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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돌아보며
김 영 홍
어린 시절부터 옛날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처녀시절에 댕기머리를 잘라 큰아버지와 부모님을 실망시킨 생각이 난다. 나는 결혼하고 신혼 생활이 너무 마음이 힘들고 아파 울음으로 살았다. 살아온 삶 숨어 울던 생각이 난다. 어머님과 이별할 때의 두려움과 아픔도 생각난다. 시골에서 혼자 살며 힘들어 울고 무서워 울었던 옛날 생각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한 장면씩 떠오른다.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며 여기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돌아보며 한자 한자 글로 쓰려니 지금도 그때처럼 눈물이 소리없이 내 두 볼로 흐른다. 오래 지난 나의 삶의 흔적들이다.
1. 댕기 머리
열아홉살 내 머리 결은 친구들의 부러움이었다. 말총머리 결에 숱도 많으니 친구들은 네 머리 반만 달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머리카락도 제법 돈이 되었다. 머리 숱쳐서 어머니 나일론 치마저고리도 해드렸다.
옛날에는 가발을 사람 머리카락으로 하였기에 빗질 하여 나오는 머리카락도 모아 팔기도하였다. 내 머리는 너무 길어서 추단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 도움으로 머리를 감는다. 머리 감기는 어머니한데 엄마! 내 머리 반만 잘라주세요? 사정을 하였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고 큰일 날 소리를 한다 하시며 너의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 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너의 큰아버지한데 어떤 불호령을 받으려고 그러니 하신다. 큰 아버지의 사랑이 유난하였지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마음대로 해본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어른들의 틀 속에서 갇혀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버지는 딸도. 조카딸들도 많은데 유난스럽게 나한데 집착을 하시는지 철부지 내 마음에는 나를 사랑이라기보다 억압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큰 아버지는 동네에서 무서운 호랑이라는 호칭으로 큰 아버지를 보면 도망가기가 바쁘다. 그런데도 나는 큰 아버지 품으로 다가갔다. 동네 호랑이라 해도 오빠와 나는 큰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가 큰 아버지를 많이 의지하였나 보다. 큰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오시면 큰 엄마 사촌언니 오빠들은 대문으로, 담 너머로 모두 도망치기가 바빴다. 큰 아버지는 술에 취하시면 주정이 심하시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신다. 큰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신다. 나를 보고 네가 가야 큰 아버지 주무시지 얼른 내려가 보라고 하셨다.
나는 큰댁으로 내려가 큰 아버지! 하고 부르면 “왜?” 하신다. “큰 소리 치지마세요?” 하며 물수건으로 큰 아버지 얼굴과 손을 닦아 드리고 잠자리도 깔아주고 베개를 내주면 큰 아버지는 내손을 꼭 잡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신통한 것 하시며 누우신 후 취중으로 오늘의 말씀을 하시며 잠에 든다.
큰 아버지가 잠에 들면 나는 집으로와 “큰 엄마! 큰 아버지 주무세요.” 한다. 큰 어머니는 고생했다고 하시며 그제야 큰댁으로 내려가신다. 큰 아버지 술주정에는 항상 온 식구들은 도망을 가고 그때마다 오빠와 내가 가야 큰 아버지가 조용해지고 잠을 주무셨다.
큰 아버지는 나를 유달리 사랑하시고 내 댕기 머리를 참 좋아 하셨다. 담배 조리를 할 때도 큰 아버지는 나를 항상 옆에 있게 하셨다. 아버지는 속상해 하시며 형님께 불만이 많으시다. 그 독한 냄새나는 건조실에 애를 데려간다며 큰 아버지한데 싫은 소리를 하셔도 큰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안하신다.
딸보다 더 귀여워하시며 너 시집 갈 때는 내가 장롱 해준다 하시며 내가 은비녀 해줄게 머리 자르지 말고 쪽찌라고 하시며 신신 당부를 하셨다. 모두 부러워하는 댕기머리는 내가 제일 싫은 긴 머리였다. 지인들은 예쁘다 예쁘다하는데 나는 추단하기가 힘들어 싫었다.
머리보고 반하였다는 오빠친구인 나의 남편은 총각 때 우리 집에 오면 나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람이 진중하고 처자식은 충분히 보호 할 사람이라며 호감을 갖고 나한데 오빠친구가 오면 인사는 해야지 어째서 바라도 보지 않으니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니 하시고 아버지는 자주 놀러 오라고 하신다.
부대가면 편지도 자주하라고 하며 친절히 대해 주셨다. 나는 그러시는 아버지도 싫었다. 한날은 부대에서 편지가 왔다. 내 사진 좀 보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건네주시며 너한테 온 편지다. 보고 답장을 해주라고 하셨다.
