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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第五 具足方便住
(1) 善根十種事
佛子야 云何爲菩薩具足方便住오 此菩薩의 所修善根이 皆爲救護一切衆生하며 饒益一切衆生하며 安樂一切衆生하며 哀愍一切衆生하며 度脫一切衆生하며 令一切衆生으로 離諸災難하며 令一切衆生으로 出生死苦하며 令一切衆生으로 發生淨信하며 令一切衆生으로 悉得調伏하며 令一切衆生으로 咸證涅槃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구족방편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온갖 중생을 이익케 하고, 온갖 중생을 안락케 하고, 온갖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신심을 내게 하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조복함을 얻게 하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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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오 구족방편주(第五 具足方便住): 제 5 구족방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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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한 방편, 훌륭한 방편, 완전한 방편이라는 뜻으로 구족방편이라고 하였다. 방편에도 좀 미진하고 부족하고 아직 덜 갖추어진 방편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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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십종사(善根十種事): 보살이 닦는 선근은 열 가지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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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구족방편주(云何爲菩薩具足方便住)오:무엇이 보살의 구족방편주냐.
차보살(此菩薩)의: 이 보살의
소수선근(所修善根)이 : 닦은 바 선근이, 보살이 착한 일 좋은 일을 하고 공덕을 닦아서
개위구호일체중생(皆爲救護一切衆生)하며: 다 무엇을 위하자고 하는 것이냐.
이것은 자선과 봉사라고 하는 보살행의 목적을 묻는 것이다. 근래에 불교 차원에서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 봉사단체도 많이 생겼다. 참 좋은 일이다. 어떤 스님은 아프리카나 캄보디아나 이런 데에 가서 우물을 무려 2천개를 파준 분이 있다. 아주 훌륭한 일이다. 그런 것이 불교다. 보살행을 지금 잘하고 있다.
내가 아주 존경하는 스님 중에 한 분이 비구니 스님인 대만의 증엄스님이다. 이 분은 세상에서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을 제일 잘하는 분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천주교를 다 합해서도 증엄스님이 이끄는 자제공덕회(慈济功德会)라는 단체가 봉사활동을 제일 잘하는 단체다.
그런데 내가 모델로 삼는 이는 그 분이 아니다.
그 분 말고 맑을 정(淨)자 빌 공(空)자를 쓰는 정공(淨空)법사라는 대만스님이 나의 모델이고 스승이다. 정공스님은 지금 86세인가 되었다.
대만불교와 한국불교를 비교해서 스님들이 하는 일이나 신도들이 불교를 위하는 일, 훌륭한 스님들의 불교적인 행위 등을 비교해 보면 한국은 불교도 아니다.
나는 88년부터 법공양을 해왔다. 요즘 자주 이야기 하게 되는데 나의 법공양 역사도 깊다. 88년부터 일지경이라고 해서 한 페이지 경전을 만들어서 범어사 일주문에 놓고 사람들이 가져가게 하는 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불교책과 사경책을 많이 찍고 있다. 오늘 본 사람도 있겠지만 이 건물의 1층에 법공양실을 마련했다.
엘레베이터도 없는 5층까지 책을 들고 올라오려면 얼마나 무거운가. 출판사 사장이 체구가 작은데 무거운 책 박스를 혼자 들어 나를 때마다 ‘수고한다’고 하면 항상 ‘괜찮아요, 괜찮아요’라고만 했다. 그것이 하도 안쓰러워서 이번에 1층에 법공양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제는 거기에 갖다놓으면 된다. 무거운 책을 5층까지 들고 올라올 필요가 없다. 스님들도 필요하면 1층에 가서 책을 가져가면 된다. 아직은 청소중이고 책이 진열이 안되었는데 다음 시간부터는 법공양 책들이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박수)
그런 일을 나 혼자 하고 있다가 어느 날 눈을 뜨고 보니 대만의 정공스님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정공스님의 법공양 역사는 나보다 깊다. 연세도 물론 많지만 30년 전부터 전세계에 무상으로 불교책을 보내 주는 운동을 했다. 우리나라고 어디고 보내달라고 하면 전세계에 컨테이너로 책을 막 보내주는 것이다. 참 대단하다.
