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기념관
54년 10월 13일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당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독버섯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의 4번째 아내인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아들 네로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황제를 죽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아그리피나는 전 남편이 병사한 뒤인 49년 황제인 숙부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했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의 최후는 처참했다. 그녀는 아들 네로를 황제로 옹립하는 음모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자신의 인생을 꽃피우는 데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네로는 황제 즉위 5년 만인 59년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했다. 권력 집행에 자꾸 간섭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네로는 62년 아내도 죽였다. 64년 기름 창고에서 발화한 불이 로마 시가지 전역을 온통 불더미로 만들어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네로는 신흥 종교 크리스트교에 책임을 전가해 기독교도를 대학살했다. 65년에는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결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네로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히틀러도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무솔리니는 평민복으로 위장해 탈출하던 중 일반 시민들에게 들켜 재판도 없이 맞아죽었다. 궁예도 맞아죽었다. 끝없는 권력 향유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던 이완용은 “매국노 타도”를 외친 이재명 지사의 칼에 입은 중상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이재명은 1887년 10월 13일 태어났다. 1908년 10월 13일에는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이 순국했다. 이강년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4년 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과 부일 민족반역자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이강년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한때 이강년 의병군은 위세를 떨쳤지만 그도 순국으로 삶을 마쳤다.
이강년도 이완용과 같은 인생관을 가졌더라면 계속 관직에 있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릴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권력의 단맛을 버렸다. 네로, 히틀러, 무솔리니, 궁예, 이완용처럼 살지 않았다. 그의 올곧은 가치관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오십 년 내려오면서 죽기를 결단한 마음
이제 와서 어찌 구차하게 삶이 있으리
군대에 맹세하고 다시 나왔건만 종시 회복키 어려워
지하에서도 오히려 싸울 뜻을 가졌네
더디고 더딘 여름날 사람 보기 드물어
교활한 오랑캐가 말마다 살아날 기회를 찾으라네
이 몸 위에 존왕양이의 대의를 짊어져
당당히 죽음에 나가리니 슬픔을 말하지 말라
이완용도 시를 남겼다. 이재명 지사에게 중상을 입은 후 인왕산 계곡에서 요양을 할 때
“琴書四十年(거문고와 함께 책 읽기를 사십 년 하였더니)
幾作山中客(거의 산중의 나그네가 되었구나)
一日茅棟成(하루 만에 띠 집을 지을 수 있으니)
居然我泉石(샘과 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노라)”
라는 시 족자를 벽에 걸어두었다.
이 시는 이완용의 자작시는 아니다. 중국 남송 성리학자 주희가 벼슬을 버리고 무이산에 은거할 때 지은 시편들 중 하나이다. 이 시를 별장에 걸어 두었다는 것은 이완용이 자신을 주희에 견주었음을 말해준다.
이완용은 저승에서 주희를 만났을 때 아마도 반가운 낯빛으로 “거문고와 함께 책 읽기를 사십 년 하였더니” 운운하다가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이놈아! 너는 ‘테스 형’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도 모르느냐? 이렇게 무식한 놈이 나라는 어떻게 팔아먹었는고? 하기야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했으니, 쯧쯧쯧. 네 무덤을 직계 후손들이 파헤쳐 없애버린 것은 아는지 모르겠다.”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