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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주석
제자들의 사명과 헤롯의 공포 (누가복음 9:1-9)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의 빛을 더욱 더 밝게 하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가 취하신 방법 -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여행하시며 설교하시고 병을 고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한 번에 한 곳에서만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제자들을 보내셨다. 제자들은 새 시대의 율법의 정신으로 잘 교육받았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고 주로 받은 것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사방으로 보내어 메시야에 의해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본성과 내용에 대해서 알도록 하게 했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새롭고 놀라운 것이며, 서기관이나 바리세인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응답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가르침을 확증케 했다(1,2절).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수가 많고 신기하고 힘이 새며 맹렬하다고 해도 그들을 내어쫓을 수 있는, "모든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흑암의 왕국의 완전한 굴복과 패배를 위해서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앓는 자를 고치는 일"을 인정하셨고,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을 뽑으셨다. 이런 일은 제자들이 어디에 가든지 환영을 받게 했고, 사람들의 판단에 납득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환심을 얻게 했다. 이것이 제자들의 임무였다. 이제 자세히 관찰해 보자.
1. 이 임무의 수행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지시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때는 장기간 혹은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았었다.
(1) 제자들은 외모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자립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은 옷을 가지고 가서는 안 되며, 예수를 따르는 동안 그들이 가졌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꾸미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가야하며 그들의 옷을 바꿔 입을 필요도 없고, 새로 신을 신을 필요도 없었다.
(2) 제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에 의존해야 되고 그들을 위해 편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친절에 의존해야 한다. 그들은 양식이나 돈을 휴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궁핍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친절을 받는 것을 꺼리지 말고 오히려 기대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규칙을 따르지 아니하고 짐이 되어 싫어서 "자기의 손으로 일을 했다."
(3)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겨워"할까 두려워하여 숙소를 옮겨서도 안 된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4절).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너희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고 너희 친구들이 그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너희 원수들이 너희가 그들을 대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희는 그 성에서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고" 같이 있던 자들과 함께 있어라.
(4) 제자들은 권위를 가져야 되며, 그들을 영접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처신했듯이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고"해야 한다(8절). "만일 어떤 성에서 너희들을 영접치 아니하고, 그 성의 성주가 너희들의 입성을 못하게 하고 떠돌이로 다루려고 하면 거기서 떠나라. 억지로 그곳에 가려고 하거나 위험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버려라."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에게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복음 전파자들은 은혜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있었다. 제자들이 남겨 놓은 이 먼지 때문에 불신앙 가운데 있었다. 제자들이 남겨 놓은 이 먼지 때문에 불신앙 가운데서 그들이 멸망 받게 될 때 그들 자신의 머리 위에 자신의 피를 쌓아 두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그 성을 포기하는 뜻으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라." 그리고 너희들은 이 이상 더 그들과 상관하지 말라.
2. 이 임무 수행을 위해서 제자들은 무엇을 했나?(6절). 그들은 주의 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영적인 현존은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의 "눈과 팔"은 그들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그들이 역사하는 곳에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지정된 모든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제자들의 활동은 그들의 주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체 양편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Ⅱ. 우리는 여기서 헤롯의 당황과 실망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되고 그로부터 받은 권위로 행했다는 사실들은 무엇보다도 예수가 메시야라는 점에 대한 "놀라운" 증거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어 주셨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명성을 더욱 퍼지게 했고, "지상으로부터의 반영" 즉 사도들처럼 무지한 자들의 반영에 의해서 "의의 태양" 광선은 더욱 더 강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추천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들로부터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었으나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행 4:13).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1.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우리 주 예수를 존귀한 자로, 비범한 사람으로, 다른 세계에서 온 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위해 박해받다가 최근에 죽임 당한 세례 요한으로 보기도 했고, 박해받다가 오래 전에 죽임 당했던 "옛 선지자의 하나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가 받은 영광으로 그가 받았던 수난을 보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산채로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들림 받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보기도 했다(7, 8절).
2. 헤롯의 마음엔 커다란 고민이 생겼다.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들었을 때" 그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얼굴에 표현되었다. 그도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없애버렸다고 생각했고 이 이상 더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세례 요한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거나 그의 정신과 능력이 남아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증인이 없는" 때를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헤롯은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 사람은 누군고? 그는 요한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왔는가? 요한은 세려를 주었으나 그는 세례를 주지 않는다. 요한은 기적을 행치 안 했는데 그는 기적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보다 더 무서운 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점점 더 당황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저를 보고자" 원했다. 그가 요한을 닮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요한이 죽임 당하기 오래전부터 예수께서는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사실을 헤롯 자신이 알게 되고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의문은 곧 없어지게 될 것이다. 헤롯은 "저를 보고자 하면서도" 왜 가서 만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의 수하에 있는 누구도 보내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헤롯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이상 더 죄를 책망하는 자와 상관하여 싶지 않았다. 헤롯은 그를 보기를 원했으나 그가 재판시에 볼 때까지 그가 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 그때는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겼다"(눅 23:11). 만일 헤롯이 자기의 죄를 깨달은 다음에 예수를 찾아갔다면 행복한 변화가 그에게 일어날 줄 누가 아는가? 그러나 그는 미루었고 그의 마음은 굳어졌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보았을 때 그는 다른 사람처럼 예수에 대해서 아주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자들의 돌아옴과 오천 명을 먹이심 (누가복음 9:10-17)
Ⅰ. 성공적인 선교에 대한 제자들의 보고가 나타나 있다. 제자들은 장기간 동안의 전도 여행을 하지는 않았다. 심부름 보냄 받은 종들처럼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에는 고쳐야 했다.
