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록적 강추위, 서울 영하16도
날씨가 매우 춥죠. 오늘 서울 경기 지반의 날씨는 영하 16도,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매서운 한파입니다. 20년만에 찾아 온 추위입니다.(90년 월 26일 영하 16.9도) 내일은 더 춥다고 합니다. 서울이 영하 17도, 강원도 철원은 영하 26도까지 내려간다는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서설이 폭설로 변하고 맹 추위가 일주일간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추위는 18께나 풀린다고 하는군요.
사실 겨울에는 눈도 좀 오고, 날씨도 추워야 하는 법입니다. 옛날에 눈은 농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비는 땅에 스며드는 양보다는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눈이 겨울에 많이 내리면 서서히 녹으면서 지면 깊숙이 스며들게 됩니다. 땅이 머금고 있는 물의 양이 많아지는 거죠. 이렇게 머금은 눈은 가물을 때 조금씩 배출해 물 부족을 채워줍니다. 그러니 옛날 천수답 농사를 짓던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눈 내리는 것을 반가워했던 것입니다.
겨울 추위는 농사 뿐 아니라 질병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니까 겨울에 모기들이 죽지 않고 아파트 지하실 등에 숨어서 살고 있더군요.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것은 겨울철에도 살아 남은 모기 한 마리가 1000개의 알을 낳고, 또 재미있는 것은 암모기가 피를 섭취하지 않아도 생식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군요. 문명이 가져다 준 작은 재앙입니다.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겨울철에 죽어야 할 해충들이 죽지 않으면 농사철에 수가 불어나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농약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겨울 날씨가 따뜻하면 어른들은 농사 걱정부터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운 것은 자연의 이치요, 조화입니다. 너무 춥다고 웅크리기보다는 활동을 많이 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그래야 한해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서민들의 겨울 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 올해에는 민생 정치가 잘 되어 서민들의 주름이 좀 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는 올해의 작은 희망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은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희망에 대해서 각 분야 별로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오늘은 종교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종교가 썩으면 끝내 그 사회는 망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 사회의 종교현실을 돌아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한겨레 21은 몇 주에 걸쳐 종교 개혁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재벌의 성장주의를 닮은 종교와 재산의 사유화 문제, 세금 포탈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선교 기관, 세습문제, 그리고 그와 둘러싼 재산 분쟁, 남녀 성차별, 기복신앙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종교개혁의 대안으로 평신도운동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한겨레 21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좀 간략하게 추려 보겠습니다.
1) 종교권력
재벌을 닮은 성장제일주의와 사유화의 그늘, 곪을 대로 곪은 환부를 도려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최근에 잠실동교회와 창신제일교회는 담임목사 세습 문제로 교회가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 교계에서 터져 나온 담임목사 세습과 종교적 성장주의가 비단 대형교회에 국한된 게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개신교쪽의 종교 권력 문제는 교회의 사유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사유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목회 세습입니다. 담임목사가 은퇴 뒤에도 계속 군림하고 돈도 마음대로 쓰려다보니 세습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입니다. 충현교회나 광림교회 등,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은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목회 세습은 개척교회로 출발한 뒤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대형교회로 발돋움한 곳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피땀에 의해 거대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는 논리를 펴면서 교회를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이죠.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는 “대형교회일수록 담임목사의 카리스마가 자행되어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가 거의 막혀버렸다”며 “세습은 교회를 세속적인 경영의 대상으로 삼는 등 기독교적 가치를 세속적인 것으로 바꿔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경제분야의 고도성장이‘재벌’형성으로 귀결되었다면 개신교에서는‘맘모스 교회’를 등장시켰죠.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4개 교회가 우리 나라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종교연구회 이진구 연구원은 “메가 처치(mega church)에의 꿈, 여기에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과 힘, 그리고 종교권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며 “한국 개신교는 세속적인 성장주의와 승리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권력화한 한국 종교의 비뚤어진 모습은 불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죠. 1994년에 이어 98년과 99년에도 폭력적인 종단사태를 겪은 뒤 국민적 불신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는 듯했던 조계종은 최근 다시 과거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중앙집권화 한 종단 권력의 정당성과 형평성이 논란거리입니다.
