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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_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19-25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 주님과 대자연에 감사하는 날이죠. 개체로서의 하나의 생명인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자기가 잘나서 세상을 사는 줄 압니다. 뭘 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잘나가는 가문에서 태어났다거나, 가방끈이 길다거나, 돈을 좀 많이 벌었거나, 권력과 명예가 드높은 사람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자수성가를 이룬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자연이라든지, 타인에 의한 혜택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매일 먹는 식사까지 스스로 마련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값없이 받고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타인이든 자연이든 함부로 무시하거나 종 부리듯 할수는 없는 것이죠.
오늘 하루라도 세상 만물과 이웃들, 함께 공유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3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의 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말하시죠. 재물이라는 외적인 존재와 마음이라는 내적인 존재의 불가분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재물이 있는 곳=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는 것이죠. 재물이란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꽁꽁 감춰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좀이나 녹이 슬어 가치기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곡식이라든지 값진 패물이 그렇다는 것이죠. 또 감춘 장소가 드러나면 도둑들이 그것을 훔쳐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족과 같은 이 말씀은 재물이라는 것이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닌 부수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등식에 대해 아니라고 항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교회 안에서 청부(淸富) 사상을 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편만해 있는 청부 사상은 교회가 재물을 축적하고 재물의 축적이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청부 사상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뿌리가 종교개혁가였던 존 칼빈(1509-1564)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는 사유재산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사유재산을 인정해야 한다며 공산주의적인 이상향을 세우려고 한 재세례파에 대해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유재산을 절대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 재물을 얻는 일은 없어야 하며 재물을 사회의 공공선과 공익을 위해 써야 한다고 가르쳤죠.
칼빈은 물질적 부를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질은 하느님의 축복이며 선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가난을 저주로 보는 시각을 반대하며, 신자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죠. 물질의 사용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연결되어 있으며, 부자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물질적 부를 이루고 나서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의 부가 공동체와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믿는 자들은 자신의 부를 나누고, 사회의 복지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니 칼빈의 청부론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부 사상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고, 건강해지며, 경제적으로도 복을 받는다’는 소위 '삼박자 복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삼박자 복음’이라는 번영신학은 부를 많이 획득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부가 구원의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즉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냉대하시는 것이며, 부와 건강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부와 번영, 건강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의 증거나 구원의 증거라고 보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번영신학은 칼빈의 사상을 왜곡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의 사용과 부를 향한 태도가 문제'라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쌓으면 안 되지만, 깨끗한(淸) 방법으로 쌓는 부(富)는 하느님을 위해 유용하게 쓰인다는 논리죠. 조금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정직한 방법으로 부를 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쏙 빼고 축적한 부를 가지고 교회에 헌금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을 바꿉니다. 스스로도 부를 축적하는 것이 선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인 것이겠죠?
인간 속에 잠재되어있는 욕망을 부추기며 설교자들은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게 하옵소서(신명기 28:13).”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게 하옵소서(욥기 8:7),”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얻게 하옵소서(막 4:20)”하며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 유일신인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필적할 만한 적수로 재물을등장시킵니다. 재물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재물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을 때 재물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여기서의 방점은 주인으로 누굴 섬기겠냐는 물음이었던 것이죠.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24절)”는 그의 말씀은 당시의 사회가 하느님과 재물이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타락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대 상황에서 하느님을 주인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그것을 실천하셨죠. 예수님은 당시 죄인 취급받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어울리며 청빈(淸貧)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자란 가정은 절대 빈곤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1년에 한 번씩은 고향에 방문할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는 아니더라도 가난에 허덕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의 단식을 통해 절대적인 가난을 고의로 택하게 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죠. 그곳에서 40일간 단식을 하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가 받으신 시험은 모두 3가지였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 사탄에게 절하여 천하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각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힘을 가지라는 마귀의 유혹이었죠.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느님을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의 권세와 맞서 싸우기로 한 것이죠. 예수님이 선택한 것은 자발적 가난 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상에서 버림받고 고통받는 암하아레츠,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택하신 것이죠.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이 세상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8:20).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한 마디 말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초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 주무셨습니다. 초대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그냥 산이나 들에서 주무시고,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굶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서로 사랑하고 나누라고 요구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이 말씀에 예외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달랑 옷 한 벌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겉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마5:40).