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 ~ 1944, Edvard Munch)의 1893년 작품 "절규(외침소리, The Scream) ". "절규"는 뭉크가 두 친구와 오슬로 에케베르크 언덕(가족의 장례식을 치렀던 장소)을 해질녁 걸어가다 마음속에 우울한 감정이 밀려들어 다리가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표현주의 선구자 뭉크는 독일의 표현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894년 "사춘기" 등을 통해 그림속에 감정을 담아 그리되 어둡고 추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1906년 "코에센의 눈 내리는 거리"도 있다. 뭉크는 평소 "나는 이 세상에서 숨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느낀 감정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다. 절규는 1893년 유화, 파스텔로 2점을 그렸으며, 그 후에도 여러점을 남겼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서민 동네에서 태어난 뭉크는 천성적으로 병약했다. 결핵에 걸린 어머니는 뭉크를 출산하면서도 계속 기침을 했으며 아버지는 뭉크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 세례를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신부를 불렀다. 하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았으나 5살때 어머니가 사망하게 된다. 14살때 공업학교에 입학했는데 15살때 화가가 되기 위해 오슬로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는다. 같은해 누나가 폐병으로 사망한다. 26살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는데 아버지 마저 뇌졸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몇년 뒤 남동생마저 페렴으로 사망하고 여동생 중 한명도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후 뭉크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여러명의 여자도 만나는데, "툴리아 라르센"은 집착이 강해 결혼하자며 자살 소동까지 일으키며 그 과정에서 뭉크의 왼손 중지가 부서지기도 하였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유명해지며 돈도 모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요구하는 등 계속 괴롭혔는데 말년에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독신으로 반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영혼의 일기장"이자 "자식"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44년 죽기 전 가정부에게 "죽을 때 혼자 있게 해달라"며 "나는 인생의 봄을 지날때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죽음은 진정한 탄생이네. 썩어가는 내 시체에서 꽃이 자라고 그 꽃 속에서 나는 계속 살아가겠지. 죽음은 삶의 시작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먼 여행을 떠났다. 생전에 뭉크는 자신의 작품이 팔리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판매된 그림을 다시 그리곤 했다.
"에드바르 뭉크(1863 ~ 1944, Edvard Munch)의 1894년 작품 "재(Ashes)". 뭉크가 학생시절 만났던 첫번째 여성이자 유부녀 "밀리 테울로브"는 여러 남자를 유혹하고 다녔는데 불륜을 저지른 뭉크는 죄책감에 빠져 "나는 우리의 사랑이 잿더미로 변해 바닦에 깔리는 걸 느꼈다"고 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에드바르 뭉크(1863 ~ 1944, Edvard Munch)의 1895년 작품 "마돈나(Madonna)". 이 그림은 뭉크가 두번째 사랑했던 여자 "다그니 유엘"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1863 ~ 1944, Edvard Munch)의 1911년 작품 "태양(The SUN)". 이 작품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