Ⅱ. 그들은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은거" 수련을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시고 따로 고을로 떠나 가셨다. 그들은 피곤해서 해이해지기도 했고 긴장이 풀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남종과 여종을 쉬게 하신 예수께서는 자기의 종들도 역시 쉬게 하셨다. 대부분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몸을 쉬게 하고 원기를 북돋게 하고, 더 많은 업무를 하기 위하여 명상함으로써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이따금씩 은거함이 있어야 한다.
Ⅲ.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셨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따라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한적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휴식을 방해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셨다"(11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한 열성은 약간의 잘못을 면케 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비록 때에 맞지 않게 찾아왔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셨다.
1.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고," 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 나라의 특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2. 예수께서는 "병든 자들을 고치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자기에게 요구하게 하셨다. 병은 의사가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고, 환자들은 가난하고 초라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영혼이든지 육체이든지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된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칠 능력을 항상 가지고 계시며, 치유를 필요로 하는 그의 백성을 치료하신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체의 편안을 위한 치유보다는 영혼의 선한 것을 위해 질병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그때에 우리는 필요하기 때문에 기꺼이 잠시 동안 고통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실 때 우리는 치유되게 될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는 성도들의 모든 질병을 고치신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위로로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신다. 또한 병을 개인의 상황에 따라 치유하신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위급한 일에 대한 구원이시다.
Ⅳ. 예수께서는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충분히 먹이셨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 기사는 두 번 나오는데 다시 뒤에 나오게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이다. 이 기사를 좀 더 세밀히 관찰해 보자.
1. 의무를 수행키 위해서 그리스도 앞에 열심히 나오는 자들, 그러기 위해 자제하거나 자기를 드러내는 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성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외적인 편익은 잊어버리게 되고,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며, 여호와이레 -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를 믿게 된다.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진실 되게 그에게 봉사하는 자들은 어떠한 선함도 결핍되지 않으리라.
2. 우리 주 예수는 자유로우시고 온후하신 분이었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데까지 주어서 자유로이 먹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가르치셨다(벧전 4:9). 작은 것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작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바로 작은 것을 크게 하는 방법이다. 분산시키는 것이 곧 증가시키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충성하는 모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음식도 주신다. 예수는 "병 고칠 자들을 고치시고," 영혼의 병을 고치실뿐만 아니라, 음식이 필요한 자에게 음식을 주시고 영적 생활을 보살펴 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시고, 소원을 만족시켜 주신다. 그리스도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서 그의 영혼을 구해주시고 영혼을 영원한 생명으로 길러주시며 모든 영적인 시험을 이길 힘도 주신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은 정해진 규칙을 따라 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떼를 지어 오십 명씩 앉히라"(14절). 음식의 더 좋은 분배와 사람의 수를 벗어나게 계산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각 떼의 수를 지정하셨다.
5.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행하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과 우리는 받을 만한 아무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이로 인한 편안은 그리스도의 중재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있으며 이 축복을 원하고 있다.
6. 그리스도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드신다. "의인이 가진 적은 것이 아주 악한 자의 부보다 나으며 채소를 먹는 것이 살진 소를 먹는 것보다 나으니라."
7. 그리스도는 필요한 자에게 충분히 먹여 주신다. 그리스도는 주려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풍부하실 뿐만 아니라, 개인 개인을 위해서도 풍부하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주린 영혼을 채워 주시고 그의 집의 선한 것으로 만족시켜 주신다. 여기에 보면 "남은 조각을 거두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며, 또한 그것을 나누어주신다는 것을 확신케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수난 예고 (누가복음 9:18-27)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관한 큰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계신다. 이 기사에서는 다른 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특수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시고 있었고,"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해야 될 일이 많이 있었지만 자기 자신, 하나님,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따로 있을 시간이 필요함을 아셨다.
2. 예수께서 따로 계실 때 기도하셨다. 헌신을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
3. 예수께로 따로 기도하실 때에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족 기도회였다. 주부는 가족과 함께, 부모는 자녀와 함께, 주인은 종들과 함께,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4.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질문하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기도로써 대답하는 데 지도를 받고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지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담론하셨다.
Ⅰ. 자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다.
1.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는 제자들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제자들을 깨닫게 하려고 하셨다. 예수와 그에 관한 진실한 지식을 갖게 되는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무지와 잘못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 주신 예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도와주고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제자들은 사람들과의 이야기 가운데서 들은 예수에 관한 추측을 말했다. 목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지도, 비난, 조언들을 적당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자주 친밀하게 대화하게 되면, 생각을 고쳐 주고 잘못을 수정해 주고, 편견을 제거해 주는 적당한 방법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의사가 환자와 자주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환자를 위해 할 일을 더 잘 알게 된다. 어떤 이는 죽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도 했다.
2. 제자들은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가? "너희들은 제자로서 훈련을 쌓았기에 나에 관해서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말해 보아라." 베드로가 말했다. "예,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약속된 메시야인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일에 대한 확실한 권위와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기름부음 받았다는 사실은 예수가 그 일을 위해서 지명을 받았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잘 가르쳤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제자들은 이 진리에 대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까지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셨다." 그것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이 사실이 완전히 확실해졌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아직 증거가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기에 이 사실은 감추어져야 한다. 그러한 동안에는 이런 신앙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Ⅱ. 예수께서는 아직까지 말씀하지 않았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가운데 확실히 서 있었고 책임질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했다(22절).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아직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됨을 가장 확실히 증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고," 성령을 보냄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완전히 선언되었다(행 2:33). 그러므로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Ⅲ.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한 제자들의 고난을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제자들이 예수의 고난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제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고난을 위하여 준비해야 했다.
