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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스크랩 한국화 발달과정 / 시인 최윤희
insook 추천 0 조회 220 11.09.17 2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한국화 발달과정

 

1. 선사시대의 거석문화 유적

 

고조선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수천 년간 우리민족은 만주와 중국대륙 북부지역에서 수많은 거석문화 유적을 만들었다. 돌과 흙을 다져서 만든 무지무덤을 흔히 적석총(積石塚)이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으로 화강암을 직육면체로 가공하여 1,100여개를 쌓아올린 형태이며, 높이는 13.1m, 너비는 31.58m로 총 7단 계단식구조의 피라미드 형태를 하고 있다.

 

1905년 최초 발견 당시, 정상부분에는 상당수의 기와편이 발견되어 정상에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하부 기단을 지지하는 호석은 4면에 3개씩 총 12개가 있었으나 그중 1개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11개가 남아있다. 장군총 외각 모퉁이에는 왕의 첩이나 호위 장수들의 묘로 추정되는 배총(陪塚, 딸린무덤) 5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동북쪽 모서리에 고인돌 모양의 배총이 1기만 남아있고 4기는 없어졌다. 중국은 2004년 7월에 고구려왕성, 왕릉과 귀족 고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피라미드 형태의 고분은 고구려 수도였던 만주 집안지역에 환도산성 아래에 수천기가 분포하고 있다.

 

또한 1945년에는 독일에 주둔하던 미국의 수송기 조종사 하우스돌프가 중국 대륙 북부지역인 함양과 서안(장안)지역을 비행하던 중에 약 100여기의 피라미드를 발견하였다. 중국은 1963년 4월 36명의 발굴팀을 구성하여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3개에 대하여 발굴조사에 착수한다. 당시 발굴요원으로 참여했던 장문구의 증언에 따르면, 고분 내부에는 벽화, 그림,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자 등이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등 생활용구 1,500여점, 배추김치, 동물의 뼈 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신라형 금관, 창 등 부장품 7,800여점을 발굴하였다. 고분 내실에는 상투머리를 한 중앙시신 등 14구와 진흙 호위상이 300여점이 출토되었다. 발굴 3일째 되던 날 발굴 단장에게 중간보고를 하자, 단장은 “이 유적지는 중화 역사 이전의 조선 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그날 밤 모든 발굴조사가 중단되었고, 중국 공안에게 이 사실을 일체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발굴 3일만에 모두 철수 하였다고 했다. 1973년에는 이 피라미드 유물을 대상으로 고고학 탄소연대 측정 결과, 황하문명보다 앞서고 중국문화와는 다른 문화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중국 당국은 현재까지 피라미드의 존재뿐만 아니라 피라미드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산으로 위장하는 등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동 지역을 외국인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고구려 장군총>                                        <고구려 태왕릉>

 

 

   

                  <집안지역 고구려 피라미드 군락지>               <중국 함양, 서안 피라미드 군락지>

 

   

                       <함양 1번 피라미드, 242 x 224m>       <복토 후 나무를 심어 놓은 함양지역 피라미드>

 

 

 

 

2. 고구려 고분벽화

 

우리 민족의 초기 회화는 4세기경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고구려 고분은 지금까지 모두 2만 여기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4~ 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약 100여기에서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 시대의 고분벽화는 감상용 회화 작품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반영한 무덤 장식용 벽화인데, 우리 민족의 채색화 수준과 기법은 물론 그 시대의 의식과 문화를 반영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분 벽면에는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이 있다. 사신도는 방위 신으로 무덤 안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좌청룡, 서쪽에 우백호, 남쪽에는 전주작, 북쪽은 후현무 순으로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와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와 별자리, 불교계통의 연꽃무늬, 여래와 보살, 비천과 기악천, 도교적인 용, 기린, 학을 탄 선인 등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분 구조와 회화 기법(벽이나 천장에 직접 그리는 조벽지법, 벽면에 회칠을 하여 벽면을 고른 다음에 그리는 화장지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색채가 아름답고 그림이 정교해진다. 묘실 구조는 전기 (4~5세기)에는 T자형의 다실묘로 검정색, 붉은색, 자주색, 청색, 녹색, 황색, 백색, 금박 등 어두운 색조를 사용한 생활풍속과 묘 주인의 초상화를 그린 인물풍속도가 주를 이룬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기(5~6)에는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呂자형 2실묘로 그림 소재가 다양하고 화려하며 밝은 색채를 사용한 인물풍속도와 사신도 (주작, 현무, 백호, 청룡)가 출토되며, 후기(6~7)에는 현실만 있는 口자형 단실묘에 불교적 요소와 도교적 색채가 강하며 인물풍속도가 사라지는 대신에 사신도만을 크게 강조하여 그렸다.

 

가. 전기 고분벽화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 고구려 전기의 대표적 고분은 황해도의 안악3호분과 평안도의 덕흥리 고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 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안악 3호분 (357년)과 덕흥리 고분(408년)이다. 안악 3호분은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서 발견되었으며, 남향에 석회질 대판석으로 된 T자형 석실 구조로 여러 면에서 3세기경의 중국 산동성 기남석묘와 통한다.

 

전실과 측실의 벽면 및 후실 외벽의 판석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서쪽 측실에는 주인공 부부, 동쪽 측실에는 외양간, 부엌 등이 그려져 있고 후실의 동쪽 회랑 벽에는 전체 길이 10.5m에 달하는 긴 화면에 250여 명이 등장하는 대규모의 행렬도가 있다.

덕흥리 고분은 평양 서북방에 있는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북경 지방인 신도현 출신으로 고구려의 유주자사를 지냈고 불교신도이며 고구려에 와서 국소대형의 관직을 받았다. 벽화의 내용은 안악 3호분과 같으나 견우직녀, 수렵도 등이 있다. 묘지명에 있는 이 무덤 주인의 성씨는 지워져서 알 수 없으나 2자로 된 복성이었고 이름은 진(鎭)이었다.

 

그의 출신을 둘러싸고 고구려인이라는 주장과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는데 이 사람의 출신지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무덤주인공 진의 경력 때문이다. 진은 건위장군, 용양장군, 좌장군(당시 중국 품계로 정4품에서 종3품에 해당) 등 여러 장군직을 역임하였고 요동태수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동이교위 유주자사를 지내다가, 77세를 일기로 409년(영락 18년) 12월 25일에 죽어 여기에 묻힌 사람이다. 즉 영락은 광개토왕 때의 연호이고 진은 광개토왕 때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데 유주의 치소는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이기 때문에, 만약 진이 고구려인이라고 한다면,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의 북경지방에까지 이르렀다는 결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벽화고분의 발견은 당시 남북한과 중국, 일본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벽화는 주인공이 그 예하의 13군 태수으로부터 하례를 받는 장면으로 주인공은 화려한 장방 안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다.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갈색의 맞섶 겉옷에 넓은 검은 띠를 맸으며 오른손에는 검은 털 부채를 쥐고 왼손은 띠 앞까지 올리고 있다. 얼굴은 넓고 둥그스름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약간 높으며 가느다란 눈매에 약간 긴 콧등, 그리고 팔 자형 수염을 잘 다듬고 턱수염을 길러 위풍당당한 풍모를 하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는 견우와 직녀 그림이 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고삐를 쥐고 소를 끄는 견우상과 그 뒤쪽에 개를 데리고 서있는 직녀상이 그려져 있고, 견우지상, 직녀지상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견우의 약간 일그러진 얼굴도 재미있고, 소의 얼굴과 걸음걸이에 애교가 있어 해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나. 중기 고분벽화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중기의 대표적 고분은 평안도의 쌍영총, 집안의 각저총, 무용총이다.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쌍영총은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에 비해 100년 정도 늦으며 앞선 시기의 고분 벽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쌍영총 널길 행렬도는 화려한 수레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중장기병과 아름다운 수레, 주름치마를 입은 3명의 여자와 그 여인들과 이야기하는 남자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무덤 안으로 향한다. 수레에 탄 사람이 무덤의 여주인공이라면, 중장기병은 무덤의 남자 주인공이고, 세 미녀는 이 부부의 딸로 해석할 수 있다.

 

집안시에 있는 무용총은 높이 약 3m, 기저(基底)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 분구로 널방(墓室)은 가로 세로 약 3m의 널방(玄室)과 가로로 긴 앞방(前室), 이 사이의 통로 및 널길(羨道)로 이루어져 있으며 呂 자형으로 널방천장이 팔각형을 이룬다. 널방 벽면에 남녀가 대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장면에서 무덤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벽화 내용은 인물풍속화이며, 그 중에서도 널방 벽화가 이 고분을 대표한다.

 

널방 벽화에는 고구려 회화에서도 손꼽히는 수렵도(狩獵圖), 무용도(舞踊圖), 주방과 묘 주인의 실내생활 장면과 수목도(樹木圖)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풍습과 생활상을 여실이 담은 무용총 벽화는 화면구성, 화재(畵材), 묘사방법 등에서 중국 양식에서 탈피한 고구려 벽화의 특징과 표현이 드러나고 전체적인 회화적 수준에서 중국의 고분벽화를 압도하고 있다.

 

수렵도는 산악을 누런 바탕에 짙은 갈색 물결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산 뒤에서는 달아나는 두 마리의 사슴을 잡으려고 말 탄 무사가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다. 앞산에는 호랑이, 사슴, 토끼를 사냥하고 있다.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 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차게 운동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의 말은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정도로 작아서 과하마(果下馬)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이는 산악 지형에서도 잘 다니고 지구력이 탁월하여 고구려 전투력의 바탕이 됐다.

 

무용도는 중앙의 오른쪽에는 14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그려져 있고 중앙에 5명은 뒤로 손을 뻗어 춤추고 있다. 그 윗부분의 벽화는 떨어져 나갔으나 악사가 춤에 가락을 넣고 있으며, 그 왼편으로 무용수가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며 나타나고 있다. 아래로는 역시 가락을 넣는 가수로 보이는 7인이 표정을 달리하여 그려졌는데, 무용과 가창을 겸한 교대조이거나 혹은 합창대로 추정된다. 중앙에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의 맨 앞에는 새 깃 모양 관을 쓴 남자 도창있다. 그 뒤로 두루마기를 입은 두 여인과 바지저고리를 입은 두 무용수가 같은 동작으로 따르고 있다. 무용수들의 소매가 길게 늘어진 무복에는 백색 바탕에 흑점문이나 황색 바탕에 적색점문이 있다. 이 무용 장면은 움직임의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다. 후기 고분벽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까지, 후기의 대표적 고분은 평양의 진파리 1호분, 통구사신총과 평안도의 강서대묘이다.

