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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진도 옛자료 3장을 보내면서 해석해 달라고 한다.
한의사라고, 뭐 한문을 줄줄 해석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루종일 눈 빠지게 한자 파악하고 컴 이용해서 이것 저것
쳇gpt 활용해서 겨우 해석했습니다.
진도 자료로 한번 읽어 볼만합니다.
진도임회면 삼막리부근 박씨 문중 효자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行郡守爲差定事旅士乃二加陳田改量監官差定爲遺合下仰照驗施行順事帖花
前別監 朴思允 准此下 辛巳 二月十四日 監定 "현 군수가 차정 업무를 위해 출장 나온 두 사람과 함께, 진술된 토지를 재측량하고 감찰 관리에게 배정하였다. 이 내용에 따라 아래에 유시하니, 잘 살펴보고 시행할 것을 명한다.
전 별감 박사윤의 안(案)에 대해 승인하니, 이에 따라 시행하라." 1881년 2월 14일 감정하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린다
臨淮面郡執綱爲文報事夫者百行之源而求忠臣必於孝子之門故世有卓異之行則必0 楊而表旋之 朝家之盛典是白齊本面下旀里居 幼鶴朴東春即本邑郡守 諱成仁之後孫也 稟性淳謹 自齠齔之年 知愛其親定省之節 供旨之誠 能修 其職以爲隣兒之矜式矣 不幸中遭父親之巨創餐粥 行0晨昏衾慕三年靡懈一從禮制當時聞見者莫不歎賞也 其母密陽朴氏年踰八旬以老病累月呻吟食飮之供藥餌之奉 暫不難側終不見效去 寺七月日大命近至則祝天願代一晝夜回甦矣命也 移時忽焉永逝則殯歛之喪0 苦之慕 雖閭里幼穉 莫不流涕而及 其葬山也 掘穴造廬晝夜侍墓則如此 誠孝振古宇有也 其在00之所咸不可緘嘿故摭實仰訴 細細斤察後同束春終身慕之孝報 營褒賞以爲려\激勸遐俗之地馳報爲臥乎 事牒呈伏請 照驗施行須至牒呈者 牒呈 府使 임회면(臨淮面)의 군직 강(郡執綱)이 글을 지어 보고함.
모든 행실의 근본은 효(孝)이며,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문하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뛰어난 행실이 있으면 반드시 드러내고 칭송하는 것이며, 이것이 조정의 훌륭한 전례입니다.
백제(白齊) 본면 하묘리(下旀里)에 사는 **유학 박동춘(朴東春)**은 본 고을의 옛 군수이신 **고(故) 성인(成仁)**의 후손입니다.
그는 성품이 순하고 삼가며,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사랑할 줄 알았고,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고 뜻을 받드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행실은 이웃 아이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병을 앓으셨을 때, 박동춘은 죽을 떠서 드리고, 새벽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으며, 3년 동안 상을 다하면서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를 들은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미량 박씨는 나이 여든을 넘기셨고, 노환으로 여러 달 신음하셨습니다. 박동춘은 음식을 올리고 약을 드리는 일에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정성이 효과를 보지 못해, (모친은) 7월 어느 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했고, 하루 밤낮 간절히 기도했으나 명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영영 세상을 떠나셨고, 그는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마을의 어린아이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산에 장사지낼 때, 스스로 무덤 옆에 움막을 지어 밤낮으로 지키며 시묘살이를 했으니, 이는 예로부터 보기 드문 효성입니다.
이 모든 일은 모두가 알게 되어 숨길 수 없어 사실을 모아 윗분께 아뢰는 바입니다.