1. 우리는 자기 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야 한다(22절). 이것이 고난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이다. 우리는 자기 부정과 금욕과 세상을 부정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안락과 욕심에 빠져서도 안 된다. 이런 것들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 피곤, 궁핍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고통이 필요하며 이것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고통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말없이 순종해야 하며 고통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자주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며, 그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2. 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관심보다 영혼의 구원과 행복에 대해서 기뻐해야 한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1) 자기 멋대로의 생활과 재산, 권력과 명예를 간직하려는 자나 자기의 목숨만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부인하고 고의적으로 양심을 속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자는 결국에 이익과 손해가 계산될 때 획득자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상실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영혼도 잃을 것이다.
(2) 우리는 역시 다음 사실을 크게 믿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때문에 우리의 목숨이 끊어진다면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인의 부활 시에 풍부하게 보상받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그리스도를 버리거나 세상적인 관심에 빠지면, 이에 비교가 안 되는 영혼이 상실과 파멸을 받게 된다(25절). 만일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부, 명예,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얻게 되었더라도 우리는 영원히 "자기를 잃든지" 결국에는 "빼앗기든지" 할 것이다. 세상적인 이익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는가?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 보면, 가장 두려운 사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실 즉 본문대로 말하면 자기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준다. Animus cujusque is est quisque─즉 그 영혼이 그 사람이다. 우리의 영혼에 좋거나 나쁜 것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좋거나 나쁜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죄와 부패로 영원히 멸망 받게 되면 우리가 파멸되는 것은 분명하다. 영혼이 저 세계에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육체가 평안할 리 없다. 그러나 육체가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는다고 해도 영혼은 행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빼앗기거나" hv zhmiwqei,j─즉 만일 그가 손해를 보거나─그리스도의 의로운 재판에 의해서 그의 영혼에 벌금이 부과되어 비참하게 버림받거나 ─그의 모든 축복이 몰수되면 그의 이익은 어디에 있으며 그의 희망은 무엇이겠는가?
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나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을 수치나 불명예로 여겨서도 안 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절).
"왜냐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인자도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당연지사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이 비겁하고 세속적인 자들을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니라, 그들은 내게 속하지 아니했도다"라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겸비"와 동시에 "존귀한" 처지를 가지셨듯이, 그의 사유도 역시 그러하리라. 그리스도의 사유와 더불어 기꺼이 수난 받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그의 사유가 세상을 통치할 때 함께 통치하게 되리라.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현재 수치를 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추종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기의 재림 때 있을 영광을 얼마나 "찬란하게" 말씀하고 계신가를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그의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 이 기사는 마태와 마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 중에 오실 것인데, 이 영광은 아버지께서 회복시켜 주신 영광이며,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영광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업의 성취의 보증으로 이 영광을 얻었었으며, 모든 일을 완성했을 때 다시 요구하셨다.
"아버지여……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의 오른 편에 앉게 하셨을 때 주신 모든 영광 중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주관자가 되시며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을 주는 자가 되셨다.
(2)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심판을 그에게 맡겨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빛과 그의 인격의 명확한 형상으로 하는 예수의 심판을 공공연히 인정하실 것이다.
(3) 예수께서는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아와 예수를 받들 것이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의 모습을 더욱 더 빛나게 해 줄 것이다. 영광 중의 예수가 그날에 얼마나 아름다울까 !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말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위하여 고난 당하고 있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곧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7절). "비록 인자의 재림은 멀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능력 가운데 현재에 임할 것이며, 여기 섰는 사람중에 살아서 볼 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이 임했을 때,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그들은 이방 나라가 회개하고 유대 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목격했다.
예수의 변모 (누가복음 9:28-36)
본문은 예수의 변모 기사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얼마 전에 말씀했던 대로 세상을 심판하러 올 때 받을 영광의 본보기이며, 예수를 위해 고난받을 제자들을 위한 격려이며, 절대로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교훈의 본보기이다. 여기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설명한 바 있으나 재고할 가치 있기에 반복해 보자. 이 사건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며, 세상의 빛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신시켜 준다. 또한 예수께서 육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고귀하고 존경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며 승천시에 들어갈 영광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장차 신자들이 받을 영광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높여 주고 격려해 준다.
Ⅰ. 본문에는 다른 두 복음서와 다른 상황이 나타난다. 마태와 마가는 "엿새 후에"라고 기록되었으나 누가는 "약 팔일쯤 후에"라고 했다. 즉 그날은 온전한 엿새가 포함된 칠일이 지난 후 여덟째 날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변모된 때는 밤중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피곤해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화려한 모습은 밤중에 더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논쟁은 더 불확실하며 의심스럽게 된다. 아마도 일곱째 날과 여덟째 날의 사이인 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약 팔일 쯤 후인 것 같다.
Ⅱ. 본문에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상황이 첨가되고 설명 되어있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영광을 "기도하실" 때에 받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주하시던 대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28절).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겸손해졌을 때 그는 존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이 일이 자신을 위해서 이 때에 준비된 것을 이미 알았고 기도로 그것을 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위하여 준비되고 약속된 좋은 것을 구하여 받으셨다. ""게 구하라, 내가 네게 주리니........."(시 2: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기도함으로 영광을 받으려고 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고하신다. 이것이 변모되고 변화되는 일이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고양되고 넓어져서 "주의 영광을 보는데"까지 이르면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후 3:18). 기도로 우리는 지혜, 은혜, 그리고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얼굴이 빛나게 된다.
