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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만의 무수한 집단순장무덤들은
고구려.백제보다 후대(AD3-4세기)에
한반도남부지역에 출현한 신라.가야세력의 실체가
흉노로 대변되는 북방 유목민들임을
알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고고학적 근거입니다.
부여도 순장풍습이 있었는데,
본래 부여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1대 왕으로 취임한
단군왕검 막내 아들 이름 부여에서
기원하는데, 단군조선전문가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부여위치는 본래 유목민들인 맥족이
동서로 이동하는 분기점인 요하지역입니다.
요하지역은 중국문명의 발원지가 되는
요하문명지역이기도 합니다.
요하지역에는 이집트보다 1000년이 빠른
피라미드의 무덤군들이
순장풍습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이 요하지역을 분기점으로 맥족은
서쪽으로는 흉노.몽골.터키로,
동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일본으로 양분되었다.
본래 고구려의 전신인 고리국은
역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역에 있었습니다.
골본부여 3대 단군에 취임했으나
토착세력의 텃세로 결국 송화강 지역에서
쫓겨 남쪽으로 망명한 고추모가
연타발과 소서노의 도움으로 압록강변에서
고구려를 개국하고 서쪽으로 진출하려던 배경이
선조들의 땅인 고리국을 되찾기위함이였다.
고리국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통치자들의 모국이다.
유라시아으로 나가는 요하지역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입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송화강이 있는 길림성이 부여로 인식되는
역사적 배경에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대단군 고열가 단군이
단군조선의 문을 닫고 산으로 들어가자,
고열가의 황족인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중앙수도인 송화강지역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부여를 개국했기 때문이다.
- 윤복현 -
[자료]요하문명과 적석총(피라미드).순장풍습
뉴허량 16개 지점 가운데 13곳이 적석총으로 조성됐다. 그 가운데 이곳(2지점)의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들어가자마자 가운데 조성된 적석총은 남북 18.7m×동서 17.5m의 방형으로 조성됐는데, 3층으로 된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 안에는 석곽을 놓았고, 그 안에 석관을 조성했다. 석관 안에서는 성인 남성의 인골과 홍산문화 옥(玉)의 대표격인 용 모양의 구부러진 옥이 확인되었다.
대형 적석총은 양 옆으로 원형 제단과 거대한 적석유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의 전통은 훗날 고구려·백제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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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허량 2지점 항공사진. |
또한 제단과 관련한 이야기는 후술하겠고, 여기에서 언급할 것은 적석유구이다. 이 돌로 쌓은 유구 안에는 무려 26기의 크고 작은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큰 석관은 길이 2m, 높이 60㎝를 넘고, 작은 석관은 길이 55㎝ 정도인 것도 있다. 순장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상(은)나라와 부여의 풍습으로 이어지는 장례 풍습이다. 그리고 적석유구 속에 석관묘를 밀집시켜 조성한 것은 한반도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과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과 비슷하다.
이 유적의 모티브는 뻔하다. 가운데 중심대묘, 즉 대규모 적석총은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이 분명하며, 적석유구 속에 조성된 26기의 무덤은 씨족사회의 구성원들이 계급별로 묻힌 것이다. 그리고 제단은 그들이 지모신과 조상신을 모신 증거이다. 중국 학계는 3단 계단식 적석총의 위용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는 훙산문화 사회는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사회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훙산문화처럼 계급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사시대 유적은 없어요. 이미 단순한 씨족사회를 넘어선 고국(古國)의 단계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출했어요.”
이교수는 “더 봐야 할 게 있다”면서 다시 기자 일행의 소매를 끌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동방의 피라미드요?”
“가보면 압니다.”
잠깐 길을 잃었다가 뉴허량에서 1㎞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좐산쯔(전산자·轉山子)라는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 낮은 나무가 서있는 아주 낮은 구릉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즉 중국말로 진쯔타(金字塔), 즉 금자탑이란다. 이집트의 웅장한 피라미드와 비교한다면 ‘피식’거릴지 몰라도 중국학계의 자부심은 대단하단다.
“그럴 만도 하죠.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앞선 시기의 피라미드니까요.”
기자는 속으로 중국인들 특유의 ‘뻥’인가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계단식 적석총을 흔히 피라미드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라 일컫는다. 그보다도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범상치 않은 모양이다.
“한변이 100m나 되는 거대한 층급형 피라미드예요. 지금 확인되는 것은 7층까지랍니다.”
