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토) 흐리고 바람 많음
승무원이 하바롭스크 도착 1시간 전쯤 깨워주었다. 간밤에 이불이 좀 허접했지만, 쿠션이 두툼하여 기차의 진동도 많이 느끼지 못하고 생각보다 잠을 잘 이뤘다. 고양이 세수(기차 안에는 세면대가 따로 없고 객차 당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 안에 있다. 위에 돌리는 밸브가 두 개 있는데, 처음에는 찬물 더운물 조절하며 틀어주는 역할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물이 나오지 않아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런데 물이 나오는 곳 즉 아랫부분에 돌기가 하나 있어서 이것을 손으로 누르고 있어야지만 물이 나온다. 참 불편하다. 한 손으로 누르고 한 손으로 물을 받아 씻어야 하기 때문에 머리 감을 엄두는 못 내고 세수도 고양이 세수가 될 수밖에 없다. 장거리 기차라서 물을 아끼기 위한 아이디어일까?)를 하고 어두운 객실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7시 15분경 하바롭스크 역에 내렸다.

하바롭스크 역
아직 하늘이 어둑하다. 우리나라보다 2시간 빠르니 한국시간 5시 15분이다. 날이 좀 밝은 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8시가 될 때까지 역사 안에 머물렀다. 어제 먹다 남은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하바롭스크 지도를 하나 사서 오늘 다닐 곳을 지도에서 확인했다. 물론 지도에는 내가 갈려고 하는 곳의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주소를 보고 찾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하면서 이로운 점이 있다면 근대 이후의 도시의 경우 광장을 중심으로 길들이 바둑판처럼 나 있는 계획도시이면서, 그 길을 따라 주소가 메겨져 있어서 주소만 알면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오래된 도시에 비해 훨씬 찾기 쉽다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일러 박물관 등을 관람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제약을 받지 않는 지역을 차례대로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역 앞에 나 있는 아무르스끼 부르바르(Амурский бульвар)거리(이 거리는 아무르강변까지 쭉 이어져 있는데, 길 중앙이 모두 공원처럼 녹지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개와 산책을 하거나 가족, 친구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를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 편에 있는 중앙시장(짼뜨랄느이 뤼녹 Центральный рынок) 쪽으로 앞 쪽 길(울리짜. 르바 똘스또보 ул. льва толстого) 또는 뒤쪽 길(울리짜. 뿌쉬낀나 ул. пушкина)을 따라 한 블록만 가면 아무르스끼 부르바르 거리와 평행선으로 나 있는 김유천거리(울리짜. 김유체나ул. ким ю чена)에 도착한다.

김유천의 활동이 인정을 받아 거리의 이름으로 삼았다.
여기서 다시 한 블록 더 가면 역시 평행선으로 나 있는 까를라 마르끄싸 거리(ул. карла мркса)가 나온다. 여기서 아무르강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길 건너편에 바로 레닌광장이 있다. 레닌 광장 에 있는 육교에서 왼쪽 편으로 내려가면 무라브에바 아무르스꼬보 거리(ул. муравьева амурского)이다. 이 길을 쭉 따라서 세 번 정도 건널목을 건너 네 번째 블록 길가에 한국 최초의 여성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가 활동하던 건물터(무라브에바 아무르스꼬보 22번지)가 있다. 현재는 21번지와 23번지 사이에 기념벽 같은 것이 서 있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레닌광장

김 알렉산드라가 활동하던 무라브에바 아무르스꼬보 22번지
다시 두 블록을 더 가면 무라브에바 아무르스꼬보 거리가 깔리니나 거리(ул. калинина)와 교차하는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깔리니나 거리를 따라 한참 올라가면 오른쪽에 한인사회당 기관지인 ‘자유종’을 비롯, 한국 역사 관련 교과서 등을 발간했던 보문사가 있던 건물(깔리니나 27б번지)이 나온다. 다시 이 길을 따라 가면 한인사회당 창당지인 조선인민회회관과 간부회관 터가 있었던 15번지와 18번지가 나오는데, 옛 건물과 번지도 도시개발과 도로확장으로 사라지고 없다. 주변 건물의 번지와 전봇대에 적힌 숫자로 대강의 위치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보문사 건물(길가에는 깔리니나 27번지와 27a번지가 있다. 이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야지 이 건물이 보인다.)