2.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사용한 metamorfw,qh ─ 즉 변형되었다라는 말을 사용치 않는다. 아마도 이 말이 이방인들의 신학에서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뜻을 가진 말을 사용한다. to. ei'doj tou/ prwsw,pje;teron, ─ 즉 용모가 본래와 다르게 변하였다. "그의 옷은 희어져 광채가 났다." 그것은 e,xastra,ptwn ─ 즉 번개처럼 빛났다. 이 말은 여기에만 사용되었다. 빛이 옷처럼 온 몸을 덮고 있었기에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빛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3.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난 기사는 마태와 마가에도 나온다. 여기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죽은 성도들은 영광 중에 있고 영광스런 나라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즉 그들은 영광으로 빛난다. 예수께서 영광 중에 계시기에 그들은 예수와 함께 영광으로 나타났다. 모든 성도들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4.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구약의 위대한 두 예언자 사이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가 찾아보자. "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다." E;legon th.n e;xodon auvton/ 그의 엑소두스, 그의 떠나감 즉 그의 죽음을 말했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문에서는 그의 퇴거, 물러감, 세상을 떠나감으로 표현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죽음을 위와 같은 개념으로 말함으로 예수로 하여금 죽음을 두렵지 않게 했고 인간의 본성으로 좀 더 쉽게 알게 했다.
성도들의 죽음은 엑소두스 즉 이 세상의 애굽으로부터의 출국이며 속박의 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떤이들은 예수의 죽음에는 이미 그의 승천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승리의 출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승리가 그의 것이었다.
(2) 예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불변하게 결정되었고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리에서 살았지만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산헤드린이 있었고, 그들은 선지자들을 재판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4)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했던 것이다. 다음 성구를 참고하라. 누가 복음 24장 29절, 27절, 베드로전서 1장 11절.
(5) 변화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 기꺼이 말씀하셨다. 아무리 즐겁더라도,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5. 여기에서 우리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실, 즉 제자들이 곤하여 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32절). 환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졸다가 자고 있었다. 너무 늦었거나 혹은 피곤했거나 전날 밤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매혹적이고도 기분 좋은 공기나 달콤하고도 음악적인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평안하고도 평화로운 잠을 자게 했고, 환상에 대한 서두를 장식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죄 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잠자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곁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그들은 예수의 기도에 개의치도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변형되기 시작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계속 잠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볼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계실 때에 이 세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예수께서 고뇌 가운데 계실 때도 잠을 잤다. 가장 훌륭한 자들일지라도 인간 본성은 나약하고 연약함을 보라.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가. 여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뇌보다 제자들에게 관심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예수를 섬긴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은혜를 생동력 있게 지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력 있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가 ! 그러나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 표적의 유능한 증인이 될 수는 있었다. 이 표적은 그들이 요구한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후에 제자들은 정신을 차렸고 완전히 깨었다. 그들은 모든 영광의 장면을 정확히 목격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거룩한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일어났던 모든 사건에 대한 특별한 기사를 쓸 수 있었다(벧후 1:18).
6. 여기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에 베드로가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을 잃을 때까지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게 하며, 축복을 계속 바라고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그것이 상실된 후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하늘에서 존귀 받고 있는 성도를 위해서 지상에 초막을 짓자고 하는 자들은 성도들이 하늘 나라의 성전에 더 좋은 집을 가지고 있고 거기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7. 여기에 보면 "저희를 덮었던 구름"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들이 구름 속에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했다. 이 구름은 더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에 임재 하실 때는 구름으로 뒤덮었었다.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때 모세는 들어갈 수 없었다"(출 40:34, 35). 또한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을 때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섬기지 못하였다(대하 5:14). 본문에 나타난 구름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겁낼 것 없다. 예수께서 그들을 구름 속으로 안전하게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8. 본문에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울려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이 소리는 마가와 마태의 기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개역에는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로 되어 있음. 역자주). 그러나 마태와 베드로서에 나오는 "내 기뻐하는 자니"란 말은 없다. 이 말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란 말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기쁨을 얻는다. 여러 가지 내용을 한 가지로 표현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용납 받았다.
끝으로 여기에 보면 제자들은 이 환상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사람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성령의 임재로 완전히 이루어지고 이 사실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는 그들은 말해서는 안 된다. 말할 시기가 있는 것처럼 침묵을 지킬 시기도 있다. 모든 일은 때가 차야 아름답고 쓸모 있게 된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 줌 (누가복음 9:37-42)
마태와 마가의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 후에 직접 나오고 그 후에 제자들과의 대화가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이튿날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일어난 사건으로 되어 잇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변모한 것은 밤중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해 주기도 하며 그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이 그 이튿날"이었던 것을 보면 베드로가 제의했던 초막을 짓지는 아니했지만 밤새 쉴 곳은 찾아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다음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처럼 큰 불화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사이에는 어떤 불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휴식의 좋은 기회가 있을 때에 그들의 공적인 지위에 대해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본문의 기사에서 다음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왔다. 예수께서 잠시 동안 그들과 떠나 있었지만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듯이 "큰 무리가 맞았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 것이라는 그에 관한 예언 때문이기도 하다.