 

진파리 1호분은 6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이 고분벽화을 대표하는 것은 소나무와 현무 그림이다. 이 소나무는 널방 북벽 좌우에 크게 그려져 있는데 북벽에 크게 그려진 현무보다도 더 사실적이고 회화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진피리 1호분 이전의 벽화는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이 그다지 사실적이지 못하였는데 비해, 이 고분 벽화는 바람에 날리는 소나무를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렸고 이 소나무 그림을 시작으로 고구려 벽화는 자연을 그린 산수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강서대묘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강서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으로 분구는 원형이고 기저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으로 각각 한 장으로 축조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및 장식무늬이며,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다. 고분축조 및 벽화 연대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로 추정된다. 벽화는 대부분 철선묘법(鐵線描法)으로 그려졌는데,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안악 3호분 묘실 내부 >                                   <안악 3호분 인물화>

 

  

                                  <덕흥리 고분벽화 >                                           <덕흥리 고분벽화 >

 

   

                                 <쌍영총 널길행렬도>                                        <쌍영총 기마상>

 

  

                                       <무용총 수렵도>                                         <무용총 무용도>

 

     

                                      <강서대묘 청룡도>                                      <강서대묘 백호도>

 

     

                                <강서대묘 주작도>                                      <강서대묘 현무도>

 

  

                          <진파리 1호분 해와 달>                        <진파리 1호분 소나무와 현무>

 

 

 

3. 고려시대 회화

 

918년에 건국한 고려는 불교를 새로운 왕조의 국교로 하여 사회통합 이념으로 삼았다. 불교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세련된 귀족문화를 바탕으로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 피웠다. 또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종이가 보급되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인물초상화, 산수화, 불화, 영모화(화조화) 등 4분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도화원을 설치하고, 도화원 소속 화원은 궁중 장식화, 의식화 등 실용적인 그림을 그렸고 왕, 왕공, 사대부들은 감상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회화인 생활화를 그렸다. 이 회화는 화려한 채색화로서 호방한 민족성을 표현하였다고 하나 지금 현재 남아있는 그림은 거의 없다. 태조 23년 新興寺에 功臣堂을 건조하여 三韓功臣을 모셨고, 鳳進寺 東西壁에 공신 37명과 장군 12명의 초상을 그리는 등 인물초상화의 전성기였으나 지금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화가는 고려 초의 李寧과 고려 말의 공민왕을 들 수 있다. 이녕의 그림은 현존하지 않지만 문헌에 따르면 禮成江圖, 天壽寺 南門圖 , 晋陽山水圖, 松都八景圖, 金剛山圖 등의 기록이 있으며 실경산수를 주로 그려 실경산수의 효시로 꼽고 있다.

 

고려 말의 공민왕은 산수, 인물, 짐승 등을 잘 다루었고 天山大獵圖은 현존하는 대표작으로 사냥하는 장면을 비단에 원인화풍(元人畵風)으로 채색한 것으로 필치가 정묘하고 치밀하여 현존 고려회화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3쪽이 소장되어 있으나 훼손이 심하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는 대부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약 160 여점이 남아 있고, 국내에 20여점, 일본에 100여점 이상, 나머지는 프랑스, 독일 등으로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된 상태이다. 고려불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단아한 형태와 원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의 조화, 호화로운 금니의 사용하여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선묘는 당시 독보적인 미의 세계를 창조한 고려인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고려 불화 제작기법은 대부분 비단 바탕 위에 적색은 주사, 녹색은 석록, 청색은 석청이라는 광물질 원석을 잘 갈아서 아교물에 섞어서 그렸으며, 비단 뒷면에 먼저 채색한 다음 앞면에서 다시 색을 칠하는 배채법(背彩法)은 깊은 색감을 살리고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 주어 지금까지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불화는 사찰의 벽화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두루마리 형식이다. 비단, 천, 종이에 족자나 액자로 제작된 불화를 흔히 탱화(幀?)라고 하는데, 탱(幀)은 틀에 그림을 붙이는 것, 걸개 또는 서화를 세는 단위를 뜻하며, 탱화라는 명칭은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탕가(Tanka)에서 유래하였다. 탱화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탱화는 고려시대 이후의 작품으로, 고려시대에는 귀족적 성향, 조선시대에는 민중적인 성향을 띤다.

 

고려 불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금니(金泥)인데, 바탕천의 올 간격과 비슷할 정도로 정밀하고 섬세하게 각종 문양을 그렸다. 가장 많이 사용한 문양은 연꽃, 연잎, 보상화, 당초, 국화, 모란 등이고 한 종류만 그리기도 하지만 연화당초문, 보상화당초문처럼 몇 가지 문양이 결합된 것도 있다. 불화에는 비로자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다양한 부처가 등장하는데 정토신앙은 종파와 상관없이 일반 신도들에게 널리 유포된 것은 아미타불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등 정토계 불화가 많이 남아 있다.

 

일반적인 수월관음도는 암좌에 반가좌한 모습이나, 이 그림은 물방울 형태의 광배 안에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다. 관음이 딛고 선 연화좌는 물속에서 솟아나 있으며, 물결무늬는 먹 선으로 구불구불하게 그어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결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발치 앞에는 꽃묶음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앞에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다.

 

 

  

                        <天山大獵圖>                                                     <天山大獵圖>

 

     

                    <수월관음도>                         <아미타불도>                              <수월관음도>

 

 

                     <아미타 삼존도>                                           <아미타삼존 내영도>

 

 

 

 

 

 

 

4. 조선시대 회화

 

 

조선시대 회화의 편년은 학자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보통 초기를 1392~1550년, 중기는 1550~1700년, 후기를 1700~1850년, 말기를 1850~1910년으로 4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조선시대 회화의 이러한 편년은 산수화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산수화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인의 자연관과 사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담고 있다. 회화는 미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산수화는 회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화원을 시험으로 뽑을 때 문인 취향을 길러주기 위하여 대나무 그림을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았으나, 이는 상징적인 의미이고 실제로는 감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산수화를 중심으로 회원을 뽑았으며 왕의 어진 등 인물화 그림 등으로 화원을 선발하였다. 또한 산수화는 각 시대별 특성을 변화가 가장 빠르고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각 국의 특성과 국제간의 미술 교류 관계를 밝힐 수 있다. 또한 제한된 크기의 화면에 대자연을 그리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기교가 잘 발달하여 회화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수화의 정신적 배경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후 고려시대까지 화려하게 발전한 불교미술이었으나, 조선 건국 후 억불숭유 정책으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문인화가 발달하여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무성의 시’라는 시화일률사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사대부들은 산수화를 보면서 상상력으로 자연 속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와유사상이 매우 발달하여 산수화가 감상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자연 친화적이고 탈사회적인 도가사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매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가. 조선 초기의 회화

 

조선 초기에는 고려 때 축적된 중국 회화가 다수 전승되었고, 연경을 중심으로 중국 화풍이 많이 전래되어 우리나라 화풍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조선으로 유입된 중국으로 화풍은 북송의 郭熙派(李郭派)와 남송의 마하파(마원과 하규) 등의 원체화풍, 명초의 절파와 미법산수화풍 등이 있는데, 이중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역시 곽희파 화풍으로 안견 화풍의 토대가 되었다. 곽희파는 북송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에 의해 이룩된 화풍으로 이성의 화풍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화풍이 뚜렷한 곽희의 이름을 따서 ‘곽희파’라 한다.

 

곽희파는 뭉게구름처럼 보이는 침식된 황토산(黃土山)을 즐겨 그리되 그 표면 처리에 있어서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도록 붓을 엇대어 쓴다. 산의 모습은 윤곽선 바깥쪽에 이빨모양으로 돋아 난 치형돌기(齒形突起)형태로 그리고 산의 밑동을 밝게 표현하는 게 특색이다. 山水는 근경, 중경, 원경이 점차 상승 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나뭇가지는 게 발톱 형태의 해조묘(蟹爪描), 소나무 잎은 송충이 털처럼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안견과 강희안 등의 거장들이 배출되어 격조 높은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당시의 화풍은 맨 먼저 북송의 이성과 곽희를 주축으로 하는 이곽파(곽희파) 화풍이, 두 번째는 남송의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을 위시한 원체화풍이, 세 번째는 명대의 원체화풍이 전래되었으며, 네 번째는 절강성 출신인 대진을 중심으로 한 절파화풍이, 다섯 번째는 북송의 미불, 미우인 부자에 의해 정립된 미법산수화풍이 전래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화풍을 철저히 소화하여 중국과는 완연하게 구분되는 특색 있고 독특한 한국적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안견은 1400년경에 태어난 화원으로 종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4품 호군(護軍)에 올랐다. 안평대군 초상화(1442)를 비롯하여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1443), 팔준도(八駿圖, 1446),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 1448) 등을 그려 조선초기 화단의 제일인자로 활약하고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 화가로 손꼽힌다.

 

안평대군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여러 유파의 그림들을 많이 보면서 그 요체와 좋은 점을 취하고 절충하여 자신의 화풍을 이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 화훼,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 등을 잘 그리고 특히 산수화에 능하여 당시에는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독특한 수지법과 준필로 험준한 산세와 대국적인 스케일을 사용하는 곽희파의 북송대 북방산수를 적극 수용하였다.

 

