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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 (2003)
- 윤구병, 보리, 2003. 02 30,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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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 이야기를 먼저 하자. 이런 강독의 방식이 맞다 틀리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읽어볼 수 있다는 여러 방법들 중에 한 방법이다.
나름대로 각 강의 주제와 철학자 또는 주제를 요약해 보았다. 책이 읽히지 않는 이들은 이 순서의 용어를 먼저 배우고 익히면서(학습), 여기 나오는 인물들을 먼저 찾아보고, 이 노력이 깊으면 깊을수록 본문을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1) 존재론(파르메니데스, 기원전 540-450경),
2) 생성론(플라톤, 기원전 427-347; 80살),
3) 공간론(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322: 62살),
4) 시간론(아우구스티누스, 354-430)),
5) 현상/현실 세계(플로티노스, 204-270)
6) 자연론(현상론, 생명론 – 근대론?), [근대론으로: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
7) 가치론/당파성(사회론, 변역(變易)론) [사회론 대 (주사위론)]
- 시대적으로는 플로티누스가 먼저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렇게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겉핥기로 읽어보아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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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몇 번이나 읽다가 덮었다는 후배가 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없는 먼나라 역사 이야기를 읽듯이 그냥 끝까지 후르륵 읽어보라고 했다. 그는 읽지 못했다고 한다. 나로서도 원전을 읽을 때 대여섯 쪽을 읽으면서 모르는 용어와 사람들이 많이 나오면, 일단 읽지 않고 덮어둔다. 그리고 목차의 개념을 유심히 살피고 특이한 용어와 인명 등을 사전을 통해 이해를 하려 한다. 그리고 그 용어와 인명의 주변의 시대 상황을 살핀다. 또 덮어 둔다. 나중에 다시 볼 기회가 다시 대여섯 쪽을 읽는데 용어에 생소한 것이 사라지지지 않으면 다시 덮지만, 대부분의 경우 계속 읽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의 의도를 모르고 읽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에는 세세히 문장들을 읽으려 하지 말고, 관심있는 부분은 읽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은 건성건성 읽어보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고 했다. 철학의 내용도 모르지만, 그 속에 쓰인 우리말도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란다. 나로서는, 사람들이 우리 입말로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게다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쓴 글들을 대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하나의 방식으로(상층의 방식으로) 쓰인 글이 아니면 읽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점에 민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프랑스는 중세의 라틴어를 버리고 그들의 입말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150년이 지나서 유물론자이며 백과전서파인 디드로가 나오고, 인민과 공화를 주장하는 루소가 나오고 나서야 프랑스에 대혁명을 실행했다. 우리는 600여년 전에 우리 입말을 창제했음에도 우리 입말로 대중이 소통할 수 있게 쓴 것은 겨우 80년 정도이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확장되었음에도 철학 분야는 그렇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입말의 소통 활발한 것은 어쩌면 코로나 이수 챗GPT, AI 등의 도구가 민중의 손바닥에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 방향으로 읽기는 여전하다.
일단 이 책은 우리의 역사, 선사시대의 청동기 문화와 연관있는 환과 단의 시대를 거쳐서, 만주의 고조선을 이어가는 철기시대의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는 긴 역사에서 입말과 우리 문자가 있음에도 지식과 역사기록을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백성과 민중과는 별개의 문화가 지배하였다. 문학에서 우리 입말로 펼치듯이, 또한 한자로 된 우리 역사를 우리말로 다시 써졌듯이, 우리의 중요한 불교 문화가 한글로 번역되었듯이, 이제 80여 년 동안에 우리 방식으로 생각하는 길을 마련하는 중이다. 이런 점에 이 책은 서양철학사이긴 하지만 우리말로 펼친 이야기 역사인 셈이다. 우리 말로 쓴 철학사가 보태어진다는 것은 우리 사유가 더욱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기로 달리 쓰는 서양사들의 관점들이 더 많이 나와야 우리의 진솔한 사유에도 힘을 얻을 것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보태자, 프랑스의 철학서들에서는 철학자 각자가 자기의 용어로 글을 쓴다. 그 책들에는 마지막에 용어 색인이 없다. 그래서 독자는 그 책을 완전히 읽고 이해되어야, 그 저자가 쓰는 용어의 의미를 그리고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푸꼬와 들뢰즈 사이에 용어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고유한 용어와 더불어 프랑스 사상을 풍부하게 하며, 20세기의 세계 철학사에서 변곡점을 보여주었다.
