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에 제대할 때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도, 아버지 때도 가난했고, 형제가 많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상황에서 입대를 하고, 월남전에 파병됐습니다. 파병된 곳에서 민사과에 근무하며 영어로 서류 작성을 해야 하는 업무도 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능력에 따라 업무가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영어를 못 하는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이었고,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그렇게 크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당시에는 공장이나 3D 업종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취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군대서 느꼈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내 세대에서 끝을 내고, 후대에는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자 마음먹고 영업사원 몇 명을 모아 대원전기가 생산하는 전기밥솥 대리점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가세 신고 정책이 시행되고 영업 매출에 대한 경제가 투명해지면서 영업이 하락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이때까지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했지만 돈을 모아 놓을 만큼의 수익은 아니었기에 점점 사업은 기울고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대리점을 닫게 되었습니다. 전기밥솥 대리점을 닫고, 한동안 일없이 쉬고 있던 어느 날,,, 아이를 업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이일 저일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실패뿐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을 팔아 분당에 침구점을 개업하고, 넉넉한 수입은 아니지만, 생활고를 해결할 정도의 수준은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놀러 간 친구 집에서 친구의 누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남편이 카자흐스탄에서 선교사로 있는데 카자흐스탄에 놀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만 듣고 직항도 없던 시절 모스크바를 경유해 94년에 처음 카자흐스탄 침켄트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터전이 될까 싶은 마음에 둘러보러 나간 시장은 그야말로 참담했습니다. 말이 시장이지 어디서 고물만 주워다 파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슨 사업이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2주간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와 침구점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96년에 친구 누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지난번 왔을 때보다는 좋아졌으니까 다시 와보라는 말에 96년 두 번째 카자흐스탄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2년 전에 들렀던 시장과 비교해 시장이 모습을 갖춰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한국에서 하는 침구점의 미래도 불투명한 상황에 카자흐스탄에서 사업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막상 가족과 상의를 하니 가족 모두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대학 재수 중이었고, 둘째 딸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설득 끝에 카자흐스탄으로 옮기기로 하고 저는 먼저 침켄트에 도착해 숙소 해결 등 가족이 옮겨 올 준비를 했습니다. 군대 문제로 아들을 함께 오지 못하고 먼저 아내와 딸이 97년 초에 드디어 침켄트에 도착하고, 딸은 한국의 고등학교 1년에 해당하는 현지 학교에 편입했습니다. 러시아어 철자도 모르고 다짜고짜 들어간 현지 학교에서 딸이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첫 사업 구상은 시작하기도 전에 접어야 했다"
침켄트에 도착했으니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곳에 고려인이 많으니까 김치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유지를 하면서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해보자"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시장에 나가 둘러보니 고려인 할머니들이 우리가 평소 먹던 김치와 다르지만, 본인들이 지금까지 먹어 오던 김치를 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인 할머니들의 생계 수단을 침범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김치를 만들어 팔겠다는 마음을 접으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닥치는 대로 식품이며, 중고자동차, 중고기계를 가져와 팔기 시작했는데, 정말 생계 때문에 마구잡이 장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카자흐스탄에 올 때도 특별한 사업 계획을 세우고 온 것도 아니고, 닥치는 대로 가져다 팔았던 식품이나 자동차도 처음 해보는 거라 사업적인 비전도 보이지 않았을 뿐 더러 중구난방에 수익도 들쑥날쑥해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보일러 사업에 손을 대다"
한국에서는 2002년 월드컵으로 떠들썩하고 축제 분위기였지만, 제 주머니에는 천 달러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보일러를 사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보일러가 중국에서 경쟁력이 있으면 여기서도 현지인에게 먹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하면서도, 자동 보일러를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설치하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심지어 한국에 살 때는 연탄보일러를 사용해서 그 당시 관심을 가지게 된 자동 보일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보일러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업 밑천으로 쓸 돈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같은 교회를 다니는 김정복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분은 청주에서 사시다 카자흐스탄에 오셨습니다. 말이 같은 교회 교인이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염치 불고하고 5천만 원만 빌려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며칠 생각해 보시고 흔쾌히 돈을 빌려주셨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빌려주셔서 당장 보일러를 사러 한국에 나갔습니다. 5천만 원으로 보일러를 사기에는 자금이 부족해서 누님에게도 빌리고, 카드 서비스도 받아서 1억 2천만 원을 들고 보일러 공장에 찾아갔습니다. 보일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와서 보일러 이것 몇 개, 저것 몇 개 이런 식으로 구매한다고 하니 공장에서는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치였지만, 공장에서야 물건 산다고 하니 안 팔 이유는 없고 결국 물건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1억 2천을 모두 보일러만 사기에는 겁이 났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사업 밑천인데 혹시라도 보일러가 생각처럼 안 되면 방법이 없겠다 싶은 걱정에 1억 2천에서 딱 절반을 잘라 식품, 모노륨을 구매했습니다.