안견 작품 중 몽유도원도만이 확실한 진작이고,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 등은 전칭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와 공간 배치 및 필법 등 한국적인 특징을 짙게 띠고 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화풍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파인 안견파가 형성되었고, 석경(石敬), 정세광(鄭世光), 신사임당(申師任堂), 이상좌(李上佐), 이불해(李不害), 강효동(姜孝同), 김시(金?), 이정근(李正根), 이흥효(李興孝), 이정(李楨),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이성길(李成吉) 등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의 화풍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 작품 해설 ]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비단에 그린 수묵담채화로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방문하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1447년 4월 20일에 안견에게 설명한 후 이를 그리게 한 것으로, 그림 착수 3일만인 4월 23일에 완성한 장권형식의 작품이다. 표제와 발문은 안평대군이 쓰고,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 당대 최고 문사 21명의 제찬을 포함해서 총 23편의 자필 찬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림이 전개되는데 몽유도원도는 왼쪽 하단부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상단부로 사선형태로 그림이 전개된다. 왼쪽 전반부는 정면시각으로 오른쪽 후반부는 부감법을 이용한 공간처리, 평원법과 고원법의 대조, 사선운동의 활용하여 자연의 웅장함과 선경(仙境)의 환상을 절묘하게 나타냈다. 운두준법(雲頭?法), 세형침수, 조광효과(照光效果)의 표현 등은 곽희파 화풍을 띠고 있지만 전체적인 화풍이 안견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후대의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그림이 전개되는데 비하여, 이 그림은 특이하게 왼쪽 하단부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상단부로 그림이 진행된다. 왼쪽 하단부의 2갈래 길에서 시작하여 윗길은 일상적인 세계의 산길로 접어드는 길이고, 오른쪽 아랫길은 도원으로 가는 길이다. 도원 방향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하고 장엄하게 그렸다. 오른쪽 상단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그 안쪽에는 넓은 평원에 도원을 그렸다. 부감법(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구사하여 앞산을 낮게 그려서 산과 평원을 적절히 묘사하였다. 복사꽃은 붉은, 분홍, 초록, 파랑색으로 그리고 꽃술에는 금분 칠이 되어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안개, 초가집, 방호가 있다. 표제와 발문을 쓴 안평대군은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특히 몽유도원도 주제의 글씨는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하는 조맹부의 송설체로 쓴 작품으로, 그의 서예 글씨는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안견 작품을 전칭한 그림으로 4계절의 변화를 初와 晩으로 구분하여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의 구도는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를 사용하여 근경과 후경이 2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편파2단구조라고 하는데, 이는 16세기 전반기부터 가운데에 하나를 더 넣어 편파3단구조로 발전하게 된다. 각 장의 그림에는 3~4개의 경군을 따로따로 배치하고, 경군들 사이에는 대개 넓은 수면이나 안개로 채워져 있어서 확대지향적인 공간을 추구하였다. 初春부터 晩秋까지는 경군들 사이에 여백을 둬서 확대지향적인 공간을 지향한 반면에 겨울 그림인 晩冬에서는 굵고 각이 심한 강렬한 필선으로 산과 나무를 그리고 그림의 끝 공간을 막아 놓았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원작은 1078년 송나라 송적(宋迪)의 작품으로, 중국 호남(湖南)성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동정호(洞庭湖) 주변의 절경(絶景)을 그린 8폭 그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의 어명으로 이광필(李光弼)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중엽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산수의 경개(景槪)가 뛰어난 것을 일컫는 '팔경(八景)'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아래의 그림은 안견의 작품을 전칭한 것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 풍경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서정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사색적 이미지가 더욱 짙다. 높은 산과 깊은 강, 안개와 노을 속에서 자그맣게 그려진 인물을 보면 마치 시공이 멈춰진 신선 세계에 있는 듯하다. 각 첩의 그림을 반으로 나누어 볼 때 왼쪽 또는 오른쪽,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을 둔 편파(偏頗) 구도로 두 폭을 함께 보아야 좌우 균형이 잡힌다. 또 가까운 곳과 먼 곳 그리고 그 가운데의 경물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깊이감과 거리감이 잘 표현되었다.

 

제1첩 산시청람(山市晴嵐, 봄철의 아침나절 풍경)

제2첩 연사모종(煙寺暮鐘, 안개에 싸여 저녁 종소리 울리는 산사의 풍경)

제3첩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수와 상강이 만나는 곳의 밤비 내리는 풍경)

제4첩 원포귀범(遠浦歸帆,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의 모습)

제5첩 평사낙안(平沙落雁, 기러기 날고 있는 모래펄 모습)

제6첩 동정추월(洞庭秋月, 달이 비친 동정호의 가을날 정취)

제7첩 어촌석조(漁村夕照, 저녁 놀 비친 어촌 풍경)

제8첩 강천모설(江天暮雪, 저녁 눈 내리는 강과 하늘 풍경)

 

 

 

 

 

 

<소상팔경도>

 

 

 

 

 

 

<몽유도원도>

 

 

  

                                      <初春>                                                       <晩春>

 

 

                                      <初夏>                                                     <晩夏>

 

 

 

                                        <初秋>                                                     <晩秋>

 

 

 

                                         <初冬>                                                    <晩冬>

 

 

 

 

 

 

나. 조선 중기의 회화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제적 대란이 잇달아 발생하고, 내부적으로는 사색붕당이 지속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불우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조선 중기에 성행하였던 화풍은 절파계 화풍과 원체화풍이 유행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화공들은 가업을 계승하는 화원출신이므로 화풍에 대하는 태도는 엄격한 형식을 강조하는 高踏的 분위기였다. 남종화가 유입된 최초의 문헌 기록은 병자호란 때 瀋陽에 잡혀 갔다 온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의 집에서 明代吳派의 大家 문징명(文徵明)의 그림을 보고 김상헌과 허묵이 찬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선조 때 김명원은 1606년에 왕에게 문징명의 화첩(畵帖)을 바쳤으며, 대체로 1700년을 전후하여 남종화가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에는 조선 초기의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시, 이윤경, 김명국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고, 안견파 화풍은 이정근, 이홍효, 이징 등이 추종하였으며 서정적이고 애틋한 영모화를 그린 이암, 김식 조속과 화조화, 묵죽, 묵매, 묵포도 등을 그린 이정, 어몽룡, 황집중 등이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한 가지 화풍에만착하기보다는 두서너 가지의 화풍을 두루 수용하는 시험적 성향을 띠고 있으며, 대를 이어 화가 집안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김명국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의 그림은 거칠고 과장된 기운이 감도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에 가까운 절파계 화풍과 더불어 안견파 화풍을 쓰기도 했다. 조선의 3대 기인 화가로 최북, 김명국, 장승업을 꼽는데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몹시 좋아해서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굳세고 호방한 거친 필법으로 절파 후기의 광태사학파적인 산수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또한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밤잠을 못 잘 정도였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대담하고 간략한 붓질로 달마도를 잘 그렸다.

 

또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양송당(養松堂) 김시(1524~1593)는 좌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가 14살 되던 1537년,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는 바람에 출셋길이 막혀 버렸다. 부친이 사약을 받던 날은 그가 장가가는 날이었다. 다행히 이 집안은 그림의 혈통이 있어 아버지는 '용천담적기'라는 저서에서 국초(國初)의 그림에 대해 논한 바 있고, 큰형님도 그림에 능했다. 달리 살아갈 길이 없던 양송당은 그림으로만 일생을 살았으며, 손자 또한 화가가 되어 연안 김씨 가문은 그림의 명문가가 되었다. 그의 화풍은 절파계 화풍을 중심으로 하면서 때로는 안견파 화풍 및 다른 화풍들을 수용하여 새롭게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였다. 글씨에서 석봉 한호, 문장에서 간이당 최립과 함께 삼절(三絶)로 칭송되었다. 양송당은 과연 당대의 대가로 기존의 서정적 산수화에서 스토리텔링이 있는 인간 중심의 산수화라는 신풍을 일으켰다. 대표작으로는 동자견려도와 한림제설도가 있다.

 

 

[ 작품 해설 ]

김명국의 달마도(達磨圖)는 족자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조선 선종화(禪宗畵)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6세기 경 중국에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보리달마는 선종화의 중요 화제로서 자주 등장한다. 대담하고 힘찬 몇 번의 붓질로 달마의 상반신을 그리고 옷 주름은 극도로 생략된 감필 붓 자국의 굵고 가는 선폭으로 강렬한 인상을, 재빠른 필선의 속도에서는 활기찬 움직임을 중심으로 묘사하였다.

 

보리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석가 세존의 불대(佛代) 27대 조사인 ‘반야다라’로부터 법통을 받고 수행하다가, 불대 28대 조사가 되었다. 반야다라 존자가 달마에게 “동쪽으로 가면 법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동쪽(중국)으로 가서 법을 전하라”고 하였다. 서기 520년경 달마가 중국에 도착하여 양나라 무제를 만나서 최초의 설법을 전하였으나, 양 무제가 깨달지 못하자 달마는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간다. 그 후 달마는 소림사로 들어가서 눕지도 말하지도 않고 동굴에서 9년간 면벽 수행하여, 이때부터 ‘면벽 9년’ 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후 중국 선종의 초조(시조)가 된다.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는 족자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작품으로 6세기 초 달마가 양(梁) 무제에게 최초로 설법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갈대 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갔다는 전설을 그림으로 그렸다. 담묵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얼굴에 비해, 의복부분은 죽죽 그어댄 활달한 농묵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주춤거리는 곳이 없는 빠른 속도의 감필묘(減筆描)는 김명국의 세련된 기교를 말해준다. 이같이 대담한 필선은 예리한 눈매와 더불어 달마의 농축된 선기(禪氣)가 매우 잘 묘사되었다.

 

김시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린 작품으로 보물 78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귀와 동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림의 주제이다. 본래 네 발 달린 짐승은 본능적으로 땅이 아닌 곳은 밟지 않는다. 그래서 나귀는 한사코 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치고 동자는 어서 가자며 잡아끌고 있다. 그 상황의 표현이 아주 생생하여 그림 속엔 사실감과 인간미가 넘친다. 특히 양송당은 작품상에 낙관(落款)을 분명히 나타냈다. 숙종 때 남태응은 '화사(畵史)'를 쓰면서 기록이 아니라 실제 작품으로 대가임을 보여주는 첫 화가는 양송당이라 하였다.

 

화면에 등장하는 각 사물들의 공간 배치와 여백이 어울려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몇 개의 바윗덩어리와 화면 오른편의 희미한 산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는 몇 개의 경군으로 흩어져 배치된 사물들을 시각적으로 하나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나무는 화면의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나 위로 올라가면서 주위의 사물들에 적절한 조형적 통일감과 긴장감을 준다. 소나무 위쪽으로는 흑백의 강한 대비효과를 주면서 주산이 그려져서 화면에 웅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한림제설도는 안견파 화풍을 수용하여 물상들이 한쪽 종반부에 치우친 편파3단구도를 이용하여 드넓은 수면 공간 효과를 내고 있다. 화면 좌측 상반부에 그려져 있는 설산의 기울어진 형태는 절파화풍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눈 걷힌 겨울날의 산수를 그린 이 작품은 편화(片畵)가 아니라 전지 반절(20호) 크기의 본격적인 작품으로 필치가 아주 곱고 세련되었다. 특히 화면 왼쪽에 '갑신년(1584) 가을에 양송거사가 안사확(安士確)을 위하여 한림제설도를 그리다'라는 관지(款識)가 한석봉체로 단정히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계수(季綏)'라는 자(字)와 이름 김시를 새긴 도장이 또렷이 찍혀 있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도서낙관이 분명하고 작품 이름과 누구를 위하여 그린 작품인지를 명확하게 기록된 최초의 작품으로 임란 이전의 작품 중 안견의 '몽유도원도' 다음 가는 회화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그림을 보면, 풍경 전체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고 깊은 정적에 싸여 차가운 강물 위로 나룻배 한 척이 외롭게 떠있다. 흰 눈이 덮인 산에는 짐승과 새들의 움직임도 없는데, 나무로 둘러싸인 초옥 안에선 한 선비가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 대문 밖 마당에는 삿갓을 쓴 시동이 무언가 하고 있고 근경의 강가에는 빈 배 두 척이 얼어붙은 듯 정적만이 가득하다. 눈 덮인 한겨울의 깊은 시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달마도>                                             <달마절로도강>

 

 

  

                       <동자견려도>                                          <한림제설도>

 

 

 

 

다. 조선 후기의 회화

 

조선 후기에는 명대 및 청대의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보다 독창적인 한국적 화풍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특히, 영정조시대의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그리는 회화가 발전하여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화풍이 풍미하였다.