여기 이 책의 내용은 20세기 마지막 년 한에 쓰여졌다가, 21세기 초 2003년에 출판되었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듯하지만, 어쩌면 우리 시대를 여는 새로운 발현 또는 창안일 것이다.
이 책은 “있음과 없음”이란 용어로 보아 이원성이 주제인 듯이 보이지만, 내용은 존재론 즉 “있음”으로 하나의 주장을 풀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원성이 드러나는 상황은 현실에서인데, 그 이원성이란 표현도 ‘있음’의 이중적 변화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양면성을 느낄 때, 삶의 터전에서 어느 편에 서는 당파성, 즉 민중에서 발현의 일원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그 일원성이 존재이며, 사실상으로 현존의 철학이며, 저자의 의도대로 삶의 철학이다. 그럼에도 곳곳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생성론(우주발생론)의 입장으로서 자연론이, 그리고 인간의 자기완성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 정체성이, 존재론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내면에서 표혐으로 추구, 즉 불교처럼 불성 찾기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존재론을 중심으로 두어서 그의 일원성에는 (전통) 논리가 우선이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벩송과 들뢰즈에서는 존재론과 다른 생성론이기에, 논리보다 자연이 먼저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일원성을 토대로 삼은 것은 어쩌면 평화통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평천하를 염두에 두면서, 순천자흥 역천자망이라고 할 때처럼, 인민이 순천자라는 것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그리고 우리 입말로 소통하기도 가능할 것이고, 이 현실의 세상에서 순천자로서 인민의 시대를 만들기를 노력하자고 하는 것 같다. 그 만들어나는 노력과 성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에 낙천적이라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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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과 없음: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의 특성:
여기서,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입말을 통해 서양철학사를 관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실천의 방향을 제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실천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다시 읽고 나서, 이 책은 존재론을 ‘우주형상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비해, 그런데 자연론에서 보는 ‘우주발생론’도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존재론에서 우주론을 끌어내고, 이에 덧붙여 지식론, 그리고 더불어 인류의 지향점으로 가치론을 끌어내고, 그 가치론을 실행에서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의 당파성도 있다. 이런 당파성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있어 온 것이 아닌지.
이 책은 존재론으로 보는 철학사인 셈이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1900년 진화의 법칙을 세 학자들이 재발견하면서 우주발생론이 다시 제기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우주발생론이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우주형상론과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은, 학문 발전의 여러 단계들에서도 이를 예고했었다. 하나는 코페르니코스 망원경을 통해 지구의 하늘 뚜껑 넘어로 보았던 브루노의 무한과 무한주의 제기였다. 그리고 갈릴레이에 의해 하늘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여기면서, 동등성이 물체에도 신체에도 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830년대에 현미경의 발달과 더불어, 물체 안의 힘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생명체 안에 힘(도약)의 발현을 보면서, 사유의 확장은 상층(하늘)에서 물체 내부로 향하기도 하였다.
고 중세 이래로 단위 설정으로서 ‘수’와 ‘원자’이었는데 비해, 이 시기에 와서야 다른 단위들의 성립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로서 물질의 기본으로 빛(열, 운동, 힘)을 통한 열역학, 파동론, 전자기학 등에 의해 운동의 발산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이런 논의가 길어지면서, 기본 단위로서 ‘수’와 ‘원자’에 대해 이와 다른 견해의 물질 내부의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과 달리, 공간의 점과 직선의 공리에 대한 문제 제기로 다른 표면 또는 다른 면적만큼이나 다른 체적들과 다양체를 다루는 방식들을 제기하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실수 이외에 허수와 초월수도 제기되었다.