나는 두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밀쳤다. 아버지는 편지를 들고 아래채 서재로 들어가신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오빠친구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버지는 편지내용을 나한데 전해 주신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해 봄에 편지 속에는 예쁜 진달래꽃을 정성 들여 담아 보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며 내 머리 옆에 가만히 두고 나가신다. 아버지의 정성과 그 사람의 집념이 대단하였다. 삼년 내내 변함이 없다. 삼년 되던 해 제대하는 날 오빠와 우리 집으로 먼저 왔다. 나는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내가 어디가 좋으세요?” 그 사람 대답은 가정이 화목해서 좋으며 모든 면이 밝아서 좋아요 라고 한다. 나의 어느 면이 제일 좋은가 또 물어보았다. 그 사람도 큰 아버지처럼 내 성품과 머리란다. 댕기머리 보면 너무 예뻐요? 댕기머리에 반했다고 했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가위를 들고 사촌 언니 집으로 가 언니 손에 가위를 들려주며 머리를 잘라 달라 고하였다.
사촌 언니는 깜짝 놀란다. 언니가 안 잘라주면 내가 잡고 자른다며 부탁을 하였다. 언니는 걱정을 하며 내가 안 자른 거다. 네가 자른 거야 큰 아버지한테, 네가 잘랐다고 해야 한다. 하고 당부를 하고 아깝다며 머리를 잘라주었다. 나는 그 사람 핑계로 방망이처럼 매달리는 무거운 머리를 잘랐다. 자른 머리를, 댕기가 달린 머리꼬랑지를 들고 집으로 왔다. 오빠 친구에게 댕기머리보고 반했다하니 이 머리가지고 가시라며 머리 꼬랑지를 내밀었다.
오빠친구는 깜짝 놀라며 아침밥도 안 먹고 자기 집으로가 버렸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큰 아버지와 그 사람에게는 반항심처럼 보였고 나는 머리 때문에 힘들어서 자르려고 큰 결심을 하였다. 댕기머리 때문에 우리 집에는 무서운 태풍이 불어왔다. 큰 아버지의 노여움으로 호령하시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산자락이 쩌렁 쩌렁 온 동네로 울려 퍼지고 큰 아버지의 손은 벌벌 떨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시며 애꿎은 아버지한데 야단치신다.
아버지도 놀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바라만 보신다. 어른들의 노여움으로 온 집안에는 먹구름으로 침묵이 흐른다. 큰 아버지가 가장 예뻐하시며 기밀답다 하시며 하루에도 몇 번씩 쓰다듬어 주시는 큰아버지께 실망을 준 것이 제일 죄송하였고 부모님에게는 미안하였지만 나는 얼마나 홀가분한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졌다.
2. 시어머님의 암 수술
오래전 이야기다. 결혼 한지 육년 되는 해이다. 어머님은 속이 아프다 하시며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시어 소화제로 노루모산이란 약을 잡수시며 어머님과 남편은 식사만 하고 나면 때마다 노루모산 약을 복용하시었다.
시집 와보니 다락에는 약 깡통이 가득하였다. 병원은 가볼 생각도 안 하시고 약만 먹고 계셨다. 대수롭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약만 먹다 보니 더 아파서 그해 봄에 청주 남궁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였다. 위암 초기 같다고 하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큰 걱정이 되었다. 집안 형편도 어렵고 작은 시누이와 시동생은 아직 공부를 해야 하고 남편 혼자 벌이로는 살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도 수술을 해야 하기에 빚이라도 내서 수술을 하자고 날짜를 받아 수술하기로 예약을 하였다. 그때 나는 둘째 아기를 임신 중이고 큰 시누이도 좋지 않은 괴로운 일로 신경을 많이 쓸 때라 온 집안이 엉망이었다.
집안 우환으로 온 가족은 근심이 많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몸 아픈 어머님은 몸이 아프시니 억지소리도 하시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임신으로 내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다. 칼슘부족과 스트레스까지 동반하여 견디기 너무 힘들어 멀쩡하던 이가 솟아올라 밥도 못 먹고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임신한 몸으로 무허가 치과로 가서 하루에 이를 세 개씩 뽑고 퉁퉁 부은 몸으로 먹지도 못한다. 임신한 사람이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었다.