 

1700년대를 기점으로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중국 남종화의 대가인 심주의 작품을 왕성하게 방작하였다. 당시의 화풍은 북종화를 탈피한 남종화가 유행하여 자연의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氣韻과 意境을 중심으로 하는 남종화는 문인화라는 명칭으로 지식인층으로 수용되어 대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관념산수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나라 산수를 그리는 진경산수가 크게 발전하였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담은 풍속화가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 산수화의 주류 화풍을 종류는 첫째 북종화풍, 둘째 진경산수화, 셋째 남종화풍이 있다. 북종화풍(절파, 원체)은 윤두서, 윤덕희, 윤용, 조영우 등에 이르러 쇠퇴하고 남종화를 전면으로 수용하여 방작한 이인상, 강세황, 신위, 윤제홍, 이제현과 김정희 등이 있으며, 남종화를 받아 들여 한국적 정서로 승화시킨 진경산수 화풍을 구사한 정선, 강희언, 김홍도, 이응환, 정수영, 최북 등이 있다.

 

정선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우리의 필법으로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한국 회화라는 기반을 만들었다. 정선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남종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작품이었으나, 그 후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실제 자연을 새로운 필법(實景)으로 그린 금강산도, 금강산내도, 해금강도, 정양사도, 인왕산도, 해인사도 등 晩年의 작품들이 진경산수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정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화원의 화공들로 진경산수화가 당시의 지식인(문인, 사대부)에게는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아마추어인 지식인이 실경을 근거로 산수를 그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남종화가 진경산수화보다 이론적 체계가 잘 정립되고 문인의 취향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정선은 중국 화풍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진경산수화라는 한국회화사의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으나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행하던 진경산수화풍도 정황에 이르러 그 맥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恭齋 尹斗緖(1668~1715)는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이석에게 입양되었다. 孤山 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로서 해남 윤씨의 종손이며 茶山 丁若鏞(1762-1836)의 외할아버지인데, 15세에 전주 이씨와 결혼하였고 그의 나이 25세에(숙종 15년)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첫 대과에 실패한 후 집안이 남인 계열인데다 당쟁이 심화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시서화와 교우, 독서로써 생애를 보냈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 공장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초상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특히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서민풍속화(나물 캐는 아낙네, 밭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를 남김으로써 우리나라의 풍속화를 개척하였고, 겸재 정선(謙齋 鄭敾),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과 함께 조선후기 삼재(三齋)로 불리는 선비화가이다.

 

공재의 회화관은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계 화풍의 자유분방한 건필농묵(健筆濃墨)을 계승한 화관(畵觀)이 뚜렷하며, 남종화론과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함께 갖추었다. 공재는 자신의 회화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평하고 있다. “굳셈과 유연함, 움직임과 고요함, 강약, 완만함과 급함, 단단함과 활발함, 각진 모양과 둥근 모양, 원만함과 돌출, 통함과 막힘, 통통함과 홀쭉함, 빠름과 느림, 가벼움과 무거움, 장단, 거대함과 세세함 등은 필법이다. 음과 양, 고요와 격정, 농담, 원근, 높이와 깊이, 앞과 뒤, 선염, 물들임과 깨뜨림 등은 묵법이다.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묘함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신격(神格)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을 부여함은 그림의 도(道)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는 화도(畵道)가 있고, 화학(畵學)이 있고, 화지(畵識)가 있고, 화공(畵工)이 있고, 화재(畵才)가 있다. 만물의 성정(性情)에 능통하고 만물의 형상에 능변하며, 삼라만상을 포괄하여 헤아릴 줄 아는 것이 '화지'이다. 형상의 의표를 터득하여 도(道)로써 안배하는 것이 '화학'이다. 규구(規矩)를 제작하는 자는 '화공'이다. 마음자리를 따라서 손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이 '화재'이다. 여기에 이르면 '화도'가 형성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염증을 느끼고, 그것을 버린 지 수년 동안이었다. 이제 옛 화첩을 펼쳐보니 기운이 약하고 힘이 없으며 불만스러운 것이 많다. 잘된 부분이 나온 때도 있으나 대체로 '화도'에서 보면 보잘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윤씨가보』라 쓰인 화첩 2권과『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 등이다.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 등은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1권은 선면(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숙종 30~34년(1704∼1708) 사이에 그려진 것이며 다른 1권은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은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스스로 지은 호생관이라는 호는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 칠칠은 북(北)이라는 이름을 둘로 나누어 스스로 지은 것이며 또한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하고 산수화도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고도 했다. 초기에는 남종화풍이었으나, 금강산 여행 이후 중국 화풍을 극복하고 한국 고유의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익, 이용휴, 신광수, 신광하, 강세황 등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소론계의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사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자연주의와 함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는 등 시서화를 겸비한 조선 후기의 본격적인 직업화가로서 활약하고 만년에는 박지원, 유련, 남공철 등 북학적 성향을 띤 지식인들 및 여항시인 이단전, 김홍도 등과도 교류하였다.

 

최북은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때문에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펴지 못하자, 술과 그림으로 울분을 달랬다. 괴팍한 성격과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狂生)으로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남공철의 '최칠칠전(崔七七傳)'과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국을 주유하던 중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구룡연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또한 어느 날 한 권력자가 최북에게 산수화를 그리라고 하자, 최북은 그에 못 이겨 그림을 그리는데, 물은 안 그리고 산만 계속해서 그리자, 이를 보던 사람이 "아니 내가 산수화를 그려 달랬는데, 산만 그리고 왜 물은 안 그립니까?" 하자, 최북은 "그림 바깥은 다 물인지 아쇼" 라며 작품을 건넸으며, 또 어느 날에는 최북이 그림을 그리기 싫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을 그려달라고 협박하자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며 송곳을 꺼내서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고, 그때부터 최북은 돋보기안경을 사도 한 알만 샀다고 한다. 말술을 즐긴 그는 말년에 남의 집 살이를 하다가 어느 눈 오는 날에 만취하여 성곽 구석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는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와 사시팔경도화첩(四時八景圖畵帖), 한강조어도 (寒江釣魚圖),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등이 있다.

 

 

[ 작품 해설 ]

 

정선의 금강전도는 1734년(영조 10년)에 정선이 내금강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눈 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낌의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내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1751년, 영조 27) 때에 윤5월 하순,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종이에 수묵(水墨)으로 그린 산수화로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겸재가 76살이라는 고령에 그려낸 대작으로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를 더한 걸작이며, 우리의 옛 그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장엄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인왕산에 큰비가 내린 다음, 비가 개어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그린 그림이다. 겸재의 평생 친구인 이병연(1671~1751)의 임종을 앞에 두고서 지루한 장맛비가 그친 어느 날 오후,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처럼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날 것을 빌면서 정선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작품을 그렸다. 이런 사실은 깎아지른 바위산인 인왕산에는 폭포가 없는데 그림에는 폭포가 세 줄기나 그려져 있다. 즉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는 장맛비가 폭포를 만들고 기와집 주변의 소나무 숲은 뚝뚝 물기가 듣는 붓을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러 삽시간에 그려냈다. 그것도 뒤쪽 소나무의 흐린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앞쪽 소나무를 짙은 먹으로 다시 그어댔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뭉개진 흔적까지 보인다. 궂은 날씨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벗을 생각하며 정선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재빨리 붓을 놀려 이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안개 속에서 한 가닥 희망처럼 보일 듯 말 듯 푸른 먹빛이 배어있다. 그림 속 기와집은 이병연의 집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정선은 인왕산의 우뚝한 기상과 이병연 집의 깨끗한 선묘로서 오랜 벗의 듬직하고도 고결한 인품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원경에 바위를 가득히 배치하고 그 아래에 안개와 수목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수목과 가옥이 있는 전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俯瞰法)으로 포착하고 원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나타내었다. 먹색의 강렬한 흑백 대비로 굴곡진 산의 습곡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며 화면에 변화와 활력을 주고, 바위의 거대한 양감(量感)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사된 적묵(積墨)의 힘찬 붓질과, 크고 작은 수목들에 가해진 편필(偏筆)의 활달한 운필 그리고 산등성이의 성근 피마준, 짧게 끊어 찍은 작은 미점(米點) 등은 정선이 서울 근교의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사용했던 기법이다. 인왕산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의 하나로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는 북악(北岳)과 연결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서울로 정할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았다.

 

공재의 자화상(自畵像)은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우리나라 초상화로서는 유일하게 국보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눈매는 상당히 매서워서 첫인상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고 활활 타오르고 수염은 내면 깊은 곳에서 기를 발산하는 듯하다. 인물은 정면도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입체감은 보이지 않으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극사실주의로 그린 이 작품 속의 얼굴에는 귀가 없고 목과 상반신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 상반부로 치며 올라가 탕건의 윗부분도 잘려져 나갔으며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 1937년)' 제3집에서 실린 윤두서의 자화상을 분석한 결과,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도포를 입은 상반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사진 속의 상반신 윤곽선은 밑그림용 유탄(柳炭, 버드나무 숯)으로 그렸는데 이것은 점착력이 약해서 쉽게 지워진다. 중요 부분인 얼굴부터 먹선을 올려 정착시키고 몸체는 유탄으로만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미쳐 먹선을 넣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 상태로 전해오다가 언젠가부터 그 부분이 지워진 상태로 남아있다.

 

채애도(採艾圖)는 봄날, 비스듬한 언덕에서 나물을 캐는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풍속화다운 풍속화이다. 이 그림에는 몇 가지 파격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림 속 주인공이 시골 아낙네라는 것과 그림의 주제가 서민의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쪽 여인은 망태기와 칼을 들고 캘 나물을 찾는 듯 허리를 굽히고 있고 위쪽 여인은 서서 고개를 젖히고 주변을 둘러보는 있는데,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저고리에 일하기 편하도록 치마를 걷어 올려 묶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있다. 간략한 선으로 나물 캐는 여인네를 잘 묘사하였다. 담묵으로 처리한 먼 산은 엷게 그렸고 간소한 필치로 여인들의 주변 언덕의 잡풀과 자갈을 묘사하였다. 인물은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에 가파른 산은 중국 화본의 영향을 받아 매우 관념적인 묘사하였다.

최북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는 종이에 담채로 그렸는데, 봄날 파릇파릇하게 나뭇잎이 돋은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사람도 없는 텅 빈 초가 정자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이처럼 한적한 풍경에 파격적으로 중앙에 두 개의 낙관과 함께 그림보다 유난히 큰 글씨로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 빈산에는 아무도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라고 쓴 화제가 눈길을 끈다. 이 화제는 중국 시인인 소식의 시구로 이 그림과 절묘하게 들고 그림 중앙에 과감하게 찍은 낙관과 대담한 글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격적인 기행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 엿보인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은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림은 3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좌상우하로 진행된다. 왼쪽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비구름과 왼쪽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그림이 시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끌어준다. 윗부분에는 초목이 듬성듬성한 눈 덮인 산이 보이고, 중간에는 거센 바람에 허리가 잔뜩 휜 나무와 그 뒤로 초가집과 사립문 밖으로 검둥개 한 마리가 뛰어나오며, 맨 아래쪽에는 지팡이를 든 노인과 동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풍설야귀인은 당나라 시인인 유장경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다음과 같다.

