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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민족은 예맥족이 아니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할 것이다.(규원사화 만설)
청나라 황제와 조상이 같은 것은 한민족이 아니라, 이성계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증거는 넘쳐난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여진족이 절대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한민족이 아닌 자는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면, 이성계는 전주이씨인 척 하지 않았고, 북애는 규원사화를 써서 여진족을 한민족으로 둔갑시키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다. 한민족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 영토는 상실되지 않았고, 우리나라 역사는 말살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했다는 증거는 많다. 나중에 자세히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나만 보기로 하자.
이씨조선실록에는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한단사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책을 바친다고 벼슬을 2품계나 올려준다는 것도 정상이 아니지만, 책을 내놓지 않는다고 사형 그것도 참형에 처한다고 협박한 사실은 그 당시 한단사 수거, 분서에 얼마나 혈안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이렇게 수거한 것을 두고 규원사화에는 구서(求書)의 유시라고 했다. 책을 구한다면, 한 권만 구하면 되지, 혈안이 되어 전국의 책을 모조리 긁어모을 필요가 없다. 구서의 유시랬던 북애는 표리부동하게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다”고 한탄(?)했다.
서양에서는 지동설처럼 교회의 교리에 반하는 책을 쓴 사람들이 처형당한 적이 있다.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내버려두면 기독교의 붕괴를 가져오니까,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이씨조선(혹자는 ‘이씨’조선이 거슬린다고 하는데, 북애도 규원사화에서 단군을 단씨라고 불렀다. 위만이 차지한 번조선을 위만조선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식민종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자처하며 우리나라 옷을 입고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영토를 식민종족에게 줘버린 이성계가 세운 나라는 뭐라 불러야 하는가. 이씨조선? ‘씨’는 높임말이다. 성계조선이 정확한 말이다, 위만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신인왕검의 조선을 단군조선, 고조선이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 조선은 하나뿐이다. 단군조선,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으로 불러야 한다.
나야 당연히 성계조선이라 부르고 싶지만, 날조사를 신봉하는 상황이라 여기서는 이씨조선으로 지칭하겠다.)에도 벌어졌다. 이성계와 그 후손들에게도 그만큼 절박했다. 일본의 한국사 말살을 능가하는 말살이 이씨조선에 의해 저질러졌던 것이다. 이성계와 그 후손이 한국사 말살에 혈안이었던 것은 이성계가 한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민족이라는 사실에 어떠한 긍지도 자부심도 갖지 못하지만, 한민족은 9200년이나 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5300년 동안 인류 문명을 주도해왔다. 긍지 높은 우리민족이 우리나라 통치자의 요건으로서 한민족 출신자임을 얼마나 엄격하게 요구했는지는 신인왕검(神人王儉)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웅씨족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 것은 배달 1세 한웅 거발한 때였다. 웅씨의 임금 웅녀가 한웅 거발한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배달 개천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합류했으므로 웅씨족은 결격사유 없는 한민족이다. 그러나 웅씨 여왕의 후손이 배달의 제후가 된 것은 웅씨족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지 천년이나 지나서였고, 우리민족의 중조가 된 것은 다시 5백년이 더 지나서였다.
신시씨와 혼인한 웅씨군 즉 웅씨 여왕의 후손이 처음으로 왕검(배달의 제후)이 된 것은 12세 한웅 주무신 때였다. '여'라고 하는 인물로 단허에 책봉받아 왕검이 되었다. 그로부터 460년이 지나 웅씨 출신의 신인왕검이 등장했다. 신인왕검의 모친은 배달 18세 한웅 거불단(단웅)과 혼인해 신인왕검을 낳았다. 신인왕검의 모친은 웅씨왕(검)의 왕녀였으므로 신인왕검은 웅씨 왕의 손자였다. 그래서 웅씨 나라의 비왕이 되었다가 웅씨의 왕이 전사하자, 신인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을 통일하고 우리민족의 중조가 되었다.(삼한관경본기)
중국인이 한족이라면서 중국 밖의 중국인들은 어째서 화교(華僑)라고 하는가. 한족이 아니라 화하족이기 때문이다. 화하족(하화족이라고도 함.)은 한족의 근원종족이 아니라, 중토에 살던 수십 종족의 피지배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화하족이 한족의 근원종족에 지나지 않는다면, 중국 밖에 사는 중국인을 모두 화교라 부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한민족, 한복, 한식, 등등 모든 것에다 우리민족명을 사용하는데, 중국은 주류인종을 한족(중국인의 92%에 달한다고 우긴다.)이라 우기는 것 외에 한을 사용하지 않는다. 날조가 아니라면, 화교가 아니라 한교, 치파오(기포)가 아니라 한포, 중식이 아니라 한식이라고 했을 것이다.
화하족 주원장이 한족이 되었기 때문에 진짜 한족인 우리민족의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예맥족이라 하고 진시왕 때 붙인 이름이라고 날조했다. 어째서 우리민족에게 예맥족이라 붙인 걸까.
바로 이성계가 예맥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예맥족이라 부른다고 8600년간 한족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할 리가 없다. 이성계는 자신이 예맥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씨조선 사람들은 왜 자신이 예맥족이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명이 漢族이라 하니까, 이씨조선은 할 수 없이 韓族이라 한 것이다.
