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현대시학》신인작품 당선작
낙타의 눈물 / 김성순
어둠이 내리면 몸 속 어딘가에서 낙타의 울음소리 들리고
게르 앞에서 나는 무릎 꿇고 비밀스런 의식을 치른다
제단에 올릴 수 있는 건 마두금 연주뿐이므로 향은 노을빛이다
예복을 걸쳐 입은 옥빛 바람, 당상집례로 홀기를 읽는다 아직도 사막 위를 부유 중인 새끼여
주술가처럼 광활한 초원 불러들인다 우주의 뱃속, 깊은 곳의 소리를 모아 바람이 부르는 노래
삐걱거리는 몸 낙타의 호흡 가다듬으며, 떨어져 나간 너의 한 쪽 귀를 찾아
구름의 행렬 길을 나서는 저녁
길을 믿지 않는 너, 오늘도 독수리로
어느 죽음 파헤치다 깊은 산자락에서 발톱의 날 세워 쓸쓸히 어둠을 파고들겠지
이제 평화롭게 불을 지피자 땅거미 지면
이국의 숲에서 내가 걸어왔던 길들 사이, 네가 있었노라
달빛 편지라도 띄울 때면 초원의 풀들은 살아 선한 눈빛으로 내게 안길까, 웅얼웅얼 울음통이 되어버린 사막 길
젖은 눈썹 사이 모래톱 숨은 홍예는 아스름 피어오른다
마야의 집 / 김성순
머리가 하얀
꽃의 사타구니에 채워야 해요 붉은 칸나가 되지 못한 그녀,
벽과 벽 사이 누런 꽃 수 놓아요 조각조각 난도질 유혹하는 방바닥, 성냥팔이 소녀 되어라 해요 환한 불꽃
겨드랑이 따뜻해져요 꽃가지 타들어 가요 놀란 눈빛,
달려온 달팽이들 밥상에 둘러앉아 회의 중이에요 긁을 수 없는 슬픔이 진수성찬인 아침,
꽃 뿌리 화분으로 옮겨 심어요 거름을 깔아요 영양제도 꽂아요
잊지 않고 꼬박꼬박 웃음 챙겨요 다소곳 앉아 햇살을 받아먹는 칸나,
잘잘잘 꽃물 흘려요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과자부스러기처럼 온 방 굴러다녀요 밟히는 시간이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한나절
책상 위의 여자는 웨딩드레스로 하얗게 피고 있어요 그녀는 지금 피고 있나요?
밥상 위를 붕붕 날아가는 파리의 물음 틀어놓은 수도꼭지 수압에 눌려 흩어져가요
칸나로 피어 날 당신, 몇 방울의 눈물 십자가로 걸어두고 참 경이롭게 기저귀 채워 달라 웃는 시간이에요
봄의 幻 / 김성순
버들가지 물고기로 피어오를 때
내 몸은 물오른 홍매 같았어 아침 햇살
붉어져 가던 몸뚱이
목말랐던 계절 홀로 잠겨
구름 사이로 날아간 내 언어들은
무덤으로 가는 길목,
빈 저수지에서 한 계절을 버텼지
호흡장애로 다가오는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면
운동화 끈 동여매고 무작정
다시 뛰었어 숲에서
열꽃으로 터져 오르는 꽃잎들,
죽은 듯 종일 눈감으면
노을처럼 번져가던 인경소리
긴 호흡으로 날아와
알약을 삼켰던 어제의 허기들
오랜 기다림도 설레게 했지
가파르게 오른 산에서 만난 당신,
봄이 흔들리는다는 것은 솟구친다는 거야
솟구친다는 것은 떨림도 이제
두렵지 않다는 가라사니 꽃잎 열리는 거야
겨드랑이에서 살랑거리는 저 초록 물고기 좀 봐
유월 / 김성순
아버지, 폭염은 조용한 골목도 비껴가지 않았어요
거리는 텅 비었고 아스팔트의 분노는 감당하기 벅찼죠 푸른 제복의 나무들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요 모두가 긴장한 오후
호기심 어린 장미 나비 손잡고 담장을 타 넘다 피 흘리며 쓰러졌어요 장전된 총알 허공으로 갈겨요 작전처럼
정적의 시간 흐르고 골목 끝으로 그림자 숨어들어요
정육점의 개 사납게 으르렁거려요 잘려나간 한 쪽 다리로 충성을 다하던 용맹함이 걷어차이는 순간
안전핀을 뽑아든 그림자, 풀숲을 향해 힘껏 검은 물체 던져요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고양이 울음,
폭격전은 또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쓰레기더미에 숨어 있던 쥐의 꼬리 피범벅으로 꿈틀거려요 요란한 군홧발 소리
포복 중이던 아버지 죽은 전우 밟으며 돌격을 외쳐요 녹슨 총 들이밀며 땀범벅이 되어 고지를 오르시던 아버지
후려치는 뺨 한 대에 털썩 고개 숙인 말, 철그렁 철그렁 꽃잎으로 지는 유월이에요
환란 / 김성순
국화의 신음 사이로 어제 뿌린 호수의 눈물 천장 떠다녀요 4와 5 사이의 시침 눈꺼풀 내려앉아요
가을볕이 오래 나를 갉아먹은 걸까요 슬픈 家系圖 책상 위 나뒹굴어요
쥐며느리처럼 웅크린 일요일, 땀범벅이에요