불교계 안의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불교바로세우기 재가연대’(상임대표 박광서)는 지난해 12월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성혜 스님(속명 강규환)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98년 수십억원대의 포커도박사건 당시 상습도박 혐의로 200만원의 벌금형으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인물이 종단의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총무원쪽은 사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총무원 관계자는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파렴치 범죄는 살인·강도·강도 정도에 국한되며 도박은 보통 풍속사범에 해당한다고 한다”며 “종헌(조계종의 헌법에 해당)과 종법(승려법 등 각종 조계종의 법률)상 결격사유로 보기 힘들고 중앙종회에서도 무난하게 넘어간 사안”이라고 설명합니다.
불교계에서는 이 같은 도덕 불감증에 대해 ‘권력승들은 징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관행으로 하고 있는 종단 권력의 메카니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즉, 종법에 따르면 사유재산 축적이나 상습도박, 이중호적 등은 승적박탈과 영구제명 등 중징계 대상이지만, 조계종 최고의사결정 기관인 ‘중앙종회 의원’이나 종단 권력승려들 가운데 이런 종류의 징계를 받은 이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권력을 누리는 대형교회에서의 세습이 ‘돈’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듯, 지난해 하반기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불교계의 이른바 ‘우담바라’ 소동 역시 돈에 휘둘리는 불교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죠. 우담바라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식물로 3천년 만에 한번씩 핀다는 전설의 꽃인데 이 꽃이 필 때에는 금륜명왕(金輪明王)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들에서조차 나타난 적이 없는 이 꽃이 지난해 과천 청계사와 관악사 연주암 등의 불상에서 잇따라 피어났다고 해 일대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언론과 학계에서는 사찰쪽이 주장하는 우담바라가 식물이 아니라 풀잠자리알이 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뿐이라는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았으나, 소동은 쉽게 가라 앉지 않았습니다. 해당 사찰의 경우 휴일에는 밀려드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하루 수백만∼수천만원에 이르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고 하죠.
이 소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데는 끝까지 ‘노 코멘트’로 일관한 조계종의 어이없는 태도도 한몫 했습니다. 오히려 총무원장이 해당 사찰이 주최한 법회에 참석함으로써 비합리적인 소동에 ‘동참’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도법 스님은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에 “우담바라꽃 사건은 포교와 경제의 이름으로 부처님 도량에서 비불교적 행위인 점·사주·관상 따위를 자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이 되질 않는다”며 “우담바라꽃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불교계의 현재 모습은 너무 남루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는 특히 “종단을 추하게 만들고 종도를 혼란스럽게 한 우담바라 문제를 묵과하는 집행부와 종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며 책임론을 제기하기도 했죠.
천주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천주교는 군국주의적 조직" 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내적 성장보다는 외형적 성장의 길을 달려왔다는 비판으로부터는 천주교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해 12월3일 ‘화해와 쇄신’을 발표하고 성직자들이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외적 성장에 치우쳤던 점을 반성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안팎에서는 바티칸의 지침에 따라 모양만 갖췄을 뿐 진정한 참회와 쇄신의 의지가 빠져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진리공동체’에서 점차 조직을 보호하는 ‘기구공동체’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나, 최근 명동성당 집회불허 방침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이듯 사회 문제에 점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비판 등은 이런 지적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절에 비해 성당이 특정 성직자에게 사유화될 위험은 적다고 보여집니다. 바티칸에서부터 변방의 이름 없는 시골성당까지 위계가 촘촘하게 짜여져 있고 몇 년 단위로 성직자들이 성당을 옮기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각에서는 교황-주교-본당신부로 내려오는 천주교 조직전체를 군국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개신교나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출된 잡음’이 덜한 천주교도 돈을 둘러싼 문제는 심심찮게 제기됩니다. 성당을 새로 짓거나 무리하게 증축할 때, 학교나 병원 사회시설 등을 인수할 때 특히 이런 잡음이 불거지죠.
99년 2월부터 인천교구 ㅂ성당에서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신자들이 성당 주임신부를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형사고발한 것이죠. 수백명의 신자들로 구성된 ㅂ성당 비상대책위원회가 주장한 내용은 93년 부임한 이래 주임신부가 성당신축을 빌미로 15억4천만원을 횡령하고 47억원을 유용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교까지 나서서 신도들을 설득한 끝에 고발은 취하되고 신부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사건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깁니다.
세속적인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종교는 자연히 이웃을 돕는 데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주대 노치준 교수(종교사회학)가 지난 92년 각 교회 재정결산서를 분석한 결과, 교회헌금 중 사회봉사비는 고작 3.8%에 불과하고 선교비도 5.3%에 그친 반면 급여, 건축 등 교회운영·관리비에 67%가 쓰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종교가 더 이상 핍박받는 소수가 아닌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세력’으로 존재하는 21세기가 된 것입니다.