그걸 새삼스레 요즘 와서 이 땅의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부활시켜 우리민족의 주류가 예맥족이라고 떠벌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중국은 박장대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우리민족이 예맥족이라는데, 완전히 합의를 본 상태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이 합쳐진 게 아니고<규원사화는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고 했지만, 날조다. 예맥족은 앵글로족 + 색슨족이 아니다. 규원사화에도 예족과 맥족이 혼혈해서 새로운 종족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없다. 거짓의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규원사화에도 예맥이나 맥이 계속 등장하는 걸로 보아 맥족은 곧 예맥족으로 말갈이자, 여진족이다.>, 맥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성계의 조상들이 우리나라 강역(중국 대륙)으로 들어왔을 때 붙여준 이름이 맥이다. 그러니까 맥이라는 종족명은 진시왕로부터 1600년 전에 이미 부르기 시작했다.
을묘 29년(B.C. 1806)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단군세기)
북애조차 조선시대에 맥족이 출현했다고 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날조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후의 백성이 되었다.(규원사화)
중국 역사책에도 주 무왕 때 화하와 만‘맥(貊’)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蠻은 남쪽 오랑캐라는 뜻인데, 중토는 오늘날의 중국이 아니기 때문에 남쪽 오랑캐가 존재하지 않았다. 貊은 북쪽 오랑캐라는 뜻이지만, 예맥족은 중토의 서쪽에 살고 있었다. 만맥이라 하지만, 남흉노가 남하한 기원전 4백년 때까지 중토에 살고 있는 오랑캐는 예맥족이 유일했다. 역사날조 차원에서 쓴 말이었던 것이다. 화하족도 예맥족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미개종족이다. 예맥족은 그래도 중토로 들어가 화하족을 지배하긴 했었다.
남국은 신인왕검이 치우씨 후손을 제후로 봉한 나라의 하나다. 22세 단군 색불루 20년(B.C. 1266)에 매우 강성했다는 기사가 나올 뿐, 언제 멸망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예맥족은 남후와 신지씨의 백성이 아니라 돌개의 백성이다. 북애가 한사코 돌개의 백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걸로 봐서 돌개 역시 예맥족이다.
단기고사에도 단군세기의 내용이 나온다. 단기고사는, 대야발이 썼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본 단군세기와 번한세가를 조선의 시각에서 완전히 뜯어고친 책에 지나지 않는다. 단기고사는 주변국 역사의 연대가 하나도 안 맞다. 온통 현대용어로 도배된 것으로 보아, 20세기에 들어와서 날조했다. 1930년 이전에는 없었던 용어까지 등장한다. 이씨조선은 한단사를 모조리 수거했기 때문에 조선인은 단군세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반면 이씨조선의 예맥족 궁궐에 숨겨진 한단 역사책 51종을 모조리 빼돌린 일본인이라면 단군세기를 토대로 충분히 날조할 수 있다. 또 이씨조선의 예맥족 왕들이 단기고사 날조를 주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청아대부 한불배와 옥저대부 고사심과) 맥대부(貊大夫) 신돌개(申突盖)에게 명하여 제후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마한과 진한, 변한이 되었다.” 우선 기원전 1806년에는 대부라는 벼슬이 없었다. 이 당시에는 성 없는 사람이 다수였으므로 미개 예맥족에게 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돌개에게 성이 있었다면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라도 단군세기에 누락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삼한은 12세 단군 아한 29년이 아니라, 1세 단군왕검 통치 마지막 해(B.C. 2241)에 조선의 땅을 삼분한 관경이다.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단군세기)
삼한은 조선의 강역 동아시아로 단군이 지배했는데, 단기고사에서는 고작 세 명에게 봉토로 둔 땅으로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집어넣은 날조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조선의 일식기록은 동아시아에 걸쳐 일어났다. 삼국의 일식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예맥족은 미개하기 그지없던 종족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 예맥족에 대한 명칭은 이외에도 읍루, 물길, 말갈 등 무수히 많다. 저 미개한 종족에게 걸맞는 이름을 너도 나도 붙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맥족은 숙신이 아니다.
肅은 ‘엄숙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엄하다; 맑다; 인도하다’, 愼은 ‘삼가다; 진실로’라는 뜻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던 예맥족에게 붙여주기에는 너무나도 황송한 이름이다. 숙신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은 중토에 세워진 나라들의 상국(번한, 마한)의 상국이었기에 엄숙하고 맑고 인도하는 진실된 존재고 삼가 공경할 대상이었다.
반면 濊貊의 뜻은 더러운 오랑캐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깊고 조용하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貊은 날조 중국사에도 오랑캐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화하와 함께 미개의 쌍벽을 이루는 종족이라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해 구한을 표방한 조선시대에도 맥이라고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한이 해체된 후 맥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예맥이라 부른 것이다.
미개 예맥족에 대한 기술은 날조역사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단사를 썼다는 규원사화에는 예맥족이 온갖 이름으로 등장해 한국사를 장식한다. 북애는 한단사를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맥족을 한민족과 동일시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맥족(여진족)은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나뉜다. 거주지의 상대적 위치가 생여진은 고려 영토의 동쪽, 숙여진은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생여진은 동여진, 숙여진은 서여진이라 불렀다. 흑수에 살았던 생여진은 흑수여진이라고도 부른다. 생여진은 숙여진의 나라 이씨조선에도 조공하고 있었다. 여진은 고구려 이후 우리나라 속민이었다. 고구려, 대진국, 고려의 영토가 중국 대륙 끝에서 동북아 끝에 걸쳐 있었으므로 실제로 생여진(동여진; 흑수여진)과 숙여진(서여진)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살았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 영주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자고 할 것이다.(규원사화 만설)
여기서도 청이 숙여진이고, 북쪽의 야인이 생여진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규원사화는 1675년에 썼다.