거기 싸이트에 들어가 보면 일본, 독일 어디 할 것 없이 한 7,8개 나라의 연락처가 있고 포교당이 있다. 그 스님의 활동사항을 올려놓은 것을 보면 중국본토에서 대만스님인 정공스님을 본받는다고 그 스님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큰 절을 새로 지어서 그 활동이 굉장하다.
그 스님이 법공양 운동을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혼자 법공양을 하다가 나중에사 그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정공스님의 사상과 내 사상이 딱 맞는 것이다. 법공양 규모를 비교하면 나는 그 스님의 만 분의 일도 안된다. 앞으로 나도 동참자와 봉사자가 많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할 계획이다. 구할 수 있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음껏 가져가서 법공양을 하도록 하고 있다.
아직 정공스님처럼 외국에까지 법공양을 보내는 일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지만 그 스님이 나의 롤모델이다.
근래에 강의한 걸 들어보니까 86세나 되어서 힘이 많이 빠진 것을 느꼈다. 그래도 깨끗하고, 수행자답게 강의를 한다. 그 스님이 강의를 할 때 화면을 보면 글자를 주먹만하게 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탁탁 뜬다. 중국말은 못알아들어도 내가 어지간한 글은 읽을 수 있으니까 그 스님의 사상이 어떻다 하는 것은 알 수가 있다.
대만에 다른 스님, 성운스님은 워낙 유명하지만, 증엄스님과 정공스님 두 스님이 내가 늘 이야기를 하는 훌륭한 스님이다. 그 중에 내가 모델로 삼는 분은 정공법사다. 언젠가 그 분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인쇄해서 걸어 놓을 참이다. 정공스님이 나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혼자 묵묵히 법공양을 하고 있지만 천리만리 먼 곳 한국에서 감동을 받는 사람이 이렇게 있다.
또 누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사람이라도 이렇게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도 또 누군가 어딘가에서 즉자개해 하고 불유타교로 혼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 그런 운동을 펼친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고 효과가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아무튼 여기는 보살행의 목적에 대해서 나왔다. 자선과 봉사의 목적에 대해서 선근을 닦음이 모두 일체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증엄스님은 일체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 자제공덕회를 세웠다. 대만은 폭우와 태풍이 잦은 나라다. 증엄스님이 기독교인을 위해서 교회를 두 채 지어준 것을 한국사람이 가서 직접 사진으로 찍어서 사이트에 올린 것을 내가 앉아서 보았다. 스님이 교회를 지어주고 학교를 수 십개 지어주고 집을 수천 채 지어 주는 것은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일이다.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하며: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한다.
안락일체중생(安樂一切衆生)하며: 일체 중생을 편안하게 안락하게 해 준다.
애민일체중생(哀愍一切衆生)하며: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
증엄스님이 처음 발심한 것은 신도를 위문하러 병원에 갔다가 피를 흘리는 아리산 고산족 임산부를 보고 나서였다. 대만은 작은 나라지만 원주민도 여러 종족이 있다. 전부 쫓겨나서 높은 산에 산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보증인이나 돈이 없으면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급해서 산에서 내려온 원주민이 보증인이 어디 있고, 돈이 어디 있는가. 원주민이 돈과 보증인이 없어서 병원에서 쫓겨나며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증엄스님이 발심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일체중생을 애민히 여기고 구호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발벗고 나온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관세음보살보다 증엄스님이 더 훌륭한 관세음보살이라고 내가 늘 이야기 한다.
도탈일체중생(度脫一切衆生)하며: 일체 중생을 벗어나게 한다. 해탈하게 한다.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이제재난(離諸災難)하며:모든 재난을 떠나게 한다. 대만에 재난이 많다. 증엄스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그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호하고자 자제공덕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대만에서만 구호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구호활동을 한다.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출생사고(出生死苦)하며:궁극에 가서는 생사의 고통까지도 벗어나게 한다.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발생정신(發生淨信)하며: 청정한 믿음을 발생하게 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실득조복(悉得調伏)하며:다 스스로 조복하게 한다. 자기를 다스리게 한다.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함증열반(咸證涅槃)이니라: 모두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
구족방편주의 선근에 대한 십종사를 이렇게 열거했다.