2.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도와 달라고 예수를 몹시 성가시게 했다(38절).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것이 그의 요구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조심성 있는 요구였다. 그리스도의 동정적인 보살핌은 모든 일을 충분히 정상적으로 이루어 놓는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서 "돌보게" 하자. "이는 내 외아들이니다"라고 그의 아버지는 탄원했다. 많은 자녀를 가진 자들은 한 자녀로 인한 고통은 나머지 자녀의 위로로 무마될 수도 있으나 외아들인 경우엔 큰 고통이다. 그 고통은 우리를 위해 자기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 이 아이의 고통은 얼마나 비참한가 !(39절). 그는 그를 "잡고 있는" 악한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런 병은 단지 자연적인 원인으로 인한 병보다 더 비참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작이 되면 그는 갑자기 "부르짖고" 여러 시간 동안 그의 비명 소리는 그의 온화한 아버지의 심정을 찌른다. 이 악한 귀신은 그를 눈물 흘리게 하고 상하게 하고 떠나가지 않고 그를 괴롭힌다. 귀신이 떠날 때는 거의 죽은 상태가 된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 ! 사탄이 역사 하는 곳은 얼마나 해를 받는가 ! 그러나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
4. 제자들의 신앙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비록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지배할 힘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악한 영을 내어쫓지 못했다(40절).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강한 능력이나 주어진 사명을 믿지 않았거나, 마땅히 해야 할 기도로 자신들을 단련시키지 않았었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책망할 데서 볼 수 있다. "오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클라크(Clarke)박사는 이 말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이해한다. "너희들은 믿음이 없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내가 너희에게 명할 사명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5. 예수께서 이 아이를 치료해 주신 것은 얼마나 효과적인가 ?(42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그 일도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다. 그 아이가 아주 심해 졌을때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마치 귀신이 그 아이를 산산조각 낼 듯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 한마디가 그 아이를 낫게 했고 귀신이 그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했다. 또 여기에서 예수께서 "그 아이를 아비에게 도로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병에서 고침 받았을 때 우리는 그들을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또한 우리가 처음에 그들을 영접했던 것처럼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예수께서 그들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자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감사해라. 데려다가 나를 위해서 양육해라. 왜냐하면 그 아이를 나한테서 다시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러나 네 마음대로 키우지는 마라." 이와 같은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부모는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의 자녀들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후에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예수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야심 (누가복음 9:43-50)
Ⅰ.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준 영향(43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을 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역사는 놀라웁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역사를 받은 자들에게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의 이름은 놀라웁기 때문이다. 그들의 놀램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그들은 각자 모두 놀랐다. 이 사건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랐다. 모든 그의 행동은 특별하고도 놀랄 만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Ⅱ. 다가올 고난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고 -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이들은 악한 자들이며 포악한 성격을 가진 자들로서 예수를 자기들 멋대로 학대할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별한 점이 몇 가지 있다.
1. 여기에서 바로 전 사건 즉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과의 관계를 볼 수 있다(43절).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다스릴 현세적인 왕국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영화와 권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임할 것을 기대했다. 이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강한 권세가 이 일을 쉽게 성취하리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행한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더욱 더 이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제자들의 이 생각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전에 이야기한 바 있는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말씀하시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손에 넘기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지게 되며, 존경을 받기는커녕 치욕을 받으며, 죽게 되며, 그의 모든 기적과 이 기적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어떤 관심도 이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예수께서 엄한 부탁을 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신앙으로 받아들여라. 현세적인 메시야 왕국에 대해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너희 귀를 막아버리지 못하게 하고 기꺼이 믿으라. 내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라. 이 말을 너희 심령에 담아두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머리와 심령에 담아두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
3. 그리스도의 이 고난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제자들은 무척 우둔했다. 이 말은 마가에도 기록되어 잇다.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것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제자들은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문자는 그것의 내포된 의미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했다. 이것은 그들이 잘못을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연약한 신앙과 편견 된 능력으로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의 고난을 예상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비로 그들에게 숨김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역설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 자신이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Ⅲ. 으뜸이 되고자 다투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책망(46-49절).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나온 바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그만큼 더 애석한 일이다. 다시 살펴보자.
1. 명예에 대한 야망과 우월감과 상위에 대한 다툼은 우리 주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죄이다.
그러한 것 때문에 그들은 엄하게 책망 받아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극복하고 치욕으로 느끼려고 애쓰던 그 부패의 강에 휩쓸리게 되었다(46절). 이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자들은 주로 높은 자리를 목적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들로 하여금 높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많은 유혹과 고통에 빠지게 했다. 그들이 안전하게 되는 것은 작은 것 가장 작은 것, 가장 작은 것 보다 더 작은 것에 만족할 때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 생각은 그에게 말이며 속삭임은 큰 소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분명히 통제하고 있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침착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 의해서 얻어지는 명예를 구하고 소란스런 야망을 갈구해서 얻는 명예를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항상 관용과 친절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본보기로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1) 너희들은 이 아이의 성격처럼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온 하라. 너희들은 세상의 화려함, 고귀나 높은 지위를 탐내지 말고, 이 아이처럼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해라. 또한 경쟁자나 적에 대해서 이 이상 더 악의을 품지 말고 이 아이처럼 되라.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즐거워하며 필요하다면 가장 비천한 자리에 서서 선을 만들어가라.
(2) 위와 같은 일이 바로 높아지는 지름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기 동료들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많은 호감을 사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친절을 행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 즉 이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분명히 존경을 받게 되고 "나를 영접함"이 되게 된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전도자는 바로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복음의 전달자로서 사람들한테 영접 받는 것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신들이 영접 받고 환영받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 명예는 그리스도의 모든 겸손한 제자들이 얻게 되며,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가 진실로 가장 큰 자가 될 것이다.
