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정신으로 터를 다진 전주한옥마을 1911년 전주부성은 남문만을 남긴 채 성문과 성곽이 모두 철거되었다. 일제가 전주와 군산 사이에 도로를 건설하깅 위해서였다. 호남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군산항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부를 내세워 허물어지고 없는 성곽 안으로 들어와 일본식으로 집을 짓고 ㄱ상권을 형성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햇다. 이 무렵, 일제에 저항하던 선비들이 한옥마을터에 하나둘 모여들어 기와지붕을 얹기 시작했다. 한옥마을은 남문 북쪽이나 서쪽의 일본 상권과 마주보이는 방향이었다. 조선 태조의어진이 모신 경기전과 전주향교가 위치한 곳이다. 한옥마을 유래는 소극적이나마 민족혼의 각성, 혹은 항일정신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한옥마을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린 위험을 넘기고서야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주한옥마을의 유산 *전주한옥마을의 관문, 풍남문 고려말에 세워진 풍남문은 패서문의 풍과패는 중국지명을 따온 것이다.풍패는 한고조 유방의고향으로, 조선 태조의 고향이 전주라서 은유적으로 이런 명칭을 붙였다.
*전주 문명의 시작, 경기전 태조 어진은 국보 317호로 지정대 있다.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 어진은 1872년 서울 영ㅇ희전의 영정을 조중묵이 모사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이다. 어진은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다.
경기전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임금의 어진이 모셔진 신성한 곳이니 이 곳에 이르는 자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애초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모신 조경묘 경기전 북쪽 경내에는 전지 이씨 시조인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가 있다.이한은 태조 21대조로서 신라시대 사공 벼슬을 지냈으며, 배위인 경주 김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 군윤 은의의 딸이다. 영조 47년에 이득리 등 7도 유생들의 상소로 경기전.정전 북쪽에 세웠다. 규모는 작지만 홍살문, 회삼문, 내삼문이 있고, 왕실의 법도를 많이 따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전주사고 사고는 나라의 역사기록을 적은 실록과 중요한 서적.문서 등을 보관하는 국가의 서적고이다. 전주사고는 성종 4년(1473)에 경기전 동쪽 담장안에 설치되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역대실록을 모아 한양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의 사고에도록 보관하도록 햇다. 하지만 숱한 변천과 전란의 와중에 모두 없어지거나 불에 타고 오로지 전주사고, 곧 이 실록각의 것만 온전히 남아서 조선의 역사를 보존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때 보존된 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든 사고가 병화로 불타 실록이 소실되었다. 이때 전주사고도 불탔는데 그 전에 이 실록의 중요성을 안 몇 지사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전주ㅇ의 존재 이유, 이목대 오목대 한옥마을 동쪽의 낮은 산자락인 발산에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다.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다는 집터에 세워진 비각이다. 큰 누각이 있는 오목대는 이성계가 최영 장군과 함께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경으로 가던 이성계가 전주 이씨 본향인 이 곳에서 친지들의환영을 받으며 잔치를 벌인 곳이다. 오목대 누각에는 이성계가 즉석에서 불렀다는 대풍가 시 편액이 걸려있다.이곳에서 그는 유방의 대풍가를 호기롭게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열고자 하는 꿈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오목대 잔치에 동행했던 정몽주는 그날부터 이성계와 갈라서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자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등전주망경대를 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각 왼편으로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석이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께서 말을 멈추고 머물던 곳이라는 뜻이다.
대풍가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날아 흩어진다. 기세를 온누리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느니 어찌하면 날랜 장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까?
등전주망경대 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 호탕한 기운을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 구름 모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본다.
*한국 최초의 순교지 전동성당 1791년 5월, 윤지충과권상연이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로 순교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유서깊은 성당이다. 풍남문 밖이 현재 전동성당 자리로, 순교의 역사적 기념터이다. 두사람의 잘린 머리를 5일 동안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고한 효수경중한 곳이 풍남문이다. 두 사람이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성당터를 마련했다. 두 순교자의 뜻을 기려 그들이 참수당했던 자리를 일부러 선택했던 것이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전북 지역 내에서 민주화의 성지로각광받은 곳이기도 하다.
*숫자로 풀어보는 전주향교 평지에 지어진 전주향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구조를 띠고 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전면에 배치되고 그 뒤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은 본래 대성전보다 크게 지어서는 안된다.그러나 학생의 수가 늘고 수용공간이 협소해지자 양옆으로 눈썹지붕을 올려 최대한 예를 갖춘 독특한 건물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경사지일 때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향공간인 대성전에는 아홉이라는 양에 다시 또 아홉으로 보좌하여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의 저편을 구현해 놓았으며, 책을 외우고 매질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명륜당은 아홉이라는 양에 슬그머니 여섯이라는 음을 짝지어, 마침내 사람사는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 된다. 향교에 들어서면 수백 살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대부분의 향교에 은ㅇ행나무가 심어지 이유는 병충해에 강해 튼튼히 자라는 은행나무는 정치판에서 더럽혀지지 말고 부정부패에 물들지 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향 그윽한 터전 양사재養士齋 양사재는 방문객을 위한 숙소시설로 이용되고 있어서 방문하여 사진 몇 장 찍어려하니 상당히 까다롭게 굴어서 앞에서 몇 장 찍는데 만족해야만 햇다. 원래는 향교의 부속건물로 서당공부를 마친 재능있는 이들이 모여 생원진사시 공부를 하던곳이다. 설사 생원과 진사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양사재에서 합격 사실을 알리는 부표附表를 해야만비로소 합격사실이 인정될 정도로 당시 선비들에게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교육입국조사가 발표되고 나서 1897년 양사재도 공립소학교라는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바뀐다. 또한 이곳은 가람이병기 시인이 머물며 많은 시를 남긴 곳이다.