구호(救護) 요익(饒益) 안락(安樂) 애민(哀愍) 도탈(度脫) 이제재난(離諸災難) 출생사고(出生死苦) 발생정신(發生淨信) 실득조복(悉得調伏) 함증열반(咸證涅槃) 열 가지로 보살행의 목적, 자선과 봉사의 목적을 잘 정리한 것이다.
(2) 勸學十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知衆生無邊과 知衆生無量과 知衆生無數와 知衆生不思議와 知衆生無量色과 知衆生不可量과 知衆生空과 知衆生無所作과 知衆生無所有와 知衆生無自性이니라 何以故오 欲令其心으로 轉復增勝하야 無所染着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의 끝없음을 알며, 중생의 한량없음을 알며, 중생의 수가 없음을 알며, 중생의 부사의함을 알며, 중생의 한량없는 몸을 알며, 중생의 헤아릴 수 없음을 알며, 중생의 공함을 알며, 중생의 지음이 없음을 알며, 중생의 있는 바 없음을 알며, 중생의 제 성품 없음을 아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이 더욱 늘고 수승하여 물들지 않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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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십법(勸學十法) : 열 가지 법을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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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 응당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함이니
하자(何者)가: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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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지중생무변(所謂知衆生無邊)과: 소위 중생이 가이 없음을 안다. 중생이 끝도 없다. 일체중생무변을 아는 것과
지중생무량(知衆生無量)과 : 중생 무량을 아는 것과
지중생무수(知衆生無數)와: 중생 무수를 아는 것과
지중생부사의(知衆生不思議)와: 중생 부사의를 아는 것과.
중생무변, 무량, 무수, 부사의 전부 같은 뜻이다.
지중생무량색(知衆生無量色)과: 중생의 한량없는 모습 한량없는 색깔을 아는 것과. 중생은 각양각색이다.
지중생불가량(知衆生不可量)과: 중생이 가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아는 것과
지중생공(知衆生空)과: 궁극적으로 그 실상은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지중생무소작(知衆生無所作)과: 중생은 지은 바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지중생무소유(知衆生無所有)와: 중생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아는 것과
지중생무자성(知衆生無自性)이니라: 중생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앞에서 나온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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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욕영기심(欲令其心)으로 : 그 마음으로 하여금
전부증승(轉復增勝)하야: 더욱 더 수승하게 해서
무소염착(無所染着)하고: 염착하는 바가 없게 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법문들은 바가 있음에 대해서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곧 스스로 알아서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는 연고니라.
8, 第六 正心住
(1) 聞十種法
佛子야 云何爲菩薩正心住오 此菩薩이 聞十種法하고 心定不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聞讚佛毁佛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法毁法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菩薩毁菩薩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讚菩薩毁菩薩所行法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衆生의 有量無量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衆生의 有垢無垢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衆生의 易度難度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法界의 有量無量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法界의 有成有壞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며 聞說法界의 若有若無하고 於佛法中에 心定不動하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정심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열 가지 법을 듣고 믿음을 결정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佛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을 찬탄하거나 법을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보살을 찬탄하거나 보살을 훼방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중생이 한량 있거나 한량없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함이로다." 또한 '중생이 때가 있거나 때가 없다'라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중생이 제도하기 쉽거나 제도하기 어렵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계가 한량있거나 한량없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계가 이룩하는 것도 있고 무너지는 것도 있다고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법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말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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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육 정심주(第六 正心住): 제 6 정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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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正心)은 바른 마음, 불법에 대한 마음이다. 불법에 대한 마음이 아니고는 바른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불자가 되고 불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불교를 애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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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십종법(聞十種法) :열 가지 법을 듣고 믿음을 정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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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정심주(云何爲菩薩正心住)오: 운하위보살 정심주냐.
차보살(此菩薩)이
문십종법(聞十種法)하고: 십종법을 듣고
심정부동(心定不動)하나니: 마음이 안정되어서 움직이지 않나니. 이것이 참 중요하다.
옛날에 서울 쪽에 큰 불교사태가 일어났을 때 나는 서울쪽으로는 고개도 안돌린다고 선언하고 정말 고개도 돌리지 않고 3년을 살았다. 서울출입은 말할 것도 없이 안했다. 다시는 서울에 안올라간다고 했는데 한 5, 6년이 지나니까 또 서울에 가게 되었다.
