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 3월호, 고정칼럼
이동규의 ‘이심전심’
“협상의 기술”
알파고 쓰나미가 한국을 휩쓸고 간 후 국내에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관심, 동경, 걱정, 두려움이 혼재되어 각 부문에 2차 여진을 일으키고 있다.
돌이켜보면 수천 년 간 인류가 발명한 두뇌게임 중 바둑은 서양의 체스 정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단연 최고의 경지다.
이번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바둑판은 가로, 세로 각각 19줄로서 모든 경우의 수는 10의 170승이라는 천문학적 수준이며,
지구상 모든 생명체 원자 수보다 크며, 수퍼컴퓨터 연산으로도 10억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종주국 중국의 프로기사만 2만 명 수준인데 비해 불과 수백 명에 불과한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어린 천재들이
그 왕관을 누려온 것은 사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중국관영 차이나 데일리가 과거 이창호 국수를 가리켜 “만리장성은 한국에 있다”라는 보도를 하지 않았던가.
향후 구글 측은 난해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스타크래프트 도전을 검토하겠다고 하는데,
소위 e-Sports 분야 또한 내로라 하는 전세계 고수는 거의 한국인 일색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결과를 두고 볼 때 가장 창의적인 민족이라는 한국인이 기계적 두뇌에 패한 것은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가올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강력한 국가적 경각심을 일거에 불러일으킨 것만큼은 커다란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구글(Google)의 원래 작명은 ‘Googol’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10의 100승이라는 전문 수학용어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담아내겠다고 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 드디어 자신이 내건 수준보다 한참 고수인 바둑을 제쳤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다.
이것은 강력한 논리나 연산능력 차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지다.
과거 정보검색(information retrieval) 기술은 최근 딥 러닝(deep learning) 외에
인지컴퓨팅, 벡터라이징 기타 신경망기술로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이제는 인간의 절대우위라 여겨져온 상상력, 창의성 내지 감성영역까지 넘보고 있을 것이라고 하니
절로 머리칼이 솟을 지경이다.
이번에 생중계를 지켜보면서 의사, 약사, 판사, 변호사, 기자, 자산투자관리사 등
그동안 대표적인 전문직으로 평가받아온 계층까지 자못 긴장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번 경기는 알파고가 독립된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라
매번 착수마다 전 세계 수천 대 규모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병렬 연결, 공조된 구조이기 때문에
인류가 2,500년간 이어온 바둑의 기본 룰을 정면 위반한 불공정계약이자 인간모독이라는 날카로운 법률적 비판도 제기되었다.
여기서 이번 관전의 핵심 포인트로 인간 대 인공지능, 서양 기술 대 동양 지혜의 대결 등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세계 최고의 전략가인 춘추시대 손자의 눈을 빌려 설명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손자병법은 총 13편, 6,109자로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나,
품질에 있어선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대 전략의 최고 개념은 제4편 군형(軍形)에서 나온다.
손자는 여기서
“이길 수 없는 자는 지키고, 이길 수 있는 자는 공격한다,
지키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고, 공격하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기고서 그 후에 싸우고, 지는 군대는 먼저 싸우고서 그 후에 이기려 한다.” 라고 설파하였다.
손자의 해설은 이번 경기를 놓고 보아도 그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고 보인다.
어쨌든 구글이 인수하여 공을 들여온 인공지능의 핵심기술인
기계학습, 딥 러닝의 가공할 위력은 이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세돌 선수가 4국을 이겼다고는 하나 4국에서 알파고가 둔 어처구니 없는 수들을 종합해볼 때
이것은 완패 그 자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돌 선수는 이번에 진정한 프로의 휴머니티를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물질 그 이상의 수확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선 천하의 이세돌 선수가 구글이라는 거대 글로벌기업 마케팅 전략의
일개 스파링 파트너로 전략해버린 듯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더욱이 이 짧은 이벤트로 구글의 시가총액은 58조나 증가했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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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번 경기를 두고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한국인의 마케팅 마인드다.
이를 경영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마디로 '협상(negotiation)' 기술의 문제다.
만약 이러한 폭발력 있는 글로벌 빅 매치가 뉴욕 트럼프호텔 정도에서 열렸다면
그 파이트머니를 비롯한 대국조건은 과연 어땠을까?
한국기원이나 이세돌 측이나 반상에선 천하의 최고수이긴 하나, 현실의 바둑에서 볼 땐
다소 성급하게 계약에 임했다고 보인다.
대국이 결정된 후에 딥마인드사 대표가
“사실 우리는 1천억 원을 불렀어도 응했을 것이다. 우리는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라고 한 대목에선
역시 순진한 한국인들이라는 자조적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사실 이건 결코 액수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선진국 또는 외국 기업과 협상에서 지금까지 속이 쓰린 사례를 너무도 많이 보아온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멀리는 과거 올림픽 중계권료 협상에서부터 최근 미국 펜타곤과의 KF-X 전투기 도입시 기술이전 협상건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매번 장고 끝에 악수를 연발하는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소위 ‘갑’인 상황에서조차 ‘을’에 끌려다니는 듯한 장면도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다.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느낀 점은 민ᆞ관 할 것 없이 협상론에 관한 한 우리는 낙제학점 수준에 머물고 있고,
그 원인은 결국 협상이론과 실제에 대한 연구와 경험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절절한 반성이었다.
협상은 종종 마음에 안드는 파트너와 춤을 추는 방법이라고 한다.
협상학 이론상 모든 협상자는 협상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성과를 얻어내기를 원한다.
일반적으로 협상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5대 요소로는 협상목표, 협상력, 관계, BATNA 및 정보를 들 수 있다.
여기서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란 협상의 가장 기본 개념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협상결렬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을 의미한다.
과거 2002년 청계천 복원공사 계획 당시 완강한 상인들에게 내민 서울시는 유명한 배트나 사례다.
"네 잘 알겠습니다. 복원공사는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시민들의 안전문제가 걸려 있는 청계고가를 전면 보수하겠습니다.
공사 기간은 3년 입니다."
그 후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반해 IMF 직후 벌어진 대우자동차와 GM간 매각협상은 최악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한달이라는 절박한 기한에서 대우차 협상팀은
결국 처음 제시했던 가격의 10%도 안 되는 4억 불에 최종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동사의 매각가치 증대를 위한 노력 부족, 협상참여자간의 협력과 소통 부재,
복잡한 이해관계자 갈등으로 인한 미흡한 협상전략의 결과였다.
이처럼 협상 결렬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대안 유무에 따라서
협상은 내게 유리하게 아니면 반대로 불리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
이를 뒤집어보면 내 자신의 배트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방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협상을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성공적인 협상의 원칙과 과정은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캠프데이비드 협정과 같은 국가 계약에서부터
기업 M&A, 각종 행정업무, 기타 테러범과의 인질협상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모든 협상과정을 요약해볼 때, 협상이란 결국 최고의 대안, 즉 나만의 배트나를 찾는 일이다.
그것 없이 협상에 임하는건 아마추어가 프로와 맞붙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ZOPA(Zone Of Possible Agreement)’인데
이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의 범위를 명확히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과의 합의가 가능한 구간인 셈인데, 각 계약 당사자간 BATNA의 공통 교집합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정을 복기해보는 이유는 우리의 천재 이세돌 진영에서
이러한 협상의 전략 프레임과 툴을 갖고 구글과 담대한 사전 대국협상을 벌였으면
정말 근사한 드라마가 탄생했었으리란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는 언제나 결과를 놓고 보면 후회가 생기는 게 진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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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