어째서 생(生)여진, 숙(熟)여진이라 했는가. 생(生)여진은 원시 그 자체로 살고, 숙(熟)여진은 생여진에 비하면 그나마 문명화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흑수에서 살았다고 기록된 생여진은 신라 멸망 후 마의태자 후손 극기가 갔을 때조차도 신석기인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살고 있었다. 김행 즉 마의태자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려사)”을 정도다. 생여진은 지구 최후의 미개 원시인이다. 10세기까지 신석기인처럼 살고서 어떻게 12세기 초에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생여진은 끝끝내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청을 세운 것은 숙여진이다.
중국 대륙<그 어떤 나라도 노예의 종족명으로 지명을 삼는 나라는 없다. ‘청구대륙’이라 해야 한다. 자오지 한웅 때 청구로 천도하면서 우리나라 중심지는 동아시아 서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구대륙’은 생소한 말이라 일단은 중국 대륙으로 표기하기로 한다.>에서 동북아에 걸쳐 있는 고려의 영토를 축소하자면, 고려의 동쪽과 서쪽에 거주한 동, 서여진족의 위치를 끌어당기면 된다. 생여진을 남하시키고, 숙여진을 동쪽으로 끌고 오는 것만으로, 고려의 영토는 간단히 한반도로 축소할 수 있다. 실제로 이씨조선의 예맥족은 제 조상 숙여진이 살던 땅의 남쪽 경계에 있던 백산(후대의 백두산)을 한반도 태백산으로 옮겼다. 그래서 예맥족이 종이 위에서 한반도 이북에게 살게 된 것이다.
여진족은 “신라 말과 고려 초, 동북으로 함경도 일대와 서북으로 압록강 남안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게 아니다. 생여진은 흑수에 살았다고 고려사에도 분명히 나온다. 무엇보다 고구려의 일식관측지가 흑룡강 상류다. 바로 흑수다. 일본이 베낀 794년에서 1183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기록이 흑룡강 중, 하류에서 관측한 거다. 역시 일본이 베낀 1343년에서 1599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관측지는 만주다. 생여진은 이씨조선 초에 남하했다가, 김종서에 의해 흑수로 도로 쫓겨 갔다.
예맥족은 돌개를 왕으로 봉한 기원전 1806년 직전에 우리나라 강역에 등장했다. 그리고 고려 말까지 내내 우리민족의 속민으로 살았다.
이성계는 한민족이 아닌 자로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예맥족이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이성계는 기만과 술수로 한민족의 통치자라는 지위를 손에 넣었다. 한민족인 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계가 예맥족이라는 사실은 주원장도 알고, 이성계의 동족 숙여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우리민족만 몰랐다.
이성계는 자신이 예맥족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까막눈에 밥 빌어먹는 거지(백련교도. 특별히 주원장만 무식하고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중토인들의 일반적인 지적, 생활수준이었다.) 주원장에게는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를, 동족 숙여진에게는 우리나라 영토를 각각 떼어 주었다.
동아시아 천자국이라는 우리나라 역사를 가졌으니까, 중토의 지명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야 했다. 중토에도 5대 강이, 중국 대륙에도 큰 강만 4개다. 요수만 적당히 정하자, 중토의 지명을 강을 기준으로 거리 비와 방위를 고려해서 간단하게 밀어낼 수가 있었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 영주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규원사화 만설)
남쪽의 천한 종족과 한나라는 명을 가리킨다. 명을 한족이 세운 나라로 날조했고, 한족은 한나라에서 유래한다고 했으니까, 명이 곧 한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이 1644년에 망했다는 것부터가 거짓이다. 1675년에도 이씨조선의 “선비들은 임진년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명나라에 대해 보답하려” 하고 있었고, 북애는 “1백년 안에는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1675년에도 청과 명이 동시에 존속했던 것이다. 명은 1644년 이후에도 존속했고, 청은 이씨조선 초에 등장했다.
고려조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규원사화 서문)
삼국사기에는 삼국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나온다. 한나라에 조공한 것은 천년이라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백 년 동안 조공했다고 날조한 대상은 명이 아니라, 청이다.
이씨조선은 이성계 때부터 명, 청에 다 조공했다. 숙여진 이성계가 우리나라 통치자가 되는 대가로 명이 중토에서 기어나와 우리나라 땅의 주인행세를 하고, 숙여진의 나라 청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는 청이 없었다.
태백일사도 삼한비기를 인용해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고 했다. 북쪽. 청이 명의 북쪽에 즉 양자강 이북에 있다는 뜻으로 쓴 글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여럿 있다. 예수회의 선교사 세스페데스(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임진왜란 때, 이씨조선에 왔다가 남긴 글에는 “강 하류의 넓이가 10레구아(16km?)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명이 나뉘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조선과 명은 접경하고 있지 않았다. 청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 세스페데스는 청까지도 명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성계는 주원장 뿐만 아니라, 숙여진에게도 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과 숙여진이 입을 열면 이성계의 왕노릇도 끝장이었다. 세스페데스는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꼬라이에는 지나가기 매우 어려운 거대한 사막이 있다고 한다.”고 했다. 고비사막 남부(몽고고원에는 몽고가 살았다.)가 이씨조선 땅이라는 거다. 결국 명, 청과 이씨조선은 황하를 기준으로 영토가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중국을 “강남의 황제가 있는 나라다. (이때는 이미 북경에 도읍을 정한 뒤)”라는 주석이 있다. 강남. 양자강 이남을 말한다. 명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것이다. 명은 양자강 이남으로 북경을 밀어냈다. 따라서 청은 지금의 양자강과 황하 사이에 있었다. 장안성을 차지한 것은 예맥족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현황하 이북까지 차지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Asia from Brookes R.지도다. 좀 있다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쌍성총관부 및 동녕부가 현황하 이북과 발해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Asia from Brookes R.은 주원장이 이성계 등과 분할할 영토를 기준으로 날조사에 근거해 그린 지도를 보고 그렸다. 비록 사본이긴 해도 서양인의 말과 이씨조선의 책과는 달리, 중국이 스스로 그린 날조 지도다.