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는 또 어떠셨습니까? 먹을 것을 요구하는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누가 9:13). 이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의 요구는 넉넉한 곳에서 조금씩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곳에서부터 나누라, 부족한 곳에서부터 나누라는 것이죠. 없는 데서 나누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죠.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이들에게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신이나 가문, 재산, 종교 등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오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자발적 가난을 우리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25절의 말씀인데요, 생활 속에서 곡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옷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주인이 되시는 하느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 등을 다 해결해 주실 터이니 너희는 그분의 뜻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분 뒤 33절에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대로 되지 않죠. 의식주에 문제가 생기거나 위협을 받으면 자신들의 신앙이나 신념을 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의식주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신앙과 신념을 배반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젊을 때 사회운동을 하다가 변절하여 뉴라이트가 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오늘 본문 22~23절에서 예수님이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눈이 좀 어두워지기만 해도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답답해지는데,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을 잃으면 그의 영혼과 그의 삶이 그 어두움 속에서 타락하지 않겠느냐’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마음의 눈, 생명의 빛을 어둡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재물이라고 힘주어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마음에 빛이 사라지고 어두움이 찾아들게 됩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품으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빛을 어둡게 하여 그의 인생을 사탄의 유혹에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재물을 하늘에 쌓아 놓았다면 그곳으로부터 더욱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어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윤석열 퇴진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9일)에는 철산 상업지구에서 광명촛불행동 주최로 유권자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 시작 전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이 나와서 발언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야무진 발언 속에 자기 반 아이들도 윤석열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이 물러나야 이 나라라 바로 설 수 있다고 당차게 말하는 모습에 그래도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날 지지 발언을 통해 그동안 철산 상업지구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때 광우병 집회는 고등학생들이, 박근혜 퇴진집회에는 중학생들이, 이번 윤석열 퇴진집회에는 초등학생들이 압장섰다는 감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지난 9일 서울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자대회에 경찰들이 불법적인 폭력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날 폭력 사태로 한창민 사회당 국회의원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고 노동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연행된 노동자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지만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두고 윤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한 마지막 발악으로 공안정국을 만들려 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이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미국의 네오콘, 젤렌스키, 윤석열이 공모해 우크라이나 전쟁 확대를 꾀한다는 의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대학가에서 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0월 28일 가천대부터 시작된 시국선언은 15일 현재 56개 대학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제주와 부산·울산·경남, 강원도의 교수들은 학교를 넘어선 연대에 나서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트럼프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트럼프는 7대 경합주'를 모두 석권하면서 최종 선거인단 312명(11월 10일자)을 확보했습니다. 과반 270표를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이후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인단 투표(12월17일)와 연방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의 개표 및 인증 절차(2025년 1월6일)를 거쳐 내년 1월 20일 제47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게 됩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세계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고 트럼프 2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만들기 위해 분주합니다. 우리나라도 윤 대통령이 트럼프와의 회동을 위해 골프연습에 나섰다고 하네요~ 과연 이것이 트럼프 2기를 준비하는 우리나라의 대책이라면 너무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김태형 소장은 트럼프가 싫어하는 인간형으로 3가지를 들었습니다. 트럼프는 인간에 대한 호불호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며, 그가 싫어하는 인간형은 위선자, 철학과 신념이 없는 사람, 비굴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꼭 그에 부합한다는 설명입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 이재명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1심 선고 공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왔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4부(재판장 한성진)가 기소된 혐의 중 일부를 제외한 핵심 내용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것입니다. 1심 선고가 나오기까지 이 재판은 2년 2개월이 걸렸습니다.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재판은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과정과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화영 경기도 전 부지사에 대한 유죄판결도 그렇고 김혜경 여사에 대한 판결도 그렇습니다. 윤석열과 김건희, 장모 최은순이 벌인 범죄 의혹에는 압수수색도, 수사도 하지 않고 유독 정적에 관해서라면 기우제식 수사와 조작, 회유와 협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아마 판결을 내린 판사들에게도 모종의 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법 현실을 목도하며 다음 정부에서는 국민들이 검찰권과 사법권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에 관련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며 가혹한 형벌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한 본문의 말씀이 이런 사태의 근간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권력과 야합하여 불의한 재판에 가담한 자들은 하느님 대신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란 것이죠. 자신들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자발적으로, 또는 협박에 못 이겨 협조함으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꼭 받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는 절대로 편히 살 수 없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 못한 잘못이 오늘날 운석열 정부와 그를 비호하는 간신배 무리들이 또다시 득세하게 만든 원인인 것입니다.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경고를 가슴속에 새겨 하느님을 섬기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