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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태자당이 아니다 인민을 스승으로 섬긴 대중정치인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16세 때 산시성 산골로… 6년간 저수지 공사
호롱불 아래서도 손에서 책 놓지 않아
지방당원부터 밟아 올라가… “겸손하고 신중” 평가
“내 스승은 산시성 사람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지난 10월 18일 시진핑(習近平)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을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했다고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의 공식 이력서를 공개했다.
“시진핑, 남, 한족(漢族), 1953년 6월생, 산시(陝西)성 푸핑(富平) 출생.
1969년 1월 당의 공작에 참가.
1974년 1월에 입당, 칭화(淸華)대학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정치교육학과 졸업, 대학원에 진학해서 법학박사 학위 획득.
1969~1975년 산시성 옌촨(延川)현 원안역(文安驛) 인민공사 량자허(梁家河) 대대(大隊)에서 지식청년으로 일하면서 당지부 서기를 지냄.
1975~1979년 칭화대학 화공학과 유기합성학과.
1979~1982년 국무원 판공청 비서 겸 중앙군사위원회 비서로 현역 복무.
1982~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당위원회 부서기.
1983~1985년 정딩현 당위원회 서기 겸 현 무장부 제1 정치위원.
1985~1988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부시장.
1988~1990년 푸젠성 닝더(寧德) 지방당위원회 서기 겸 닝더 군분구(軍分區) 당위원회 제1서기.
1990~1993년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당위원회 서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겸 푸저우 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
1993~1995년 푸젠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푸저우시 당위원회 서기 겸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겸 푸저우 군분구 당위원회 제1서기.
1995~1996년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로 승진.
1996~1999년 푸젠성 당위원회 부서기 겸 푸젠성 고사포(高射砲) 부대 예비역 사단 제1 정치위원.
1998~2002년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정치교육 전공, 법학박사학위 획득….”
이후 시진핑은 저장(浙江)성 성장(省長), 저장성 당서기를 거쳐 2007년에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를 지내다가 2008년에 9명의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됐다. 그는 국가부주석으로 기용된 뒤 이번에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현 중국 최고지도자 후진타오의 후임자로 내정됐다.
이런 이력을 가진 시진핑을 홍콩과 일본의 언론들은 흔히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분류한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1913~2002)이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동시에 인정을 받아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콩언론들은 또 시진핑이 젊은 시절 입당원서를 10차례나 제출했다가 거부당했다는 확인 안된 이야기까지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의 관영 웹사이트인 차이나닷컴(china.com)은 이미 2008년에 “시진핑이 입당원서를 한 차례 거부당한 적이 있으나, 21살이던 1974년 두 번째 제출에서 입당이 허가됐다”고 소개한 바 있다. 처음 입당이 거부된 이유는 당시 문화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아버지 시중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입당원서를 냈을 때 “부모가 문제가 있더라도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는 당중앙의 공식판단에 따라 입당이 허가된 것으로 소개했다.
옌안 량자허촌에서 ‘군중’을 배우다
시진핑이 ‘태자당’이라는 이야기와 10차례나 입당이 거부됐다는 이야기는 서로 상충한다. 실제로 시진핑은 아버지 시중쉰의 사상문제 때문에 16살이던 1969년 베이징에서 산시성 옌안(延安) 부근의 시골마을로 하방(下放)되어 갖은 고생을 하며 험악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중국공산당 지방당원으로 시작해서 성장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시진핑은 8000만 중국공산당원을 이끄는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된 뒤 장시(江西)성 지방시찰을 하면서 현지에서 대학생 ‘촌관(村官)’들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촌관’이란 도시의 대학생들에게 지방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벽지의 하급 행정관직을 맡아 일정기간 일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시진핑은 이들 대학생 촌관들에게 “농촌에서 기층(基層)공작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좌표를 제시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젊은 시절 농촌에서 일하면 무엇이 군중(群衆)이며, 군중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이고, 왜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고 했다. 자신이 16살 때 하방당해 농촌에 가서 고생하며 깨달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은 깨우침을 들려준 것이라는 게 중국 관영 매체들의 전언이었다.
시진핑이 우리의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하방당해 간 곳은 마오쩌둥이 토굴생활을 하던 옌안서도 동북쪽으로 70㎞ 깊숙이 들어가 있는 량자허(梁家河)라는 마을이었다. 마오쩌둥이 1968년 12월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 속에서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을 포함한 베이징 청년학생 15명이 배당받아 간 량자허라는 산골마을은 옥수수국수밖에는 먹을 것이 없는 깡촌이었으며, 그들에게 배당된 숙소는 토굴이었다는 것이 중국 관영매체들의 전언이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물이 모자라는 이곳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저수지 만드는 임무를 맡은 흰 얼굴의 베이징 청소년들은 이후 20년간 이 일을 해야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그 지방에 남아서 살기도 하고, 일부는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며, 그 가운데에는 당간부로 출세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시진핑이 그 경우라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저수지는 지금도 남아 기능을 하고 있으며, 베이징에서 온 학생 15명을 포함한 200명이 참가한 저수지 건설 작업을 지휘한 현지의 여성 대대장은 스위싱(石玉興)이라는 꺽다리 처녀였다. 스위싱은 1969년
1월 13일 베이징에서 온 흰 얼굴의 애송이 15명을 집합시켰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한다.