이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판축의 형태로 흙을 다지고(층마다 8~10㎝로) 바깥 쪽은 돌로 쌓았어요. 다진 할석의 면을 바깥으로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견치석과 엇박자로 쌓는 석축의 방법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부여~고구려·백제·신라~일본 규슈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적석총과 같은 모티브라는 것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조성된 앞에 제단(60×40m)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훙산문화 사람들이 이 제단에서 피라미드의 주인공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피라미드는 1992년 본격적으로 확인됐다. 아직도 표면만 발굴했을 뿐 중앙부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중국인들이 이 수수께끼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라미드라 일컫는 이런 거대한 적석총의 존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BC 2612년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그런데 이 동방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교수는 “모티브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다”면서 “이 건축물은 제단을 갖춘 무덤이며 그리스 신전 같은 역할을 했으니 훙산문화가 다른 세계문명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동기 문화는 동이가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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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피라미드에서는 청동기를 제조할 때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청동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됐다.
이를 두고 중국의 저명한 야금학자는 “기존 중국의 청동기 시작 연대(BC 2000년설)보다 1000년 이상 앞선 BC 3500~BC 3000년 사이에 이미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해왔다. 아직은 그의 견해가 세계학계에서 공인되지 않고 있다. 만약 공인된다면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가 창조됐다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무엇보다 이곳은 동이의 영역 아닌가.
중국학계는 입이 딱 벌어졌다. 중국 고고학자 옌원밍(엄문명·嚴文明)은 “이 피라미드는 왕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화문명 5000년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피라미드는 어떻게 다링허와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반도와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로 퍼졌을까. 고구려 지안(集安) 국내성 일대에서 발견된 1만여기의 적석총은 이 뉴허량 적석총과 어떤 친연관계를 갖고 있을까. 기자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여행을 떠나보련다.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이형구 교수가 더 알아야 할 피라미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바로 요하문명의 뿌리가 한반도문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남방식 고인돌 양식이 기후변화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집안지역에 1만여기에 달하는 초기 피라미드 무덤군들을 남겼으며, 홍산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홍산지역의 적석총문화가 다시 서안-티벳-중동-이집트로 이어졌으며, 집안지역에서 송화강지역을 걸쳐 북쪽으로 이주한 고대 한반도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피라미드문명을 건설했다고 할 수 있다. 남미지역의 피라미드 주역들은 몽골인종인 인디언들로 스스로를 태양족이라고 불리우고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윤복현]
순장유적지가 발견되는 세계지역은 '한류'로 대변되는 고대사의 주역이였던 한국인들의 이동,정착과 관련한 역사활동 영역이라 추정해도 큰 문제가 없다본다.
[자료]한국고유의 풍습-순장에 대하여
고인돌=>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고대 한국인들의 거석문화와 관련되는 순장풍습은 고대 한국인들의 풍습으로 진짜 배경은 정말로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랑을 잊지못하여 따라 죽는 것 처럼, 따라 죽고 싶을 정도로 홍익인간정치를 한 통치자들이나 사랑하는 사람.가족의 죽음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풍습이였는데, 이후 하늘의 이치를 거스리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통치권위를 내세우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본다.
동방족(고대 한국인들)의 풍습으로 알려진 순장이 양저문화에서 발견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배장제도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절강성 여항현 요산(瑤山)에서 서로 다른 흙을 사용하여 둘레를 자갈과 잘게 자른 돌을 두른 3층의 제단 유적이 발견됐다. 길이는 약 20미터, 면적 400제곱미터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유적으로 보이는데 부장품을 고려할 때 순장의 흔적도 보인다. 즉 사각형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주위에 순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압록강변 집안지역에서 홍산지역으로 전파되어 서안지역.티벳.중동.이집트.아메리카지역 등으로 전파된 동방족의 구조물이죠.중국에서 피라미드식으로 된 4각형의 제단이나 무덤은 모두 중국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했다. 절강성의 요산을 포함하여 4각형으로 된 피라미드 구조물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김천씨의 능과 만주 길림성 집안현의 장군총, 서하왕국(당항족이 세운 유목국가)의 왕릉, 북방식 신석기문화유적인 요령성 건평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사용하며,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여 명에 이르렀다.(其死夏月皆用 殺人殉葬 多者百數)"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부여에 순장이 존재했음을 전하는, 우리 나라의 순장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지요.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도 문헌상에 순장기록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 지배층이 모두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이고, 또 동천왕 사후에 가까운 신하들의 순사(殉死)가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초기에는 순장이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부여, 고구려, 백제지역에서는 순장유적이 발견된 바 없습니다.