은행잎들 우르르 약국으로 몰려가 문 두드려요 밥도 없는 일요일 앙상한 뱃가죽
뒹구는 문장 한 숟가락 떠먹어요 따뜻한 물 한잔 주시겠어요 눈 감으면 온통 바람뿐인 형광등,
묘비명으로 박힌 일요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수족관의 금붕어 삼킬까요 꿈틀거리는 지느러미 너무 싱싱해 보여요 먹이를 앞에 두고 움직일 수 없는 들짐승같이
컹컹거리는 일요일 정적 좀 누가 깨워주세요
아무도 낚아채어 주지 않는 일출 꿈꾸며 눈 감아요 흩어진 신발들, 환하게 피어나길 기다리는 가을
삐걱거리던 창틀 몸 눕혀야 하는 시간이에요 더디게 문 여는 당신, 보름달이면 어떨까요
김성순 시인
김천 출생. 울산 남구 거주.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년 재학 중.
[심사평]
상상력의 리얼리티, 즐거운 핍진감 / 오태환
……서구문학의 간섭 속에 형성된 현대시가 지닌 문제적 부분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이미지에 경사(傾斜)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가 지니는 이미지의 비중이 무엇보다 크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의 결을 어르고 다스리는 데 너무 소홀하다 싶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나 황진이의 〈어져, 내 일이야〉에 드러나는 정서의, 휘영청 어질머리 날 정도로 보드랍고 나긋나긋한 구경(究竟)을 현대시에서 찾기 쉽지 않다. 그 은근하면서도 흐벅진 감정의 흐름에 마음을 당실당실 맡기는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생경하고 무잡(蕪雜)한 감정의 유희를 경험하며 관자놀이에 핏줄이나 돋우기 일쑤다. 현대시가 이미지 제련에 치중한 나머지 정서적인 부분을 허술히 여기는 것을 소위 현대의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쳐도 서운한 느낌은 마찬가지다.
심사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이 거의 다가 아니라 하나같이 언어를 굴절, 변형시켜 이미지를 깎고 다듬는 데 힘을 쏟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는 정서의 섬세한 매만짐과 공교한 드러냄이 아쉬웠다는 뜻이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한효정 씨의 「빵을 굽는 아침」외 9편, 금은돌 씨의 「옆구리의 살구꽃」외 9편, 김성순 씨의 「낙타의 눈물」외 5편이었다.
한효정 씨의 작품은 싱싱한 언어를 산뜻한 숨결마디에 싣고 있다. 잘 다듬어진 느낌이지만 시 안에 잠복한 서사적 맥락과 상상력의 효과가 약간씩 엇박자를 놓는 듯하다.
금은돌 씨는 부분적으로 “돌의 결을 따라 꽃잎이 떨어지는 건 철근을 갈라내는 것보다 아츤 일”(「물고기 사랑」) 같은 인상적인 이미지가 눈에 띈다. 그러나 「옆구리의 살구꽃」에서처럼 요설적이어서 솎아내야 할 부분이나, “눈이 아름다운 건 만질 수 없기 때문이죠”(「물고기 사랑」)처럼 잠언적이어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둠이 내리면 몸속 어딘가에서 낙타의 울음소리가 들리고”로 시작해서 “젖은 눈썹 사이로 모래톱 숨은 홍예 아스름 피어오른다”로 맺는 김성순 씨의 「낙타의 눈물」은 활달한 이미지와 품은 정조가 적절하게 교직(交織)되어 상상력의 리얼리티라고 할까, 네 모서리의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는 즐거운 핍진감(逼眞感)을 선사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이 뒤받쳐 줄 만한 양력(楊力)을 지니지 못한 것이 문제되기도 했었으나, 이 정도의 시를 생산할 정도의 감각이라면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순 씨의 당선을 축하하고,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 : 오태환, 정일근, 우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