“집합시키고 보니 이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갖고 온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그 상자에 무슨 금은보화라도 들었나 해서 열어보라고 했는데 책이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자기네들도 무거운 책 상자를 들고온 걸 후회하면서 투덜거렸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상자는 시진핑이라는 학생 것이더군요. 다른 학생들은 일이 힘들어 지쳐서 곯아떨어지는데, 시진핑 학생은 끝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결국 칭화대에 갔고요.”
주민들 “참을성 대단”
그로부터 23년 후인 1992년 어느 가을이었다. 이미 동부 연안의 부유한 지역 푸젠(福建)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푸저우(福州)시 당서기로 출세한 시진핑이 다시 이 량자허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시진핑은 하방당한 청소년 학생들을 지휘하던 시골처녀 스위싱을 만났는데 이때 스위싱이 한 말은 “그래도 그때 베이징에서 온 지식청년들에게는 옥수수국수를 만들어 먹였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은 조와 밀껍질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20여년 만에 동부 해안의 부자도시 푸저우시 당서기가 되어 깡촌의 저수지 공사장으로 돌아온 시진핑에게 마을사람들은 추억의 옥수수국수와 콩, 깨 등을 선물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한다.
시진핑이 량자허라는 산골마을로 하방을 당해 갔을 당시 41살이었던 량여우창(梁有昌·79)이라는 노인은 당시의 시진핑에 대해 이런 기억을 털어놓는다. “참을성이 대단한 학생이었어요. 산시성 북부의 음력 2~3월이면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때인데 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는 시진핑은 허연 다리를 드러낸 채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 ‘하오허우성(好后生·훌륭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지요.”
시진핑이 량자허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6년 후인 1975년이었다. 량자허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인지 시진핑은 추천 케이스로 칭화대 입학자격을 얻었다. 량자허마을 사람들 모두 “할 일은 다 하면서도 책 보기를 좋아하는 학생,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해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시진핑을 “하루의 작업이 끝난 뒤에 호롱불을 켜고 흙벽돌보다 더 두꺼운 책을 읽던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시진핑이 읽던 책 가운데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관한 것과 수학에 관한 것도 있었다”는 것이 중국 관영매체들의 이야기다. 도시의 다른 학생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에서 견디지도 못할 상황임에도 시진핑 학생은 책까지 읽는 점이 남달랐다고 시진핑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평가했다.
“산시는 나의 뿌리이며, 옌안은 나의 혼”
시진핑은 40년 전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인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도시의 지식청년들을 농촌 산골로 하방시키는 바람에 질곡에 빠진 자신의 청소년기를 잘 탈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 시중쉰이 마오쩌둥 지지파들에 의해 ‘반당(反黨)집단’의 지휘자로 낙인 찍혀 있다가 그때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배려로 당간부 재교육기관인 당교(黨校)라는 안전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던 점이, 시진핑이 량자허촌을 떠나 칭화대에 추천케이스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열여섯 살에 베이징에서 옌안보다 더 깊은 산골에서 저수지 만드는 공사를 6년간 한 뒤 8000만명의 중국공산당원들 가운데서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 결국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에 이른 인물을 ‘태자당’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2008년 이미 중앙당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무를 총괄하는 서기처 서기에 올라 산시성 인민대표들 토론회에 참석한 시진핑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한다. “나는 옌안에서 입당했습니다. 옌안은 나를 키워주었고, 자라게 해주었습니다. 산시는 나의 뿌리이며, 옌안은 나의 혼입니다. 나는 꿈에도 여러 번 옌안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나의 희망은 적당한 때에 산시성으로 가서 옌안을 돌아보고 그곳 인민들과 각급 간부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진핑은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에 관한 한 그 기반이 탄탄한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 역시 1942년생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때 7살이었으니 소학교, 중학교, 대학 교육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을 때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1953년생인 시진핑은 마오가 실패작으로 끝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밀어붙이는 시기에 중·고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시진핑이 정치적으로 다소 좌파적인 성향의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더구나 아버지 시중쉰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마오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길을 달린 군인이요 행정가였지만, 문화혁명과 함께 반당분자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시진핑은 인생에서 귀중한 초년 고생을 겪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중국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시중쉰은 덩샤오핑보다 더 빠른 개혁개방에 대한 생각을 일찍이 갖게 된 사람으로, 문혁이 끝나고 복권된 이후에 개혁개방의 출발점인 광둥(廣東)성에서 최고위 행정가 겸 군구(軍區) 정치위원을 지낸 인물이다. 아버지 시중쉰의 개혁개방에 관한 생각은 시진핑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군인 출신인 아버지의 경력은 시진핑에게 군내 인맥관리와 군의 지지에 유리한 강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군 경력, 군 인맥관리에도 강점
시진핑은 또한 최근 생산되고 있는 중국공산당 인재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꾸준히 군 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며, 그런 점에서 이번 군사위원회 부주석 자리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군 경력은 26살 때인 1979년부터 3년간 당중앙군사위 판공청 비서로 3년간 현역 군복무를 한 것을 시작으로, 지방 행정조직 가운데 군사담당인 무장부 서기와 정치위원을 두루 역임했고, 인민해방군에서 대공(對空)방어를 담당하는 고사포부대 예비역사단 제1정치위원도 지냈다.