어머님의 수술 날이라 시골에서 청주병원으로 나와 어머님은 수술실로 들어가시고 큰아들도 어머님이 제일 의지해오며 살림을 다 맡기는 큰 시누이도 나가라고 하시며 큰 며느리를 부른다고 하신다기에 얼굴은 퉁퉁 부은 얼굴로 어머님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때 어머님은 내 두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애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거듭 세 번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한테 너무 모질게 하여 벌을 받나 보다, 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는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꼭꼭 싸서 간직한 돈을 건네주시며 당부를 하신다. 이 돈은 몇 푼 안 되지만 꼭 필요할 때 보태 쓰라며 몇 천원도 안 되는 돈이라고 하시고, 또 다른 종이에 싼 것은 이것은 머리카락이야 하시며 작은딸이 제비추리가 있는데 안 좋다 하니 예방으로 스님이 탁발 오거든 시주 줄 때 섞어서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은 큰아들 이야기이다. “그놈이 마음은 착한데 말투가 무뚝뚝해서 내뱉는 말이 천둥 치는 소리를 하여도 네가 참고 살아라” 하시며 신신당부를 하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이 내가 잘못했다는 그 말씀에 내 가슴에 응어리와 상처가 치유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하며 어머님은 수술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밖으로 나와 복받침을 참지 못해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과 큰 시누이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또 뭐라고 하였기에 이러느냐고 달래주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작은 시누이 머리카락은 스님이 탁발하러 왔을 때 쌀 시주를 주면서 어머님이 이러이러하라는데요? 하며 차마 쌀에 머리카락은 못 섞어 들이구요. 하며 스님이 뒤돌아서면 머리를 태우려고요 하였다. 스님은 참 좋은 생각이라며 그러시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시어머님께 거짓말을 하였다. 어머님이 “쌀에 섞어주었니?” 하실 때 얼굴이 달아오르며 “예” 라고 거짓 대답을 하였다. 시어머니께는 죄송하였으나 나는 차마 쌀에 섞지를 못하였다. 어머님도 제 마음을 아셨겠지요. 나는 둘째 아기 나려고 친정집에 갔다. 아기 낳으려 할 때 기형아는 아닐까 걱정이 된다. 임신 중에 진통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진통을 겪으며 아기 낳고 아기의 손과 발부터 살펴보고 울음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숨을 쉬며 작고 미숙했지만, 정상으로 태어나서 감사하였다. 아기 낳은 지 삼일 만에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아기 낳은 삼일 되는 날 산모의 몸으로 이십 리를 걸어와 어머님 초상을 치러야 하였기에 몸조리도 못 하고 그때부터 나는 가정의 안주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때부터 나의 삶이란 몸과 마음의 아픔이란 말로도 하기 싫고 글로도 쓰기가 싫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농사지어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며 객지로 나가고, 작은 시누이 고등학교 졸업과 시동생은 중학교 다니고, 큰 시누이와 둘이 아들딸 되라고 농사짓고 누에 쳐가며 사는 삶이 되었다.
우리 시어머님 돌아가시고, 농사도, 누에 농사도 최고로 잘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며 아이들도 잘 크며 공부도 잘하여 집안이 편하였다. 이듬해 큰 시누도 결혼시키고 나니 혼자 농사하랴 누에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지만 나는 시어머님과의 약속대로 최선을 다했다. 작은시누이도 결혼시키고 시동생까지 결혼시키고 살다보니 내 자식 대학에, 결혼에, 눈코 뜰새 없이 열심히 살아온 보람은 어머니의 자식 사남매도 결혼하여 잘 살고, 어린 내 자식들 키우며 사는 나의 시골 삶의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3. 도둑 쫓던 밤
삼십 대 새댁 시절의 삶은 큰아들 8살 큰딸 4살 때였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객지로 돈 벌러 가시고 어린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이다. 가을걷이 다 하고 초겨울이었다. 그날따라 첫눈으로 눈보라 몰아치는 바람결은 문풍지를 흔들고 문풍지 우는 소리에 스산한 겨울밤이었다.
세찬 바람소리에 객지로 간 남편 생각에 잠도 오질 않는다. 언 발 굴려가며 고생하는 남편은 밥은 제때 먹는지 잠은 따스한 방에서 자는지 오만 걱정이 다 된다. 참새들도 밤이 되니 자기 집 찾아 지붕 처마 속으로 들어가는데 처자식 두고 간 남편인들 단잠을 잘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온다.
어린 남매는 곤한 잠자리에 들어 새근새근 잘 잔다. 재잘거리던 참새들도 단잠을 자건만 저 바람은 왜 아니 자고, 문풍지 우는소리에 잠 못 드는 이 마음을 하늘이나 알까. 남편이 집에 있다면 나도 단잠을 자겠지! 우리 마을에는 집집마다 울도 담도 없는 마을이었다. 자자 일촌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오늘은 첫눈이 내리느라 스산한 바람 소리가 문고리마저 덜컹거리며 흔들어댄다. 그런데 쿵 하는 그 소리와 문고리 잡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그러는가 가만히 문틈 사이로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지만 문고리에 수저 하나 걸어 놓았다.
누구네 집이든 일상처럼 문 잠금은 수저가 고작이다. 나는 그때 헛기침을 하며 곤하게 잠든 큰아들을 흔들고 꼬집었다. 아이가 울자 큰소리로 왜 안 자 아빠 깨라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혼잣말로 주고받는다. 그때 뒷문에서 서성이던 도둑은 앞문 쪽으로 돌아와 대청마루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동시에 두 아이를 꼬집어 울리고 불을 켜며 소리쳤다. 그때 대청마루에서 후다닥 뛰며 나간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안도하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날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아서야 나가보았다. 도둑놈의 발자국이라 하더니 대청마루에는 커다란 발자국으로 집을 앞뒤로 돌은 자국이 남아있다. 얼마나 섬뜩한지 옆집 형님한테 간밤에 도둑이 왔다고 말을 하였다. 형님이 하시는 말이 그 집에 무얼 훔치러 왔겠니? 사람 도둑이지 하신다. 나는 놀라며 “형님! 사람 도둑이 뭐예요?” 라고 물었다. 형님 말씀은 예쁘고 젊은게 혼자 있는 걸 알고 온 게지 하시는데. 어이가 없고 서러움에 복받치는 눈물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형님은 나를 위로는 못 해줄망정 젊은 것이 혼자 사는 것이 무슨 죄인가 그때부터 남편 신발을 뜨락에 나란히 놓고 집 앞뒤로 밖에다 전구를 달고 방 안에서 스위치를 누를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그다음부터는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나도 불을 켜고 방안에는 자물통으로 단단히 잠그고 살았다. 그때에 그 도둑놈 때문에 우리 큰아들은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가장처럼 문단속도 하고 엄마 도둑놈 오면 나를 깨우면 내가 몽둥이로 때려준다며 엄마를 안심시키며 살던 생각이 난다.