2) 한국교회의 ‘기복 상품’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거듭해온 요인으로 ‘성령의 역사’나 ‘한국인의 기질’ 등이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기복(祈福)신앙을 빼놓을 수 없죠.
기복신앙은 부귀영화와 건강, 가족의 평안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종교가 과다하게 연결된 상태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적 성향은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말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위로와 축복의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흥회 스타일의 종교의식 등 현세 복락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체계는 1950년대 초 한국전쟁과 그 후 한국인들의 물질적, 심리적 안정욕구에서 형성되기 시작해 70년대 중반 이후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런 토양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주 세력이 기도원, 부흥회 등이죠.
기복신앙은 병 고치는 것을 교회의 주된 임무로 여기는 신유(神癒) 부흥회, 질병치료와 관련된 안수기도, 현세적 보상을 기대하는 헌금 강조 등으로 나타납니다. 목원대 김흥수 교수(교회사)는 “현세적 축복을 강조하다보니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으로써 성령이 강조되었고 성령의 은사는 재정적 성공의 은사로 둔갑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교회의 성장주의 및 대형주의와 맞닿아 있죠. 목회자들은 신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기복적 신앙을 설교합니다. 기복적 성향을 가진 신도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교회성장을 시키고자 한 것이죠.
3) 여자여 잠잠하라”- 종교 안의 가부장적 위계문화
흔히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때 개교회주의, 대교회주의 문제를 빠짐없이 꼽습니다. 개교회주의란 바로 옆의 교회가 굶고 있어도 내 교회만 편안하면 된다는 배타적 태도를 지적하는 말이고, 대교회주의는 신도 수와 성전규모 키우는 데 경쟁적으로 몰두하는 풍토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한 여성목사는 여기에 ‘남교회주의’가 첨가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중요직책이 남성들에게 독점되는 가운데 남녀성직자, 남자성직자와 여자신도, 남녀신도 사이에 가부장적 위계문화가 뚜렷하게 형성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70% 이상은 여성이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여성 신도들의 비율은 이를 훨씬 웃돌죠. 그러나 여성목회자와 교직자의 숫자는 터무니없습니다. 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와 교단에서는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를 꺼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성목사 안수를 이단으로 취급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여성목사의 안수를 허용하지 않을 때 종종 동원되는 말은 <고린도전서> 바울서신에 나오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대목과 예수의 12제자 중 여자는 한명도 없다는 주장을 하는 거죠.
문화관광부가 파악하고 있는 우리나라 개신교 목회자(목사, 부목사 등)는 12만명 가량입니다. 그중 기장 여성목사가 118명, 감리교 여성목사가 300여명, 예장통합 여성목사는 203명입니다. 대부분 여성목사들로 이루어진 여목총회의 여성목사들을 합해도 전체 목사 중 여성목사의 비율은 1%가 채 안 됩니다.
개신교 여성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이 수치가 바로 교회 안의 여성지위라고 잘라 말합니다. 여성목사를 허용하는 교단에서도 여성목사를 부목사나 담임목사로 초빙하는 비율은 무척 낮고, 교단에 따라 구역 할당, 사례비 지불, 사택·자동차 지급 등에 차별을 두기도 합니다.
여성의 사제서품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천주교는 상황이 더 열악하죠. 일례로 각 천주교회의 운영위원회라 할 수 있는 사목위원회에서 여성이 위원장을 맡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구별로 구성되는 평신도협의회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구요.
서울대교구 복음화사무국 강영옥 박사는 “성서모임, 구반장 교육, 고해성사 등 실제 교회활동에 열성적인 여성신자의 비율은 80∼90%에 이르지만 정작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는 10% 이하의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 여성승려인 비구니가 법회를 주관할 수 있고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81명 중 10명이 ‘여성할당’으로 돼 있어 표면적으로는 여성지위가 높은 것으로 보이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이랄 것도 여성이랄 것도 없이 그대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갈라디아서 3장28절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4)지옥과 아수라, 돈…돈…돈
1998년 조계종 폭력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기자가 국내 불교 문제 전문가 ㄱ씨를 찾아왔다. 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종교분쟁을 취재해봤지만 하나의 종교 안에서 분파가 다르다고 이렇게 목숨을 내걸고 폭력투쟁을 벌이는 건 처음 본다. 도대체 종교이념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ㄱ씨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1조원 정도가 걸린 돈의 문제다.”
