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람들의 세계관
1. 시대 배경
1) 사림파의 등장
15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지주제의 발달과 과전법의 붕괴, 공납제도의 모순 심화와 군역제도의 붕괴, 장시와 국제교역의 발달 등 새로운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사림파가 등장했다. 도학정치의 이념을 바탕으로, 서원의 건립, 성리학의 보급, 경제 개혁 등 다양한 개혁을 추구 하였다.
2) 사대사화(四大士禍)
기존의 훈구파와 새로운 사림파의 갈등으로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조광조의 도학 정치가 좌절된 기묘사화를 비롯하여 율곡 10 살 때인 1545년의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했다.
3) 도적과 외적
사회가 혼란하고,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사방에 도적이 들끓어 임꺽정은 경기도까지 활동할 만큼 나라가 어지러웠다.
한편 북방의 여진족은 1513년 속고내가 온성, 갑산 등을 침입한 것을 비롯 15244년과 1528년, 1583년 추장 이탕개의 침입 등 수 차례 침입이 있었고, 1522년 추자도에 침입한 왜구도 여러 번 침입, 1555년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을묘왜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 출생과 가계
율곡은 1536년(중종31년) 12월 26일 강원도 강릉 북평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황보다 35년 뒤이고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7년 뒤였다. 貫鄕은 덕수이고 자는 叔獻이고 호는 율곡이다. 호는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에서 따왔다. 어릴 때 이름은 현룡(見龍)이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꿈에 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율곡 집안은 상당한 명문 집안으로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7대조, 8대조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정3품)와 지돈령부사(정2품)를 지냈다. 그러나 고조부 때부터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외조부 신명화는 기유 명현의 한 사람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외조모 이씨는 본관이 용인으로 사임당을 포함해 딸 다섯을 낳아 키웠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가 치계한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어버이와 남편을 섬기는데 도리를 다해 일찍부터 인근에 소문이 났다. 외할머니는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도 90세까지 살며 율곡이 출세하는 것을 지켜 봤다.
아버지 이원수는 수운 판관과 사헌부 감찰(정6품)등을 지냈으나 결단력과 의지가 부족하며, 불경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사임당은 주 문왕의 어머니인 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태임은 현모양처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학자 안지추의 <안씨가훈>과 <예기>를 중히 여겨 가족간의 인화를 도모하였다. 자녀들에게 늘 인간된 도리를 지킬 것과 忠君愛國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인 노씨는 성주 목사를 지낸 노경린의 장녀였다. 율곡과 사이에 43세에 딸을 하나 얻었으나 얼마 뒤 죽고 말았다. “어질고 순하며 인자하고 평화스러워서 덕으로 남편을 섬기되 어긋남이 없었고 서모 섬기기를 친어머니처럼 하였다.” (행장)는 말처럼 사나운 서모가 끝내 그 성격이 고쳐지게 된 것도 이러한 부인의 내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곡의 두 첩이나 그들에게서 난 두 아들을 잘 가꾸며 살았던 부인은 현모양처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임진왜란 때 파난가지 않고 율곡묘가 있는 선영에서 신주를 않은 채 왜군을 준열히 꾸짖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율곡은 29세에 장원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해마다 승진, 경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경직은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30세), 사헌부 지평,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교리(33세), 홍문관 교리(35세), 홍문관 직제학(38세), 우부승지(38세), 사간원 대사간(39,44세), 홍문관 부제학(40세), 사헌부 대사헌, 호조판서 겸 예문 대제학(46세), 이조판서(47,48세), 형조판서, 병조판서(47세), 의정부 우참찬(48세)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은 청주 목사(36세), 황해도 관찰사(39세) 등을 지냈다. 33세에 千秋使가 중국 갈 때 書狀官을 역임하였다.
율곡은 1584년 49세에 병으로 죽었다. 죽기 이틀 전 서익이 巡按御使의 명을 받아 북방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서익을 불러다가 계책을 일러주려 하였다. 주변에서 간곡히 말리자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국가의 큰 일인데 어찌 신병을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여 이와 같은 機密한 일을 잃겠는가? 허물며 사생의 천명이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 일로 인하여 죽겠는가.” 하고서 이에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 입으로 불러 아우인 우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였다.
인조 2년(1624년)에 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숙종8년(1682)에 文廟에 從祀되었다.
3. 천재성
율곡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말을 하면서 글을 알았다고 한다. 7살 때에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10살 때는 유교 경전을 비롯, 온갖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행장등에 전하는 일화로 천재성을 알아보기로 하자.
3살 때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따서 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그러자, 율곡은 옛 시를 인용하여 “石榴皮裏碎紅珠(석류피이쇄홍주)”(석류 속에 붉은 구슬이 흩어져 있네)라고 대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7살 때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는 진복창을 보고 <진복창전>을 지어 그가 소인이 될 것을 예언 하였다. 후에 진복창은 크게 출세하여 을사사화때 윤원형에게 붙어 죄 없는 선비들을 많이 숙청하는데 중심 인물이 되었다.