8600년의 한제국은 어이없게 식민종족들에 의해 역사와 영토가 해체되어 양자강 이남은 주원장이, 양자강 이북은 숙여진이, 황하 이북과 동북아는 이성계가 나눠가졌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이성계와 그 후손들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씨조선의 영토를 야금야금 갈취한 것이다. 원래 협박범은 얻을 게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협박한다. 청도 그랬다. 지리적 조건으로도 양자강 이남의 주원장은 이씨조선을 공격할 수도 없지만, 역시 약점을 잡힌 터라 임진왜란에 파병까지 해야 했다.
명은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에게도 시달리던 형편없는 약체국이다. 그런 명이 북애가 규원사화를 쓸 당시까지도 멀쩡했던 건, 청이 명과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명이 강한 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북애 역시 청과 생여진, 왜까지 끌어들여 명에 맞서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으로 알았던 나라가 전쟁에서 여지없이 무너진 경우가 더러 있다. 독소전, 노일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청은 주원장의 후손에게도 협박을 했겠지만, 통하지 않았다. 양자강 이남의 한족은 여전히 그 땅에서 천자국의 백성 한족으로 살고 있으니까, 진실이 폭로돼도 주원장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후손들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그 후손은 자신들의 책임을 우리나라 왕조에 전가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은 자들이라, 땅을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 역사도 계속해서 축소되어 갔다. 고려가 한국사를 말살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고려가 이씨조선사를 축소할 수 있는가.
고려가 한국사를 말살했다면 이씨조선은 한단사를 수거하고 분서할 이유가 없다. 통치자가 바뀌었으므로 약점도 사라지고, 더 이상 중국도 공갈, 협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건 이씨조선이 망했기 때문에 중국이 대한민국을 협박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주원장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미개 중국에 번듯한 역사를 마련해주기 위해 역사교환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천자 행세를 하려면 필히 번듯한 역사를 가진 종족으로 둔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다고 해도 미개 중국의 우두머리라는 지위로는 한민족의 반발로 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 명은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 게 아니니까, 우리나라 역사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명은 중토의 지명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 시대에 걸쳐 지도를 날조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은 원래 몽고간섭기의 지도를 명이 날조한 것을 보고 그린 지도다.
이걸 알아야 한다. 서양인들은 동아시아를 탐험해서 지도를 작성한 게 아니라, 기존의 만들어진 지도를 보고 그냥 베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지도가 날조되어 있으면, 서양인이 베낀 지도 역시 날조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Asia 1808은 중국의 날조지도를 보고 베낀 연도가 1808년이었던 것이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도는 이씨조선의 지도를 보고 베꼈다. 1824년이라 써 있지만, 이씨조선에 교구가 세워진 것은 1830년대, 서울·원산 교구 등으로 나뉜 것은 1900년대고, 위도와 경도가 표시된 이씨조선 지도는 1910년대에 나왔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의 주해에는 괄호 안에 1924년이라 써 있다.(주간조선 2003. 07. 29.)
이미 1909년에 일본이 일명 ‘간도협정’을 맺어 한반도 이북을 청에 넘겼다. 그러나 한반도 이북에도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청이 이씨조선의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바람에 청의 영토가 되고 나서도 조선인이 그 땅에 계속 살았다. 시간이 좀더 지나면 그 땅의 사람들도 인식이 변해 ‘이제는 나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아직 자신을 조선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1924년, 원본지도는 1824년에 제작했던 것이다.
Asia 1808을 보자. 회수 중류 이남에 Cayson 개성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고, 개성이 황하 하류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황하는 산동반도 위로 흘러나간다.) 북위 32°쯤 된다. 오늘날의 합비다. 회수는 예성강이 아니라, 임진강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수도 개경은 장안인데, 이성계는 개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성강은 위수다.
이성계는 개경이 개성이라 날조했다. 왕건이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날조 역사 속에서나마 묘청이 개경의 지덕이 다한 반면 서경은 왕성하기 때문에 그곳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묘청의 난은 순수창작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실에 근거해 날조했다. 저 날조기사에서 개경은 고려 이전부터 우리나라 역대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땅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도읍이었던 적이 없는 개성이 개경이라면, 신인왕검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5경, 3경의 하나였던 서경에 비해 지덕이 다할 수 있는가. 역사날조하면서 무심코 실사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게 역사날조의 어려움이다. 거짓말은 쌓이고 쌓이면 거짓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주원장이 합의한 서압록강은 어딘가. 중국 지도에는 이 당시의 요수가 남아 있지 않다. 청이 지도를 날조해 명의 요수를 난하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조선이 황하 이북을 차지했기 때문에 서압록강(서압록강=요수라는 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이 될 수 있는 강은 정해져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침입하려고 해도 서압록강을 건너야 했고,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입해도 서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황하 하류에 보면, 태행산맥 이서는 동북아에서부터 줄곧 산악지대고, 산악지대 이서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설령 태행산맥 이서로 진격했다고 해도 진령산맥, 복우산맥(伏牛산맥 ; 푸뉴산맥) 등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태행산맥 이동으로 공격로를 잡아야 하는데, 이 경우 오늘날의 상건하<하류는 영정하, 천진 하류는 해하(海河; 하이허)라고 부른다. 이하 상건하로 기술.>를 꼭 건너야 한다. 상건하가 이성계와 주원장이 합의한 요수였던 것이다.