전봇대에 새겨진 번호가 번지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반대편 레니나 거리로 나와 아무르강변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황금 돔으로 장식된 화려한 성당과 꺼지지 않는 불꽃(전쟁기념탑)있는 광장이 나온다. 이후 아무르만에 도착하여 선착장을 둘러보고, 아무르만을 따라 걷다 긴 계단 위를 올라 콤소몰광장의 성당을 보았다. 계단에서 성당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 편 일대로 하바롭스크 극동군사 박물관, 극동미술관, 지역박물관,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관람료는 비싼 편이라 사진료를 포함 300~400루블 한다. 나는 미술이나 군사에는 관심이 없어서 군사박물관과 미술관은 보지 않았다.

군사박물관

극동미술관

지역학박물관 야외 전시실 귀부(우수리스크의 발해 거북이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귀부의 상태는 많이 마모가 되어 불량하고, 우수리스크의 것보다 못하다. 위에 있는 비석은 제짝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씨는 하나도 없으며 시멘트로 근대에 갖다 붙인게 아닌가 의심된다.)

고고학박물관
지역박물관 뒤편은 우쬬스 절벽 위(박물관은 건물에 들어갈 때만 입장료를 내며, 경내에서 절벽 위는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로 이어진다. 우쬬스 절벽은 1918년 9월 일본군에 의해 이 지역이 점령된 후 러시아 백위파에게 체포된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끌려와 처형당한 후 강으로 던져진 곳이다. 우쬬스 절벽 아래는 선착장에서부터 이어진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 박물관을 다 보고 난 뒤 다시 아무르만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아무르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서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유람선은 타야하지 않겠는가. 발해사에서 흑수(중국 흑룡강, 러시아 아무르강)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유람선도 아무 때나 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계절과 시간이 정해져 있다. 겨울과 비성수기에는 하지 않고 지금은 아침에도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밤에는 잘 모르겠지만, 성수기 밤에도 운행 안할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 야경을 즐길만한 시설이 없고 관광산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언어가 안 되서 알아보지 못했다. 오후에 운행한다는 것도 겨우 알아들었다는.... 이런 유람선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수단으로서의 배는 오전에도 운행하고 있었다. 여튼 호객행위를 하는 유람선에 탑승하여 200루블을 주고, 약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아무르대교 부근까지 갔다 왔다.

유람선

선상에서 바라 본 아무르대교

선상에서 바라 본 우쬬스 절벽(강변 산책로에서 볼록 튀어 나온 부근)
아무르강 유람선까지 해서 대충 하바롭스크의 일정을 마쳤다. 그런데 큰일이다.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유람선까지 탔는데도, 2시 밖에 안 되었다. 우수리스크행 기차는 밤 9시 반에 있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낸다 말인가. 하바롭스크 외곽의 유적지는 주소를 조사할 수 없어서 그냥 왔는데, 좀 더 철저히 조사 못한 것이 후회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나이족 민속촌이라도 알아 볼 것을... 하다못해 읽을 책이라도 한 권 가져왔다면. 배낭 무게 줄인다고 열심히 워드로 친 기초러시아어도 우정마을에 두고 오고... 내 평생 아무것도 못하고 무엇을 기다려 본 가장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거기다 기온은 점차 내려가고 열심히 걸어 다닐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설상가상 기차가 거의 1시간이나 연착했다. 블라디에서의 둘째 날 악몽이 떠올랐다. 사람은 망각에 동물이라고 그날보다 더 힘든 것 같다. 더 늦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까?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 나쁘지 않은 상황에 감사해야지 수도 없이 마음먹었건만 더 이상 감사하지 않다. 흑흑흑. 빨리 잘 생각밖에 없다. 오늘 동행은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다. 안 되는 영어로 옷 갈아 입게 나가 있을까 물어보신다. 당근 노~땡큐지. 옷 갈아 입을 건 아예 챙겨오지도 않았는데. 글쿠 우린 기차에서 옷 갈아입거나 벗는 문화는 아니지. 여튼 오늘도 이렇게 마감했다는...

기차 연착을 알리는 전광판(가장 윗줄 빨간색 55분이 내가 타는 기차의 연착시간이다. 열차시각은 모스크바시간으로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