Ⅳ. 예수를 존경하고 섬기는 자를 실망케 했다 하여 제자들을 예수께서 책망하심. 이 사람은 제자들의 동료도 아니었고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나 일흔 사도의 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과 사귀지도 않았었고, 같이 다니지도 않았던 자이었다. 그러나 어떤 우연한 경우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은 자였다. 그는 귀신을 내어쫓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고, 진실된 태도로 기도한자였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이 사람은 제자들에 의해서 비난받았고 저지 당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사탄의 왕국을 약화시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기도하고 전파하는 일을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교회로부터 분리되었었고 제자들처럼 임명받지도 못했다. 그는 제자들을 존경하지 않았고, 그들과 친교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이때의 열 두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인의 어느 단체가 자기들과 친교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제지시킬 만한 이유를 도대체 가지고 있겠는가?
2.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 행위를 꾸짖으시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한 어떤 사람도 자기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칭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금하지 말라(50절). 오히려 그를 격려해 줘라.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려지기 위해서 너희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지만 그는 너희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잇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똑같은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지 않지만 똑 같은 목적지에서 너희와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해 온 것대로 잘 해라. 그러나 그가 잘못하는 것은 따라가지 말라.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을 금지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동료 중 한 사람도 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편은 적고, 적은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비록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정받게 된다. 마가복음 9장 38, 39절을 보라. 만일 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자랑하고 그를 위해 열심인 척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교회에 저지를 것인가 !
제자들의 잘못된 열심 (누가복음 9:51-56)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으로 바로 앞의 가사와의 유사성 때문에 여기에 삽입한 것 같다. 여기에서도 역시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한 제자들의 시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이라는 명목으로 제자들은 자기들과 분리된 자들을 말못하게 하고 제지시켰었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똑같은 이유로 비신앙자들을 죽이고 싶어한다. 후자도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독단적인 신앙과 종교적인 박해의 정신은 바로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Ⅰ. 속죄와 구원을 위한 우리 주 예수의 준비와 결심, 51절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잇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1. 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위해 정해진 때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징조를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셨으며,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무척 분주하게 일하셨다.
2. 예수께서는 자기의 고난과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뒤따라올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었다. 예수께서는 이 때를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 받는" 때로 보셨다(딤전 3:16). 즉 가장 고귀한 하늘나라로 올라가셔서, 거기서 존귀받는 때로 보셨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의 죽음을 이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죽음을 두렵지 않게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깊이 나아가서 죽음을 더 좋은 세상으로의 옮김으로 보아 죽음을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게 했다. 모든 선한 기독교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또한 죽음은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승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승천할 때가 가까워 오면 구원이 가까이 이른 것을 알고 머리를 들어야 한다.
3. 예수께서는 주어질 기쁨을 예상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고난 당하고 죽기로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리고 도피하시지 않고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리 저리로 다니시지도 않았다. 만일 예수께서 평소처럼 행하셨다면 사마리아를 피하여 가셨을 것이다. 예수에서는 거기서 당할 일을 잘 알고 계셨지만 기쁨으로 용기 있게 그곳에 가셨다. 예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영광 받으실 것을 아시고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 예수께서는 수치를 당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실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나 고통 당하는 것을 꺼리는 우리는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를 꺼려하고 우리의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Ⅱ. 사마리아인의 무례함 ─ "어떤 촌"인지 이름이 밟혀져 잇지 않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곳으로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영접치도 아니했고 그곳에서 쉬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예의를 지켰는가. 예수께서는 쉴 곳을 정하고 그곳에서 자기와 제자들이 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을 "앞서 사자로 보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무례히 행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그들이 제자들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해 준비하도록 몇몇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편리를 위해서요, 그의 오심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2. 사마리아인은 예수께 대해서 대단히 무례했다(53절).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을로 가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가 못 들어오도록 감시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말했던 모든 것을 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좋은 손님이 되어 사마리아의 다른 촌에서도 했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 선을 베풀고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했었을 것이다.(요 4:41).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큰 축복을 베풀었을 것인데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이러한 일은 예수의 복음 전파자들이 자주 당하는 일이다. 이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을 보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논쟁은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 하는 문제였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보라. 이들 사이의 대립이 심해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도 아니했고"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다(요 4:9).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또한 자기 마을에서 숙박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일 그들이 계속 금했다고 하면 예수께서도 그리로 지나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사마리아보다 갈릴리 지방의 큰길로 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찬양 받을 만한 교사인 그리스도를 특별히 환영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고 그곳과 가까이 지내서 그런 것 같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그들은 심한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도록 권유하려고 했었으며, 이로 인해서 자기들의 성전이 명성을 얻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알고 전에 그의 전도 여행시 베풀었던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Ⅲ. 이런 모욕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분개(54절). 두 제자가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화를 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대해서는 소돔에 내렸던 저주 외에는 다른 것을 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그들을 놀라게 할뿐만 아니라 그들을 멸하게 하소서."
1. 여기에 보면 몇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이 이 두 제자들에게 있었다.
(1) 예수 그리스도 한테서 받은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볼 수 있다. 비록 이 일이 그들의 사명에는 특별히 언급되어 잇지 않았지만 하늘로부터 불을 가져오게 해달라는 말을 했다. qe,leij e;ipwmen ─ 즉 당신이 우리가 이 말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이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자기들의 선생의 명예를 위한 열심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었던 예수께서 하찮은 사마리아인 몇몇에 의해서 자유롭게 통행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자기 선생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 선생님의 선의와 뜻에 복종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허락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했다.
(4) 그들보다 먼저 있었던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엘리야처럼"(개역 성서에는 이 말이 없음 - 역자주) 할까요? 그들은 엘리야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을 두 차례나 불로 사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런 일을 하려고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왕하 1:10, 12), 그들은 이 전례가 그들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두 사건에 서로 일치되지 않을 때, 훌륭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잘못 적용, 쉽게 하여 우리의 부당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2. 이들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잘못된 점이 더 많다.