“날이 저물어 푸르른 산은 먼데/ 차가운 하늘 밑 시골집이 쓸쓸하네/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 으로 세파에 시달려 늙고 지친 나그네가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애절한 마음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채애도(採艾圖)>                                                <자화상>

 

 

   

                                 <공산무인도>                                                     <풍설야귀인>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는 중인 출신으로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특히, 본격적인 풍속화를 그린 화가이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출신의 소년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표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 때문이다. 단원이 당대의 명문사대부이자 문인화가인 표암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표암도 단원의 재능을 이렇게 칭찬한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렸다.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다른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표암과 단원의 관계는 세 번 변한다.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두 번째는 사포서에서 일하는 동료 관계, 세 번째는 지기(나를 알아준다)의 관계이다. 강세황은 삼대가 정2품 이상의 벼슬에 올랐던 명문가의 집안인 반면, 김홍도는 중인 계급이었고, 두 사람의 나이 차가 40년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표암이 단원을 제자이자 동료이며 지기라고 기록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단원은 표암의 추천으로 스무 살 이전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 축하 잔치용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단원이 그 그림을 그렸다. 이는 이미 그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1773년 스물아홉의 때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며 정조와의 인연을 맺고,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 초상화를 그린 단원은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오르고, 두 달 뒤에는 스승 표암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가 함께 근무했다. 이 무렵 단원은 신선도, 군선도,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와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대부분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그렸으며,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는데, 이에 대하여 표암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40대에는 주로 화조화, 기록화 등을 그렸으며 1791년에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하여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충청도 괴산지역)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올랐으나, 부임 3년째 되던 해 호서위유사(湖西慰諭使) 홍대엽이 "김홍도는 고을의 수장인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이나 즐겨서 원망과 비방이 자자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서 연풍현감에서 파직되었다. 현감 자리에서 중인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하여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는 해산선학도, 마상청앵도, 세마도 등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 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지만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아니하므로 1806년 예순두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단원의 단원풍속화첩에 들어 있는 풍속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는 첫 번째 이유는 소재가 매우 친근하기 때문이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당시 시대적 생활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며, 둘째는 풍속화가 간략한 선으로 그린 만화적인 성격을 띠며 마치 삽화처럼 세부가 소상하면서도 익살으며, 셋째는 단순하고 빠른 필선으로 현대의 캐리커처와 같이 인물의 특징을 중심으로 그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원풍속화첩(25첩)은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을 하여 그렸는데, 각 장은 가로 22.4㎝, 세로 26.6㎝ 정도이며, 씨름, 대장간, 글방 등 서민의 일상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 구수하고도 익살스럽게 묘사하였다. 대부분의 풍속화는 주변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으며 특히, 인물은 웃음 띤 둥근 얼굴을 많이 모사하여 익살스러움을 한층 더하였다. 선이 굵고 힘찬 붓질과 짜임새 있는 구도로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한편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한국인의 웃음을 잘 표현하였으며 일부 춘화 작품도 남아 있다.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 ?)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이자 화원인 신한평의 아들로 조선의 양반관료의 위선과 이중성을 풍자한 풍속화를 잘 그렸다. 그러나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었고 또한 도화서 화원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종조부 신일흥, 종증조부 신세담, 아버지 신한평도 모두 도화서의 화원으로 명실상부한 화원의 가문이었다. 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정조 초기에 그린 그림 중 한 작품이 정조와 닮지 않아서 그림(어진)을 알아볼 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신윤복도 도화서 화원이 되어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 맡았고 1813년의 작품이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혜원은 단원과 함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며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주로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위선과 이중성을 고발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또한 가장 선구적인 모더니즘의 화풍 구사한 우리나라 최고의 혁명적 화원이다. 즉 혜원의 핵심 화제는 지배계층의 이중적인 위선을 고발하고 인간 중심의 정신을 표방하는데 있다.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이고 스스로 사회 지도층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근엄한 표정과 꼿꼿한 자세로 행동하지만 그 내면의 이중인격을 자유분방한 화필로 담아 서민들과 함께 비웃고 있다. 청금상련, 주유청강 등의 그림에서와 같이 주변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현장 고발자이자 증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등장시킨 것이다. 즉, 혜원은 당시 그 어떤 사회 비판가들 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양반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향락적 풍조가 만연한 조선후기의 사회를 그림으로 고발하였다.

 

또한 혜원의 풍속화를 통해서 살림과 복식 등 그 당시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짧은 찬문과 함께 관지와 도인이 곁들였지만, 한결같이 연대와 시기를 밝히고 있지 않아서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혜원의 작품은 소재, 구성, 인물 표현법과 설채법 등에서 단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인물화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또한 중국과 서양 안료를 이용하여 적색, 청색, 황색 등 다양한 색체를 풍성하게 사용하였다.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혹은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은 혜원이 그린 풍속화 30장으로 만든 연작 화첩인데, 한때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나 1930년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이 일본 오사카의 한 고미술상에게서 사들여 새로 표구를 했으며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주유도, 단오수변희희도, 주막도, 연당의 여인, 무무도, 산궁수진 등과 산수화, 영모화(翎毛畵)에도 뛰어났으며 일부 춘화 작품도 남아 있다.

 

 

[ 작품 해설 ]

 

김홍도의 ‘씨름’은 단원풍속화첩에 수록된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옷차림과 여기저기 부채를 든 모습으로 보아 모내기가 끝난 단오절 무렵으로 보인다. 오른쪽에는 발막신(가죽신)과 짚신,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댓님과 옷차림으로 보아 양반과 평민의 대결이다. 구경꾼 또한 왼편에는 양반이, 오른편에는 평민이 앉아서 구경하고 있으며, 앞쪽 평민 출신의 씨름꾼이 상대편을 들배지기 기술을 구사하자 양반들이 당혹스러워하고 평민들은 신이 났다.

이 그림을 우리나라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이 그림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렸고, 공책만한 종이 위에 모두 22명이 등장하며, 인물 배치는 가분수 형태로 위쪽에 더 많이 배치하여 구성으로서의 역동성을 띤다. 또한 왼쪽에는 엿장수 소년이 등장한다. 씨름판의 구경꾼은 결정적인 순간에 처한 씨름선수를 함께 흥분과 긴장으로 마음을 졸이는 반면, 엿장수 소년에게는 그런 긴장감이 없고 밝은 표정으로 엿을 팔고 있다. 즉, 이 엿장수의 역할은 긴장과 풀림의 조화, 집중적 관심과 외면의 상반된 관계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조형미를 십분 살리고 있다.

 

‘무동’(舞童) 또한 단원풍속화첩에 수록된 작품으로 ‘씨름’과 함께 최고의 작품으로 솝꼽힌다. 그래서인지 88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는 무동의 모습과 움직임을 디자인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퇴색되고 자잘한 상처가 난 종이에 金弘道印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는데, 이 도장은 작품 제작에 찍은 것이 나중에 찍은 가짜이기 때문에 한때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고도 도저히 인정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어느 작품보다도 단원의 기풍이나 솜씨가 잘 어울린 수작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삼현육각(三絃六角 : 북, 장구, 피리 둘, 대금, 해금)의 연주 장면과 잘 생긴 아이가 소매를 펄럭이며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의 초점은 무동에 있고 다른 인물들과는 약간 떼어서 배치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삼현육각 연주는 그림에서처럼 둥글게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렬로 앉아 연주하는 것이 관례인데 즉 이 작품에서 원형으로 배치한 것은 단원이 의도한 창의적 화면 구성으로 판단된다.

 

이 그림의 가장 왼쪽 위에 있는 앉아서 북을 치는 사람은 상체를 곧추세우고서 양손에 궁글채를 잡아 큰 장단을 맞추며 대금과 해금 연주자를 보고 있다. 장구를 치는 사람은 오른손에는 열채를 쥐고 왼편은 맨손으로 북편을 치는데, 흥에 겨워 윗몸을 앞으로 슬쩍 수그리고 어깨 장단을 맞추고 있다. 오른쪽 위의 피리 부는 사람 중 가장 오른쪽에 벙거지를 쓴 사람은 가는 피리인 세(細)피리를 불고 있는데 들숨이 입안에 가득 차서 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왼편의 갓 쓴 사람은 세피리보다 굵은 향(鄕)피리를 삐딱하게 물고 있다. 대금은 젓대라고도 하는 순수한 우리 고유 악기로 넓은 취공에 댄 입술을 조절하면 음 높이가 달라진다. 대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오늘날의 방식과는 반대로 왼쪽으로 젓대를 잡았고 연주하고 있으며, 해금을 켜는 사람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다. 음의 높이를 고르는 왼손은 현을 쥐고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손등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 씨름에서와 마찬가지로 뒷모습이 그려진 사람은 똑같이 손 모양에 허점이 보인다는 점이다.

 

춤추는 아이(무동)는 수염이 없고 얼굴 생김이 동그란 점으로 보아 열 서넛 살쯤 된 소년으로 추정된다. 왼쪽 발로 힘차게 땅을 구르자 절로 오른쪽 다리가 둥실 들렸는데, 덩달아 휘젓는 팔의 매무새가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이 소년의 옷자락에는 그야말로 우리 옛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목선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필선은 중국이나 일본의 인물화에 이와 유사한 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정교한 선을 사용하는데 이 점에서 오히려 정교함이 약점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무동에서 나타난 필선은 인위적인 느낌이 없고 천연덕스럽게도 척척 그렸다는 것이다.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는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로, 개성 송악산(松岳山) 기슭에 있는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에서 열린 들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이다, 발문(跋文)에는 장준택 등 칠순 노인 64명이 그들 자손의 주선으로 평소의 숙원을 풀어 만월대에 모여서 큰 잔치를 벌인다고 적혀있다. 그림 상단에는 이 날 행사의 목적과 의의, 풍경 등이 적혀 있고 맨 아래에는 참석자 명단이 적혀 있다. 그림의 구성은 송악산 서쪽만 배경으로 사용하고 들잔치는 고려 왕궁의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 폐허에서 화려하게 열린다. 그림 속 등장인물은 250명이 넘고 저마다 다른 자세와 동작이 치밀한 관찰을 거쳐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단원 특유의 부벽준법(斧劈?法)을 사용하였고 군중이 입은 옷의 담소(淡素)한 색조까지 가려내서 그렸다.