여러 해 전 일인데 그때 백만 불자가 개종을 했다고 한다. 불교사태가 톱뉴스로 나가고 전세계 뉴스로 타전되는 그 시기에 백만 불자가 개종을 했다. 개종한 것도 문제가 있고 그런 추태를 보인 것은 더 문제가 있다.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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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문찬불훼불(所謂聞讚佛毁佛)하고 :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부처님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듣고서
어불법중(於佛法中)에 : 불법 가운데서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마음이 안정되어서 움직이지 아니한다.
부처님과 불교를 찬탄한다고 들뜰 것도 아니고 부처님을 비방한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훼불 사건이 일고, 부산에서도 ‘어느 절 어느 법당이 무너져라’ 하고 어느 종교단체에서 기도를 했었다. 그럴 때는 뭐라 말할 수도 없이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불교티비에 송현이라고 하는 시인이 강의를 하는데 재미있게 참 잘한다. 그분이 마지막 시간에 울분을 토하면서 어느 종교 단체에서 이만 명인가 하는 신도들이 모여서 어느 절 무너져라 하고 공개적으로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도고 스님들이고 까딱도 안한다’고 하면서 혼자 울분을 토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고마운 마음이다.
찬불훼불 그러한 소리를 듣고서 불법가운데 심정부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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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법훼법(聞讚法毁法)하고: 법을 찬탄하거나 법을 훼방하는 것을 듣고는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가운데서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마음이 안정되어서 동하지 않는다. 남이 불교에 대해서 또는 부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지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애불정신은 있어야 한다. 불교를 애착하고 불교를 사랑하는 정신이 애불정신이고 불법을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호불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있어야 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전쟁에 임하는 것도 의로운 일이지만 진정 불자가 되었다면 불법을 지키는 일에 더 발벗고 나서야 된다.
승병문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물론 국가가 없으면 불교도 없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국가에서 할 일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생명을 걸고 나서야 된다. 그것이 불자로서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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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보살훼보살(聞讚菩薩毁菩薩)하고: 보살을 찬탄하든지 보살을 훼방하든지 하는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 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심정부동하며
*
문찬보살훼보살소행법(聞讚菩薩毁菩薩所行法)하고: 보살과 보살의 소행법에 대해서 찬탄하든 훼방하든 이러한 것을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마음이 안정되어서 동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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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중생(聞說衆生)의: 중생수가
유량무량(有量無量)하고: 한량이 있느니 한량이 없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중에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심정부동이라. 학인 때 이런 것을 가지고 많이 따졌다. ‘인구수가 계속 불어나는데 어디서 죽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태어나느냐, 어딘가는 줄어들었을 것 아니냐’ 그런 식으로 어리석을 때는 유량 무량에 대해서 많이 따진다. 그런 것을 듣고도 어불법중에 심정부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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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중생(聞說衆生)의: 중생이
유구무구(有垢無垢)하고: 때가 있다 때가 없다. 중생은 번뇌 덩어리다. 중생은 망상투성이다. 죄업장 투성이다. 이런 등등 이야기를 듣고는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심정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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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중생(聞說衆生)의: 중생은
이도난도(易度難度)하고: 제도 하기 쉽다. 제도하기 어렵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 불법 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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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법계(聞說法界)의: 법계는
유량무량(有量無量)하고: 양이 있다 양이 없다. 한량이 있다, 없다 그러한 내용을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 불법 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
문설법계(聞說法界)의: 법계가
유성유괴(有成有壞)하고: 성주괴공이 있다, 성죄괴공이 없다. 성주괴공이 있는데 우리가 잘 살면 뭐하나 등등 그런 소리에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 불법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며
*
문설법계(聞說法界)의: 법계가
약유약무(若有若無)하고: 있다, 없다 하는 데 있어서 그런 것을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가운데
심정부동(心定不動)하니: 심정부동하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이 되나니라.