"어렵게 모은 사업 밑천 1억 2천... 사기꾼이 될 것인가? 사업가가 될 것인가?"
2003년 봄에 보일러와 식품이 도착했는데, 누가 봐도 봄에 보일러가 팔릴 시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상황은 암담했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대신 식품이 조금씩 팔리면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문제는 생계유지가 아니라 '남들에게 빌린 1억 2천만 원을 어떻게 갚을까'에 대한 고민과 가져온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한 심적인 압박감은 지금이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잠도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면서 했던 말은 "하나님, 1억 2천 만원 중에 6천 만원 정도만 갚을 수 있게 해주세요."였습니다. 마음이야 1억 2천 만원 모두 갚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6천만 원만 갚아도 마음의 짐의 한결 가벼워질 것 같더라고요.
"보일러 설치... 난 할 줄 모르는데..."
5월쯤 되자 어떤 사람이 와서 보일러를 하나 사면서 보일러 설치를 해달라고하는데, 저는 보일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 설치를 부탁해서 주변에 보일러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습니다. 그때야 일거리가 많지 않았던 때라 사람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기술자를 한 명 구해서 보일러를 설치하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데, 역시나 보일러 까막눈인 저에게는 더구나 러시아어로 설명하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도 못 했습니다. 설치하고 나니 고객이 시운전을 부탁해서 시운전해 줄 사람을 또 찾아 시운전하고 첫 보일러 판매를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다음에 보일러를 사러 온 사람은 보일러 설치와 집 난방을 같이 부탁하는 거였습니다. 보일러 하나 설치해 판매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집 전체 난방까지 해달라고하니 앞이 깜깜했지만, 사람을 수소문해서 난방 설비 기사를 찾아 보일러 설치부터 방과 거실 난방기 설치까지 끝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보일러도 난방 설비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매일 현장에 찾아가 어깨 넘어 눈동냥을 하며 하나둘 배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카자흐스탄에는 한국의 경동 보일러 공장이 알마티에 있었고, 귀뚜라미 보일러도 카자흐스탄 전국에 매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터키, 이탈리아, 중국산 보일러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보일러도 잘 모르는 제가 보일러를 판매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무식한 것이 용감하다'고 될 수 없는 사업을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물건이 하나, 둘 팔리기 시작하면서 주변에서는 '미스터 배가 판매하는 보일러는 싼 중국산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자 보일러 수요는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보일러가 팔려도 고민이었던 것은 6천만 원으로 사 온 보일러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겨울 시즌에 판매하고 어느 정도 재고를 가지고 가려면 보일러를 더 주문해야겠는데, 문제는 추가로 주문한 돈도 부족했고, 주문하면 한국에서 물건이 오는 시간도 한, 두 달 정도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 선금을 주고 보일러를 주문하는 현지인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0여 명의 현지인이 선금을 주면서 보일러를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회사도 작고, 서로 신뢰가 쌓일 만큼 인간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선금을 주면서 보일러를 주문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걸 모으니 꽤 큰 금액이 됐습니다. 보통 10~15명의 고객이 자재비를 포함해 공사비 전액을 선입금시켰으니까요. 그래서 고객이 주문한 수량에 여유분까지 더해 급하게 한국 보일러 공장에 발주를 요청했습니다. 물건이 도착하고 고객이 보일러 주문할 때마다 쫓아다니며 기사들이 어떻게 설치하고 시운전하는지, 난방 설비는 어떻게 하는지 하나둘 눈동냥 하던 중 해가 바뀌고 이듬해 봄부터 상황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웃긴 상황은, 저는 보일러나 난방 설비에 대해 전혀 몰라서 배운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현장에 나갔는데, 정작 보일러를 주문한 고객들은 그런 모습이 "외국인이 저렇게 성실하게 내가 주문한 보일러, 난방 설비 현장 감독을 꼼꼼하게 한다." 생각하고 대접을 잘해주는 거였습니다.