신중히 살펴주셔서, 훗날까지도 박동춘의 효심을 이어 칭찬하고 기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포상을 시행하여, 널리 백성들을 권면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도 그 소문이 퍼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첩정으로 삼아 공손히 보고 드리오니, 검토하신 후 시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牒呈 府使
1886년 1월
禯曺爲相考事節 啓下 敎今三月初十日 動駕敎是時 0分揫錚人珍島幼學朴斗煥原情形曺 啓目據其矣 考學生東春孝行卓異特施以旋閭之典事自本曺覆 啓蒙允爲有置旋門竪立時材木直手依據 自官擧行之意知委0邑爲旀竪立0形正0移以爲憑考之地直貴向事 合行 照驗施行源玉關者 “영조조 조정에서 관련 사안을 검토하여 계문으로 아뢰며, 금년 3월 10일 임금께서 거둥하신 때 내려진 교지에 따라, 진도에 사는 유생(과거공부하는 학생) 박두환의 원래 사정과 정황을 조사하여 보고드렸습니다.
또한 고학생(과거 공부만 하다 돌아가신 사람) 동춘은 효성이 지극히 뛰어나므로, 특별히 효자문을 세워주는 전례(旋閭之典)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일은 본 관청에서 재검토 후 상부에 계문하여 허락을 받았고, 효자문 설치 시 필요한 목재와 인건비는 관청에서 직접 부담하여 처리하였습니다.
해당 고을에 이 일을 위임하여, 표석을 세우고 정형화된 형태로 이전 설치하였으며, 후일 참고할 수 있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관계자들이 협조하여 시행하고 검토하였으며, 이 사안의 담당자는 원옥(源玉)입니다.”
右 關 全羅道觀察使 전라도 관찰사, (도(道)의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관리)
光緖14年4月 광서 14년 음력 4월은 양력 1888년 5월 16일 ~ 6월 14일
동춘씨라는 분의 족보.
東春 字乃吉號橘軒生癸卯
동춘(東春)은 자(字)가 내길(乃吉)이고 호(號)는 귤헌(橘軒)이며, 계묘년(癸卯1843년)에 태어났다.
天性至孝忘體俱養丁內憂居盧紫毀有感物之異以孝童蒙教官朝奉大夫父母生時奉養之節行終時如一奄遭齋塞坐三年居盧徹物感動而墓前植橘子當年結實此孝拔華放邑鄉追薦勢鼓干當朝有旌閣卒壬寅四月二十七日.
그는 타고난 천성이 지극한 효성으로 몸을 잊고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하자 집에 머물며 옷은 자줏빛으로 바꾸고 마음을 다해 슬퍼하였다. 그의 효행은 사람들과 사물에까지 감동을 주어, 어린이들에게 효를 가르치는 ‘효동몽 교관’(孝童蒙教官), 그리고 ‘조봉대부’(朝奉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부모 생전에 봉양에 정성을 다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삼년상을 지내며 슬픔을 잊지 않았다. 그의 효심은 산천초목도 감동시켜, 무덤 앞에 심은 유자나무가 그 해에 곧 열매를 맺었다. 그의 효성이 자연계마저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효행이 널리 알려져 마을과 고을에서 추천되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칭찬하여 정문(旌閣, 충신·효자에게 세우는 문)을 세웠다. 그는 임인년(壬寅, 1902년 추정)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墓刀藏山村后麓巽坐鄕薦蒙旌
묘소는 장산촌 뒷자락, 산의 남동쪽(巽坐, 풍수방위 중 하나)에 있으며, 고을에서 추천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문(旌)을 하사받았다.
配淑夫人密陽朴氏聖祿女.
배우자는 숙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이름은 성록(聖祿)이다.
墓上同先山下孝子閣建立光田村前建立后孫
묘는 선영과 함께 산 아래에 있으며, 효자각(孝子閣)은 광전마을 앞에 세워졌고, 후손들이 이를 세웠다.
효자문 안에 있는 글을 해석해 봅니다.
