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이 피면 파랑새가 날아올까, 슬픔과 한의 고장, 정읍에서/전성훈
2017년 첫 번째 역사탐방은 전라북도 정읍이다. 태어나 한 번도 정읍에 가 본 적이 없지만 정읍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가을이면 온 산이 붉은 옷으로 물들어 남녀노소 모두의 마음에 가을 소풍바람을 넣어주는 내장산 단풍놀이, 그리고 조금 늦게 아하 하고 떠오르는 정읍사와 동학농민혁명이다. 정읍은 백제시대 정촌(井村)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정읍(井邑)으로 불리었다. 땅을 한 자만 파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만큼 물이 풍부한 지역이라 고을 이름에 우물 정(井)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익산을 지나 태인 그리고 정읍으로 달려가는 호남고속도로 주변의 풍경은 봄이 오는 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겨울 내내 웅크리던 어머니이신 대지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면서 어린 아기가 방긋방긋 웃는 모습처럼 따뜻한 손길을 흔든다.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볕아래 앙상한 초목의 가지도 오는 봄을 반기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길 건너에는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의 바쁜 마음처럼 트랙터가 웅웅 소리를 내면서 커다란 바퀴를 힘차게 굴리며 겨울철에 놀고 있던 논을 갈아엎고 흙 기운을 북돋고 있다. 지금 이 땅에는 두 쪽으로 갈라진 광풍의 소리가 윙윙거리며 천지를 횡횡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승리의 환성으로 기쁨에 겨워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거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망과 탄식 그리고 절규의 함성이 점철되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렇듯 생각이 두 갈래로 찢어져 서로 원수 보듯 한다 해도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따뜻하고 화사한 자연의 얼굴을 더 이상 외면할 수 는 없다.
천년도 훨씬 넘는 까마득한 옛날, 어느 늦은 밤 정촌 마을 어귀에서, 장삿길에 나선 지 오래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긴 머리 여인은 애틋한 마음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어기야차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시장에 가 계신가요/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박병채 역)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화상통화를 한다든지 아니면 위치파악 앱으로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보는 여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을 남편의 행동거지인데, 그 때에는 그저 속절없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달님에게 불안한 마음을 전하며 빌 뿐이었다.
정읍은 이렇듯 정감어린 곳이지만 또한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부읍성, 만석보, 황토재, 녹두장군 옛집(복원) 등 이곳저곳에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열정적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지루하기도 한 기나긴 현지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 고종 31년(1894년 갑오년) 5월, 당시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만세보 수세(저수지 사용료) 강제 징수 등 학정에 대항하여 농민이 들고 일어났다. 그 지휘자가 바로 녹두장군으로 불린 전봉준(全琫準)이었다. 무장 봉기에 나서 농민군이 정부군을 맞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곳이 누런 흙으로 높은 고개를 이룬 황토재였다.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뒤편 비석에서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았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우게 된 동기와 이유를 밝히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누군가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 나중에 다시 이름을 복구하였지만 비문의 다른 부위와 색깔이 달라서 그 모양이 흉물스럽다.
신화(神話)를 꿈꾸거나 신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배타적이며 편협적인 모습은 과거 역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다. 감추고 싶은 부끄럽고 창피한 지나간 일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과거의 사건과 함께 인류의 역사요 거울이다. 역사적 사실(事實)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부분만이 사실이며 진실(眞實)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잘못된 역사 인식에 이르게 되고 서로 충돌하고 반목하는 불행한 사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주변을 살피다가 반가운 노랫말을 보았다. 어렸을 때 ‘고무줄 놀이’하며 종종 불렀던 그 노래였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만난 피향정, 우리나라 유학자의 효시로 불리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통일신라시대 태산(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있으면서 연꽃이 소담스럽게 핀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계절이 봄이 오는 때인지라 사람의 심성을 깨끗하게 변화시켜준다는 ‘꽃 중의 꽃’, 연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피향정을 소개해주는 여성 해설사분이 호소력 짙은 감칠 나는 목소리에 통기타를 치면서 불러주는 ‘정읍사’을 들으며 다시 정감어린 정읍의 봄기운을 느꼈다. 세상은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할 때 하나가 된다. 이제는 슬피 울며 지나간 과거 역사의 원한과 서러움을 토로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함께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 억압하고 반목하고 비난하고 원수로 여기며 복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날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원수 같은 그들을 용서하려면 나 자신부터 용서하고 내 몸의 상처가 잘 아물어 다시는 상처가 도지지 않도록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슬픔과 절망과 회한이 철철 넘쳤던 이 땅에 녹두꽃이 피면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파랑새가 다시 찾아오려나? 녹두꽃이 피는 날, 그날 우리 모두 함께 큰소리로 목 놓아 만세를 부르며 하나가 되고 싶다.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