 

이 그림은 거침없는 필력이 정교하고 담담하게 채색을 한 한국의 산하를 정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으며 아래의 부분의 연회장면은 구석구석 어느 곳 하나 소홀함이 없이 묘사하여 등장하는 인물 중에 똑같은 모습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천막 안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개인별로 푸짐한 잔치 음식을 한 상식 받고 앉아있다. 아랫부분에서는, 여인이 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와서 선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잔 막걸리를 팔고 있다. 왼쪽 중간에 할아버지 두 분은 술에 취하여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는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로 여백의 미를 잘 살린 산수인물화의 대표작이다. 수직으로 긴 화폭 하단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쏠리는 언덕과 길을 대각선 구도로 잡고,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하여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오른편 언덕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파릇파릇한 잎이 달린 가지가 위로 뻗고 있다. 선비는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멈춰서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울고 있는 꾀꼬리를 바라본다. 언덕과 길은 엷은 먹으로 바탕을 칠한 다음, 초묵(焦墨)을 촘촘히 찍어 잡초를 여기저기 벌려 놓았다. 나귀를 탄 선비와 종자의 모양은 아주 가는 붓끝으로 현실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바로 오른편에 치우친 전경을 제하고는 화폭 전체에 끝없는 빈 공간이 펼쳐지며 화폭 왼편 위쪽에는 그림을 평하는 김인문의 제화시(題畵詩)가 적혀 있다. 이 시는 소리, 색, 움직임, 배경을 적절히 구사한 명시로 시와 그림이 잘 어울린다. 시가 먼저 있고 그림이 나왔는지, 그림이 있고 시가 나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여백의 맛을 잘 살리는 우리의 멋을 잘 표현하고 있다.

 

佳人花底簧千舌 꽃 아래 佳人은 천 가지 황(簧 : 악기의 일종)의 혓소리 내고

韻士樽前柑一雙 시인의 술독 앞에는 두 알의 귤 보기도 좋네

歷亂金樽楊柳岸 언덕 위 버들가지 사이를 어지러이

惹烟和雨織春江 오가는 저 꾀꼬리, 안개와 비를 엮어 봄 강을 짜는 구나

 

碁聲流水古松館道人 李文郁證 기성유수고성관도인 이인문이 감상하다

 

추성부도(秋聲賦圖)는 宋代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그린 시의도(詩意圖)이다. 그림에 적힌 ‘추성부’의 전문은 김홍도가 쓰고, 화면의 왼쪽에는 백문타원인(白文楕圓印)으로 기우유자(騎牛游子)라고 찍혀 있다. 끝부분에 ‘을축년동지후삼일(乙丑年冬至後三日) 단구사(丹邱寫)’라 하였으므로 이 그림은 단원이 죽기 바로 전년인 1805년(61세)에 그린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메마른 가을 산이 있고, 산 능선 위로는 수평방향의 갈필로 음양을 주어 한밤중임을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중국식 초옥(草屋)의 둥근 창 안으로 구양수가 보인다.

 

구양수가 책을 읽다 소리가 나자, 동자에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서 살피라 하였다. 이에 동자가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星月皎潔 明下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라고 답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동자는 손을 들어 바람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다. 마당의 낙엽수들은 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바닥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드문드문 흩날리고 있다. 화면 왼쪽 언덕에는 나무가 두 그루 서 있고 그 옆쪽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초가집이 보이며 위로는 보름달이 떠 있다.

 

이 그림은 갈필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어둡게 그려서 가을밤의 스산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며 좌우에 산이나 언덕을 배치하여 초옥과 마당을 감싸며 부감하듯 그려서 단원의 뛰어난 감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불규칙하게 꺾여 올라가 끝이 갈라지는 나무 형태 또한 단원의 전형적인 화법이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약간 비비듯이 처리된 메마른 붓질들은 차가운 달빛 속에서 거칠고 황량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소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구양수가 전하고자 했던 노년의 비애와 동시에 죽음을 앞 둔 단원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구양수가 만물이 조락하는 가을을 맞아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하는 백가지 근심을 마음에 느껴 ‘백우감기심’(百憂感其心)이라는 구절은 바로 단원이 1805년 김 생원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인용했던 구절로서 단원의 심리상태를 여실히 보여 준다. 몸은 아프고 아직 어린 외아들인 김양익의 장래문제, 출가한 딸에 대한 걱정 등이 겹쳐 단원은 인생무상을 탄식하고 있다.

 

일재 신한평의 자모육아도는 종이에 담채로 그린 작품이다. 일재는 신윤복의 아버지로 1726년에 태어나 매우 오랫동안 화원으로 봉직하여 어진까지 그렸고 벼슬은 종3품인 첨절제사까지 올랐다. 일재는 신윤복을 비롯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 그림은 자신의 처자식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오른편에 서서 울고 있는 아이가 신윤복이다. 이 작품은 풍속화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며 그의 풍속화가 혜원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는 비단 바탕에 고운 필치로 인물화 실력을 한껏 뽐낸 작품으로 혜원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 가느다란 실눈썹의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 좁은 입 등 조선후기 미인의 조건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이 여인은 아마도 혜원의 사람이었던 듯하다. 깃과 고름, 곁바대는 자줏빛으로 하고 끝동만은 옥색 천을 대어 멋을 부린 회장저고리는 청에서 수입된 최신 패션이었다. 윗단은 촘촘하게 잔주름을 잡고 허리 밑을 불룩하게 키워서 숨 막힐 듯 탐스럽게 둔부를 강조한 스란치마. 곁바대 밑으로 살짝 흘린 연지빛 속고름도 일류 멋쟁이가 아니면 부릴 수 없는 색태(色態)이다. 커다란 트레머리와 귀밑머리가 하늘거리는 가냘픈 목으로 다소곳이 받쳐 이고, 옥색 끝동 밖으로 내민 상아빛 손으로는 연자줏빛 노리개. 진자줏빛 고름을 수줍은 듯 만지며 옥색 스란치마 밖으로 버선발을 상큼하니 내밀고 있다. 가냘픈 이목구비와 겨드랑이 밑으로 흘린 속고름. 치마 밖으로 살그머니 내민 외씨버선은 선정적인 요염미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림 왼쪽 상단의 화제에는 자박흉중만화운 필단화여파전신(資薄胸中萬華云 筆端話與把傳神 : 아찔하게 얇은 가슴 속 온갖 화려함을 이르나니, 붓끝으로 말과 함께 그 마음까지 그리노라)라고 적어 놓았다. 즉, 이 여인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마음까지 알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사이임을 뜻한다. 그림 속의 소재는 화가의 삶과 가장 절실한 대상일수록 그 느낌이 강하다. 더군다나 초상화의 경우는 그 마음을 알고 그려야 보는 이들의 살아 있는 대상을 보듯 이끌리게 마련이다. 화가는 섬려한 비단 바탕에 가장 고운 선과 색을 써서 온 정성으로 그림을 완성하여 이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단오풍정(端午風情)은 단오에 기녀들이 속살을 드러낸 채 목욕하는 자태를 뇌쇄적일만큼 매혹적으로 묘사하였다. 기생의 외모는 도시적인 세련미가 철철 흐르고, 그것을 표현한 선묘나 채색도 아주 감각적이다. 한 예로 왼쪽 아래에 앉아서 멱을 감는 여인의 손가락 표현에서는 김홍도 작품의 투박한 모습과는 다른 세련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여인들의 치마저고리가 내뿜는 화려한 원색은 차가운 옅은 녹색의 배경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인물의 깔끔한 묘선과는 달리 배경 그림은 거칠고 무른 필선을 사용하여 사실적인 표현을 충실하게 나타내었는데, 거칠고 단단한 조형성을 지닌 배경에 산뜻한 인물을 배치하여 더욱 여성적인 깔끔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세심하고 충실한 입체감과 다채롭고 선명한 평면성이 교차하고 있다. 혜원 작품의 배경은 비교적 자세하고 다채롭게 묘사하면서도 총체적인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혜원이 이처럼 에로틱한 장면을 화폭에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외설로 빠지지 않는 것은 창의적 개성과 뛰어난 조형 능력 때문이다. 이러한 혜원의 예술성이 중요한 사항만 집중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다른 점이다.

 

두 명의 어린 승녀가 바위 틈새로 엿보지 않았더라면 긴장감이 훨씬 삭감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바로 감상자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어린 승려의 엿보는 행위는 화면의 왼쪽 아래의 멱을 감는 여인들과 오른쪽 위의 그네를 타거나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들을 연결시키는 구실한다. 왼쪽의 승려는 오른쪽의 여인들을 바라보고 오른쪽의 승려는 왼쪽의 여인들을 쳐다봄으로써, 이 승려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두 무리의 기녀들이 연결된다. 이들은 성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극적인 긴장감을 유도하는 동시에 흩어져 있는 등장인물들을 긴밀하게 엮어 놓았다. 이 작품은 구성에서 이원적인 구분이 뚜렷하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김홍도의 작품보다 보다 훨씬 치밀한 구성과 이지적인 화면 처리를 알 수 있다.

 

연소답청(年少踏靑 : 젊은 선비들이 푸른 새싹을 밟는다)은 조선 후기의 양반들의 유한놀이 문화인 들놀이 즉, 젊고 늙은 양반들이 종과 기생을 앞세워 봄나들이를 가는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혜원은 왼쪽 끝에 온 상을 찌푸린 채 채찍을 든 맨상투의 사내인 말구종로 등장한다. 말고삐를 잡고 길잡이 해야 할 사람이 남의 갓을 들고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 앞에 선 사내는 말구종에게 자신의 갓을 맡기고 말구종의 벙거지를 빌려 썼다. 상투를 튼 것으로 보아 기혼인 세 양반은 기생을 말에 타우고 스스로 고삐 잡이를 자청하는가 하면 담뱃대까지 가져다 바쳤다. 이에 신이 난 기생들은 머리에 진달래를 꽂고 담배를 피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양반들의 옷을 보면 푸르고 붉은 주머니에 또 푸르고 붉게 누빈 속옷, 긴 띠를 드리우고 짧게 행전을 친 입성에서 한량의 감각이 엿보인다. 바깥에 걸친 창옷으로 또 다른 멋까지 부린다. 또한 기생은 값비싼 가채를 쓰고 푸른색으로 물들인 최고급 치마를 입고 있다. 버들 같이 가는 허리에 동여맨 긴 치마와 외씨버선, 신발까지 호사가 넘친다. 혜원의 의도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에서, 지엄한 양반이 기생 앞에서 기꺼이 기생의 말구종 역할 자청하는 근엄한 당시 양반의 이중인격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청금상련(聽琴賞蓮 : 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감상한다)의 그림 오른 쪽 위에는 좌상객상만 주중주불공(座上客常滿 酒中酒不空) 이라는 제사(題辭)가 있다. 그런데 '中酒不空'에서 앞의 '酒'자는 혜원이 잘못 쓴 것으로 '(준)'자가 되어야 한다. 즉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 차 있고, 술 단지에는 술이 비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려한 선과 세련된 색감이 살아 있는 이 그림에는 연못이 있는 뜰에서 잘 차려 입은 세 쌍의 양반과 기녀가 등장한다. 한쪽에는 가야금을 타고 감상하는 세 사람이 있으며, 또 한편에는 탕건은 벗어 둔 채 포옹하는 남녀의 모습과 이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3명의 양반은 수염과 차림으로 보아 서로 엇비슷한 연배의 친구 사이로 보이며 도포 빛깔이나 호박(瑚珀)으로 만든 갓 끈과 도포에 두른 자주색과 붉은색 띠로 보아 적어도 당상관 이상의 고급관료들이다.

