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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3)
3. 혁명의 제1막
삼부회의 선거 기구는 꽤 복잡했으나 퍽 ‘리버럴’한 편이었다. 제1신분의 경우, 주교는 열 명에 한 명, 사제는 전원, 수도원은 한 수도원마다 한 명씩으로 구성되는 선거 위원회를 만들어서 베르사유로 보낼 제1신분 대표자 308명을 뽑았다. 따라서 이 308명 중에는 사제가 비교적 많았다. 제2신분의 경우에는, 바이아주 재판구별로 세습귀족의 작위를 가진 자는 전원이 각자 자기 재판소 소재지에 모여서 선거인단을 구성하고 이 선거인단이 대의원을 선출했다. 귀족 대표 대의원은 대검 귀족이 265명, 법복 귀족이 20명 도합 285명이었다. 제3신분의 경우는, 직인 길드 조합원 100명에 한 명, 기타 길드 조합원 100명에 두 명, 비조합원 시민 100명에 두 명을 선거 위원으로 선출하여 바이아주 재판소 소재지로 보내면, 거기서 200호에 두 명 꼴로 선출된 농촌 출신 선거 위원들과 합동하여, 최종적으로 베르사유로 보낼 제3신분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제3신분 대의원 총수는 621명이었는데, 약 절반이 법률가들이고 나머지 반은 여러 가지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진정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귀족 신분의 미라보나 성직자 신분의 시에예스(Emmauel Joseph Sieyes, 흔히 아베 시에예스 Abbe Sieyes로 알려진) 같은 사람들이 자기 신분 회의에서는 탈락되고 제3신분 회의에서 제3신분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사실이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미라보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눈부신 활동을 펼쳐 혁명에 공로한 바가 크고,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 -ce que la tiers etat?)>를 써서 “제3신분이란 국민 전체이다”라는 명쾌한 말을 남겨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삼부회의 대의원 선출 과정에서 국민이 왕에게 올리는 진정서를 많이 작성하였는데,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농민의 의견이 거기에 충분히 반영될 수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그 진정서들을 조사해 보면, 신분마다 같지 않으나 공통되는 국민의 여망이 발견된다. 특권 신분은 권리의 평등과 기회의 균등 및 개인별 표결 방식 등을 반대하고 농민은 영주권의 지배와 길드를 반대하고 있다. 신분과 이해관계에 따라 국왕에게 호소하는 것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 내용에 공통되는 것을 뽑아보면, 왕권을 제한하는 헌법, 국민의 선거에 의한 입법부, 입법부에 의한 과세와 납세의 평등, 가톨릭교회의 전제 반대, 배심 재판제도, 언론과 사상의 자유 등이다.
이러한 목표를 품에 안고 삼부회 대의원 1, 214명이 1789년 5월초 프랑스 왕국의 방방곡곡 원근 각지에서 베르사유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사유는 물론이고 파리도 처음 보는 시골뜨기 유지들이었다. 특히 제3신분 대의원들이 그랬다. 그들은 우선 베르사유 궁정의 호사함에 놀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베르사유 궁정이 넓고 아름답고 호화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궁정은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호사와 장대함의 극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저 놀라는 데 그치고 마는 시골뜨기들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비판력이 있었던 것이다. 베르사유의 장대하고 호사한 궁정과 궁중 생활의 비용은 어디서 나왔던가? 바로 제3신분의 혈세가 아닌가! 국가재정 파탄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그들은 이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삼부회의 회의 장소를 파리로 하지 않고 베르사유로 한 것은 왕이 그토록 즐기던 사냥의 편의를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첫째 실책이었다. 삼부회가 아직 개회도 되기 전에 이미 왕에 대한 적의와 증오가 대의원들의 마음에 싹트고 있었다.
제3신분 대의원들의 마음을 한결 더 불쾌하게 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왕은 특권 신분 대의원들은 응접실에서 정중히 접견했으나 제3신분 대의원들은 왕의 침실에서 한 줄로 서서 접견하였다. 제3신분은 검은색 제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았느데, 이는 특권 신분이 차려 입은 찬란한 황금색과 초라한 대조를 이루었다. 드디어 개회식 날인 5월 5일이 되었다. 왕은 특권 신분 대의원은 양쪽으로 열리는 넓은 출입문으로 당당히 입장하게 하고 제3신분은 좁은 뒷문으로 입장시켰다. 제3신분 대의원 사이에서는, 이쯤되면 1614년의 경우처럼 꿇어 엎드려서 왕의 개회사를 들으라는 명령이라도 내려지지 않겠느냐 하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이렇게 시작된 개회식은 제3신분 대의원들을 한결 더 실망시켰다. 루이 16세는 개회사에서 지극히 감상적인 어조로 개혁 정신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무엇보다도 국고를 충실히 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어 등단한 법무 대신은 와으이 미덕과 행복만을 찬양하였고, 네케르는 장장 세 시간이나 숫자만을 나열하였다. 그는 재정 적자는 별것 아니고 약간의 개혁만으로 쉽게 메워질 수 있는 것처럼 보고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곳 베르사유까지 불러올린 것인가! 더구나 왕이나 대신 그 누구도 정치적 개혁이나 개인별 표결 방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제3신분 대의원들은 침묵으로 실망을 표시하였다.