賢孝堂記 堂以賢孝名何也 繼志述事之大者也 朝清大夫禮部尚書諱講宣文章道德著於當世云矣建國之初賴功輔之佐則銘彝鼎被竹帛而遺芳百世者豈非國家之修治乎 其後孫諱麒壽來居沃州代々蒙蔭則聖朝褒崇之典如山如海而祝假 無疆也以類聚之者千仞鳳翔必有其侶九皐鶴鳴其能自和則理固然也 雲仍居在本土者不下於數百冠童而建廟設堂曾未早建設者事巨力綿也至于丙戌門議齊發數間竪豎立則春秋講信俗化之樞機 東西膠序教訓之根本將使圓冠方頷再行鄒魯之風銳氣英聲一變賨渝之俗一門四表煥矣 維新十三宗0矣如在氷壼精鑑廣淸虎洞之郊霜鏡 懸明遙暎龍山之沼開基四會之躔授規三農之隙千秋不能移百代所 不能易為其血倫所蒙而孰不 激義竣功乎本裔某拍其事實示余爲記 余亦同源而何敢辭而拙陋乎感荷孝誠之極力不揆僭倭是以爲記 檀纪四二八七年甲午二月下浣香齋朴連培撰
'賢孝堂記'는 ‘현효당기’라 읽으며, ‘현효당(賢孝堂)’이라는 건축물 또는 공간을 세운 내력과 그 뜻을 기록한 것입니다.
현효당기 (賢孝堂記)
당(堂)을 '현효(賢孝)'라 이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상의 뜻을 이어받고,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청대부(朝淸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공 휘(諱) 강선(講宣)은 문장과 도덕이 당세에 뛰어났으니,
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 그 공훈으로 나라를 보좌하였고,
그 공적은 종묘에 새겨지고 기록되어 그 향기가 백세에 전하니,
이는 국가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후손 휘(諱) 기수(麒壽)는 옥주(沃州)에 와서 살았으며,
대대로 조상의 은덕을 입어 성조(聖朝)의 포상과 우대는 산 같고 바다 같았으며,
그 축복은 끝이 없었다.
같은 부류는 모이기 마련이니,
천 길의 봉황이 날면 반드시 짝이 있고,
깊은 못에서 학이 울면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 —
이것은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본향(本鄕)에 거주하는 이들이 수백 명이나 되며,
어린아이들조차 모자를 쓰고 (즉 장성하여),
비록 이보다 앞서 당을 세우지 못했던 것은 일이 크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술년(丙戌)**에 온 문중이 뜻을 함께하여
몇 칸의 집을 세우고 당을 세움으로써
봄가을로 예를 가르치며,
풍속을 교화하는 중추가 되었고,
동서로는 사제 간의 질서를 이루고,
훈계를 베푸는 근본이 되었다.
장차 갓을 쓰고 바른 무릎을 가진 젊은이들이
다시 공자와 맹자의 고장 풍속을 따르게 되며,
기세와 명성이 일어나 촌의 풍속이 바뀌고,
한 문중의 명예가 사방에 빛나리라.
유신(維新) 13종손(宗孫)이여,
그 정결한 마음은 얼음 항아리 같고,
분별력은 넓고도 맑으며,
호랑이 굴과 같은 곳에서도 거울처럼 밝은 덕을 보였고,
용산의 못에서도 멀리 비치니,
네 모퉁이에 기반을 두고,
농사철의 짬을 타서 모범을 세우니,
천 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백 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으리라.
그 혈연으로 인하여 혜택을 입는 자라면,
누군들 의롭게 감동하고
공을 다하지 않겠는가?
본 종친 모(某)가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 기록을 부탁하니,
나 또한 같은 혈통이니 어찌 감히 사양하며 내 졸렬함을 숨기랴.
그들의 지극한 효성과 정성에 감동하여 감히 문장을 지어 기록하노라.
단기 4287년 갑오(甲午)년 2월 하순, 향재(香齋) 박연배(朴連培)가 짓다.