이런 경우들과 인접하여, 비유적으로든 또는 은유적으로든 생명체들의 분류에서 계층이 아니라 기능(역량)의 조합의 방식에 따라 다른 방법들이 제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물체의 운동과 생명체의 지속의 방식은, 하늘의 운행의 선분과 현의 자리(길이)의 음에서도 ‘조성작업’이 있다. 따라서 물체의 조합에서 ‘구성작업’과 ‘구축작업’과 달리, 생명체에서는 조성작업과 조화작용들로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심층의 발현에서 자발성은 신과도 무관하고, 구성과 구축의 언어(+수학) 논리와도 다른 방법으로 전개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1880년대) 왜 이런 다른 방법들이 제기되었음에도 또다시 지성의 논리가 우선인 것으로 돌아섰던가? 신앙 제도에서 완전성, 국가 체제에서 절대성, 논리와 수학체계에서 진리성이, 변증법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친근성으로 결탁(카르텔)을 형성하였다. 이 카르델이 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국주의는 각 나라에서 애국이라는 이름아래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사유를 나쁜 짓으로 또는 맑스주의자를 악마 또는 빨갱이로 취급하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유발생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를 잠재우고, 권세, 권력,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극우 카르텔(패거리)이 전쟁을 조장하였다고들 한다. 마치 아가멤논이 트로이에게 전쟁을 걸었 듯이. 20세기의 1차 대전이 소비에트 연방을 형성시켰고, 또 다시 이를 배척(배제)하기 위해 2차 대전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세 카르텔은 방향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금융의 지배였을 것이다. 그리스 식민지 참주정과 로마 황제정 이래로 비슷하게 제국 형성의 방법을 동일하게 전개하면서, 전쟁의 정복을 통한 국부(자본)축적의 길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제국주의와 제국에서 배제되었던 나라들과 이탈하려는 나라들을 통제할 수단이 금융(달러 본위)만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너지의 지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이는 19세기말 이래로 하려던 작업인 지식의 통합을 통해 지배를 다시 시도하였다. 컴퓨터를 통한 빅데이터의 한계를 넘어서 AI와 AGI를 통해 통치권과 절대권의 지배를 시도하고 있다. 엉뚱하게도 중국과 같은 통제와 계획 사회에서 빅데이터의 구축과 활용이, 미국과 같은 제국에서도 사적 이익의 극대화에서도 구축과 활용을 통한 지배방식과 다르지만, 또 하나의 지배 방향을 형성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데...
인류가 만들어 놓은 지적 자료들은 수학 철학이 보여주듯이, 하나의 체계도 아니었고 하나의 방법도 아니었고, 또한 하나의 현재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지식의 기원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체일 것이며, 과거와 현재의 이런 현상과 상황에서 드러나는 사건도 다양체로 보인다.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지적 체계의 단일화(절대화)의 작업, 신 아래서 완전성의 작업등은 인간 (지적) 사유의 착각이라고 했었다. 그래도 그런 사유가 여전히 존속하는 것은 신화에서, 유일신에서, 형상형이상학에서, 그리고 빅데이터의 성립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탐욕(사적 이익)과 오만(지배 욕심)에서 오는 단일화(획일화, 통일화)에 있는 것 같다. 미국 대통령의 황제정(참주제)과 같은 오만한 표현에서(우리 먼저 대통령도 닮아갔고, 지금도 닮아가는 것 같은 데), 공론장은 세 패거리의 공론장이지 다양체가 아라는 것이다. 탐욕과 오만의 탐만치가 서양 사상사에 아가멤논 이래로 3천년을 이어온 것인데 비해, 우리 역사에서도 조선조에서 훈구파, 서인, 노론(사문난적) 세력 이래로, 이어서 일제와 미국 제국 하에 포획되거나 포섭된 자들은 여전히 제국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긴 통사를 통하여 학습하면서, 연대하고, 공감과 공명을 이루는 새로운 사회, 공화정을 이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59UKF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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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달리 이야기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나로서는 덧붙여서, 이 책 한 방향을 열었듯이, 철학사를 이해하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여긴다.