(2) 勸學十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一切法無相과 一切法無體와 一切法不可修와 一切法無所有와 一切法無眞實과 一切法空과 一切法無性과 一切法如幻과 一切法如夢과 一切法無分別이니라 何以故오 欲令其心으로 轉復增進하야 得不退轉無生法忍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온갖 법이 모양이 없고, 온갖 법이 자체가 없고, 온갖 법이 닦을 수가 없고, 온갖 법이 있는 것이 없고, 온갖 법이 진실하지 않고, 온갖 법이 공하고, 온갖 법이 성품이 없고, 온갖 법이 환술과 같고, 온갖 법이 꿈과 같고, 온갖 법이 분별이 없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 더 증진하여 퇴전하지 않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하려 함이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남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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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십법(勸學十法):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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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응당히 십법을 배우기를 권하노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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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일체법무상(所謂一切法無相)과: 소위 일체법이 형상이 없다는 것을 배워야 된다.
일체법무체(一切法無體)와 :또 일체법이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변하는 것이고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육체를 형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세포인데 60조의 낱낱 세포를 분석하면 그 60조 세포마다 우리 육신만한 세포들이 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포라고 하지 않고 단위나 기준은 다르겠지만, 세포마다 각각 그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체다. 전부 그런 무수한 세포들이 뭉쳐서 하나의 육신이 된다.
꽃 한송이도 마찬가지고 나뭇잎 하나도 마찬가지고 무수한 실체들이 그렇다. 무수한 것들이 합해서 어떤 하나의 무엇인가를 형성한다. 무상이니 무체니 하는 것이 그런 뜻이다.
일체법불가수(一切法不可修)와: 가이 닦을 것이 못되며
일체법무소유(一切法無所有)와: 있는 바가 없으며
일체법무진실(一切法無眞實)과: 일체법의 진실함이 없음이다. 변하기 때문에 무진실이라고 한다. 진실이라면 변하지 않아야 된다. 그러니까 좀 섭섭해도 사람이 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좋아하는 것도 변해서 좋아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 까닭이 없다. 개 닭 쳐다보듯이 서로 그런 사이가 됐을 텐데 변했기 때문에 개 닭쳐다 보듯 보던 사이가 안보면 못견디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또 본래대로 돌아가 보기 싫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무진실이다. 진실성이 없다.
일체법공(一切法空)과: 공이다.
일체법무성(一切法無性)과: 무성이다.
일체법여환(一切法如幻)과: 환과 같다.
일체법여몽(一切法如夢)과: 꿈과 같다.
일체법무분별(一切法無分別)이니라: 일체법무분별이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렇다 저렇다 규정지어서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분별할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교리는 사실 화엄경의 진면목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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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욕령기심(欲令其心)으로: 그 마음으로 하여금
전부증진(轉復增進)하야: 더욱 다시 나아가서
득불퇴전무생법인(得不退轉無生法忍)하고: 퇴전하지 않는 무생법인을 얻고. 생멸이 없는 진리 이럴 때 법인(法忍)은 진리다. 참을 인자를 왜 썼느냐. 언젠가 설명한 적이 있다. 무생법인 할 때 왜 진리라는 뜻에 참을 인자를 붙이는가. 앞에서는 도장 인자를 설명했는데 여기 인(忍)은 참을 인자다. 진리라고 하는 것, 생멸이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숨어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늘 고통을 안고 산다. 가끔 진통제를 먹는데 진통제를 먹으면 고통이 좀 견딜만 하다. 그런데 고통은 눈에 안보이니까 아무도 모른다. ‘아프다 아프다’ 해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인(忍)이라는 것도 그와 같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비밀한 것이고 숨어 있는 것이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인자를 내가 이해하려고 여러 책을 많이 보다가 어느 날 유마경소에서 그 설명을 보았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참음을 통해서 뭔가가 이해된다. 진리도 그렇다. 불퇴전무생법인이라고 하는 참을 인자의 뜻은 그런 것이다.
유소문법(有所聞法)에 : 법문을 들음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곧 스스로 이해해서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는 연고니라.
9, 第七 不退住
(1) 聞十種法
佛子야 云何爲菩薩不退住오 此菩薩이 聞十種法하고 堅固不退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聞有佛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法無法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無菩薩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行無菩薩行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有菩薩이 修行出離修行不出離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過去有佛過去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未來有佛未來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現在有佛現在無佛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佛智有盡佛智無盡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 聞三世一相三世非一相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여, 어떤 것이 보살의 불퇴주인가. 보살은 열 가지 법을 듣고 견고하여 물러서지 않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법이 있다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행이 있다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보살이 수행해서 벗어난다. 수행해서 벗어나지 못한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함이니라. 또한 과거에 부처님이 있었다. 과거에 부처님이 없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미래에 부처님이 있을 것이다 미래에 부처님이 없을 것이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현재에 부처님이 있다.