큰아들은 그때부터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어른처럼 살아온 삶을 내 책 속에 아들이 실어 놓은 글 속에 사연을 보니 가슴이 메어온다. 사남매가 한편씩 실은 글을 보며 큰아들이 도둑 때문에 겪은 이야기를 쓴 글을 보고 마음이 찡해왔다. “엄마 왜 도둑놈 이 벽돌을 우리 집에다 던지고 그랬을까? 나쁜 놈이지!” 어릴 때 한 말이 생생히 떠오른다며 “엄마! 도둑놈 때문에 옆집 아줌마를 불러와 함께 자는 거야” 했다.
남편이 객지 생활하며 살다 보니 억울한 소리며 마음 아픈 소리도 들으며 살았다. 청주로 이사 나와 살 때였다. 저 여자는 첩이라며 이웃에서 수군수군 했다며 이웃 사람들은 나를 첩으로 알았을 때 큰애하고 막내아들하고 나이 차이가 12년 차이라 위로 남매는 전처의 자식이고 어린 남매는 저 여자가 낳았다 라고도 하고 이따금 남편이 오면 달리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수모도 감내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은 젊은 청춘을 서러운 아픔을 견디며, 오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서럽게 살아온 삶은 옛이야기로 흘러갔고 어느새 우리의 인생은 지려는 석양처럼 저물어 간다. 지난 세월 잠깐의 짧은 삶인 것을, 그리도 외롭고 힘들고 고단한 삶으로 여기까지 잘도 견디며 살아왔다. 지금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자식들도 내 옆을 잘 지켜주니 편하고 든든하게 오늘을 살고 있다.
4. 어머니 노자 돈
어머니 사랑은 하늘같다고 바다보다 넓다는 노랫말도 있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끝도 없더란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가 되어 보아도 어머니의 심증을 백분의 일이나 알까. 내 자식 아파하면 내 간잎이 녹아드는데. 우리 어머니도 그런 마음으로 기른 자식이건만 어머니도 나처럼 이런 마음으로 키웠으련만 어찌하여 부모보다 자식이 소중하고 애착이 가는 걸까. 그것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쉽게 하는 소리였다. 옛날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치사랑은 없단 말씀을 하시어도 그 말의 뜻도 모르고 어머니한테 따스한 말 한마디 못해준 아쉬움만이 내 가슴을 울린다.
어머니 가시고 나니 어머니가 소중해지고 보고 싶은데 이미 때는 늦으리라 이미 가신 어머니를 부른들 대답을 하랴 내가 서러워 울은 들 달래 줄 어머니는 하늘로 가시고 없는데 봄이 되니 새싹이 돋아 오르듯 어머니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봄이면 미나리 사들고 오셔서 부침개를 해달라며 네가 해준 부침개가 제일 맛나다며 막걸리 한잔하시며 하신 말씀이 내 귀전에 맴돌고 어머니가 요즈음 너무 보고 싶다.
그때 하신 어머니의 말씀은 유언이셨다. 마지막으로 입고 가실 수의 옷 이야기는 벼는 싫다 인견 아니면 한지로 해 달라고 하시고 노잣돈 이야기를 하시며 속바지에 주머니를 양쪽에 달아서 한쪽에 십만 원씩 넣어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은 한쪽 돈 십 만원은 아버지 만나 준다고 하시며 그때는 돈이 없어 아버지 가실 때 노잣돈을 못 넣어준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였다. 꼭 해달라며 당부를 하신 어머니 말씀은 유언이셨다.
나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어머니가 원하시는 데로 수의를 맞추며, 속바지에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바느질하시는 그분은 껄껄 웃으시고 수의에는 주머니를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어머니 유언이시니 주머니를 꼭 달아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며 도포는 어머니 회갑 때 내가 명주로 해준 것으로 하고 속바지에 주머니는 꼭 달아 달라며 다시 한 번 더 부탁을 하였다. 아주머니 말씀은 달아주는 것은 어렵지가 않으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는 건대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진짜로 돈을 넣어주려고요. 한다. “네 우리 어머니 유언인데요. 해드려야지요!” 아주머니의 말씀이 “아아 그러면 육거리에 불교용품 파는 가게 가면 가짜 돈이 있데요.” 저승 갈대 주는 돈이라 한다. “그런 돈이 따로 있나요?” 하며 물어보았다.
나는 남편한테 가짜 돈도 될까요. 하고 상의를 하였다. 남편은 안 주면 말지 어찌 가짜 돈을 주나 한다. 어머니의 말씀이 염할 때는 큰딸이 지켜야 한다. 하시며 염하는 사람이 그 돈 못 빼가게 꼭 지키라는 당부까지 하신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꼭 지켜볼게요. 하였다.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셨다. 우리 어머니는 구십 사세에 돌아가셨다. 자손들 다 보고 증손주 물까지 받아 드시고, 마지막 밤은 딸 셋이 지켜주고 삼일 만에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 손 꼭 잡고 마지막 임종을 하신 어머니시다. 나는 어머니 유언을 온 가족들에게 알렸다. 온 가족에게 노자를 달라고 하여 손주, 손녀까지 만 원씩 받아 어머니 주머니를 채워 드렸다.