그는 2000년부터 3년간은 난징(南京)군구의 국방동원위원회 부주임을 지내는 등, 지방 행정 수장과 지방 당 위원회 최고위직을 맡으면서도 항상 군사담당자로서 군을 관리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오히려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사람의 전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 군사위원회 주석보다도 군 커리어를 제대로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다소 체중이 많이 나가는 듯보이기는 하지만 성(省) 당위원회 서기를 하던 시절 취임 9개월 만에 관할 69개의 현과 시를 시찰하는, 중국 내에서는 드문 시찰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200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됐을 때 조선일보 베이징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시진핑이 상하이시 인민대표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참관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필자가 본 시진핑은 그의 체중보다 더 무게 있어 보이는 언행과 함께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할 줄 알고, 울림이 좋은 육중한 목소리로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의사표시를 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시진핑은 최근 중국 지방 관영신문인 시안만보(西安晩報)와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지금까지의 일생을 통해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쪽은 혁명선배님들이고, 또 다른 한쪽은 산시성 시골의 량자허마을 사람들이었다. 량자허마을 사람들은 내가 항상 군중 속에 있어야 하며, 결코 군중의 곁을 떠나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름 “진핑(近平)”이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준다는 뜻의 ‘평이근인(平易近人)’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엘리트당 변신 꾀하는 공산당의 얼굴로
시진핑 부주석은 2005년에는 저장성 당서기 자격으로, 지난해 12월에는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필자는 2005년에는 그의 방한 활동을 취재했고, 지난해에는 그를 환영하는 조찬모임에서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의 혹독한 고생이 그에게 선물한 겸손함과 부드러움과 신중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인사를 할 줄 아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인물로 판단됐다. 50대 중반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원숙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지구 최대의 정당으로 당원 수가 8000만명인 중국공산당은 거대 조직에서 살아남아 거대한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겸손과 신중함은 필수요건으로 갈수록 중국 각계의 엘리트 그룹을 흡수해서 확대의 길을 걷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공산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중국 내 최대의 엘리트 정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 중국공산당이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인텔리겐차를 당의 얼굴로 내세우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를 잘 만나 출세한 인물이라는 의미의 ‘태자당’이라는 이름을 그에 대한 평가로 삼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현 중국사회 내에서 갖추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갖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평가된다.
부인 펑리위안
문예전사 출신의 전통가곡 가수… 현 인민해방군 소장
시진핑의 9년 연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은 중국의 전통가곡 가수이며 현역 인민해방군 소장이다. 직책은 군 총정치부 가무단 단장이다. 당초 시진핑 부주석은 아버지를 잘 둬서 출세한 ‘태자당(太子黨)’으로, 부인 펑리위안은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로 국내에 소개됐다. 그러나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의 전통가곡을 고음으로 부르는 가수로, 이른바 중국군의 ‘문예전사(文藝戰士)’ 출신이다. 14살 때 산둥(山東)예술학원에 입학해서 민족가요를 전공했고, 18살 때 군에 입대했다. 군의 사기를 중시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은 이 문예전사들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으며, 문예전사들로 구성된 군 가무단 가운데 최고 지휘자가 펑리위안이다.
펑리위안이 부르는 대단한 고음의 중국민족가곡은 군 내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들으며, 펑리위안은 시진핑이 푸젠성에서 지방행정책임자로 일할 때 만나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2년 출생한 딸 밍쩌(明澤)가 있으며 “밍쩌를 출산할 때 시진핑은 지방의 홍수 대책반에 가서 일하느라 집을 비우고 있었다”고 펑리위안은 말한다. 그녀는 “시진핑과의 결혼생활은 서로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말한다. 자신은 근무지가 베이징이지만 남편이 오랜 기간 동안 지방을 다니며 일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하며, 상하이 사범대학 대학원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펑리위안의 남편 시진핑에 대한 평가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好人)이며, 집안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 식의 정치인과 가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혁명동지’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전 조선일보 베이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