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사에서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노란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내려앉는다. 지난여름 푸르름은 간 곳이 없다. 빛바랜 은행잎이 마음을 적신다. 나는 오랜만에 옛 청사를 찾았다. 누굴 만날 일이 있는 게 아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건강검진을 받는다. 단골로 다니던 근처 병원에 예약하고 나오는 길이다. 젊음의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디딘 곳이라 감회가 새롭다.
한여름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은 위를 향하고 있다. 해를 보며 광합성작용으로 몸을 이롭게 한다. 뿌리는 땅을 향하여 내려가 수분을 섭취한다. 방향성이 잘 어울려 건강하다. 고구마 싹을 보니 처음에는 위로 자라다 얼마 후 옆으로 기어간다. 가끔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면 좋을듯하다.
젊은 날, 삶의 나침판이 흔들릴 때였다.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아버님께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다. 누구를 탓하랴. 이어 어머님마저 세상을 떠나니 막막했다. 농무 濃霧속에 갇힌 배처럼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무너질 무렵 당숙이 손을 내밀었다. 해미 선영에 선친을 모시고 같이 살자 하여 서산 땅을 처음 밟았다.
하지만 가슴속에 수많은 꽃이 피고 질 때라 서산에서는 잠시 머물었을 뿐이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침내 웅지의 큰 꿈을 품고 종로, 신촌 고시원을 전전했다. 예기치 못한 가족의 우환이 다가와 쇳덩이처럼 짓누른다. 정상을 코 앞두고 방향감각을 잃었다. 마침 충남도에서 신호가 왔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어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할 운명인가보다.
도청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이다. 대전역에 내리니, 마침 석가탄신일 봉축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전역에서 도청 앞으로 이어지는 봉축 행렬이 장관이다. 마치 나를 환영하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그 행렬에 아들이 끼어 아장아장 걷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어느새 자라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가정을 이루었다.‘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했거늘 세 번이나 강산이 변할 시간을 충남도행 기차에 승차하고 있었다.
옛 청사는 바라만 보아도 묵직한 역사의 아우라가 뿜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 중앙청사와 전방 지휘사령부로도 자리했다. 요동치던 격동기에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와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를 잉태하여 탄생시켰다. 이제 산고를 잊고 내포로 떠났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한국사를 묵묵히 지켜온 이곳에 나의 삶도 묻어 있다.
도지사실은 옛 모습 그대로다. 내포로 이사 갔지만, 역대 도지사의 기록을 잘 정리해 놓았다. 대전역이 바라보이는 발코니에 서니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도지사에게 보고하러 와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비서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모습이 스친다. 예산편성서류를 한 뭉치 옆구리에 끼고 와서 보고하다 걱정 들으며 후회도 했었다.
어디 가나 보직이 중요하다. 관련 공부를 조금 했다고 예산실로 배치를 받았다. 충남도의 곳간을 관리하는 일이다. 나랏돈은 사람의 피처럼 온몸에 골고루 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그늘진 곳에 볕이 들게 하고 소외된 곳에는 손을 내밀어 따뜻한 공동체를 꾸리느라 낮인지 밤인지 구분 못 하며 지냈다. 고속열차의 지정석처럼 휴게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기차처럼 직진만 했다.
고행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직원이라기보다는 잡부라는 말이 적확하다. 예산실의 허드렛일이 내 몫이다. 때가 되면 밥걱정이다. 윗사람이나 동료의 끼니를 챙기는 일이다. 그 입맛이 얼마나 다양한지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처럼 맞추기 어렵다. 꼭 한두 사람이 투정이다. 그뿐 아니다. 선임자는‘나 때는 이렇게 했다’라며 여기저기 다니며 외상장부를 만들어 놓아 골치가 아프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빚쟁이들이 몰려온다. 군말 없이 해결해야 능력이 있단다. 울며 겨자 먹듯 아들에게 주려고 들어놓은 적금을 해지하여 털어 넣곤 했다. 또 왜 그리 회의가 많은지 모른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자고나면 회의 준비다. 시군직원이나 도청 직원을 불러 모으는 일부터 회의서류를 만들고 인쇄하여 회의장에 배부하느라 밥 먹듯 야근이다.
동료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그는 시군에서 근무하다 도청으로 전입했다. 당시 시군에서는 도청 근무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도청에 근무한다니 자랑스러워 찾아왔다.
“너 충남도청 직원이 맞아?
그가 책자를 인쇄하여 손수레에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찐했던 모양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지금은 예산안을 지방의회에서 심의‧의결한다. 당시는 내무부 장관이 승인했다. 한 해의 절반은 예산 승인받으러 서울에서 여관을 전전했다. 장관의 승인 권한이 하늘을 찌른다. 담당 직원이 빨간 사인펜 하나를 들고 춤추면 거기에 놀아나야 한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윗사람이 관심 두는 예산만 용케 찾아내어 삭감한다. 그 삭감예산을 살리려 줄다리기한다. 출장 올 때 쥐여 준 봉투나 각 부서에서 챙겨준 특산물이 그의 손에 다 넘어가야 밀고 당기는 일이 끝난다. 진즉‘김영란법’이 만들어졌으면 했다.
이러다 보니 가정생활이 엉망이다. 아내는‘검둥이가 세수하나 마나고, 장님이 눈뜨나 마나며, 자신이 결혼하나 마나.’라며 푸념이다. 아들도 아버지와 어린 날 추억이 없단다. 집에서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른다. 집안 대소사는 귓전에 공허한 메아리다. 한여름 나뭇잎이 낙엽 될 줄 모르고 태양을 향해 무성하듯 내 눈과 귀는 오로지 윗사람을 향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어낼 수 없는 노릇이다.
밀레니얼스 세대가 현명하다. 회사는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어찌 보면 옳다. 나는 직장이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는 훈‧포장을 받았지만, 가정에서는 직위해제 받아 마땅하다. 가장으로 무임승차하여 명함인생으로 살았다. 옛 청사를 둘러보니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팀장, 과장, 국장만 남아있다. 명함을 보고 찾아왔던 이는 모두 떠나고 그 자리에 떨어진 은행잎만 나뒹군다. 이제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돌이켜보니 즐풍목우 櫛風沐雨의 세월을 보냈다. 현직에서 물러나 세상을 보니 생경하다. 직진만 할 줄 안다. 좌회전이나 우회전이 낯설다. 때론 후진도 해야 하는데 어색하다. 진즉 기차에서 내려 차를 몰고 가족과 골목길을 누비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노란 은행잎에 묵직한 옛 청사의 모습이 드리운다. 저녁노을 황야 속을 달리며 푸름이 가득했던 여름날의 흔적을 지운다. 아!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