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맡겨진 책무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여수경찰은 원초이며 근원적으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다른 게 아니고 정부가 수립 된 후 최초로 반란군에 의해 피습을 당했던 것이다. 그해가 1948년 10월 19일. 흔히 여순사건으로 불리어지는 대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여수경찰서는 하룻밤 사이에 불이 타고 소속 경찰관 72명은 좌익에게 붙잡혀 학살을 당했다.
그런 인해 여수경찰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내상(內傷)으로 지니고 살고 있다. 당시 희생된 경찰관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공직자로서 제 직분을 다하다 숨져갔다. 위기에 처하여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직장을 사수하여 명실상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만큼 그 희생은 여간 값긴 것이 아니며 여간 고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은 관심부족과 바쁘다는 핑계로 추모사업은 커녕, 홍보조차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지만 그대로 덮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 사정도 감안된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고인들에게 짝이 없다.
비극의 발단은 여수 신월동에 주둔한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지방 좌익들과 합세해 봉기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제주도 폭동진압에 나서게 되자 같은 동포에게 총을 총을 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내부 사정도 있었다. 여수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공산혁명의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의 뿌리는 해방전부터 박헌영이 심어놓은 좌악사상이 바탕이 된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수에 잠입하여 철저하게 ㅔㅅ포조직을 키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반란군은 무엇보다도 먼저 경찰서와 경찰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한데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경찰은 총기를 가지고 있어 지역을 점령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경찰관서와 경찰관을 공했다. 이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경찰관 수는 전체 직원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는 여수경찰의 뼈아픈 비극이고 신생 대한민국에도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비극을 겪었기에 여수경찰은 그 아픔을 간직하며 굳건히 치안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한편으로 직원간의 유대 강화에 힘쓰고 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선배경찰들이 감내한 그 희생을 한시도 잊지않고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고 건설적인 일로써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선배경찰이 물려준 값진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초임시절에는 그 아픈 비극의 역사는 물론, 값진 희생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역사의식이 투철하지 못 했다기 보다도 그런 선배들을 기리는 행사가 한번도 없었기에 그런 사실조차 확인하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내가 뒤늦게나마 인식을 새롭게 하게된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보안부서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흩어진 자료를 접하고 선배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현황을 파악하고 난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파악해야 할 것이 이것이구나 .’라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료수집에 매달렸다. 자꾸만 고령으로 증언해줄 분들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또 다른 계기는 당시 선배님들의 투철한 경찰정신을 본 것이었다. 당시 희생된 경찰관들은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든지 도망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고 대다수가 거점을 사수하거나 비상응소(應召)에 응하다가 희생을 당한 것이었다.
그 비참한 실상은 실로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총에 맞아 무차별하게 죽어간 것은 물론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죽창으로 찔려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 살해에 가담한 자 중에는 반란군뿐 아니라 좌익인사도 다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악랄한 짓은 좌익들이 더 였다. 경찰과 우익인사를 색출해 내는 일 또한 그들이 앞장섰던 것이다.
이런 뼈아픈 희생위에서 출발한 조직이 충의회(忠義會)이다. 한데 이번 정기총회에서 별 능력도 없는 나를 회원들이 전폭적으로 추대하여 모임을 이끌도록 해준 것이다. 마땅히 사양해야 옳았으나 거절하지 못한 것은 평소 결단력없는 데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봉사직이라는 것과, 한 조직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으로서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마땅히 받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발로된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간과할수 없는 동기가 더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몇년전부터 간헐적 움직임이 보이던 시민단체가 마침내 "여순사건 특별법 국회발의'를 추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내용이 우선 심히 편파적이다. '14연대 주동 반란진압과 토벌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 보상'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반란시 경찰관의 희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이게 형평성을 갖춘 것인가.
그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었고, 작은 조직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충의회는 전국경찰에 다 있는 조직이지만 여수의 경우는 특별하다. 과거의 이러한 아픔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희생 정신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당시 반란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여수에서만 72명의 경찰관을 비롯해 우익인사가 16명이나 된다. 시민단체에서 파악한 진압과정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가 죽은 124명과 비교해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하여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당시 죽어간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을 당했다며 허위 백서를 만들고 위령탑을 세우자며 떠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보상까지 해야한다며 국회에서 발의를 해놓은 상황이다. 이를 어찌 전 경찰 아닌, 충의회 차원에서만 좌시할 수 있는 일인가.
반란에 앞장선 자들은 무도하기 그지 었다. 경찰관은 일제시대의 경찰관으로서 국민을 핍박하고 못살게 굴었다고 매도했다. 더 나아가 어느 경찰관은 부녀자를 강간까지 했다고 허위 선전하여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터무니 없는 중상모략이다.
그렇지만 여수경찰은 차분하게 인내하면서 역량을 키워왔다. 그 결실이 전국적으로도 우수 조직으로 태어난 충의회를 들수 있다. 회원수는 적지만 좌익척결의 의지는 남다르다.
조직을 맡으면서 앞으로 해야 할 계획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금년에는 그동안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치르지 못한 추모제부터 시행할까 한다. 흩어진 유족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시민들도 초청하여 값진 희생을 위무코자 한다. 그리한다면 억울하게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도 이제는 마음을 풀고 영면하리라. 그 일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다. (2013)
첫댓글 진실은 언젠가는 꼭 밝혀지게 마련이지만
선생님과 같은 선각자의 책임의식과 역사정립에 대한 깊은 사명감이 세상에 진실을 속히 알리게 될 것입니다.
부디 큰 성과 거두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인사님의 격려말씀 고맙습니다. 우선은 회원결속과 추진할 사업을 하나씩 가려서 실천가능한 것부터 실행에 옮기는 일이 중요할것 같습니다. 상반기 중에 우선 희생자 유족을 모시고 추모제부터 지낼 생각입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적임자에게 제대로 제 지위를 주신 것 같습니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대부분 경찰관들이 크게
고생을 하는데 알아주지 못함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금년부터 추모제를 개최할까 합니다. 회원 결속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중요한 일을 맡으신 선생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어깨가 무거우시겠지만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부담되고 어깨가 무겁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다음달에는 첫행사로 보성으로 관광을 떠나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보람있는 일에 박수를 보냅니다,,,,!!!
박선생님이 오랜만에 들르셨군요. 책임이 막중하지만 잘 이끌어가도록 힘쓰려고 합니다.
부담을 마다하고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을 맡아서 하시니 존경받을 만합니다. 선생님말고는 적임자가 없지 싶네요. 유족들을 위로하고 역사가 바로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은 아무래도 역부족이지 싶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관심을 가진다해도 저쪽편을 많이 드니 우군이 적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