Asia 1808이 무엇을 기준으로 색 구분을 해두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와 이어진 붉은색은 ‘원(元)’이라고 표시한 거라는 정도다. 위선과 경선은 그나마 정확하다. 한반도 북부를 지나는 위선이 북위 40°니까, 녹색 북단을 지나는 위선은 북위 50°다. 그러니까 녹색 상부는 몽고고원이다. 녹색의 서쪽을 지나는 경선은 100°니까, 녹색 하부는 채달목분지다. 녹색 중앙부는 오르도스사막에 해당한다. 지도 남서쪽의 노란색 북부에 THIBET이라 쓴 부분은 티벳고원이다. 북위 30°(한반도 아래 동중국해에 걸쳐 동서로 그려진 선)이 지나는 부분이 티벳고원 남단에 해당한다. 노란색 아래는 인도와 방글라데시다. 북위 30° 위쪽에서 길게 누운 강이 방글라데시에서 꺾여 들어간다. 바로 아노장포강이다. 원래 아노장포강은 북위 30° 아래쪽을 흐르는데 잘못 그려졌다.
Asia 1808이 1717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를 토대로 날조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은 아닐까, 노란색으로 칠한 한반도 이북이 동녕부, 노란색 이서의 붉은색이 쌍성총관부가 아닐까도 생각해봤지만, Asia 1808은 황여전람도상의 이씨조선 바깥에 즉 중토에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셈이 된다. 그리고 고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고려보다 훨씬 큰(10배 이상) 군사지역을 설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동녕부는 요동(명의 요수는 상건하)에 있다고 날조했으므로 한반도 이북의 노란색 이서가 동녕부다. 쌍성총관부는 고려의 동북면(중국 대륙에 한해 고려 수도를 기준으로 한 방위)인 황하 하류 이북에 있었다. 청이 이씨조선 땅을 빼앗을 때마다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위치도 요수를 따라 계속해서 한반도 쪽으로 밀렸으므로 이 지도는 명이 날조한 역사를 토대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동녕부는 고려의 서북면, 쌍성총관부는 동북면에 위치했지만, 여기서는 방위가 무시되고 있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전체적으로 방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날조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발해만 및 황하 하류 이북에 그렸다는 것은 날조사에서 그곳이 고려 영토라는 의미다. 조휘·탁청 등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며 몽고에 투항하자, 그 땅에 설치한 것이 썽성총관부라 날조했다. 황하 하류 이북도 고려 땅인데, 상건하 이동이 고려 영토가 아닐 수는 없다. 오늘날은 쌍성총관부를 한반도 안에다 그리고 있다. 또 동녕부도 한반도 안의 서경에 있다가 요동으로 옮겼다고 날조했다.
날조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발해만 및 황하 하류 이북에 그렸다는 것은 이성계가 현황하 이북까지 차지했음을 말해준다. 철령 이북 땅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했으므로 당연히 몽고를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했다고? 양자강 이남에 있던 명이 무슨 수로 현황하 이북 땅을 지배한단 말인가. 해결책으로 청이 1636년에 세워진 나라라고 날조했다. 1636년 이전까지는 명의 땅에서 명의 지배를 받은 오랑캐 부족이라고.
타림분지 및 중앙아시아 등에 있다는 서타타르 중간에 거란(KITAYANS)이라 표기되어 있다. 북위 40°선이 붉은색을 통과하고 북위 50°선이 붉은색 위로 지나간다. 요컨대 붉은색은 타림분지와 중가리아분지, 발하시호수가 있는 지역이다. 중가리아분지에는 차가타이 한국이 있었다고 했으니, 거란은 타림분지에 있었다. 오늘날의 위구르 자치구다.
거란은 1125년에 중토 즉 티벳고원 북부<티벳고원 북부가 소위 중원이다. 우리나라는 양자강 이북에, 중국(화하)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양자강 이남에 장강, 회수, 황하가 위치해야 한다. 장강, 회수, 황하가 현위치에 있고서는 방대한 분량을 창작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날조가 불가능하다. 우선, 삼국이 한수가 아니라, 황하를 두고 싸운 게 되고, 신라와 중국이 가장 빈번히 싸워야 한다. 중토를 침입한 수많은 유목민족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문제점도 발생한다. 중토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그래서 지명을 순차적으로 옮기자, 중토는 확대되고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되어 역사날조가 간단했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가 중토라는 사실은 서압록강만 찾으면 간단히 입증된다.>에서 망했으니까, 거란은 계속해서 중토에 남아 있었다. 몽고는 원래 소수종족이라 넓은 땅을 다 지배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몽고는 원으로 날조한 나라 외에도 사한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몽고족의 일파 거란에게 서해도(서해는 타림강이다. 고려 말까지 강을 바다로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후술한다.) 수비를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했다.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자마자 중토에서 빠져나왔다. 중토가 극한의 미개 땅이라 잠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중토를 방치하면, 미개 화하족이 빠져나와 중국 대륙으로 흩어지고 극단의 난잡한 성풍속을 전파할 것이므로 중토를 봉쇄해버렸다. 이미 티벳고원 남부에는 8첩을, 채달목분지에는 동녕부를 설치했으니까, 서해도만 수비하면 중토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거란 역시 미개 땅에 갇혀 사는 건 원치 않았으므로 서해도 수비에 동의한 것이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를 주도한 예맥족 역시 소수종족이다. 소수의 예맥족이 현황하 이남으로 가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 거란을 데려갔다.
