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준석 기자의 '폐하, 불 좀'
[2002-08-30]
지난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 세미나 참석을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5세가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중 유일한 현직 국가원수인 김대통령을 위해 만찬을 열었다. 분데빅 노르웨이 총리도 함께 참석했다. 재미있는 일은 만찬이 끝나갈 때쯤 일어났다.
식사를 마친 분데빅 총리가 갑자기 담배를 빼어 물었다. 버젓이 자기 나라 국왕이 보는 앞에서였다. 그러더니 한 술 더 떠서 국왕에게 "불 좀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랄 5세는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더니 지포 라이터를 꺼내서 분데빅 총리에게 건네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대통령은 만찬을 끝내면서 국왕과 총리를 비롯한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 가지에 놀랐다. 첫째는 총리가 국왕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데 놀랐고 둘째는 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놀랐으며 셋째는 국왕이 주섬주섬 꺼낸 라이터가 보통 사람들이 쓰는 것과 똑같은 지포 라이터인데 놀랐다. 이렇게 민주적인 생활방식이 노르웨이를 이끌어가는 힘인 것같다" .
이상의 얘기는 만찬을 끝낸뒤 김대통령이 직접 회고한 것이다.
그렇다고 노르웨이에서 국왕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가 미혼모 출신인 미모의 여성과 결혼한다는 사실이 1면 톱을 차지할만큼 왕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있는 나라인 것이다. 결국 위의 에피소드는 문화의 차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만찬 자리에서 이한동 총리가 김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김대통령에게 "불 좀 빌려주시죠"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권위주의적이고 딱딱한 우리 사회의 문화를 대통령에게만 책임지울 수는 없다.
대통령이 보여주는 모습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모습의 단면이기도 하다. 사회 전체가 변하지 않는데 대통령 혼자 변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국민 전체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하는 책임이 큰 것만은 분명하다.
돌이켜 보면 역대 대통령들은 나름대로 권위주의를 버리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들을 해오기는 한 것같다.
보통사람을 표방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청와대 회의실의 사각 테이블을 원탁으로 바꿔 대화문화를 정착시키려고 했고 김영삼 전대통령은 대중 정치인 출신답게 칼국수 점심과 청와대 앞길 개방으로 국민들과의 거리감을 좁히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각하'라는 호칭을 못하게 하고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국민과 직접 만나려고 했다. 이 모든 노력들은 나름대로의 진일보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아직도 국민들이 느끼는 대통령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뛰어난 유머감각과 서민적인 모습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대가 기대하는 '친근한 대통령'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동안 권위주의 시대를 겪어오면서 1인자로서의 역할에만 익숙해진 측면이 있다.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수용하기에는 어쩔 수 없는 세대차이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21세기이다. 다음 대통령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평적인 리더십과 권위주의를 깨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차기 대권주자들도 이런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같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를 관광코스로 개방하고 자신은 정부종합청사에 집무실을 차리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참모들과 팔 걷어붙이고 논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한다. 다 좋은 얘기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호와 상징은 전임 대통령들도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노력이 구호와 상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통령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대통령이 되면 이미 견고하게 형성돼 있는 대통령 주변의 시스템 -주로 의전과 경호-을 깨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은 대통령 자신에게는 매우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대통령의 편의와 권위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비상한 결단과 자제력이 없다면 그 편하고 좋은 시스템을 자기 스스로 깨나가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불필요한 권위와 형식과 규제들을 깨나가는 노력이 있어야만 21세기형 대통령 문화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에게 "불 좀 빌려주시죠"까지는 아니더라도 더불어 거리낌없이 토론하고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변화에 가속도가 붙길 기대한다.
호준석 기자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까 박정희대통령 시절의 씁쓸한 일화가 생각납니다..어느날 박정희가 지방순시에서 프리핑을 도중에 담배를 입에 물었답니다. 옆에 있던 도지사가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는데 불이 크게 켜지는 바람이 박정희가 움찔 했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젊은 경호원이 도지사를 한쪽으로 조용히 부르더니
각하를 놀라게 하면 되겠느냐며 무릎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답니다.. 아들뻘 되는 경호원에게 당하고 자존심이 상한 도지사는 너무 억울해서 박정희에게 호소를 했는데, 박정희 대답이 가관입니다.."어~허!! 나에게 몇 대 맞은 것으로 생각하시오..." 그런 사람을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하는 국민들, 고생좀 더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