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lia는 이덕하 선생의 꽃가루 님 번역 비판에 대한 평가와 태도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다음과 같은 까닭들 때문입니다. [이덕하 선생의 꽃가루 님의 번역 비판에 관한 언급은 다음의 두 글(의 댓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꽃가루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90
『 괴델, 에셔, 바흐 』번역 비판을 시작하며
http://theacro.com/zbxe/722697
① 이덕하 님께서는 꽃가루 님의 『괴델, 에셔, 바흐 Gödel, Escher, Bach: An Eternal Golden Braid』 번역판 비판을 반대하는(말리는) 이유로, 자신이 이미 비판했으므로 남들이 재차 비판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옹색한 이덕하 님 개인만의 유아론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을 비판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다른 책의 번역을 비판하는 것이 한국의 번역 출판계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라는 표면적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데요. 이것은 내가 이미 손댔으니까 네가 뒤늦게 뒷북 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식의 오만함이고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솔까, 이덕하 님의 이런 유아론적 논리는 『괴델, 에셔, 바흐』한국어판 오역 비판은 자신 최초로 시도한 ‘업적’이었다는 사실을 표나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② 또한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이 그 무슨 번역 비판의 전범(典範, standard)도 아니거니와, 게다가 완전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즉 이덕하 님의 14장 비판만으로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이 마무리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한 다른 분들의 추가 비판은 (현재 이 오역판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끼치는 경제적/정신적 폐해의 심각함에 비춰볼 때) 얼마든지 더 필요하고 시급한 상황입니다. 2006년 이덕하 씨가 문제의 번역판을 비판하고 나서 지금 한국 번역계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나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즉, 여전히 국내 최대 온 · 오프 라인 서점 가릴 것 없이 교보문고 · 영풍문고 · 반디앤루니스 · 예스24 · 알라딘 · 인터파크 등등에서 『괴델, 에셔, 바흐』 최악의 오역판을 버젓이 팔아먹고 있습니다. 음식으로 치면 방사능 원소 세슘에 오염된 생선이나 채소를 몰래 팔아먹는 비양심적 범죄 행위와 똑같은 짓입니다. 또한 서울대는 권장 도서 100선으로 최악의 오역서를 무료 광고까지 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서울대의 이런 무책임한 광고짓으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손실을 당할지 상상해보십시오. 이게 대중윤리도덕이 무너져버린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올바른 번역 비판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 비판에 나서는 의식 있는 지식인이 어디 그리 있습니까? 이런 판국인데 꽃가루 님의 비판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위와 같은 이덕하 씨의 발언은 심히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③ 번역 비판은 일종의 품앗이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이덕하 님께서 많은 번역 비판을 해오면서 세상의 누리꾼들로부터 유익하고 소중한 충고 · 역비판 · 도움말 · 오류 지적 · 가르침 따위를 얼마나 많이 받아오셨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로운 세상 누리꾼들의 응답과 반응(피드백)은 이덕하 님한테 유무형의 (지적/인격적/도덕윤리적/정신적/물리적) 자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덕하 님께선 세상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이덕하 씨 혼자 힘만으로 번역 비판 작업을 진행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니, 이덕하 씨 자신 스스로 수차례에 걸쳐서 그랬죠. 불의한 제도권 번역가 집단과 출판 집단이 저지르고 있는 심각한 오역과 부당 상행위를 고발하는 자신의 숭고한 행위를, 그 비판글들을 인터넷에 널리 퍼뜨려 달라고 누리꾼들한테 여러 번 직접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들에 비춰볼 때, 이덕하 님께서 보이는 (꽃가루 님의『괴델, 에셔, 바흐』 번역 비판에 대한) 작금의 생뚱스런 태도와 반응은 실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고 일종의 배신감마저 드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덕하 님께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비판글만을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 열심히 여기저기에 퍼나르는 일에만 열심이었을 뿐, 남들이 진행하는 동일한 활동에 대해서는 여태껏 강 건너 불구경하듯 거의 아무런 지원 사격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중점적으로 해온 번역 비판 작업과 거의 완전히 합치하는 다른 논객들의 글에 대해서, 당연히 동업자적/동지적 우정이나 연대감을 느끼고 그 어떤 도움말 · 충고 · 역비판 · 촌평 따위로 상호격려를 나눌 수도 있으련만, 격려는커녕 오히려 엉뚱한 자신의 최초 업적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옹색함만을 노출하고 있으니 적이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지식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④ qualia는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이덕하 님한테 신뢰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비판은 근본적으로 “상호” 비판이고, 상호 비판은 상호 부조입니다. 모든 비판 행위는 나홀로로는(단독으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역설적이게도 비판 주체는 (자신이 비판해 마지 않는) 비판 대상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비판의 기본 개념, 비판 행위의 기본 작동 원리, 그리고 그 철학적 의미에 조금이라도 주의한다면 이런 비판에 소아병적으로 “삐질” 위인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90 의 댓글에 제 답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토론/논쟁을 할 때, 상대방의 반론/반박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상대방의 반론/반박에 대응하지 않고 토론/논쟁을 중단하는 경우는 대략 3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상대방과의 토론/논쟁이 완결됐다고 생각하는 경우 (자기 자신이 상대방을 완전히 논파해 완결됐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포함됨)
② 상대방과 토론/논쟁을 계속하는 것은 더이상 “긍정적 · 건설적” 의미가 없는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감정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③ 상대방의 반론/반박이 너무나 빈틈없고 강력해 재반론/재반박할 수 없어 무응답 형식으로 (비겁하게) 후퇴하는 경우
이렇게 대충 3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거의 모든 논객들은 수많은 토론과 논쟁을 치르면서 위와 같은 경우를 한두 번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토론과 논쟁의 본질 속에는 저러한 요소들이 내재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것들이 긍정적 속성이든 부정적 속성이든 토론/논쟁의 일부로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토론/논쟁 개념이 (한국/한국인에게는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념 얘기는 여기선 이 정도 말해두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덕하 선생을 비판했더니, 이덕하 선생이 반론이랄까, 해명이랄까, 여하튼 《번역 비판》 게시판에 반박성 댓글을 두 개 올렸더군요. 벌써 한 달 하고도 20여일 전입니다. 즉 2013년 02월 06일의 일이죠.
그런데 이덕하 님의 반박성 댓글에 여지껏 무응답으로 일관했던 제가, 뒤늦게 뜬금없이 댓글을 올리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위에서 무대응/무응답의 3가지 경우를 약술해놨는데요. 그러나 제가 이덕하 선생한테 무대응/무응답한 까닭은 위 3가지 경우 가운데 그 어느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애초에 이덕하 선생에 대한 일전의 제 비판글은 토론과 논쟁을 염두에 두고 써올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토론과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이덕하 님의 해명성 (혹은 반론성) 댓글에 재반론/재반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형태의 제 무대응/무응답이 이덕하 선생(의 반론)을 무시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위 3가지 경우 어느것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덕하 선생이 《괴델, 에셔, 바흐》 국역본에 대한 “꽃가루” 님의 번역 비판 활동을 놓고 만류성 조언을 담은 글을 올렸었는데요. 그 글을 읽고 일종의 섭섭함 혹은 유감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그런 “상기시킴”과 “경각심 고취”가 비판글의 주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