어머니가 당부했던 말씀이 생각나 염하는 아저씨한테 물어보았다. 아저씨 우리 어머니 노잣돈은 어떻게 하셨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여기에 빼놓았는데요.” 나는 깜짝 놀라며 “아저씨, 우리 어머니 유언이라 온 가족들이 모은 노자예요. 아저씨 돈은 어머니 주머니에 넣어주세요.” 부탁을 하면서 “아저씨 목욕비는 제가 잘 챙겨서 드릴게요.” 하였다.
아저씨는 다시 매듭을 풀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노잣돈을 넣어 주시며 “할머니는 참 부자시네요. 자식들도 효자시고 자손들이 한 사람도 앞서간 사람도 없고 참 복도 많은 할머니 잘 사신 할머니시네요” 한다. 우리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지만 고우신 마음 때문에 늦 팔자는 좋으신 분이시다. 어머님이 당부한 대로 노잣돈을 넣어드렸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노잣돈을 들려는데 부족하시지는 않으신가요. 아버지를 만나 노잣돈은 전해주셨는지요? 아버지가 어머니 잘 살고 왔다고 칭찬은 하시던가요. 사랑하는 어머니, 천국으로 가시는 그 길도 꽃길 되어 편안히 행복하시길 발원합니다.
5. 제주 약천사
제주하면 참 좋은 고장, 누구나 한번은 가고 싶다 생각하는 제주이다. 옛날에는 신혼여행지로 손꼽히는 제주였다. 지금은 신혼여행을 해외여행으로 많이 가지만 옛날 그때는 지금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주라면 최고 좋은 여행지로 생각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포동 약천사 혜주 혜인스님의 큰 불사로 창건하시어 지금에 훌륭한 약천사에 큰 법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계종 극락 도량 약천사를 불기 2542년 11월 20일 내 나이 53세 때 혜인 스님을 친견하였다. 스님 법문을 경청하고 나의 어둡고 얼룩진 마음은 다소 편한 마음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스님 법문은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스님의 말씀 지나간 삶이 아픔이었다면 과거일 뿐인데! 왜 잡고 매달려 본인의 마음에 묻어 놓고 사는가! 하시며 전생의 업이 있다 해도 그만치 겪음으로 업장이 소멸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새봄으로 새잎으로 꽃으로 피워야 하지요?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힘이 들어 지치고 아파 울 때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내 삶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는 죽고 싶고 자주 죽음의 늪으로만 빠져갈 때 부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 보라고 하시는 스님 법문과 아이들을 보라고 하시며 가슴에 와 닿는 법문을 하시고 나를 부처님 앞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 후로 열심히 부처님한테 매달리며 살고 나쁜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식과 부처님을 의지하며 살기 시작하고 불교 대학도 수료하고, 모든 봉사도 하고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점점 내 생활은 밝은 삶으로 살기 시작하였다.
스님 법문에 마음을 여는 그 순간 외소 하신 몸에서 법문의 음성 소리는 산자락이 울려 메아리로 가슴에 와 닿는, 그 강인하신 큰 스님도 모친의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았다. 부모와 자식이란 천륜임은 어쩔 수 없는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의 삶이란 영암 스님의 짚시 인생이란 노래가사 말처럼 모든 인연 묻어버리고 그 한 몸 구름에 싣고 파란 하늘 지붕 삼아 구름에 달려가듯이 이곳저곳 헤매어 제주까지 오셨나 보다. 약천사 큰 불사하실 때 얼마나 힘이 들어 쓸까? 지친 몸을 끌어안고 살아오신 스님의 삶의 흔적이 여기 제주 약천사에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 약천사는 세계적 관광지로 유명하여 중국 관광객 손님은 기본 코스로 약천사는 꼭 들린다고 한다. 약천사 앞바다에 비릿한 바다 냄새에 봄 향기 가득하고,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제주 서귀포 약천사가 나를 부른다.
산수유 꽃 만발한 봄날 남편의 생일여행 차 약천사에서 기도 올리고 싶어 나는 약천사 스님께 전화를 하며 숙소를 부탁하였다. 남편 생일 기도를 약천사에서 올려달라고 큰스님께 부탁하였다.
오래전 인연으로 혜인스님 어머님 사십구재에 우리 절 용화 합창 단원들이 제주까지 가서 동참을 하였다. 그 세월이 벌써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오래전 추억처럼 아련해진다. 요 몇 년 전에 남편과 단둘이 생일 기도를 제주 약천사에서 올린 생각을 하며 요즈음에 운동도, 글공부도 방학을 하였는데 제주 약천사나 갈까 싶은데. 왠지 가면 오히려 허전하고 울적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혜인 큰스님도 돌아가시고 친절하신 공양주도 집으로 가고 왠지 낯설고 허전할 것 같아 망설여진다. 어디론가 훌쩍 가고 싶은데 이렇다하게 마음 가는 곳을 못 찾아 마음만 심란하다. 혜인 큰 스님이 단양 광덕서 불사할 때만 가 보았는데 광덕사를 가볼까. 하다가도 큰스님이 머무르던 그곳에 어느 스님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무엇 때문일까. 결정을 못 하는 나는 자신감도 용기도 없다. 나이 탓이련가 전에는 내 집처럼 언제고 가고 싶으면 전화 한 통화로 가곤 하여는데. 지금은 부모가 없는 친정집처럼 갈까 말까 망설여진다.