전국 토지의 0.3%가 사찰 소유 땅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불교계가 관리하는 재산은 많습니다. 1994년 조계종 사태 이후 개혁종단이 들어서고 전국의 조계종 사찰이 보유한 재산관리를 통일적으로 하기 위해 재산현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나가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전통사찰의 경우 문화재관람료에 국립공원 입장료 수입의 10∼30%, 정부가 별도로 지급하는 사찰 보수유지 지원금, 신자들의 시주금까지 더해져 수입액은 엄청납니다. 이 때문에 이른바 ‘목 좋은’ 전통사찰들에서는 주지스님 임명 때마다 크고 작은 분규와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가끔씩 살인사건까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은 돈 문제인 경우가 많죠.
‘주지스님’이 돈까지 관리하는 자리로 변하면서 궂은 일을 전담하는 ‘행정승’이라기보다는 ‘권력승’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가 끝나면 선거결과에 따라 재정이 좋은 주요 사찰의 주지스님이 바뀐다고 합니다.
5) 교회와 불사 건축
관광객이 찾아오는 절을 만들기 위해 사찰들은 대형 건축물을 짓는 ‘불사’(佛事)에 관심을 쏟습니다. 조계종쪽은 애초 수도를 위한 전통사찰에 국립공원 관광객을 유치한 정부쪽에 역사적 책임이 있습니다고 말하지만, 사찰 스스로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는 지적을 면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또 무분별한 불사로 전통적인 사찰양식이 파괴되거나 개발로 인해 주변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비판도 일고 있죠.
불사는 이와 함께 뒤가 구린 자금의 세탁통로로 악용되는 경우마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 불교관계자는 “일부 대형 사찰의 주지스님들이나 재정에 참여한 불자들의 경우 만지는 돈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다른 용도로 투자했다 망하거나, 사금융업자로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서울 강남에 세워진 초대형교회나 여의도 순복음교회 등 수백억원짜리 휘황찬란한 교회 성전들은 돈으로 얼룩진 개신교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속의 황금만능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위용을 뽐내는 교회건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죠. 이런 교회를 짓기 위해서 건축헌금을 종용합니다.
해마다 9월이면 열리는 주요 교단 선거 때마다 금권선거로 얼룩지는 것도 돈을 우상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죠. 교단 총회장 선거에는 ‘10당 8락’이란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입니다. 10억원 쓰면 당선되고 8억원 쓰면 떨어진다는 것이죠. 총회장은 교단 전체를 운영하는 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철이 되면 각 세력 사이에 후보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납니다.
천주교의 경우 다른 종교보다 상대적으로 재정운영이 투명해 교구 차원에서 일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개별 성당의 신부가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교구는 성당이 보고한 수입내역에 따라 성당별 등급을 정해 공납금을 받고 신부 월급을 정해줄 뿐 개별 성당의 재정운영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또 각종 명목의 특별헌금이나 사례비는 보고내역에서도 빠져 있습니다. 신부 개개인의 양식을 믿고 상당부분의 재정운영권을 위임하는 셈이죠. 물론 성당마다 신자들로 구성된 사목위원회에서 재정 담당을 두어 입출금 내역을 관리하고는 있으나 신부가 임명하는 사목위원들이 제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죠.
돈이 종교를 망치는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종교의 종류와 상관없이 복식부기 제도화와 외부 감사제도 등을 도입하는 등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3. 깨어 있는 종교인
이상에서 한국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한국 종교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자본주의 종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윤추구를 지상의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 지금의 종교입니다. 성직자들은 재벌 총수를 닮아 갑니다. 이런 종교적 모습에서 이 시대의 희망이 생겨날리 없습니다.
저는 올해 한국의 종교가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 지녔던 꿈과 희망, 진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돌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죠. 잘못된 종교에 대해 강력한 비판과 대응을 하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참된 신앙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책임도 우리의 몫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의한 세상과 죄인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영합하는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진리를 보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종교인은 자신이 그렇게 살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 길로 끌어 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세상과 함께 동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인지, 무엇이 완전을 향해 가는 길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은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한국의 종교가 새롭게 되고, 또 한국의 종교가 한국 사회를 밝게 할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썩을 것을 쫓아가고, 세상 풍조에 물든 한국의 종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게 되기를 함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