중토에 금을 세웠던, 역시 몽고족의 일파인 숙여진(예맥족)을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동녕부로 이주시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녹색 부분 아래쪽의 KALMHCS가 뭘 말하는지는 몰라도 숙여진이 살던 곳이다. 녹색은 채달목분지에서, 고비사막, 몽고고원에 이르지만, 타림분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붉은색이 모두 거란의 거주지가 아니듯이 녹색 지역 방위를 모두 숙여진에게 맡겼다는 뜻은 아니다. 숙여진은 채달목분지에 거주했다.
채달목분지가 동녕부고, 현황하 하류 이북이 쌍성총관부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고려 말까지 내내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예맥족이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을 당시부터 채달목분지에서 줄곧 살았다는 것은 물론 1장 내용 전체를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자세히 고찰하겠다.
황하 이북에 보면 동북아에 걸쳐 동타타르라고 써두었다. 타타르라는 말은 특정 민족의 명칭이 아니고, 아시아적 유목사회 부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타타르 아래는 무구리, 위에는 솔롱기안스라고 써두었다. 무구리는 고구려, 솔롱기안스는 고려를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가 유목민족이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
성을 수백 개씩 쌓은 유목민족도 있던가. 가축의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떠도는 게 유목민족이다. 재산이라고는 가축 말고는 달랑 천막뿐이다. 삼국은 건국자 모두 궁성에서 살았다. 삼국사기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으며, 박혁거세는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고추모는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했지만, 중국은 환인시라는 곳에 고추모가 지었다는 궁궐 유적을 날조해두었다. 삼국은 모두 몇 성이나 쌓았나.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1백 76성, 백제가 2백성(말기), 신라는 기록이 없다. 신라는 삼국 말기 고구려에 버금가는 나라였으니까, 적게 잡아도 5백성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삼국 말기 백제는 두 나라에 비해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그런 나라가 2백성이고, 강대국 고구려는 1백 76성? 축소한 것이 5백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축성기술이 금방 발전하는 것인가. 건국하자마자 축성부터 하는 나라가 최초의 국가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수십 종족에 이르는 유목민족들이 그 간단한 성 하나도 쌓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우리나라는 한국시대를 제외해도 6천년의 고도 문명을 이룩한 농경민족이다. 삼국은 7천 2백년의 한문명을 이어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6백년이 넘었다. 종이 위에서나마 동북아조차 우리나라에게 주기가 아깝다고 해서 조작조각 나눈 것이다. 솔롱기안스가 고려인데, 한반도에 COREA이라 써둔 것도 우리나라를 분해해 작은 나라로 보이게 하겠다는 의도다.
노란색 지역이 몽고 땅이라는 뜻이라면, 이 지도상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는 고려의 몽고 침공을 막을 수가 없다. 만주로의 침공을 저지하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Asia 1808은 1차 날조사에 근거해 작성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이다.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의 영토를 가로채면서 날조사를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에 티벳(THIBET)이라 쓴 것은 중토가 아니라고 우길 속셈에서다. 마찬가지로 현 황하 이남을 날조 동녕부 및 쌍성총관부와 같은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중토가 황하 이남이고, 몽고에게 정복되었다는 날조사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CHINA라고 써두었다. 한반도도 붉은색이다. 남송(남송은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송이었다. 중토의 동쪽에 있으면서 축소되어 갔으니까.)뿐만 아니라, 고려도 몽고에게 정복됐다고 우길 셈으로 같은 색으로 칠한 것이다.
영토가 큰 만치 우리나라의 종족구성은 다양했다. 桓族, 韓族은 우리나라 안의 모든 종족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구한(九桓)은 모조리 삼한(진한, 번한, 마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삼성기전 하편) “천하의 땅을 새로 갈아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단군세기) 韓族은 우리민족 이외에 다른 종족들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을 제외한 韓族은 속민의 형태로 있었다.
속민 혹은 피지배종족. 우리도 우리민족이라 여기지 않고, 그 종족들도 우리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유목민족이다. 다만 화하는 후직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이래로 아노장포강 유역에서나마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다른 종족을 배제한 한국사의 주체인 한민족은 韓민족이 아니라 漢민족이다.
현황하 이남은 자오지 한웅 이후 우리나라의 중심지였다. 이성계가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분해한 14세기 말은 우리민족을 漢族이라 부른 지도 어언 2천년이 지난 때다. 그 땅에 韓族이라 불리는 집단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오늘날 황하 이남에 있는 소수종족들은 원래 티벳고원의 일부인 중토에서 살았던 것이다. 韓族 역시 중토에서 살던 종족이다. 화하족은 특정종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중토의 토착민 전체를 지칭하던 말이다. 중토에 토착민이 수십 종족이나 되니까, 그들을 총칭할 필요성 때문에 우리민족이 만들어낸 말이다.