약천사, 절로 가는 길가의 귤나무에는 귤이 많이 달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법당이며 구석구석 이곳저곳 한 바퀴 돌며 산책하던 길로 내려오던 길에 큰 스님과 차 마시며 하시던 스님 말씀도 생각난다. 이제는 모두 지난 추억일 뿐이다.
포항 농산 스님 큰 행사로 포항까지 우리 부부는 새벽길을 달려 서예전 이웃 행사할 때 스님들 아침 공양을 해야 했기에 우리는 새벽 4시에 청주에서 대구 시민회관으로 달려가던 추억도 생각난다. 혜인 큰스님 말씀이 추억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도 지난 추억을 생각하네요. 제주 약천사 앞바다의 시원한 바다의 내음이 나를 오라고 유혹을 하는데 망설여진다. 남편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 말을 하라고 했다. 어디고 모신다며 농담처럼 말한다. 제주 약천사 혜인스님이 하신 법문이 생각난다. 그리고 농산 스님의 대작 글을 선물로 받아 우리 거실과 안방에는 스님 글이 걸려있다.
그 스님은 글을 써서 서울. 대구. 포항에서. 글 전시회를 하시어 불우이웃 청소년들 선금으로 돌보실 때 우리 부부도 동참하면서 참 훌륭하신 분이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욕심 없는 삶, 오로지 봉사하시는 스님의 참뜻을 알면서 우리는 스님을 존경하며 자주 찾아가던 작은 암자 포항 문수암 농산 스님은 언제부터인지 소식도 없이 홀연히 떠나셨다. 포항 효성사에도 안 계시고 외국에 봉사 가시었단 말도 있고 이곳저곳 연락을 해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삶이 스님의 삶인가 보다.
6. 혼자 우는 밤
그리도 당당했던 내 기세는 어디로 누가 가져가고 혼자 우는가! 지금 내 마음은 물가에 힘없는 갈대처럼 흔들거린다. 옛날에는 두려움도 모르고 허허벌판 태풍의 세찬 바람 속에서도 당당하게 생활하며 살았던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나약해졌을까. 나이 탓인가 옆에서 나를 지켜준다는 의지의 힘이였나보다. 요즈음에 남편이 병원으로 가고 나서 시작되는 나약한 마음의 물결은 태풍처럼 가슴으로 스며온다.
출렁대며 밀려오는 마음의 물결은 한없이 울렁거린다. 캄캄한 밤 현관문으로 들어 설 때 무서움보다 허전함이 밀려온다. 공연히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며 이것저것 뒤적여도 본다. 허전함을 달래보려는 심정이나 마음의 물결은 파도처럼 밀려들며 용솟음친다.
책을 보려 해도 글을 써보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가 않아 공연한 공상만 떨다 밤잠도 설친다. 오늘은 남편 병원에서 해가지고 혼자 집으로 가려니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가기가 싫었다. 심리적 불안은 점점 심해진다.
어린 아이처럼 텅 빈집으로 오는 길이 싫었다. 동갑내기 친구생각이 난다.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하며 자리에 누어도 잠은 오지 않으며 옛날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섭고 두려웠다. 혼자서 마음을 다잡아본다. 좋은 생각을 하자 쓸모없는 옛날 생각은 버려야지 하는데 지나간 아픔의 추억만 새록새록 떠오르고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음의 물결을 막지 못하고 펑펑 울고 있다. 예쁜 이름도 지여주지 못한 아쉬움은 하늘로 보낸 딸아기 생각은 큰 파도 타고 내 가슴속을 파고든다.
잊어야지 하니 어제 일처럼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시골에서 어린아이 둘과 누에 칠 때였다. 집너머 밭에 뽕따러가서 뽕잎을 한가마니 따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려 는데 말 풀이 소복하게 보여 토끼주려고 앉자 한 움큼 잡고 끊으려는 순간에 손위로 뱀이 쭉 으윽 올라와 얼마나 놀라는지 나도 모르게 외마디 큰소리로 고함을 쳤는지 아래 논에서 모심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애기엄마! 괜찮아요? 하며 임신 중인데. 놀라서 어떡하나. 아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얼른 집에가 약 먹고 쉬라고했다.
나는 집에 와 아이들 밥을 챙겨 주려는데 배가 아프며 배속에서 아기가 똘똘 뭉치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보고 밥먹으라하고 자리에 누워 쉬고 나니 몇 시간 지나고 배속에 아기가 꿈틀거리며 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나는 약 먹을 생각도 못하고 일을 했다. 집에는 어른도 남편도 없이 혼자서 아이들 데리고 농사며 누에치느라 바쁘게 사느라 아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일만하였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밥도 잘 먹고 농사도 잘하며 누에도 잘 처서 가을걷이를 다하고 아기 낳을 때가 되어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셋째아이라 쉽게 날줄 알았는데 아기가 힘을 드리고 진통을 오래하니 어머니가 날계란을 깨서 먹으라고 하셨다. 그러면 아기가 빨리나온다고 하신다. 너는 아기를 빨리 잘 낳는데 어찌 이리 힘들게 하니 하시며 걱정을 하셨다. 온종일 진통 끝에 딸아이를 낳다.