현재에 부처님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없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삼세가 한 모양이다 삼세가 한 모양이 아니다 함을 듣고도 불법 가운데서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열가지이니라."
*
제칠 불퇴주(第七 不退住): 제 7 불퇴주
*
불퇴주 물러서지 않는 주. 앞에 나온 제6 정심주와 유사하다.
정심주에는 부처님을 찬탄하든 비방하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동하지 않는 이치가 나왔다. 여기는 물러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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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십종법(聞十種法): 열 가지 법을 듣고 견고하여 퇴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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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불퇴주(云何爲菩薩不退住)오 : 무엇이 보살의 불퇴주 물러서지 않는 주인가.
차보살(此菩薩)이
문십종법(聞十種法)하고: 십종법을 듣고
견고불퇴(堅固不退)하나니: 아주 굳건해서 물러서지 않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
소위문유불무불(所謂聞有佛無佛)하고: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 가운데서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하며. ‘부처님’ 하면 워낙 포괄적이고 뜻이 다양해서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대개 학자들은 부처님하면 2600여년 전에 인도 역사에 계셨던 가빌라국의 싯달태자로 출가해서 성도하신 그 한 분을 부처님이라 한다. 그렇게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 이상은 거론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빠진 학자적인 안목이다. 그런데 우리 수행자들, 종교인들의 생각은 다르다.물론 과거의 부처님이 계셨던 것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를 믿듯이 다 믿는다. 그것과 함께 부처님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서, 그 스승의 가르침을 함께 한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는다. 학자들이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대승불교와 선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에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는 차원에서 마음의 부처님을 안다. 그리고 또 영원히 상주불멸 하는 법신 부처님을 믿는다. 법신으로서의 부처님은 역사적인 부처님을 다 포함하면서도 항상 내가 생각하고 내가 믿을 때 언제나 내 곁에 있는, 내 마음속에 있고 내 주변에 있고, 우리 법당에 있고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기도하면 의지가 되고 내 기도를 들어주는 분이다. 그 부처님이 법신부처님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런 것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법신불로서 믿고 거기에 대한 신심이 확고하다. 그것이 큰 힘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무엇이며 없는 것은 무엇인가. 깨놓고 이야기 하면 부처님이 3천년 전에 있었든지 아니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있든지 그것이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사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절 주지스님이라도 좋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라도 좋고 나 자신이라도 좋다. 나는 확실하게 있는가? 정말 자신있게 있다고 할 만한가? 불교적인 지식을 조금만 가지면 요지부동하게 확실하게 있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상을 알기 때문이다.
무상, 무아, 고, 공 이런 설명을 다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도 있다고 할 것이 못된다. 그런데 없는 것 역시 실제로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서양에서는 법신불에 대해서 상당히 신앙한다. 미국 같은 데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오히려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을 많이 모신다. 그 자체는 법신불이 아니지만 그 부처님을 통해서 법신불을 이해하고 법신불을 우리 마음에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는 불교를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런 저런 부처님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다. 신앙에 따라서, 믿는 사람에 따라서 부처님이 여러 가지다. 그래서 유불무불이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부정하든 긍정하든 또 어떤 부처님을 믿든, 과거에 계셨던 역사적인 부처님을 오직 부처님이라고만 생각하든 아니면 법신불로서 지금 살아있는 이 우주에 변만해 있는 부처님, 언제든지 부르면 나타나는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든 그런 것에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다.
*
문유법무법(聞有法無法)하고: 또 진리가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을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중에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 심불퇴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법인데 ‘그 부처님 가르침 말짱 헛 거 아니야?’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런 소리에 결코 퇴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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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보살무보살(聞有菩薩無菩薩)하고: 보살이 있다, 보살이 없다 그런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불법가운데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심불퇴전 한다.