"현지인의 문화에서 발견... 바닥 난방이 히트를 치다"
이렇게 현지인들과 친분을 갖고 교류를 하면서 카작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살펴보니, 카작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방바닥 문화인데 대신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카펫을 깔고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바닥 난방을 해 보자' 싶은 생각이 들어, 엑셀 파이프를 구해 바닥 난방을 시도하려고 하니, 생소한 난방 설비에 현지인들이 난감해하는 거였습니다. 현지인은 "그 호스가 터져서 물이 새면 아래층까지 물바다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당신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죽기 전에 이 호스가 터져 문제가 된다면 내가 책임지겠소.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바닥 난방을 하지만, 호스가 터져서 문제가 생긴 것은 많지 않으니 믿고 맡겨 보시오" 현지인은 반신반의하면서 공사를 맡겼고, 바닥 난방이 호응을 얻기 시작한 것은 집들이 이후였습니다. 한국도 집을 사거나 짓거나 하면 손님을 초대해 집들이하듯, 카자흐스탄도 우리나라와 똑같이 집들이하더군요. 그런데 집들이 손님으로 온 친척과 지인들이 바닥이 따뜻한 것을 경험하고 너무 신기해하는 겁니다. 평소 자신들이 보던 것처럼 라디에이터 없이도 바닥이 따뜻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집들이 손님으로 갔다가 집들이 온 손님이 우리 사무실 가보고 싶다는 성화에 못 이겨 본의 아니게 사무실 탐방을 하게 되고 이 후 단독주택을 새로 짓는 현지인들의 바닥 난방 설비 요청이 계속 들오는 거였습니다. 첫해 바닥 난방하려고 난방용 파이프를 5만 미터를 샀는데, 일반적으로 주택 하나에 들어가는 파이프 양이 1,500미터 정도니까 잘해야 약 30채 정도 바닥 난방 공사를 한 것 같네요. 그런데 이렇게 첫해 바닥 난방이 좋다는 것이 현지인들에게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듬해부터는 수요가 몇 배가 늘어나서 직원도 더 늘리고 회사가 큰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일러 사업을 시작하고 2년쯤 지나자 기존 보일러나 난방 설비 업자들이 먼저 찾아오고, 필요한 자재나 보일러를 사 가고, 일도 같이하자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 겁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지키는 원칙이 있다면, '사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손님 한 명이 사무실을 찾아오더라도 물건을 먼저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나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먼저 만든 다음에 일을 진행하려고 했고, 이런 생각은 비단 사업뿐만 아니라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매번 강조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고객이 먼저 보일러를 교체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보일러 상태가 어떻길래 교체하려고 하느냐 물어봤더니,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보일러가 오래되기도 했고, 겨울에 보일러 고장이 나서 난방이 안 되면 곤란하니까 미리 교체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보일러는 아직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아직 상태가 괜찮은 것 같으니 더 사용해 보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가서 조치해 줄 테니 보일러는 나중에 바꾸라고 조언했습니다. 보일러를 교체하려고 왔던 고객은 도대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은 눈치였지만, 저는 그 사람이 보일러를 교체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저에게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야 누구든 탐이 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고객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얼마의 돈을 손에 쥐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에게 공사를 의뢰한 많은 고객이 선입금하고 순번을 기다렸다가 난방공사를 했다는 것은 저와 고객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어려운 일이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지인들을 만나서 선입금 받고 순번을 기다렸다가 공사를 했다고 하면 도무지 믿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이방인... 그러나 화합과 배려가 필요"
지금 카자흐스탄 전역에 흩어져 사는 교민과 앞으로 카자흐스탄에 올 분들께 조언을 드리자면, 한국인들은 카자흐스탄 사람에게 이방인이자 언젠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을 겁니다. 물론 몇몇은 카자흐스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곳에 묻히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이곳에 묻히든 이방인으로 카자흐스탄 땅에 온 이상 카자흐스탄 국민과 잘 화합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여기에 남아 있는 우리의 2세, 3세 그리고 새롭게 카자흐스탄에 사업을 위해 진출하는 기업에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별다른 계획 없이 카자흐스탄에 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큰 부자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을 떠나 카자흐스탄에서 보냈던 삶을 돌아보면, 제가 꿈꾸었던 가난의 계단을 뛰어넘은 것도 감사하고, 두 명(배재광, 배은영)의 자녀가 