아기가 엄마배속에서 나오면 응애 하며 우는데 아기를 씻기고 나도 아기가 안 울었다. 나는 미역국 먹고나 아기를 젖 먹이려고 무릎위에 않고 보니 눈망울을 초롱초롱 예쁘게 뜨고 빙그레 배안의 웃음을 짓는다.
나는 젓을 빨리려고 젓꼭지를 입속으로 넣어주어도 아기가 젖을 빨지를 않는다. 나는 “엄마! 아기가 젓을 안 빨아요?” 하였다. 어머니는 아직 좀 더 있다가 먹여보라고 하신다. 저도 세상 밖에 나오느라 힘이 들었나보다. 하시며 힘든데 어서 누우라고 하신다.
나는 한잠을 자고 나도 아기는 울지도 아니하고 꼼틀꼼틀 놀기만 한다. 나는 아기를 안고 젖을 물려도 아기가 젖을 안 빨고 혀만 놀리고 젖을 못 빤다. 나는 잠깐 아기를 엎어 놓아 봐도 아기는 울지를 않았다.
나는 “엄마! 아기가, 이상해요?” 하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아기가 순해서 안 운다고 생각을 했단다. 나는 젓을 짜서 입속으로 넣어 주니 아기가 젖 삼키는데 힘들어했다. 저녁나절에 남편이 아기를 보러 왔다. 아기는 울지도 안하고 아빠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남편은 참 예쁘다며 들여다보았다.
아빠는 하루 밤 자고 현장으로 가시고 나는 아기를 데리고 청주 이소아과 병원으로 왔다.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기가 목 젓이 안 생겼네요. 한다. 나는 깜짝 놀라며 그럼 어떡해요? 하고 물어보았다. 집에 가서 젖을 짜서 수저로 먹여 보세요. 한다. 아기가 배속에서 놀라는가 봐요? 하며 내가 해줄게 없으니 오시지마세요. 했다.
나는 너무 놀라 밥도 못 먹고 걱정하니 어머니가 큰일이네 걱정을 하시며 산모가 더 걱정이 된다며 밥을 먹어야지 애들 보라며 아이 둘을 내 앞으로 보내시며 눈물을 붉히신다.
다음날은 아래 마을 방앗간 짚차를 빌려 그 차로 증평 수녀 병원으로 갔다. 수녀병원에서는 약과 분유를 주면서 먹여보고 내일 또 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희망을 걸고 엄마와 나는 매일 수녀병원으로 다녀보는데 하루는 수녀님이 아기가 오래 못살아요? 한다. 그러니! 자기가 미국으로 보내본다며 아기를 달라고 한다. 나는 아기를 줄 수가 없었다.
눈은 무릎까지 쌓여 차가 갈수 없다하여 아기를 솜포대기에 싸서 안고 이십 리 길을 걸어서 한 달을 병원을 다녀도 아기는 차도가 없고 점점 세약해진다. 하루는 젓을 짜서 입속에 넣어 주니 삼키지 못하고 입가로 흐르며 엄마 눈만 바라본다. 그렇게 아가는 한 달 만에 엄마품을 떠난다.
가슴이 무너진다. 우리아가 이름도 못 지여주고 아빠도 없는데 나 혼자 어쩌라고 가는 것이니 하며 하늘나라로 가는 아가를 보는 어미의 심정은 무너진다. 집에는 어른도 남편도 없는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우는 통곡 소리에 아랫집 아저씨 두 분이 오시어서 아기를 기저귀에 둘둘 말아나가며 제수씨는 나오지 마세요. 했다. 너무나 큰 아픔의 이별이었다.
아기 낳으며 몸도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갔다. 마음으로는 나도 하늘나라로 따라 가고 싶다. 그런데 이 두 아이 손을 잡고 보니 죽을 수도 없었다. 이런 괴로움으로 살아온 나의 삶을 하늘은 아시려는지…….
7. 나의 인생 열매
나의 열매들이다. 사남매를 보며 고된 나의 삶의 흔적의 열매를 하나씩 적어본다. 지금처럼 넉넉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그때 시절로 최선을 다하며 키운 열매들이다. 내가지마다 꽃이 피어 열매로 한 알 한 알 익어간다.
가지에서 가지가 자라며 예뿐 꽃도 피우고 알알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 사남매의 가족들의 꽃과 열매도 잘 익어 가리라 생각한다. 너희들의 새 가지마다 사랑 거름으로 복을 주며 예뿐 꽃피우고 알찬 씨앗이 되길 바란다.