‘관세음보살이 실제 있어?’ ‘지장보살이 실제로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우리가 지대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신도들이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있다.신심이 왔다 갔다 할 때 그런 소리를 할 때도 있고, 농담삼아 ‘관세음보살은 이때 안 나타나고 뭐하는 거야’ 하는 말도 쉽게 한다. 사실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 소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존재를 합리화 시키느라고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다’‘지장보살은 원력의 상징이다’ 이런 식으로 그야말로 억지로 갖다 붙여서 견강부회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납득하고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 한 그대로 실제적으로 부처님이 계시고 보살님이 계시고,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있고, 지장도량에는 지장보살님이 있고, 관음도량에는 관세음보살이 있고 이렇게 막연하나마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존재한다. 뻔히 눈뜨고 우리 형제 자매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빠져버리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빠져 버렸는데 뭐가 있겠는가.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도 믿음이 빠져 버리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 눈 앞에 실증적으로 보여주지 못해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있다 없다에 대한 이론이 분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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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보살행무보살행(聞有菩薩行無菩薩行)하고: 보살행이 있느니 보살행이 없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증엄스님 이야기 정공법사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모두 뛰어난 보살행을 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할 수가 있다.
어불법중(於佛法中)에: ‘니는 니 소신대로 그런 소리 하던지 말던지 큰스님이다 나이많은 스님이다 공부 많이 한 스님이다 그런 조건 가지고 그런 소리 한다고 해서 흔들릴 일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절대 거기에 흔들릴 일이 아니다.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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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보살(聞有菩薩)이: 보살이 있어서
수행출리수행불출리(修行出離修行不出離)하고 : 수행해서 생사로부터 벗어난다, 수행을 해서 생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도대체 생사를 해탈 하는 거냐 안하는 것이냐, 진짜 그 도리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의심할 수가 있다. 많이 의심하고 논란도 많이 한다.
어불법중(於佛法中)에: 그런 소리를 듣고도 불법 가운데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심불퇴전한다. 내 불법을 믿는데 대해서는 전혀 까딱도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이 그런 소리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권위라는 것도 사실은 애매하다.
불교 안에서 공부 많이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저 사람이 불교를 믿는 건가 안 믿는 건가. 진짜 불자인가 불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평생 불교 집안에서 먹고 살고 일생을 살아가는데도 가만히 보면 전혀 불법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가 없는 것 같다.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불교에 몸을 담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그 마음이 젖어 들어있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경전강의를 많이 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것을 볼 때는 실망이 크다. 물론 여기서는 실망이 크면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다. 어불법중에 심불퇴전 이라는 말이 실망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해서 생사를 벗어나느냐 벗어나지 못하느냐 그런 문제도 의심할 만하지만 심불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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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거유불과거무불(聞過去有佛過去無佛)하고: 또 과거에 부처님이 있어서 진짜 과거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과거에 부처님이 없었는데 방편으로 하는 소린가.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말씀드리지만 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눈뜨고 옆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는 실제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 자신도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한다. 하물며 과거부처님 현재부처님 미래부처님이 있느니 없느니 그렇게 단정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것은 별개의 것이다. 경전에서 이렇게 ‘과거의 무량 부처님’ 하면 그 나름대로 자기소신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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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래유불미래무불(聞未來有佛未來無佛)하고: 이것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부처님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그런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가운데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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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재유불현재무불(聞現在有佛現在無佛)하고: 현재 부처님이 진짜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과거에 2600년 전에 인도 역사에 인류의 스승으로 나타났던 그 분이 부처님인가 그렇게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유불이다. 또 현재무불이라고 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것은 그사람 소신의 문제이고 그 사람 안목의 문제다.
내가 중언부언하지만 현재 난들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재 나도 있다고 할 수가 없는데, 현재유불, 현재무불에 대해서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중에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심불퇴전이다.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것에 있어서 직접적인 문제들을 여기서 많이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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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불지유진불지무진(聞佛智有盡佛智無盡)하고: 또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다함이 없다. 그런 것들도 우리가 한 번 의심 할 수가 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가운데
심불퇴전(心不退轉)하며: 심불퇴전 하며. 아주 신심이 견고한 사람은 그런 데 까딱도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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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삼세일상삼세비일상(聞三世一相三世非一相)하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가 한 모양이다. 한 모양이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어불법중에
심불퇴전(心不退轉)이니: 심불퇴전이니 아주 신심이 견고한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가 된다.