8살 때 율곡은 임진강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고, 10살 때에는 경포대에서 鏡浦臺賦를 지었다.
거문고를 올리고 옷을 벗으면 /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한 즐거움을 알게 되고
바람을 맞으며 술잔을 들면 /희문이 세상을 근심하는 정이 가득해온다
於是鼓瑟解衣 抱曾點浴沂之樂 臨風把酒 藹希文憂世之情
불 같은 더위는 조맹의 위엄에 비길만 하고 / 첩첩이 쌓여 있는 기이한 봉우리 구름은 도연
명이 쓴 글귀로 들어 간다
炎炎火氣 日比趙孟之嚴 疊疊奇峯 雲入淵明之句
경포대부는 율곡의 숙성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의 내용을 이루는 여러 문장의 출전을 보더라도, <논어>등 유교의 기본 경전을 비롯하여 <좌전>, <사기>, <후한서> 등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노장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범위에 걸쳐 있다.
율곡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으뜸으로 뽑히기를 아홉 번, 試官을 놀램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23세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에 대한 명논문을 써서 고시관을 놀라게 했다함은 더욱 유명한 이야기이다.
4. 방황(출가)
율곡은 19세 때 갑자기 금강산으로 출가 하였다. 1년 만에 다시 산을 내려 왔지만 당시 불교를 배척하고 있던 사회 분위기에서 이 사건으로 반대파들에게 두고두고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의 입산 동기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박세채는 <남계집> “記栗谷先生入山詩記” 에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 신사임당은 율곡이 16 살 때 죽었다. 게다가 큰형과 함께 수운 판관으로 관서지방으로 출장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갔다 돌아 오는 길이라 임종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 누구보다 어머니를 따르던 율곡은 이것이 평생 한이 되었다.
두 번째는 어머니 돌아가신 뒤의 집안 분위기를 들 수 있다. 아버지는 재혼하는 대신 첩에게 살림을 맡겼는데, 그는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율곡의 형제 자매들을 곱게 대하지 않았다. 이런 서모의 시달림을 피해 들어 갔다고 한다.
5. 뜻을 세우다. 엄격한 자기 관리
율곡은 10 살 때 <경포대부>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社稷之臣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음을 기르고 안일을 경계하여 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살겠다는 이 포부는 율곡이 평생 지향한 인생 목표였다. 금강산에서 내려와 새 출발을 위해 지은 自警文을 보면 율곡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뜻을 크게 지니자 – 성인을 모범으로 삼자.
*마음을 가다듬자 – 마음이 가라앉으면 말이 적게 된다. 말을 적절히 하자.
*혼자를 삼가자 – 모든 나쁜 짓은 혼자 있을 때 마음을 다잡지 않아서 생겨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하자 – 실천하지 않는다면 공부도 소용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성실하게 수행하자 –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잘못된 일과 맞닥뜨리게 되면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상대방에게는 감화를 주도록 한다.
*집 안에 화목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나의 성의가 부족한 탓이다.
*밤에 잠자거나 병이 아니라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공부는 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는다. 공부는 죽은 후에야 그만두는 것이니 그 효과를 서두른다면 그것도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자경문 제 1 조는 立志(뜻을 세움)이다. 이는 입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신을 할 수 없고 학문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뒷날 율곡은 임금에게나 學人들에게 늘 큰 뜻을 세우고 굳게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또 그는 세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
6. 퇴계를 만나다.
율곡이 태어날 무렵 사림들은 백운동 서원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서원을 세워 성리학을 발전 시켰다. 이에 따라 뛰어난 성리학자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성리학자는 김안국, 김정국 형제와 서경덕, 이지함, 성혼, 이언적, 이황, 조식, 김인후, 기대승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퇴계는 특유의 집념과 끈기로 이 땅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사람이요, 주자의 학문을 속속들이 파헤쳐 관통한 사람이었다. 당시 성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의문을 가진 사람은 거의가 퇴계에게 해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율곡은 23 살(1588)때 퇴계를 방문하였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老大家로서 禮安 退溪에 있어 아직 陶山으로 옮겨가기 전이었다. 청년 율곡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던 터이므로 퇴계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으로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퇴계는 그와의 대화를 통하여 율곡의 才分과 학문의 방향을 충분히 인식하였던 모양으로 그 후 율곡에게 주는 서간 중에 “足下의 나이 겨우 20년대에 저렇게 뛰어났으니 失學이라고 할 수 없다. 前非를 깨닫고 고칠 줄을 알며, 또 窮理居敬의 實學에 종사하고 있으니 …… 求道의 방향을 잃었다고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 또 퇴계는 그의 門人 趙穆에게 주는 서간 중에도 율곡에 대하여 “그 사람이 明爽하여 섭렵함이 많고 五學에 뜻하고 있으니 ‘후생이 可畏’라는 前聖의 말이 나를 속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7. 여러 학자와 벌인 논쟁 – 편지를 주고 받다.