당파성과 실천성을 제기할 때는 세계사의 진행과정을 이야기한다. 맑스 식으로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있다. 이를 이어서 금융 제국의 횡포가 휩쓸고 있다고 하는 시기에, 지식 또는 정보 지배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들 한다. 코로나로서 의학 정보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듯이, 이와 맞물려, 거의 6년 만에 인공지능을 통한 다른 시대로 이행하는 것 같다. 챗GTP, AI, AGI의 정보시대 임에도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무도 결정을 말하지 못한다. 이런 정보 시대의 특징은 이기자(정보를 통한 승리, 정복논리)는 주장만 남은 것 같다. 이런 역사적 흐름에 다른 길이 없을까?
세상은 체계와 진리로서만 통할까? 어쩌면 진리를 말하면서, 투쟁의 승리를 위한 도구와 방법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철학사를 완전, 보편, 절대에 마주하여 현실의 불완전, 무상, 상대 등으로 대립적 구도로 보는 것에는 은연중에 이원론이 깔려있다. 고중세에 하늘과 땅의 연대, 근세 시대에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정신과 물체 또는 영혼과 신체의 대응, 평행, 대칭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학적 관점과 형이상학적 관점을 벗어나 사회 또는 산업화에서 실증성이 등장했으나, 자연의 원인과 근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인간의 지식이 자연과 생명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지구라는 우주의 일부를 아끼자고 한다.
수메르와 이집트를 전승한 이오니아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진솔한 탐구에 이어서, 철학사를 하늘에 빗대어 또는 투영하여 생각하는 시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외적인 신(deus ex machina)의 작동에 끌려다녔다. 그리고 정복 전쟁의 이익 탈취에 재미들린 사고는 하나의 신에 의해 지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선동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조금씩 각성하기 시작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의 자치와 자율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활동도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들 또는 유일신과 연관하여 사고하기를 더 좋아했다. 자연에게 자율성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이들보다 부정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상층 우선의 사유는 제도에 반영되었다.
상층의 시대에서 표면의 시대로 내려온 것은 갈릴레이로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자연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노력은 사회 속에서 인민의 자치와 자율을 불러왔으나, 제도의 관습은 상층이 표면 아래 심층을 장악하고 있었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 인식의 발전과정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감과 공명을 다루어야 한다고들 한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이해, 지식의 발달, 의식의 내면성의 표출 등이 점차로 폭을 넗히면서, 서양철학사에서 ‘형이상학’을 ‘자연배후학’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언어에서도 논리가 우선이 아니라 공감성이 먼저라고 한다. 개념, 명제, 도식, 체계를 갖는 논리가 먼저 주어졌고 하는데 비해, 이런 논리의 선전제로서 원리와 공리가 인간의 협약의 일부일 것이라고 이의 제기하였다. 어쩌면 벩송이 말하듯이, 철학의 지혜는 모든 항목과 개념은 정지된 사실(만들어진 것)을 다루는 것이라기보다, 움직이고 변화하고 활동하는 상태들에서 한 단면을 잘라서(나누어서) 다룰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지속을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원리와 공리 이전에서 사람들은 공유하는 의식을 통해서 일반화를 먼저 했을 것이고, 상태들의 변화만큼이나, 그 상태들이 있는 때와 장소가 중요하기 언어에서 부사어가 중요하다고 한다.
덧보태어 이 항목 또는 용어들 사이에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발생의 근친성과 더불어 터전에서 함께 사는 친화성이 용어들의 결합(조합)으로 발언과 진술이 먼저일 것이라 한다. 진술들의 상호연관이 진술과 발언에서 사건들을 지칭하고, 표출한다. 그리고 사건들은 다양한 연관들의 덩어리로서 기호처럼 나타난다. 19세기 전반에서부터 열역학, 파동론, 전자기학, (요즘의, 인공지능의) 알고리즘까지도 덩어리 단위에 대한 기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기호화의 의미가 시대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그 과정의 노력에서 새로운 발명과 창안이 나오고, 그것을 표현하고 기호로 작업하는 인물이 시대의 인물로 등장할 것이다. 사회와 제도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인생도처 유고수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기나긴 역사에서 카이로스가 중요했던 만큼, 시대의 진동의 파고의 높이로서 변곡점, 즉 시대의 고원을 만드는 것이 인민의 힘(노력)일 것이다. 공화정을 기대하며 노력하는 인민에게 경의를!
(3:06, 59UKJ) (4:06, 59ULC) (5:32, 59U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