이날 밤 지방별로 열린 제3신분의 집회에서는 모두 같은 결의를 하였다. 신분의 구별없이 대의원 전체가 합동으로 대의원 위임장을 심사할 것과, 공동 심사가 끝날 때까지 신분별 회의장을 마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결의는 곧 신분의 구별이 실재함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특권 신분은 각각 다로 모임을 가지고 제3신분의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 그 후 한 달 이상 특권 신분과 제3신분 사이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양자 간의 타협을 위한 노력이 여러 모로 진행되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6월 12일에 이르러 드디어 제3신분은 단독으로 대의원 위임장 심사에 들어갔다. 제3신분의 단호한 결의를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다. 제1신분 대의원인 사제 세 명이 제3신분 회의에 합류하자 그 후 수일 안에 16명의 사제가 뒤따랐다. 6월 17일 이들 19명의 제1신분 대의원을 포함한 제3신분 회의는 자기들이야말로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자임을 선언하여 490대 90으로 국민의회(Assemble Nationale)의 성립을 결의하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선언과 함께 국민의회는 자신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강제로 해산되는 경우에는 전체 국민이 납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국민의회가 가결한 결의에 대해서는 일체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제 제3신분 의회는 제3신분이라는 특정 계층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는 일반의지의 대표 기관이 되어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국민의회가 프랑스의 새 주권자가 되었으니 지금까지의 주권자인 왕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6월 17일 결의는 왕에 대한 협박일 뿐만 아니라 그 주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중대 사태에 직면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제1, 제2신분 회의의 향방이었는데, 19일 제1신분 회의가 149대 137로 국민의회에 합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왕에 대한 제2의 직격탄이었다. 왕은 성직자들의 합류를 막으려고 황급히 참의회를 열어 방책을 숙의했는데, 거기서 얻은 결정이란 고작 국민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장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구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구기관(球技館, jeu de paume)으로 옮겨, 프랑스의 성문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이 확고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을 것과 사정이 요구하는 장소라면 어디서든지 집회한다는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 흔히 ‘테니스코트의 서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20일의 이 서약은 그 후로 굳게 지켜진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왕의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더 강해진다. 앞서 19일에 국민의회에 합류하기로 결의한 제1신분 회의 대의원 149명이 22일부터 그 결의를 행동으로 옮겼다. 이 149명 안에는 다섯 명의 주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의회는 명실공히 국민의 대표기관의 모습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언가 강경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3일 왕은 세 신분 합동 회의에 직접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세 신분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니 각 신분 회의는 장소를 달리하여 각각 회의를 한다. 과세는 평등의 원칙을 따를 것이나 일체의 재산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재산이란, 10분의 1세, 현물지대, 화폐지대, 봉건적 의무, 토지에 대한 실제적 또는 명예상의 일체의 특권과 개인에 속한 봉토 등을 의미한다. 만일 대의원들이 짐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짐만을 ‘국민의 참 대표자’로 간주할 것이다.”
이것은 왕의 지시를 다르지 않으면 삼부회건 국민의회건 해산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끝으로 왕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짐의 특별한 승인 없이는 신들의 어떠한 의안도 결의도 법적 효력을 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라.....신들이여, 짐은 신들에게 내일 아침 각각 신분별로 할당된 의사당으로 가서 각자의 의사를 재개하도록 명한다.”
이렇게 협박과 명령을 남기고 왕은 퇴장했는데, 그의 말에는 정치적, 사회적, 재정적 개혁 중 어느 하나에 대한 약속도 없었다.
왕명을 따르는 귀족과 성직자 중 일부는 일어나 자리를 떴으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후 왕의 정리들이 나타나서 이들을 퇴장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미라보가 그들을 향하여 “가서 귀하들을 여기 보낸 자들에게 전하라. 우리는 국민의 의지에 따라 여기 있으니 총거멩 의하지 않고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은 왕의 정리들을 향한 항거라기보다는 국민의회 전체와 국민을 향한 미라보의 굳은 결의의 표명이었다. 이 한마디 말은 천금의 무게로 국민의회 의원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국민의회는 스스로 결의한 바를 굳게 지킨다는 것과, 국민의회 의원의 신체는 불가침이고 이 불가침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라도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이것은 사흘 전에 이루어졌던 테니스코트 서약의 재확인이며 황명에 대한 재항명인 동시에 다가오고 있는 생명의 위협에 대한 강력한 자기방어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흘전의 서약보다 더 대담한 것으로서 극히 주목할만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 결의는 사흘 전의 서약과는 달리 왕의 의사를 명확히 알고 난 뒤의 결의이고, 왕의 목소리를 막 듣고 난 그 자리에서 행한 결의였기 때문이다. 이는 더 굳고 더 새로운 항명이었다.