*전주천 최고의 경승지 남천교 전주천은 전주읍성의 남쪽을 거쳐 서쪽을 흘러가다가 만경강과 만난다. 전주의 남쪽을 흘러갈 때는 남천이 되고, 서쪽에서는 서천으로 불린다. 남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모두 다섯 곳이다. 전주천의 교량 가운데 남천교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고 각별하다. 다리 위에는 돌을 정교하게 조각한 다섯 개의 용두를 얹었다고 한다. 다리 바로 동쪽으로 우뚝 솟은 승암산이 화산이기에 부성 안에 화재가 끊이지 않아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는용을 놓아사 그 재액을 물리치려고 햇던 것이다. 하지만 공을 들인 다리도 여러 차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기 일쑤여서 그 동안 방치되엇다. 2009년 공사를 벌여 옛적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교각을 무지개 형태로 하고, 다리 난간에는 용머리 장식도 햇다. 누각의 이름이 청연루로 전주8경의 한벽청연에서 따온 것이다. 여름이면 남천을 따라 흘러가는 바람이 청연루의 기둥 사이를 빠져나간다.
*풍운을 잠재운 전주동헌 조선말기에 전주를 다스리는 전주부윤은 관찰사가 겸임했다. 대신 그 실무만큼은 따로 조정에서 파견한 전주판관이 담당했다. 판관이 근무하는 본관청사를 풍락헌이라 했는데 오늘날 동헌이다. 동헌 옆에는 안채 살림을 도맡은 내아가 있는데 이를 서헌이라 한다. 전주동헌은 1934년까지 엄존하였으나 일제가 조선왕조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상징인 동헌 건물을 헐어내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해 봄 전주동헌 건물은 전주 유씨 가문에 팔려나가 제각으로 쓰인다. 이후 전주시장이 동헌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해서 소유주를 설득해서 전주시한옥마을로 옮겨진ㅇ다. 75년만의 일이다.
*물안개 피어나는 곳 한벽당 한벽당의 원래 이름은 월당루이다. 월당 최담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지은 누각이다.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이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이 태종 4년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흰 옥처럼 흩어지고 얼음처럼 차갑다 하여 한벽당이라 햇다. 한벽당 아래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강물 아래에 괴물이 살아 매년 단오가 되면 처녀를 바쳐야만 했는데 효심깊은 처녀가 아버지를 위해 제물이 되기로 나섰다.제물을 바치기 전날에 사또 꿈에 성황대황이 나타나 강물에 소금을 부으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꿈에서 들은 대로 햇더니 거대한 지네가 둥둥 ‘떠올랐다고 전해진다.
*고택ㅜ독립운동가 장현식선생님의 고택이 전주에 자리잡은 사연이 애틋하다. 원래 이 한옥은 장샘이 1932년 고향인 김제 서도마을에 건축하였다. 이곳은 독립투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던, 독립투사들의 사랑방이자 아지트였다.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한옥을 재정비하기는 힘들어졌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전주시가 이 고택ㄷ을 들여오기에 이르렀다. 장샘 고택은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미닫이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도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임실 진참봉 고택은 임실군 성가리에 소재한 사랑채을 철거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온전하게 인수하여 장샘 고택 옆에 이축했다.
완판본문화관에서 완판본이란 전라도의 수도였던 전주(완산)에서 발간된 옛 책과 그 판본을 말한다. 완판본문화은 기록문화의 중요성과 과거 왕성햇던 전주의 출판문화를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출간된 완판본을 만나볼 수 있으며 목판인쇄체험과 제본체험을 할 수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번째, 대도시로서는 첫 번째로 국제 슬로시티에 선정되었다. 시티라고 하지만 , 전주한옥마을보다 앞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시티들은 모두 농어촌이나 산간의 시골마을이다. 2013년, 국제 슬로시티 가입국은 25개국 150개 도시에이르는데,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입된 것은 전주한옥마을이 처음이다.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지역에는 없는 전주만의 독특한 음식들이 있다. 황포묵, 물짜장, 모주, 가게 맥주를 뜻하는 가맥과 각종 튀김을 상추에 싸먹는 상추튀김은 전주가 개발한 독특한 음ㅎ식이다.
국립무형유산원은 2009년 10월, 프랑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할 필요성을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주에 짓고 있는 건물로 2013년 개관되었다. 문화유산 분야 중 이 같은 국제기관은 페루와 중국 등 전 세계에 단 두 곳뿐이다.
꼭 가보고 싶었던 독학혁명 기념관은 가보지 못했다.
2015.11.6 10.20(화) 1학년은 순천국제정원박람회를 소풍갔고, 2학년은 전주한옥마을로 소풀을 갔다. 부담임이라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야하는 상황이어서 짧은 시간에 답사하다 보니 매우 빠른 속도로 돌아다녔으나 여러 군데를 가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