이십대엔. 그러다 서른이 넘어 사회인이 되고 가장이 되면서 내게 가장 큰 소망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되어버렸다. … 그것이 인생이다.
이제 날이 어두워졌으니 남자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야 한다.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놀아주고 늦게 돌아온 아내와 저녁준비를 하고 음식물쓰레기를 갖다 버리고 9시뉴스를 보고… 그러면서 오늘 하루는 또 지나가겠지. 이러면서 내 나이 곧 마흔이 되고 쉰이 되겠지. 그러다 문득문득 가슴이 허전해질 땐 아무라도 붙잡고 얘기하고 싶어지겠지. 자유로운 만큼 고독한. 정말 고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나오면서 남자는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고독이다.
김윤영 1971년 서울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의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2002년 창작집 <루이뷔똥>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