 

맨 왼쪽에 있는 양반은 정자관을 벗어 놓고 있어 그의 집으로 추정되며, 소나무 아래에는 기와를 돌담이 있고, 위쪽에는 2단으로 축대를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쪽에는 연꽃을 심은 호사스런 석축 연못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급 저택의 후원으로 추정된다. 이 집 주인은 자신의 집에 기녀를 불러 놓고 성행위를 한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양반이 이를 고발하는 혜원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즉 혜원의 풍속화는 단순한 에로티즘이 아니라 당시 지배계층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현실 고발적 리얼리즘이 담겨 있다. 사대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혜원의 주된 후원자이자 핵심 감상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장고발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물론, 사회지도층임을 자청하던 사대부들은 매우 당혹스럽고 난감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혜원의 모든 기록과 대부분의 작품은 사라지게 되었다.

 

주유청강(舟遊淸江 : 맑은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은 양반들이 기녀들을 불러 놓고 뱃놀이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외형적인 호사를 금기로 여기던 조선시대의 이념이 이 그림에서는 매우 다르게 묘사되었다. 양반 차림의 3명 중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수염도 나고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반면 나머지 2명은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들이다. 일종의 접대용 파티인 셈이다. 보통 양반의 도포 띠는 검정색, 붉은색, 자주색등의 유색인데 가운데 서 있는 양반과 왼쪽에 앉아 있는 양반은 흰색 띠를 매고 있다. 즉 집안에 누구인가 세상을 떠나면 그 자손들은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흰 갓을 쓰고 흰 옷을 입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3년상이라 하여 부모가 돌아간 다음 28개월 동안 흰옷을 입고 지냈는데 27~28개월 사이 한 달 동안은 그림처럼 검은 갓과 흰 옷, 흰 띠를 매고 있어야 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보아 나이 많은 양반(가운데)이 젊은 사대부 2명을 접대하기 위하여 기녀를 불러 뱃놀이를 하고 있다. 당시 사회의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으며 이처럼 부도덕적 접대 행위는 지금도 지탄 받는 행위이다. 이러한 혜원의 고발정신은 오른쪽 화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一笛晩風 聽不得 白鷗飛下 浪花前(일적만풍 청부득 백구비하 랑화전 : 피리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드는구나)이라 하였다. 피리소리는 풍파에 들리지 않고 흰 갈매기가 먹이를 찾아 날아든다고 하였다. 이 그림에 나오지도 않은 갈매기를 끌어들여 먹이를 찾아 날라 든 젊은 두 양반을 의미하였고 화제 또한 주유청강이라고 하여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월하정인은 안개 가득한 야심한 밤, 달빛 아래 두 남녀의 은밀한 만남을 그린 그림이다. 청아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그림은 달빛 아래에서 두 남녀가 안타까운 정을 나누는 장면을 숨 막힐 것 같은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여 안타까운 두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혜원전신첩 속 30점 가운데 4점에 달이 그려져 있고, 동서양을 막론한 대부분의 화가들 또한 보름달을 그린다. 그러나 이 그림 속의 달 모양은 눈썹 형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관측되지 않은 형태라고 하여 최근까지 미술 평론가로부터 많이 폄하되었다. 국내외 어느 작가의 그림 속에도 월하정인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모양의 달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월하정인에 나오는 달은 혜원이 초승달을 잘못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상에 놓여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현상을 말한다. 달의 전부가 가려지면 개기월식, 일부가 가려지면을 부분월식이라 한다. 충남대 천문우주과학과 이태형 교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 서울의 부분월식에 대한 기록을 조사한 결과 1784년 8월30일과 1793년 8월21일 두 차례의 부분월식이 확인되었는데, 1784년에는 8월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지역에 3일 내내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월식이 나타났어도 관찰할 수 없었다. 반면 1793년 8월21일에는 오후에 비가 그쳐 월식 관측이 가능했다. 결국 혜원의 ‘월하정인’은 1793년 8월21일 밤 11시50분경의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벽이 허물어진 낡은 담장, 요염한 달, 나무와 담장을 감싸는 밤안개, 밤은 깊어 삼경인데 호롱불을 든 남자와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은밀하게 만나고 있다. 남자는 어딘가로 가자고 하고, 여인은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신발은 한량을 향하고 있다. 담장에는 낙서처럼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 양인지(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 兩人知 : 달빛이 가뭇가뭇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화제가 그들의 속내를 대신해 준다.

 

 

 

                                      <씨름>                                                       <무동>

 

 

                                   <만월대계회도>                                   <마상청앵도>

 

 

<추성부도>

 

 

 

<신한평의 자모육아도>

 

 

 

                              <미인도>                                           <단오풍정>

 

 

    

                                   <연소답청>                                                <청금상련>

 

 

 

                                 <주유청강>                                                  <월하정인>

 

 

 

라. 조선 말기의 회화

 

조선 말기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김정희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화단을 풍미하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급속히 쇠퇴하였고, 개성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특히, 중국적 화풍을 띤 장승업과 김정희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 다진 허련을 중심으로 개성 강한 화풍을 형성되고, 이 전통이 현대 한국 화단으로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 놓았다면 윤제홍 일파와 홍세섭 등은 남종화법을 토대로 현대적 감각의 화풍을 형성하였으나, 남종화법의 토착화는 한국 근대 및 현대의 수묵화가 외형적으로는 남종화 일변도의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남종화가 토착화된 것은 김정희의 영향이 크다. 그는 화법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시하여 화법의 형식을 중요시 하는 경향을 배척하였다. 김정희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와 예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24세 때 동지부사(冬至副史)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인 원원(阮元), 옹방망(翁方網) 등과 교우하면서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을 전수하는 등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김정희는 저술을 즐겨하지 않았고 젊어서 저술한 것은 모두 태워 버렸기 때문에 그의 회화론은 고증이나 편지 속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날 뿐 문자향이나 서권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밝혀진 것은 없다.

 

55세가 되던 해 당쟁에 몰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자 평소 교분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추사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지만 끝까지 마음이 변치 않고 위로해준 사람은 제자 이상적뿐이었는데, 이러한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 세한도이다. 예서법(隸書法)으로 난을 그려, 그야말로 화폭마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지면에 넘쳐나고 있다. 그는 한 획도 남의 화법을 쓰지 아니하고 서예를 분석하여 자기의 독창적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은 중인으로 고아로 자라 정확한 출생 및 사망기록이 없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수표교에 있는 이응헌(李應憲) 집과 한성판윤(漢城判尹) 변원규(卞元圭) 집의 사랑에서 기식(寄食)하며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元, 明 이래의 명작을 접하고 스스로 화리(畵理)를 터득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화재(畵才)를 알아차린 주인의 배려로 본격적인 그림공부에 전념하였다. 오원(吾園)이란 아호는 조선최고의 화가인 단원(檀園)과 혜원(蕙園)처럼 나도(吾) 원(園)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했고 특히 어떤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궁궐에서 3번씩이나 도망쳤으며 40대에는 역관 중인계층과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조선시대 3대 화가 또는 4대 화가 중의 한사람으로 오원을 꼽는데 3대 화가라면 안견, 김홍도, 장승업, 4대 화가라면 정선을 추가하는데, 그들을 3대 또는 4대 화가로 지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거대한 예술적 업적과 영향력 때문이다. 조선 초기 세종(世宗) 연간의 찬란한 회화를 대표하는 안견, 안견은 조선 초기를 풍미한 소위 안견파 화풍의 창시자로서 그의 영향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까지 미쳤다. 당시의 조선 왕조는 내부의 모순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제국주의적 침략 근성을 배운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열강의 침략 속에서 비극적으로 몰락해 갔다. 그러나 장승업의 회화는 조선왕조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듯이 배출한 천재화가이다.

 

오원은 산수, 인물, 영모, 기명절지(器皿折枝), 사군자 등 폭넓게 다루었는데, 산수는 元末 4대가와 淸初의 4왕 오운(四王吳?) 계통의 남종화풍과 각체의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였으며, 중년에는 기이하고 웅장한 외관과 복잡한 구도로 점차 북종 원체적인 장식화의 경향을 띤다. 인물화와 영모화는 역동적 구도, 사실적 묘사와 화려한 설채를 특징으로 했는데 만년으로 갈수록 전문적인 기교를 강조하는 화풍을 보였다.

 

현대 한국화의 시조를 오원 장승업으로 꼽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된 뒤 도화서 화원들이 광통교에 모여 그림을 팔기 시작했으며 오원도 ‘육교화방’이라는 개인 화실을 열고 안중식(安中植), 소림 조석진(趙錫晉) 등의 제자를 길렀다. 훗날 안중식은 홍익대 동양화과를 창설한 청전 이상범을, 조석진은 서울대 동양화과를 만든 심산 노수현을 길러 한국화단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말 사대부층이 몰락하고 중소 상공인과 부농이 부상하면서 오히려 서툴고 허술함이 드러나는 오원의 그림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원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대화가로서 전통화법을 종합하면서도 그 단점을 극복하였다. 당시 화단은 형식화된 남종문인화 지상주의로 말미암아 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오원은 당시에 잊혔던 북종화법을 골고루 탐색하였고, 화보가 아닌 실제 동식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였고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도 참작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다. 또한 장승업은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 여러 가지 그릇붙이와 화초의 가지를 섞어서 그린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그렸고, 화조영모화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 생동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으며, 기명절지도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출해 내기도 했다. 장승업의 가장 큰 업적은 순수한 예술정신의 구현에 있다. 그의 생애는 미(美)를 위한 구도자의 길이었으며, 세속적인 면에서는 실패했으나 진정한 예술의 면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모든 진정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장승업도 금세 당시 예술계의 총아가 되었으며, 위로는 고종 황제와 지배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이름 없는 부호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그의 후원자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궁중에서 그림을 그려 바치라는 임금의 어명을 여러 차례 어기는 기행(奇行)에 조차 면죄부를 준 것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예술혼 때문이다. 1897년 광무(光武) 원년(元年)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모른다.

 

주요 작품으로는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 영모절지병풍(翎毛折枝屛風),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화조곡병(花鳥曲屛), 담채산수(淡彩山水), 화조수도(花鳥獸圖), 포대도(包袋圖), 심양송객도(陽送客圖), 어옹도(漁翁圖) 등이 있다.