중국을 구성하는 종족은 모두 56종(자료에 따라서는 51종이라고도 한다.)인데, 그 중 한족(?)이 92%다. 오늘날 중국의 인구가 13억이라는데, 화교는 빠진 숫자다. 한족을 제외한 나머지 55종족이 1억 4백 명이라는 거다.
청을 세웠다는 만주족(예맥족)은 오늘날 동북아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청은 양자강 이북에 세워진 나라다. 2백년 뒤 정묘호란으로 난하까지 확보하고 나서 현북경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이미 한족의 반발도 사라진 상태라 지배층만 이주했기 때문에 예맥족의 대부분이 채달목분지 및 양자강에서 황하 사이에 남았다. 그런데 오늘날 이곳은 한족이 거주하고 있다. 요컨대 예맥족도 대부분 한족으로 슬그머니 변신한 것이다. 예맥족을 따라간 거란 역시 한족으로 변신했다. 동북아의 만주족은 청이 동북아를 다 차지했을 때 흑수에서 남하시킨 생여진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만주족은 그 옛날의 만주족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의 한족(?)을 제외한 55종족들은 한족화에 실패한(고유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화하와 몽고족, 투르크족이다. 요컨대 중국이 주장하는 한족의 실체는 우리민족을 토대로 중토의 토착민과 몽고족에서 한족화된 사람들을 포함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생여진은 숙여진과 분리된 후로 지리상의 여건(중간에 우리나라가 위치했다.) 때문에 중토를 침입한 적이 없다. 몽고족의 일부는 고려 말 이후 몽고고원으로 이주했으나, 몽골공화국은 2002년 현재, 245만 7000명에 불과하니까 무시해도 된다. 흉노, 선비, 거란, 예맥족도 몽고의 갈래지만, 중토 침입시에는 각각 행동했다. 중토를 침입한 흉노는 남흉노고, 북흉노는 중앙아시아로 빠졌다. 돌궐도 동돌궐과 서돌궐도 갈라졌다. 위구르는 투르크의 갈래로 중토 침입시, 단독행동을 했다. ......
그 옛날에도 92%가 한족이었다면, 몽고, 흉노, 거란, 말갈, 선비, 돌궐, 위구르 등을 다 합쳐도 수%밖에 안되는 이민족한테 매번 정복당했다는 얘기다. 각각의 종족은 따로 따로 중토를 침범했으니까, 92%에 달하는 한족(?)은 매번 1%도 안되는 이민족에게 지배당할 만큼 열등종족이라는 소리다. 반대로 몽고족이나 투르크족은 한족의 1%도 안되는 인원으로 지난 수천 년간 중토를 정복한 우수종족이라는 소리다. 몽고족과 투르크족은 모든 국가, 모든 군대의 염원인 일당백을 수천 년 내내 실현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에 밀려난 탓으로 중토로, 서방으로 쳐들어가 나라를 세운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그린 몽고습래회사에는 몽고군과 고려군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몽고병사는 고려병사의 뒤에 숨어 있거나, 왜군에 맞서 싸우는 고려 병사 뒤로 도망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이 당시 일본은 중국왜가 건너가 일본을 장악한지 5백년이 지나 야만성과 잔혹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어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몽고군이 용감한 것은 약한 군대를 만났을 때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몽고인에 의해 서양이 정복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서양의 군사력 수준을 말해준다. 실상 서양은 우리민족에게 밀려난 종족들에 의해 대대로 정복되어 왔다.
전쟁만이 타국의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은 아니다. 세계사를 보면, 상속, 혼인, 발견, 어부지리 등 온갖 방법으로 땅의 주권이 바뀌었다. 몽고는 고려 땅을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획득하지 않았다. 전쟁을 하기에는 고려가 너무나 강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진국을 제외하면, 배달 개천 이후 고려 말까지 5300년간 이민족에게 정복된 적이 없는 세계사에 유일무이한 대제국이다.
결코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미개 식민종족들이 권모술수로 분할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는 예맥족 이성계가 주도했다. 그 때문에 이씨조선의 예맥족들은 동족 청에 발목 잡혀 끝없이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축소해야 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제작된 여지전도에서 의주가 대능하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지전도를 인터넷에 올라온 조그만 것 밖에 못 봤지만, 강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혹자는 의주 동쪽을 흐르는 요동반도 아래쪽의 강을 현요수라고 하는데, 현대지도와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현요동반도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에 현요수가 있다. 현요수가 요동반도 아래쪽에 있으면 요동반도가 아니라, 요서(요북)반도여야 하지 않는가. 발해만 동단의 강을 현요수라고 하면, 강 위치가 서쪽으로 밀린 셈이다. 그렇다고 대능하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 강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오른쪽 지류가 훨씬 작은 게 현요수를 그렸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청구도를 보면, 의주가 현요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청구도의 서압록강은 확실히 대능하다. 이 시기 서압록강이 대능하에서 현요수로 밀려났던 것이다.
의주는 서압록강에 있었으니까, 이성계는 상건하로 의주를 밀어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공(이씨조선의 선조라 불리는 예맥족)은 상건하까지 도망쳐서 국경지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가 청구도를 그릴 당시에도 대능하가 서압록강이니까, 1712년에 세워진 청비는 현압록강이 아니라, 대능하 유역에 세웠다. 대능하에서 토문강이니까, 아직도 동북아 대부분이 이씨조선의 영토였다. 그러니까 백두산정계비는 일본의 날조다.