(1) 여수께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모욕당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 성에서 떠나라고 위협했고 거라사인들도 자기들의 마을에서 떠나기를 간구 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한 번도 저주하시지 않으셨고, 모욕을 끝까지 참으셨다.
(2)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하신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 많이 알고 그로부터 않은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보다 나쁜 것은 아니다.
(3)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고 이들이 예수님께 무례한 행위를 했을 것 같다. 오히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맞이하고 환영했을 것이다. 소수의 악한 사람 때문에 전 고을이 잿더미가 되어야 하는가 ? 이 제자들이 악한 사람들을 파멸할 권리를 가졌던가?
(4) 그들의 선생은 어떤 경우에도 "하늘로서 오는 불"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 요구했던 "하늘로서 오는 표적"도 거절하셨다(마 16:1). 그런데 왜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표적을 바랬는가 ?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림 받은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빛의 아들이 아닌가 ?
(5) 엘리야의 예는 이 사건에 맞지 않는다. 엘리야는 율법의 두려움을 알려 주기 위해서 보냄 받았고, 그 증거를 보여 주었다. 또한 엘리야는 아합 왕가의 우상 숭배와 사악에 대하여 용감히 싸우기 위해서 보냄 받았다. 그가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한 일은 충분한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 소개된 것은 은혜의 법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소름끼치는 정의의 역사는 도저히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틸로슨(Tillotson) 대주교는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오는 불을 요구했던 그 사마리아에 그들이 가까이 오게 되자, 바로 그 장소에서 옛날의 엘리야의 일을 상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장소는 같을지 모르지만 시간은 달랐다.
Ⅳ. 야고보와 요한의 혈기와 분노에 대한 예수의 책망(55절). 예수께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보시며 "꾸짖으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사랑하시기 때문에 꾸짖고 벌하신다. 특별히 그들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이라는 미명 아래 부당하고 잘못되었을 때 그렇게 하신다.
1.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신다. 너희들은 너희 속에 어떤 영이 있는지를 모른다.
(1) "너희들은 어떤 악한 영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주님에 대한 열심이라는 구실 속에 감추어진 자만, 분노, 원한이 얼마나 많은가." 선한 사람들 심령에는 많은 부패가 은밀히 섞여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2) 너희들은 이런 것에 반대되는 선한 영을 너희 속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너희가 오랫동안 배워왔지만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정신을 아직도 확실히 배워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불리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라고 배워오지 않았느냐? 너희는 너희의 생각이 너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뜻과 얼마나 반대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이제 속박, 파괴, 죽음의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유, 은혜의 법 아래 있다. 이것은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축복이라는 복음의 선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기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되며 너희 자신에 반대되는 저주에 적응시켜서는 안 된다.
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종교의 일반적인 계획과 성격을 보여 준다(56절).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오지 않았다(개역에는 난외에 기록되어 있음:역자 주). 그러므로 너희를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보낸 것이 아니라 구하러 보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거룩한 종교를 불과 검, 피와 살인으로 전하지 않고 사랑과 즐거움, 그리고 초대하고 동경하게 함으로 전파하려고 계획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천벌과 파괴의 기적으로 하지 않고 치유의 기적으로 전파하려고 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의를 제거하여 그것을 마음에 품지 못하게 했다. 복음의 정신이 확실히 없는 사람들은 폭력과 박해로 그들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저주하거나 파괴한다. 그들은 양심적으로 말하지 못하며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러 오셨다. 그 증거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을 행했고 다른 종류의 은혜를 많이 베풀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능력껏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쳤고 인간의 줄과 사랑의 끈으로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며 폭력의 몸둥이나 독설로 인도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Ⅴ. 이곳을 떠나가시는 예수─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례함을 징계치도 않으시고(자유로 지나가실 수도 있었지만) 그 길로 여행하는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억지로 그곳을 지나가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다른 촌으로 가셨다." 그곳 사람들은 옹졸하거나 완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 쉬시고 갈 길을 가셨다. 반대의 물결이 강할 때에는 그것에 대항하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례히 행한다면 우리는 복수하는 대신 다른 사람도 예의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려면 (누가복음 9:57-62)
본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세 종류의 사람과 그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대답이 나온다. 앞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태 복음 19잘 21절에서 설명했다.
Ⅰ.그리스도를 즉시 따르려고 하는 자가 나온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성급하고 겸손하게 생각도 없는 것 같고 희생을 생각지도 않은 것 같다.
1.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 큰 약속을 기대했다(57절).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영광 받으리라고 기대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결심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불이나 물 가운데로 가거나 붙잡혀 죽게 되더라도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계 4:4).
2. 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주의를 하셨다. 즉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큰 일을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과 비천함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이 말은 우리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신 것은 아주 낮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왕들이 항상 지녔던 호화로운 장식을 원치 않으시고 여우나 공중의 새와 같이 보잘것없는 것들을 요구하셨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만족할 만한 가치를 증진시키고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고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고후 8:9) 얼마나 가난해지셨나 보라 ! 모든 것을 만드셨던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한 거처도, 머리 둘 곳도 만드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한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일까 ! 예수께서는 자신을 육과 피를 가진 아담의 아들을 인자라고 불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본성이 비천하고, 가장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를 위해서 낮아진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세상에서 받는 거룩한 모욕과 세상에서 위대한 일 때문에 받는 거룩한 모욕을 가르쳐 주며, 저 세계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가난을 정당화해 주고 복된 것으로 해 주기 위해서 가난하셨다. 제자들은 확실한 거처가 없었다(고전 4:11). 그들은 자기의 선성의 거처가 없음을 알았을 때 자기들의 거처가 없음을 좋게 여겼다. 사무엘 하 11장 11절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대접에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
(2) 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이 고려해야 될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큰 일도 제처 놓아야 되며 어떤 것도 우리가 믿는 하늘 나라보다 더 크게 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하찮은 일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 고백과 세속적인 이익을 혼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것들을 분리시키셨다. 우리가 그것들을 결합시키려고 생각지 말자. 반대로 우리는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사람에게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불편하며, 낮게 되고 거치른 대접과 모욕을 당하며 살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따라 오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 본문에 보면 이 말씀은 그를 되돌려 보내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는 이 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는다.