 

 

 

[ 작품 해설 ]

 

추사의 세한도는 59세(1844년, 헌종 10)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으며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유배생활을 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은 수묵과 마른 붓질 및 필획의 감각만으로 그려졌으며,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주위에 송백 두 그루씩이 대칭을 이루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되었다. 오른편 상단에는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는 글과 관지(款識)를 적었다. 이처럼 극도로 생략 절제된 요소들은 문인화의 특징으로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수법을 쓴 것 같다. 자신의 농축된 내면세계를 고유의 필선과 먹빛이 풍기는 담백 아담한 분위기는 문인화가 지향한 사의(寫意)와 문기(文氣)를 잘 보여주며 조선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작란도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또는 不作蘭花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이라는 불리며, 세한도와 더불어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몇 안 되는 필선으로 한 포기의 난을 그렸는데,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저 붓 가는 대로 맡겨진 필선이 난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뿐이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쓴 화제가 가득하여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예 작품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처럼 그림에 문학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형식은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남종화적 그림들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림은 그 속성상 자연물의 외형적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한계성 때문에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심회나 사상을 명료하게 들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 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렸네. 마음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비야이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힐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답하겠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 又題”

“초서와 예서, 기이(奇異)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吳小山見而 豪奪可笑”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 하는 것을 보니 우습도다”

 

그림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림만 탐내어 가져가려는 미련함에 웃음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림의 깊은 뜻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엔 소산 스스로가 그 뜻을 터득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것 같지도 않으면서 그림만 탐내어 빼앗아 가려고 하니 가소롭다는 것이다. 시화일체의 기본 정신은 시와 그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받쳐 주고 채워 주며 서로를 분명히 해주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부작란도는 화제가 강조하는 내용에 비해 난 그림은 감상자에게 호소하는 힘이 약하게 보인다.

묵란도(墨蘭圖)는 김정희의 둘째 아들 상우(商佑)에게 그려준다고 이렇게 자제(自題)를 썼다. “난초를 그리는 것도 역시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해야 한다. 난잎 하나하나 그리고 한 점의 꼭지가 내심으로 살펴봐도 병 되지 않아야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눈들이 보는 바요, 여러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만큼 엄숙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작은 예술이지만 반드시 성의와 正心에서 나와야 하수(下手)하는 종지(宗旨)를 얻게 되는 것이다”라는 글은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깨우쳐 주는 말이기도 하다.

 

장승업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은 비단에 채색화로 그렸으며 오원 특유의 과장된 산수와 인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그의 중년기의 작품이다. 기암(奇岩)에 둘러싸인 중경(中景)의 평지에서 짙게 깔린 구름 너머로 밀려오는 파도결 등이 묘한 채색의 효과와 조화를 이루며 신선 3명이 대화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의 제찬(題贊)은 오원의 제자인 안중식(安中植)이 섰다. 삼인문년(三人問年)은 ‘세 노인이 서로 나이를 묻다’라는 뜻으로 대화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 노인이 "내 나이가 얼만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어렸을 적에 천지를 만든 반고(盤古 : 중국 신화에 나오는 1만 8천 년 전 천지창조의 신)씨와 친하게 지냈던 생각이 날 뿐이다"라고 하자, 두 번째 노인이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될 때마다(상전벽해 桑田碧海) 숫자 세는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놓았던 산가지가 열 간 집을 가득 채웠다'하자, 마지막 노인이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仙桃 : 3000년만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는데 지금 그 씨가 쌓여 곤륜산 높이가 되었다. 내 나이에 비하면 댁에 둘은 하루살이로 아침에 나왔다가 저녁에 죽는 버섯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그림 오른편 중앙에 있는 동자는 仙桃를 훔치려는 동방삭(東方朔)으로 나이는 삼천갑자(갑년 60년 X 3,000 = 18 만 살)이다.

 

호취도(豪鷲圖, 1880)는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작품으로 우리나라 독수리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언뜻 보아서는 호방한 필치로 일시에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의 깃털 하나하나부터 매서운 독수리의 눈초리와 날렵한 몸짓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독수리 한마리는 위쪽에 그려진 나뭇가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화면 아랫부분에 그려진 나뭇가지에서 한 발로 앉아 뒤를 돌아보고 있다. 나뭇가지들의 변화 있는 굽음새와 매들의 당당한 앉음새가 잘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독수리들의 살기등등한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등은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고목의 묘사에 더해진 대담한 묵법과 바위, 대나무, 나뭇잎들의 표현에 보이는 장식성 높은 설채법이 좋은 대조를 보인다.

 

오원은 자신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쓰지 못하여 제자들이 써 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장승업은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을 짊어지고 살았다. 화제(畵題)를 쓴 정학교(1832~1914: 조선말기의 문인서화가로서 장승업의 작품에 화제를 많이 썼다)는 장승업의 심사를 잘 알아 굵고 가늘게 퉁길 듯 날아갈 듯 변화무쌍한 필획들을 번드쳐 쌩하는 삼엄한 소리를 내는 듯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내려갔다.

 

地闊山高添意氣 땅 넓고 산 드높아 장한 의기 더해 주고

楓枯艸動長精神 마른 잎에 가을 풀 소리 정신이 새롭구나

 

 

 

<세한도>

 

 

   

                         <부작란도>                                                    <묵란도>

 

 

 

   

                 <소운의 초상화>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호취도>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은 근대가 시작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예술적 위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조선왕조 최후의 화가들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조선의 말과 근대 초기에 전통시대의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이들의 배출한 제자들이 한국 근대미술을 이끈 첫 세대를 형성한 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최우석, 박승무 등이 있다. 두 사람의 문하생들이었다. 삶과 예술에 있어 안중식과 조석진은 숙명적인 한 쌍이었다.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아명은 종식(鍾植), 별명이 욱상(昱相)이었으며, 심전(心田) 이외에도 심전경부(心田耕夫), 경묵도인(耕墨道人), 말년에 불불옹(不不翁) 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으며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양천(陽川), 통진(通津) 군수를 지냈다. 화단진출의 결정적 분기점은 1881년 10월 淸國 천진기기창에 조석진과 함께 기기 도면을 그려오게 특별히 화공으로 선발되어 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의 제도 연수생으로 자격으로 텐진(天津)에 다녀왔다.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문명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피난한 적도 있고, 그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서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천진기기창을 갔다 온 10년 후인 1891년에 상해 등지를 여행하고 1899년 또 한 번 상해를 거쳐 일본의 교토, 오사카 등 2년간의 해외체류는 근대적 의식과 서양문화에 대한 식견을 체험하고, 그의 관념적인 그림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화를 주로 모방했던 장승업의 화풍을 배웠고 산수, 인물, 화조를 잘 그렸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난 문인화가였다.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었으나 중국의 고사나 화보를 탈피하지 못한 그림이 많았다. 또한 근대화단사에서 후진 양성과 새로운 미술계 움직임의 구심점으로도 큰 공헌을 하였다. 1911년에 서화가 후진 양성을 위하여 세운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조석진, 김응원, 강진희, 강필주와 함께 중심교수로 나갔던 것이다. 수묵화, 채색화 등 모든 전통기법을 구사한 안중식은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최우석, 이상범, 노수현 등을 제자로 배출하였다. 1918년 6월에는 조석진와 함께 서화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서화협회는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이자 민족사회 서화가들의 미술운동을 계획하였으나 3.1운동의 실패와 안중식의 타계로 협회활동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 낙지론도(樂志論圖), 산수도(山水圖),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 군작도(群雀圖) 등이 있다.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1853~1920)은 조부 조정규 밑에서 화기(畵技)를 배우고 산수, 인물, 기명(器皿), 화조, 절지(折枝), 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한 조선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이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군수(永春郡守)가 되고 정3품에 올랐다. 1881년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해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製圖士)로 안중식과 함께 발탁되어 톈진(天津)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귀국 후 도화서에 들어가 조선 최후의 화원이 되었다. 영춘군수(永春郡守)로 있던 1902년에는 고종과 이왕전하의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안중식과 함께 궁중화가인 화사(畵師)로 선발되었다.

 

1908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의 촉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후진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1911년 이왕가(李王家)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안중식과 함께 교수로 있으면서, 이용우, 오일영,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박승무, 변관식 등 한국 근대의 전통회화를 주도하게 되는 후학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1919년 민족서화가들을 중심으로 서화협회를 결성, 초대회장 안중식에 이어 제2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년이 채 못 된 1920년 서울에서 죽었으며, 유작으로는 군리도(群鯉圖), 매림유거도(梅林幽居圖), 운산서식도(雲山棲息圖), 매조도 등이 있다.

 

 

 

[ 작품 해설 ]

 

안중식의 성재수간(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다)은 1911년 작품으로 고종대 화단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구양수(歐陽修)의 '추성부(秋聲賦)'를 화제로 삼아 그린 대작의 청록산수이다.

추성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양수(歐陽修)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 놀라 귀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 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구양수가 말한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하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어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이하 생략)

 

도원문진도은 1913년 작품으로 원래 사계산수 중의 한 폭이었으나. 춘추 두 폭만이 알려져 있다. 설채(設彩)도 청록산수법(靑綠山水法)을 써서 밝고 화려하지만 매우 맑은 감흥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산수법에서 언뜻 느끼는 것은 조선 궁중의 장벽화(障壁畵) 기법과 그의 남종화적인 배경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園記)는 안견 이래로 그림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는데, 안중식 특유의 각이 지고 심하게 주름이 잡힌 산이 겹겹이 포개져 올라가고, 청록색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채색이 궁중의 벽을 장식하는 장식화로서의 면모를 가늠케 한다. 전경에는 진한 채색을 쓰고 원경에는 연한 채색을 써서 원근감을 나타내었으며, 청록색 바탕 위에 무수히 많은 태점을 찍어 화려함을 더했다.

 

조석진의 운산우의(구름 산 비 기운)는 1912년 조석진이 70세에 그린 작품으로 아늑하고 전망 좋은 산자락과 물가에는 집과 누각들이 자리 잡고, 산에는 흰 구름이 자욱하게 일어서 비 기운이 감돈다. 그 속으로 지팡이를 든 노인이 동자 하나를 데리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이렇게 꾸밈없고 질박하며 넉넉하고 편안한 정취가 소림 조석진의 고유한 특징이자 매력이다.

 

백매는 소림이 천도교 교인으로 3.1운동 을 주도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명인 우당 권동진에게 준 작품이다. 만송이 꽃이 용감히 눈 속을 뚫고 나오니, 한그루 나무가 홀로 온 세상의 봄을 앞선다는 시가 적혀 있다.

 

 

 

                                      <안중식의 성재수간>                                                <도원문진도>

 

  

                                        <조석진의 운산우의>                                                   <백매>

 

<이상범의 산가청류(山家淸流)>

 

<변관식의 금강산 단발령>

 

 

  

                                 <이응노의 군상>                                               <문자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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