이씨조선은 1712년에서 1824년 사이에 또 한 번 청한테 영토를 빼앗겼다. 가능성이 높은 해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지도를 제작한 1824년이다. 이씨조선의 예맥족왕들은 자신의 책임을 모조리 우리나라에 떠넘긴 자들이다. 영토를 상실하면, 우선 축소된 강역에 맞춰 지도를 그려서, 지명을 모두 끌어당겨야 한다. 옮긴 지명에 맞춰 고을 이름도 바꾸고,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의 직함도 바꿔야 한다. 개성사람이, 의주 사람으로, 공주목사에서 순천목사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토가 축소되기 무섭게 지도 작성에 들어가야 했다.
1717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에는 동압록강 이북 너머 극히 일부만 이씨조선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1717년은 청비를 세우고 나서 5년 후다. 19세기 전후(여지전도)까지도 현요수가 서압록강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청은 우리나라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계획안을 작성했다. 청으로서야 당연히 한꺼번에 다 빼앗고 싶었겠지만, 한 번에 왕창 내놓으라고 하면, ‘차라리 한민족의 땅을 속임수로 빼앗았다고 실토하자.’고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이씨조선의 예맥족들의 반응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황여전람도는 청비를 세우기 전의 여러 계획안 가운데 하나거나, 청비 직후 또 다시 이씨조선 땅을 빼앗기 위해 마련한 계획안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중국은 한반도마저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이씨조선이 망해서 한반도를 빼앗지 못한 것이다. 황여전람도는 청이 이씨조선 땅을 빼앗기 위한 계획안의 하나지, 황여전람도를 따라 국경선이 정해졌던 적은 없다. 1708년부터 실측을 했건 안했건 간에, 이를 근거로 현재 전해져오는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후대의 거짓말이다. 실측한 지도는 현요수에서 토문강이 국경선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실측할 수는 없지 않은가.
1735년, 당빌이 시나 아틀라스를 그린 이후 대부분의 중국지도가 황여전람도를 근거로 만들고, 특히 1927년에 진량이 출판한 만한합벽청내부일통여지비도가 황여전람도를 그대로 그린 것은 황여전람도에 표시된 국경선 이북은 공고한 중국 땅이라고 우길 속셈에서였다. 우리나라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다 보니까, 중국과 이씨조선의 영토 분쟁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 이북의 한 줌을 영토분쟁 지역이었다고 우기기 위한 역사날조 차원에서 황여전람도를 근거로 지도를 만들게 한 것이다.
이미 국제 사회는 청의 날조지도를 받아들여 이씨조선의 영토를 축소하고 있었다. 1894년 9월 3일자 프랑스신문 ‘르 프티 주르날’에 게재된 ‘한국, 일본과 동부 중국의 지도’(30.5×43㎝)를 살펴보면, 이씨조선 땅이 한반도로 표시되어 있다. 동압록강 북안까지 이씨조선 땅으로 그렸다. 이 당시 이씨조선 땅은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에 나와 있는 동압록강 서북단에서 흑룡강 하류까지였다.
1900년부터는 일본이 발벗고 나서서 이씨조선 땅이 한반도뿐이라고 선전한다. 10년 후에는 일명 청과 간도협정을 맺어 한반도 이북(동압록강 서북단에서 흑룡강 하류까지)을 넘긴다.
일본이 한단사에서 고려사까지 우리나라 전역사 말살에 혈안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나라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4세기 말 백제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대대로 우리나라에 조공한 속국이다.
중국왜가 이주한 후 문맹자의 나라로 전락한 일본은 조선통신사의 가르침을 받자, 역사날조에 혈안이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역사날조가 거의 끝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역사날조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조선통신사가 마지막으로 간 해가 1811년이니까, 조선통신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역사날조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씨조선을 강점한 동안 이미 말살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겠다고 날뛰었다.
고토 분지로라는 왜노는 이씨조선을 병탄하기 전인 1900년에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라고 써서 우리나라 땅이 한반도뿐이라고 전세계에다 소개했다. 일본이 이씨조선을 병탄하기 전인 1900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지리를 연구한다면서 설치고 다녔다는 사실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년 3월호에 이토 후미마루(伊藤文治)의 '소등박사(고토 분지로)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 나와 있다. 일본이 1900년 이전부터 세계에 이씨조선의 영토가 한반도라고 날조해 알렸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 역시 이씨조선 땅을 중국 땅이라 알렸으니까.
‘한국, 일본과 동부 중국의 지도’에는 일본연안을 제외한 바다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다. 그러나 동해가 우리나라 영토라면서도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 남의 나라 영토에다 자국명을 붙일 수도 있나. 자국에 타국명을 붙이는 나라도 있나.
땅을 빼앗기 전부터 축소지도(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국은 이씨조선 땅을 모조리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같은 화하족의 나라(중국이나 일본이나 그 근원은 모두 화하다.) 일본이 이씨조선을 집어삼킬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씨조선이 존속하는 동안, 서압록강은 상건하, 난하, 대능하, 현요수, 동압록강으로 밀려났다. 이씨조선은 청에게 최소한 다섯 번, 일본이 넘겨준 것까지 해서 최소한 여섯 번에 걸쳐 땅을 빼앗겼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 자체를 잃었다.
이성계와 예맥족이 역사를 축소한 대가를 두고두고 무섭게 치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