Ⅱ. 또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루 동안만 보내달라고 간청했다(59절). 이 사람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처음에는 그 사람을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청원했던 그는 따라오는 어려움에 관해서 들었을 때 도망가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셨던 이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후에는 복종한 것 같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아주 진실하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요 15:16). 위의 성구에서 본 바와 같이 원하는 것도 그가 아니요, 행하는 자도 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불러 주시고 이 사람에게처럼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라.
1. 그의 변명,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집에 계십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제가 필요합니다. 가서 죽을 때까지 그를 보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아버지께 베푼 후에는 나는 무슨 일이나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 가지의 유혹이 나온다. 이 유혹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 주의를 하여야 한다.
(1) 우리는 철저히 제자직을 수행할 때 쉬라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미해결로 그것을 남겨 두게 되고 정확히 하지 않게 되며 엄밀하지도 성실하지 못하게 된다.
(2) 우리는 우리의 의무로 알고 있는 일을 연기하라는 유혹을 받게 되어 어떤 다른 때로 연기하게 된다. 우리가 걱정과 어려움을 피하여 어떤 일을 완수함으로 어떤 위치까지 올랐을 때 우리는 신앙적인 것을 생각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의해서 속게 됨으로 모든 시간에 속게 된다.
(3) 우리는 친척에 대한 의무로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변경하려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사실 그럴 듯한 변명이다.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가서 내 가족을 돌보고 내 자식들을 기르게 하옵소서. 그런 다음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의 나라는 최초의 장소에서 찾고 구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대답(60절).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죽은 자들을 장사할 사람은 죽은 자들과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늙은이나 죽어 가는 자 외에 누가 있는가 생각해 보라. 그들은 어떤 봉사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와 전도자들이 비인도적인 되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신앙은 모든 가족에 대해서 친절하고 선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가정에서 효성스럽게 부모를 받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을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가족이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위치에 있다면 레위 사람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어버릴 만한 열심이 필요하다(신 33:9). 전도자로 부름 받은 자는 이 세상적의 일로 자신을 얽매이게 해서는 안 된다(딤후 2:4).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위하여 부르실 때마다 우리는 혈육과 의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규칙이다(갈 1:15, 16). 어떤 변명도 그리스도의 부름에 대해 현재의 복종하는 일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Ⅲ. 본문에 보면 기꺼이 주를 따르려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자기의 친구들과 의논할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나는 다른 계획이 없고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말은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불렀을 때 엘리사가 요구했던 것이었다.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의 요구는 허락되었다. 그러나 복음전파의 직분은 결단을 요한다. 이 일은 예언자들의 일보다 더 긴급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허락 받지 못했다. 허락하여 주사 avpota,xaszai toi/j eivj si;ko,n me─즉 가서 가사를 정리케 하소서. 그리고 모든 일을 지시하고 이 일에 대해서 이해시키게 하여 주소서. 이제 여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1)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서글프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다.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겼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없고 어떤 위안도 받을 수 없기에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 그가 그들과 계속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위안과 축복을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2) 그는 마땅히 그의 심령을 채워야 되는 것과, 그리스도를 좇는 자로서 의무에 대한 많은 관심보다 오히려 세상적인 관심을 더 많이 가진 것 같다. 또한 그는 가족과 친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쉽게 그들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아마도 그는 작별 인사를 한 번 했으나 떠나기가 싫어서 몇 번이고 또 작별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에서 편히 있기 때문이다.
(3)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의 계획은 유혹을 받게 된다. 집에서 편히 있는 그들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은 그의 결심을 변경시킬 만한 가장 강한 유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결심을 반대하게 될 것이고 떠나지 말라고 간청하고 기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하고 구속주를 쫓으려고 결심한 자들은 유혹이 될 만한 자들과 자주 의논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2. 이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62절). "쟁기를 잡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자는 뒤를 돌아보거나 자신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쟁기로 잘못하여 쟁기질한 땅은 씨를 뿌리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따라와서 좋은 이익을 거두려고 계획한 네가 세속적인 생활에 다시 관심을 갖고 그것을 갈망하고─본문에서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이 ─롯의 아내가 소돔을 쳐다본 것처럼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1) 만일 네가 완전히 쟁기질하지 않고 무성의하게 하면 너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씨를 심을 적합한 땅이 되지 못한다.
(2) 만일 네가 쟁기질을 잘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씨를 뿌리는데 적합한 씨뿌리는 자가 되지 못한다.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 한다. 묵은 땅이 깨뜨려지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가 뿌려지기에 적합치 않은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묵은 땅을 깨뜨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씨뿌리는 일을 하기에 적합치 않다. 그래서 그들이 쟁기를 잡게 되면 수시로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 일을 그만 두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려는 자는 그 일을 계속하려는 결심을 해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후퇴이며 후퇴는 파멸이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지 않는 자들은 하늘 나라에 적합치 않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