(2) 勸學十種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種廣大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說一卽多와 說多卽一과 文隨於義와 義隨於文과 非有卽有와 有卽非有와 無相卽相과 相卽無相과 無性卽性과 性卽無性이니라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於一切法에 善能出離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들이여, 이보살이 응당 열 가지 넓고 큰 법 배우기를 권할지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하나가 곧 많은 것이다 말하며, 많은 것이 곧 하나다 말하며, 글이 뜻을 따르고 뜻이 글을 따르며, 있지 아니한 것이 곧 있고, 있는 것이 곧 있지 아니하며, 상(相) 없는 것이 곧 상이며, 상이 곧 상이 없는 것이며, 성품 없는 것이 곧 성품이며, 성품이 곧 성품 없는 것이니라.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 나아가서 모든 법에서 잘 능히 벗어나고 법을 듣고는 곧 스스로 잘 알아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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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십종법(勸學十種法) : 열 가지 법을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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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종광대법(應勸學十種廣大法)이니 : 열 가지 광대한 법을 배우기를 권하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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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설일즉다(所謂說一卽多)와: 하나가 곧 다라고 말하는 것과
설다즉일(說多卽一)과: 많은 것이 곧 하나다. 우리가 법성게에서 외웠듯이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다. 화엄경에는 이런 소리가 많다.
문수어의(文隨於義)와: 글로써 뜻을 따른다. 글이 뜻을 따른다.
의수어문(義隨於文)과 : 뜻이 글을 따른다.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것도 관점의 차이다.
비유즉유(非有卽有)와: 유 아닌 것이 곧 유다라고 하는 것과
유즉비유(有卽非有)와: 유가 곧 유가 아니다. 학인 때 강원에서 교리를 한참 공부하다 보면 아주 재미가 있고 이론이 분분하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가 많고 많이 다투는 것이다.
논강 때 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글을 깊이 파고 심사숙고 하는지 어떤 스님은 졸립다고 책을 들고 마루에 나와서 기둥에 기대서 책을 보고 있었다. 도반이 보니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내려와서 머리 위 얼굴 앞에서 널름널름 하는데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책을 뚫어지게 보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기록에 없이, 강원에만 전래된 불교다. 그렇게 입으로만 전해진 구전 불교도 많다. ‘유가 곧 유가 아니다’ 이런 것들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때 논의의 대상 중에 하나였다.
무상즉상(無相卽相)과: 이것도 같은 것이다. 모양 없는 것이 곧 모양이다.
상즉무상(相卽無相)과 : 모양이 곧 모양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일은
무성즉성(無性卽性)과: 성품 없음이 곧 성품이다.
성즉무성(性卽無性)이니라: 성품이 곧 성품이 없음이다.
불교에는 명제가 많다. 설명이 풍부하고 말이 많고 술어가 다양하다. 다양한 불교 술어에 대해서도 우리가 확철하게 안목이 서지 않으면 이론이 분분하다.
성품이라고 하는 문제, 상이라고 하는 문제, 있음의 문제, 없음의 문제 일(一)의 문제 다(多)의 문제가 다 그런 것들이다.
*
하이고(何以故)오
욕령증진(欲令增進)하야: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서
어일체법(於一切法)에: 모든 법에 있어서
선능출리(善能出離)하고: 잘 능히 벗어나고. 결국은 일체법에서 벗어나야 된다.
일체법을 공부하는 것은 궁극에는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역설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유소문법(有所聞法)에: 법을 들은 바에 있어서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곧 스스로 이해해서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아니하는 연고니라. 참 좋은 말이다. ‘유소문법에 즉자개해해서 불유타교’ 나는 이 구절이 열 번 나와도 열 번 다 줄을 그어 놓았다. 매우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결국은 내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준비는 다 되어 있다. 불성이라고 하는, 인간 불성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의 어떤 난해하고 고준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소질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즉자개해 할 수 있는 소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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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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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有法無法하고 於佛法中에 心不退轉하며...혜명화 님!! 수고 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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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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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우리는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준비는 다 되어 있다. 불성이라고 하는, 인간 불성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