族禊序 天下事物各有本末又有始終 木無根本安有千枝萬葉之榮 水無本源豈有千派萬流之聲 人無先祖安有百子千孫之榮 由是觀之千事萬物有本而無 末則本不為本有始而無終則 始不為始矣朝清大夫禮部尚 書功臣之後裔諱麒壽來居沃 州與曹朴朴金四姓叶規設郡 建校為兹鄉之巨族也而今以 後新成廟宇又建講堂青山有 光白石含語而自有培根涟源 之理也先生後孫等鞍掌其事 戶論家說収合金錢殖利買土 以傳千秋萬歲之奉香别立禊 案歲々講信試切慕先豈不宜 乎安不美哉古木回春必有萬. 和方暢之榮真源出水必有千 派活動之聲矣顧名思義克致 誠心勉之哉請序某素與余特 有宿誼設不敢辭而謹書 檀紀四二八七年甲午二月下澣幹, 香齋朴連培撰
족제 서문 (族禊序)
천하의 모든 사물에는 각각 근본과 말단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나무에 뿌리와 줄기가 없다면 어찌 천 갈래의 가지와 만 개의 잎이 무성할 수 있겠는가?
물에 근원이 없다면 어찌 수천 갈래의 지류가 흐르고, 물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조상이 없다면 어찌 백 명의 자손과 천 명의 후손이 번성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건대, 세상의 모든 일은 근본이 없으면 말단도 없고,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면 그 시작조차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조정의 청백리 대부이자 예부 상서였던 공신의 후예로, 이름이 기수(麒壽)인 분이 옛날에 **옥주(沃州)**에 이르러 살게 되었고, 조(曹), 박(朴), 박(朴), 김(金) 네 성씨와 함께 협력하여 고을을 규획하고, 학교를 세워 이 마을의 대족(大家)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 새로 사당을 세우고, 다시 강당을 세웠다.
푸른 산에는 빛이 있고, 흰 돌에는 말이 담겨 있으니, 스스로도 근본을 배양하고 뿌리를 흐르게 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후손들이 이에 일을 맡고, 문중에서 논의하고, 집안에서 말이 오가며, 돈을 모으고 재산을 불려 토지를 사들여, 천세만세토록 제향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였다.
따로 **제례문서(禊案)**를 세우고, 해마다 신의를 강론하며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을 실천하니 어찌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늙은 나무도 봄이 오면 반드시 다시 살아나 만 가지 화창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참된 물의 근원도 반드시 수천 갈래의 흐름으로 움직이는 소리를 내는 법이다.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헤아려 정성을 다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청을 한 사람과 나는 평소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이 글을 씁니다.
단기 4287년(1894년) 갑오년 2월 하순에
향재 박연배(香齋 朴連培) 씀
첫댓글 아! 고상 많아셌구만이라.
함양 박씨 문중에 자료덜로
광전리에 지각이 있고 거그 비각에가 효자비가 두 갱가 현존 한당구만이라.
그란데 거그 지각 또 딸른 비석 중 한나는 소전 선상님 글씨란다는데(아래 사진)
뒷면엔 국한문 혼용에 소전 선상님 글씨라 함
야튼 후손덜언 뭔 내용인 중 몰라 궁굼했으 껀데 존 일 하솄구만이라.
그란데 군지에도 쩌그 문서에도 두 사람 효행 내용이 중복되는 내용이 있는데
'동춘'이란 분은 23세로 문서 소장자에 고조부로 23세인데
'두환'이란 분은 26세로 방계인 친척일 뿐으로 어렴풋이 이름만 기억된다는데
삼막리(하미실)에서도 현재 동춘의 후손은 뚜렷이 확인 되지만
'두환'의 후손이나 내력은 지끔 확인이 안 돼서 잔 그랑갑서람짜.
동시대에 같은 효행 기록에 내용도 같아서
혹시 같은 분에 두 가지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저런 관용 문서에도 두 이름이 달리 적어진 것을 보면....
이 부분은 그 박씨네 문중 안에서 풀어사라 씰 그들에 숙제라고 봐져람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