율곡은 당대 유명한 학자들과 논쟁을 하였다. 퇴계를 비롯한 선배와 동료, 후학들의 논쟁을 통하여 율곡은 명쾌하고 논리정연한 철학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 퇴계와 주고받은 편지
퇴계는 율곡에게 한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敬은 主一無敵이라야 되겠는데 만일 사물이 일제히 와 닥칠 때에는 어떻게 이에 응대할 것인가” 율곡은 작별하고 돌아와 두루 생각해본 끝에 다름과 같은 의견을 퇴계에게 보냈다.
“主一無敵과 窮理를 靜中 공부라 하여 敬의 요체로 삼고, 酬酌萬變을 動中공부라 하여 敬의 활용으로 보아 敬의 動靜과 體用이 일관된 상태를 敬의 至善입니다.”
퇴계는 율곡의 이 해석에 대하여 매우 좋다는 답서를 보냈다.
*성혼과 주고 받은 편지
율곡은 37세에(1572년) 절친한 친구인 성혼과 사단칠정, 인심도심에 대해 철학논변을 시작하였다. 퇴계와 고봉과 주고 받은 편지는 아쉽게도 몇 차례 또는 한 차례로 끝났지만, 성혼과주고 받은 편지는 아홉 차례에 이른다.
조선시대 성리학사상 가장 유명한 학술 논쟁을 든다면, 퇴계와 기대승 사이의 8년여에 걸쳐 행해진 四七論辨을 들 수 있으나, 율곡과 성혼 사이에 행해진 철학상의 논변도 그에 버금가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혼과 율곡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서신을 왕래하며 철학상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다. 퇴계와 기대승이 四端七情을 중심으로 삼은데 비해, 이들은 人心道心設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 기대승과 박순 등과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논변을 하였다.
8. 현실 개혁 노력
율곡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만칸 고옥이 막 무너지려는 찰라’ 라고 표현하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10년이 못 가서 반드시 환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율곡은 이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 경제,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개혁책을 내놓는다. 여기서는 을사삭훈 논의 과정을 통해 율곡이 명분과 가치관을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을사삭훈은 홍문관과 양사를 중심으로 조정 관료와 종친이 참여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율곡이 주도하였다. 1596년(선조 2년) 홍문관 교리로 있던 율곡은 賜暇讀書(사가독서)를 마치고 올린 동호문답에서 을사 신원과 삭훈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충성스런 신하는 반역을 하였다고 배척되고 간특한 괴수는 공신으로 녹공되었으니 명문의 잘못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지금의 계책은 다섯 간흉(정순명, 윤원형, 이기, 임백령, 허자) 의 죄를 폭로하여 그 관작을 삭탈하며 衞社功臣을 모두 삭제하고 죄 없는 사람을 모두 풀어주어, 이로써 종묘사직에 고하고 중외에 교를 반포하여 모든 나라가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홍문관을 중심으로 삭훈이 논의되고 경연에서도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율곡은 41차례 상소를 작성하여 을사사화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낱낱이 증명하고 삭훈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마침내 1577년 을사삭훈이 단행되었다.
9.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
1) 가정교육 – 동거계사
율곡은 <동거계사>를 만들어 가족 모두가 지키게 하여 화목을 도모하였다. <동거계사>는 부모와 형제, 자식들간에 서로 지켜야할 도리를 정리한 일종의 규칙이었다. 율곡 일가는 아침마다 함께 모여 <동거계사>를 읽고 화목하게 살 것을 다짐하였다고 한다.
2) 학교 교육 – 은병정사 학규
율곡이 따르고자 한 주자는 무이산 제5곡에 무이정사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5곡을 일명 대은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름을 따서 율곡은 자신이 세운 학교 이름을 은병정사라고 하였다. 은병정사에는 입학하는데 신분 차별이 없었고 양반이나 서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학생들은 자치기구를 만들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10. 마무리 말
율곡이 34살에 왕에게 올린 <동호문답>에서 바람직한 人間象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眞儒(진정한 유자)는 나아가서는 일세에 道를 행하여 백성들이 태평을 누리게 하고 물러와서는 가르침을 주어 학자들이 큰 꿈을 깨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행함이 없고 물러와 가르침을 줌이 없다면 비록 眞儒라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 (전서, 권 15, 동호문답)
율곡은 이황과 함께 조선 왕조가 낳은 위대한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위대한 인물은 당대보다는 후대에 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는 왕조실록에 실려있는 율곡에 대한 인물평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사류(士類)를 보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내 당인에게 원수처럼 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졸한 뒤에 편당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 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