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삶과,
어거스틴 어머니가 마지막 남긴 이야기
중세 로마교회의 아버지며 I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 초대교회에 있어서 신학사상의 최고 봉을 이루어 이전의 사상을 종합,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사상의 근원이 되었던 사상의 호수가 되었던 사람. 그가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를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라고도부 르지만, 우리는 이미 우러에게 익숙해진 대로 어거스틴이라 고 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 이전의 사상이 한 데 모아 졌으며, 그 이후의 사상은 그에게서 발원되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어거스틴이라는 한 인물 속에 있는 정신적, 종교적 능력이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을 것 인가 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남긴 흔적을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를 압도해 오는것이 시실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사상이 그렇게 큰 호수 같았고 높은 봉 우리가 된 것은 갑자기 된 것은 아니었다. 그 앞 에 있었던 작은 봉우리들이 어거스틴의 높은 사상의 봉우리 를 이루어 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부 연구가인 한 스 폰 캄펜하우젠이 평가한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 <유대적>인 근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도덕적 이면서 율법 적이며 엄격하여 교회의 규율과 질서가 강조 되어 복종의 요구가 있을 뿐, 자연세계와 정신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자유가 없었으며, 금욕주의는 배타적이고 부정적이 어서 이것은 실천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는 데는 위대하다 할 수 있었으나, 진정한 철학을 용인할 수 없는 메마른 라틴적 사고는 정신적 빈약성을 가져오게 되었고 동방지역 교회의 사변적이지만 풍부한 신학적인 삶과의 대결을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라틴교회의 입장은 어거스틴 이전부 터 점점 갱신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밀란의 감독 암브 로스에 있어서 이미 회랍신학과의 대결이 성서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결부되어 있었다. 암브로스는 어거스틴의 회심 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을 많은 사 람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의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그의 환경이 나 정신적 유산이나 그의, 천품상 비상한 자질에서라기보다는 자신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즉 자신을 발전시 키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에 깊이 파고 들어가 자신을 변혁시켜 재형성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 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능력을 자신의 것 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354년 II월 13일에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 (Taga" ste)에서 시민적 내지 소시민적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타가스테의 시의회 의원이 었고, 포도원을 소유하고 작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그는 성격이 사나왔고 방종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일생 이 교도로 있었다.
그 반면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여인상을 대표할 만큼 온순하고 인내 성이 있었으며 경건한 사람이었다. 샤프는 "어거스딘의 어머니 모니카는 교회사를 장식한 가장 고상하고 경건한 여자 중 의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모니 카의 일생은 아들을 위한 기도의 삶의 연속이었다 할 것이 다. 그는 아들이 가는 곳마다 찾아가서 아들로 하여금 그리 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하고 소원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 기의 「고백록」에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 고 있다. 어거스틴아, 내게 이제 무슨 걱정이 있으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다. (......) 무엇을 하려고 이 세 상에 더 살겠느냐?
이제 이 세상에 있어서의 나의 소망은 다 이루어졌다.
전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물 기를 원했던 까닭은 오직 한가지 뿐이었다.
내가 죽기 전 에 나는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고 죽겠다는 것이 었다.
나의 하나님께서 이제 내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
나 는 이제 네가 땅의 행복을 경멸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보았다.
내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 느냐?
이렇게 모니카는 일생을 아들의 회개를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여거스틴이 청소년 때 그의 가족과 그 자신이 추구하고 얻으려고 노력했던 목표는 빠른 출세와 부와 명예였다. 어거스 틴은 이와 같은 가족의 기대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 분한 천부의 재질을 타고났다. 그는 타고난 놀라운 웅변술로 학생들에게까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는 그를 수사학자나 법정변론의 공인교사로 만들기로 걸심을 하였다. 그려나 어거스틴이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카데 지에 갔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학비는 친척 이면서도 부자인 로마니아누스(Romanianus)가 도와주게 되었 다. 로마니아누스는 장래가 기대되는 이 소년을 도와주어 큰 인물이 되도록 하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후원으로 공 부를 열심히 하였고 후에 자기가 처음으로 내는 책을 그에게 바침으로써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어거 스틴은 이 때 침착하고 공부 잘 하는 학생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어거스틴 전기를 쓴 작가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한 빛나고 성공적인 수사학자였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어거스틴은 19세 때 자기 고향 도시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수도 카테 지 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게 되어 10년간 자기 전문 분야에서 가 장 빠르게 출세하고 유명해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크게 만족한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학생들의 수업태도에 실망을 하고 있었다. 예의범절도 모르고 강의를 훼방하는 행위, 선생이 진지하게 알려주려고 해도 그 내용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려는 학구 의 태도 등에 대해서 그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어거스딘의 생애와 사상 383년 로마에 가서 가르쳤을 때는 학생들이 교수의 가르침에 열심히 경청하는 것에 만족했으나,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수업료도 지불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 그를 피곤하게 하고 있었 다. 이런 일들이 그를 괴롭히었다는 것은 그 때만 해도 어거 스틴은 정신적 명예욕으로 가득차 있었고, 남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자기의 능력에 감탄해 주기를 바랐으며, 부 유해지고 훌륭한 결혼도 꿈꾸고 있었다. 그는 결혼을 자기의 지위에 따른 행복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때 그는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사 람은 이것을 어거스틴의 방탕하는 타락한 삶을 대표하는 한 실례로 들고 있다.
물론 어겨스틴은 이 여인과 정식으로 전 혼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13여년이나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 틴은 다만 어떤 육적인 만족만을 이 여인에게서 충족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기 애인에게 충실한 듯하며, 감 독이 된 후에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나, 그녀의 사 랑과 정절에 대하여 회상하는 것을 보면 비록 합법적인 결합 이 아니었다 해도 그 여인과의 생활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어거스틴은 그 아들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으로 <아메오 다투스(Adeodatus)>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이 아들을 몹 시 사랑했고 기대도 했으나, 어려서 죽어 어거스틴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서 수사학자로서 출세의 길을 가고 있는 동안 점점 마음의 공허함과 정신적 도덕적 삶에서 불안을 느 끼게 되었고 죄에 빠져들어간 영혼의 구원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