이튿날인 24일에는 성직자 신분 가운데서 새로 더 많은 의원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였고, 25일에는 왕의 사촌 오를레앙 공을 추종하는 귀족 신분 47명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였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왕도 국민의회에 양보하든가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든가 양자택일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6월27일 왕은 제1, 제2신분 모두 제3신분에 합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이 양보한 것이다. 그러나 왕의 갑작스런 양보는 사실 의회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지방의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키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전날 밤 왕은 비밀리에 2만 명의 군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의 일부가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군대가 국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왕과 왕국의 운명은 빤한 것이다. 더구나 군대 이동의 낌새를 알아차린 파리의 제3신분 선거위원 400명이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 국민의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한편 국민 자위대를 조직하고 나섰다. 오를레앙 공의 저택 팔레 루아 얄은 파리 반왕 운동의 중심으로서 약 4,000명이 그곳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제 곧 혁명의 중ㅇ심이 될 파리의 공기는 날로 분망해 갔다. 드디어 파리 선거 위원회가 수도로 집결하는 군대의 원대 송환을 국민의회에 청원하였다. 국민의회는 곧바로 청원을 의결하였다. 국민의회는 이제 거대한 혁명의 잠재력을 가진 파리 시민을 동맹군으로 맞게 되었다. 혁명의 잠재력이 폭발할 경우 왕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지, 왕뿐 아니라 왕을 지지하고 국민의회를 적대시하는 세력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지 점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리의 공기는 날로 험악해졌다. 국민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왕의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빵값은 매일같이 폭등하고 있었다. 파리의 빈민은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빵집을 습격할 기세였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파리 시민 65만 명 중 10만이 갖가지 형태의 빈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거지이거나 거지에 가까운 가난뱅이들이었다. 이 최하층 빈민이 아니라도 파리 시민은 대부분 극소수의 부자 말고는 곡가의 앙등을 견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파리 시민은 곡가 앙등의 원인이 불황이나 흉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부 부유층의 사재기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반사회적 인간들이야말로 왕을 지지하고 국민의회를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렇게 불온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7월 11일 재무 총감 네케르가 파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파리 증권거래소가 곧 문을 닫았다. 파리 군중이 여기저기서 떼를 지었고, 과격한 선동가들의 선동과 구호가 남발되었다. 이튿날과 그 다음날 군중은 앵발리드 병원의 무기고에서 약탈한 2만 8000자루의 총과 몇 문이 대포로 무장하였다. 파리의 행정과 질서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7월 14일 무장한 폭동 시민이 학정과 봉건제도의 상징이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다. 형무소 소장과 파리 시장이 시청 옆 광장에서 폭도에게 처형되었다. 그 후 3일간 폭동은 거리를 휩쓸었다. 최소한 100명이 처형되었다. 당시 파리의 광란상을 목격한 바뵈프(Francois Noel Babeuf, 일명 그라쿠스(Gracchus)바뵈프)가 고향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온갖 종류의 처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사열형, 수레로 찢어 죽이는 거열형,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목을 달아 죽이는 교수형, 갖가지 고문형, 도처에서 행해지는 이 사형은 지난날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지배자들은 우리를 개화시키지 않고 야만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그들 자신도 결국 야만이었으니까.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뿌린 씨를 거두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거둘 것이다.”
사흘 후 이 폭동은 성스런 혁명으로 승화되고 폭도는 영광스런 애국자, 즉 파트리오트(patriote)가 되었다. 15일에는 파리를 포위중이던 군대가 물러나고 16일에는 네케르가 재임명되고 17일에는 왕이 파리를 친히 방문하였다. 왕은 파리의 폭도가 임명한 새 시장 바이이(Jean Sylvain Bailly)와 국민 방위대(Gardes nationale) 사령관 라파예트(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tier Lafayette) 후작을 그대로 승인하고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휘장을 받아 모자에 꽂았다. 왕의 파리 방문과 일체의 행동은 혁명의 승인이며 재가였다. 왕은 스스로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혁명은 제1막을 내렸다. 혁명에 굴복한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그의 머리 위에는 프랑스 국민-그 대표기관인 국민의회- 이라는 새 주권자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
당시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는 본국 정부에 “이 순간부터 우리는 프랑스를 자유의 나라로, 그 왕을 완권이 제한된 왕으로, 그 귀족을 일반 국민의 수준으로 떨어진 귀족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파리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세계의 부르주아는 그 소식을 자기들 시대의 도래로 이해하여 기쁨과 희망으로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