각자의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6명의 손주, 손녀를 얻게 된 것도 카자흐스탄에서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도 러시아어를 잘 못하지만, 러시아어를 잘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 누구도 제가 지금처럼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의 상황을 한마디로 한다면 "무식해서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처음 카자흐스탄에 와서 5~6년의 삶처럼 힘들 줄 알았다면, 한국에서 택시를 하거나 봇짐을 나를지언정 한국 떠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중국 한(漢)나라의 한신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쳐서 병사들이 물러서지 못하고 힘을 다하여 싸우도록 하여 조(趙)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처럼 저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상황이 힘들고 지쳐도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나를 있도록 도움을 준 가장 고마운 사람"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처음 돈을 빌려준 김정복 장로를 만나 돈을 갚으면서 물어봤습니다." 장로님은 저와 돈을 빌려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집도 절도 없는 상태에 번듯한 사업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빌려줬다가 떼이면 어떻게 하시려고 저에게 돈을 빌려주신 겁니까?" 그랬더니 김정복 장로께서 담담하게 "우리는 그 돈을 빌려주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로님께서 교편에서 퇴직하고 받는 퇴직금을 자녀 결혼을 위해 예금했다가 제가 부탁해서 빌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친형제끼리도 이런 상황에서 돈을 빌려주기 쉽지 않다는 것을 공감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김정복 장로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복 장로와 인연은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정복 장로는 카자흐스탄에 뜻이 있었는데, 비자 받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정복 장로가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물어보셔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고려 노인대학 졸업생들이 모국 방문할 때 몇 번 도울 수 있었던 것도 고려 노인대학을 만들고 이끌어 가는 김정복 장로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 인생의 큰 변화가 카자흐스탄에 와서 있었고, 제 경제적인 여유도 이곳 현지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현지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 재광이는 현지 보육원이나 어려운 곳을 방문해 도움을 주고 있다고 들어서 마음이 흐뭇합니다.
우즈벡에 사는 손녀가 10살 때 학교에서 내준 숙제 중에 할아버지에 관해 써 오라는 내용이 있었나 봅니다. 그 내용을 잠깐 들려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께, 할아버지는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제게 항상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셨죠.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여쭤보면 언제나 대답해 주셨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저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과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죠. 저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손녀 -한나-"한글로 쓴 내용이 아니라 부모가 번역해서 저에게 보내줬는데,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제가 살아온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알마티로 오는 침켄트 공항에서 한국인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누군지 모르다가 같이 있던 현지인에게 제 이름을 듣더니 반색을 하면서 '카자흐스탄 전설을 만났다'며, 한국 보일러 업계에서는 이미 대단한 분으로 소문이 났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감사하면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저와 인연이 있는 목사님께서도 저의 지금 모습을 보면서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제가 처음 카자흐스탄에 왔을 때는 희망보다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었으니, 하나님의 도우심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종업원 복지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한 해는 연초에 직원들에게 그해 수익 100%를 보너스로 나눠주겠다고 선포하고, 연말에 정산해서 근무 기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직원은 그 보너스로 차도 사고, 어떤 직원은 집 사는 데 보태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 올 수 있는 것도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직원들이 함께 고생한 덕분이라 생각하면 당연한 혜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근향(한인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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