순장이란 부족장이나 왕, 또는 가장이 죽었을 때, 생시에 가까이에서 그를 모시던 신하나 시녀, 사랑했던 처나 첩 등을 함께 매장하여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시중들고 생활할 수 있게 했던 제도입니다. 이것은 고대사회 때 성행했으나 사회가 발전하고 인간애가 성장하면서, 사람 대신 흙으로 만든 인형인 토우나 토용을 묻는 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대시기에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순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 인도, 멕시코, 남태평양의 섬 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순장풍습은 고대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풍습으로 고대 한국인들이 활동한 역사영역을 알 수 있는 좋은 아이콘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한국인들인 슈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실크로드를 따라서 정착했던 중동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우르(Ur=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고향) 유적의 왕묘에서는 59인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6인은 완전무장한 병사, 9인은 화려한 장신구를 가진 여자였다. 슈메르인들도 순장풍습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를 태양족이라고 칭했으며, 한국의 전통부적과 동일한 물고기문양을 제사그릇에 새긴 티우(치우)왕족에 해당하는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조세르 왕묘 주변에서 궁녀 273인, 신하 43인을 순장한 묘가 발견되었다.
흉노.몽골인들이 휩쓸여서 피를 섞은 유럽에서도 고대 갈리아(현 프랑스)·아일랜드인·불가리아인·슬라브인들에게서도 순장 또는 순사(자원하여 묻히는 것)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제도가 지도자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이 반복됐다.순장이 성행한 시기는 동이족이 건설한 것으로 인식하는 은나라로 보통 한 무덤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순장됐는데 순장자의 수만큼이나 묻힌 방법이 다양하다. 두개골만 매장된 구덩이가 있는가 하면 꿇어앉은 채 살해된 순장자들도 있다. 한 구덩이 안에서 수십 명씩 포개져 매장된 순장자도 발견된다.
진나라 목공이 사망한 기원전 621년에도 177명이 순장됐는데 그 가운데는 엄식, 중항, 침호 등 충신들이 포함돼 있었다. 순장제도는 진 헌공 원년인 기원전 385년에 폐지됐는데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즉위한 2세 황제 호해 때 다시 등장했다.
그 후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는 순장제가 사라졌는데 명대에 부활한다. 명나라 태조 때 많은 궁인들이 순사했고 성조ㆍ인종ㆍ선종 때도 순장했고 청나라 때도 세조가 사망하자 후궁 30명이 순장되었고 성조(聖祖) 때도 40명의 궁녀를 순장하려다 성조가 심히 싫어하여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순장이 성행했다. 『고사기』에 죽은 사람이 능묘 주위에 담 구실을 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일본서기』에는 순사자들을 생매장하였는데 이를 고풍(古風)이라고 적었다. 순장이 일본에 매우 성행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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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북방기마민족의 적석목곽분으로 유명한 황남대총은 고분의 구조상 추가장이 불가능한데 15세 전후의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어 순장의 흔적을 보여준다. |
한국의 순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순장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다. 가야지역인 양산군 양산읍 북정리 부부총, 1982년 우연하게 발견된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의성 탑리, 창녕 계성리, 순흥 읍내리 등에서 순장의 증거가 발견된다.
유명한 경주의 황남대총의 경우 고분의 구조상 적석목곽분은 추가장이 불가능한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150센티미터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다. 반면에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다.
여하튼 동이족의 풍습으로 알려진 순장이 양저문화에서 발견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배장제도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절강성 여항현 요산(瑤山)에서 서로 다른 흙을 사용하여 둘레를 자갈과 잘게 자른 돌을 두른 3층의 제단 유적이 발견됐다. 길이는 약 20미터, 면적 400제곱미터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유적으로 보이는데 부장품을 고려할 때 순장의 흔적도 보인다. 즉 사각형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주위에 순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피라미드식으로 된 4각형의 제단이나 무덤은 모두 중국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했다. 그는 절강성의 요산을 포함하여 4각형으로 된 구조물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김천씨의 능과 만주 길림성 집안현의 장군총, 서하왕국(당항족이 세운 유목국가)의 왕릉, 북방식 신석기문화유적인 요령성 건평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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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유익한 자료입니다. 퍼가는 중에 연달아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