큰아들
우리 부부의 인연으로 첫째 큰아들이 탄생하여 참 행복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나 어머님 앞에서 내색조차 못하고 마음대로 안아보지 못하였다. 우리의 예쁜 꽃, 보고 또 바라보아도 눈을 떼지 못하는데 이런 큰아들은 엄마 품보다 할머니 품에서 자라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 아들 백일 날, 동네 떡 잔치하며 행복했던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아들 나이는 오십이란다. 큰아들 군인 보내고 참 많이도 울었는데, 벌써 큰 손주가 군대를 갔다. 남편의 객지 생활로 큰 아들을 의지하며 살아온 오십 년 속의 삶은 좋고 기쁜 날도, 아파서 울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효심이 지극한 큰며느리, 큰 아들 항상 고맙고 사랑한다. 큰 아들 가정에 항상 밝은 빛으로 행복함을 비추어 주시길 기도한다.
큰딸
아픈 손가락인 큰딸아이를 가졌을 때는 기쁘다고 내색조차 못하였다. 집안의 우환으로 임신이란 말도 못 하고 지냈다. 시어머님의 위암으로 수술 날을 받으며 내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다. 칼슘 부족과 스트레스까지 동반하여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멀쩡하던 이빨이 다 솟아올라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무허가 치과로 가서 하루에 이를 세 개나 뽑고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으니 배속에 아가는 얼마나 고통을 겪었으랴! 큰딸한테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였다. 나의 걱정은 기형아로 태어나면 어쩌나 노심초사로 혼자 고민하였다. 작고 미숙했지만 정상으로 태어나서 감사하였다. 너와 나의 복이려니 하며 살자 하면서도 항상 아픈 손가락이다. 큰딸은 착한 마음으로 나라 밥 먹고 잘 살며 예쁜 딸, 아들 낳고 예쁘게 잘 사는 모습에 감사하고 고맙다. 큰 딸네 온 가족의 행복과 사랑으로 밝은 태양처럼 비추길 바라며 기도한다.
작은딸
복 많은 작은딸 임신하며 집안일이 잘 풀리며 가정에는 어려움은 없었는데 아기가 뱃속에서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여 엄마의 고통이 많았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한 고집으로 제일 힘들게 키운 작은딸 예쁘게 잘 성장하여 예쁜 가정 이루며 예쁜 딸, 아들 나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고집과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으면 어떨까! 큰 출세 돈도 좋은데. 네 몸이 우선임을 알고 잘살기 바란다. 공무원으로 최고의 상도 받았잖아 출세 무엇이 출세인가 인간답게 살면 되지 어느 부모가 자식 출세 마다할까? 내 자식이 아프면 부모 마음은 더 아프단다. 네 자식이 아플 때 네 마음이 편안 하더냐 부디 건강한 몸으로 예쁜 네 자식들 잘 키우길 바란다. 항상 자식 위해 기도하는 부모 마음은 변함이 없단다. 부디 건강하고 밝고 좋은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막내아들
막내로 태어난 아들은 사랑도 환경도 잘 타고난 복덩이 아들이다. 형, 누나와는 달리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사남매 중 제일 잘 키운 막내아들이라 생각한다. 유치원도 학원도 큰애들 못해준 엄마의 한을 막내아들은 모자람 없이 키운다며 후회 없이 키웠다.
막내아들은 작은 새끼손가락처럼 항상 어려보이는 걱정스런 막내였다. 그런데 지금은 듬직하고 든든한 엄마의 기둥이 되여 주는 막내아들을 보면 행복하다. 엄마걱정과 근심도 제일 많이 하게하고 즐거움도 안겨주는 효자 막내아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고맙고 사랑한다.
막내아들 더도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 예쁜 가정 가꾸며 사회적 생활도 지금처럼 많은 이의 귀감이 되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막내아들 사랑한다.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
너희들은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지금처럼 풍족하게는 못 키웠다. 그때시절에는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너희들이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심정을 절반이라도 알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식을 어떻게 키우고 싶을까. 어떻게 해줄까? 그런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다. 내 자식 사남매들은 반듯한 삶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았으면 한다.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지만 예의에 벗어나는 사람이 된다면 인생은 실패함으로 알면 된다.
가난 속에서 살았지만 외삼촌들처럼 의리로 사람다운 삶으로 살았으면 한다.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 외삼촌들 하는 것처럼 욕심 없이 나누며 돈독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빠 엄마가 살다가 얼마가 모자랄지 남을지는 모르지만 적은 돈 때문에 싸움하지 말고 공과 사를 잘 구분하여야한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와, 의리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인생의 재산이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노년이 행복하다. 첫 번째 복은 예절바른 두 며느리고, 둘째로는 두 사위들이다. 나는 인복이 많아 상냥하고 고운 며느리를 보고, 예절도 바른 손자, 손녀들로 잘 키우고 예쁜 가정으로 살아가는 너희들의 모습에 행복하다. 그리고 듬직한 사위들이 나의 말년의 복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나의 사남매들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서로 의지하며 지금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날로 살아가지 않을까. 부모로서 잘해주지는 못했고 결혼할 때도 월세 방도 못해준 어미의 심정은 너희들이 더 잘 알거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자립으로 사라가려니 많은 힘이 들겠지만 그것이 삶의 보람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다. 더도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 살고 어디를 가더라도 최선을 다 하여 인정받는 사람으로 만인들의 꽃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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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종수정 했습니다. 이 글로 올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남편분것도 확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