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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사비 비문은 1820년 홍문관제학 조진관이 지은 글(찬술)이다. 하단 원문 그대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조진관의 글을 받아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동부승지 이익회이다.
홍직필 선생의 정려기문은 1817년 원강사를 세운 엄흥도 공의 후손 석헌(碩憲)이 울산에서 한양으로 홍직필을 찾아와 기문을 청하였기에 찬술하여 준 기문이다.
울산 원강서원(원강사)
원강서원은 1799년(정조 23년) 울산에 살고 있던 엄흥도의 후손들이 울산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에 원강사(圓岡祠)를 세워 그의 제사를 받들었는데, 1817년(순조 17년)에 사림(士林)의 논의에 따라 이 사당이 원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94년 원강서원을 삼동면 둔기리에 다시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서원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1820년(순조 20년)에 세운 것이다.
서원 안에는 서원 본체 건물 한 체와 제실이 두체, 그리고 엄흥도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독립체로 서원 뒤편에 있다.
역주 장릉지보유 230쪽 각주(엄호장정려기 중) :
울산에 살던 엄흥도의 후손들이 울산에 원강사(圓岡祠)를 세워 엄흥도를 배향한 것은 1799년(정조 23) 기미(己未)이다. ‘병오년’은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원강사는 1817년(순조 17) 원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26년(영조 2) 엄종한(嚴從漢)의 상언(上言)으로 청주(淸州)에 정려문을 세웠다. 그 후 1759년(영조 35) 임금의 명에 따라 영월로 옮겨 세웠는데, 엄흥도가 청주에 거주한 적이 없고 그의 묘소 또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영조 35년 3월 38일 참조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증공조참판엄공원강서원비 (贈工曹參判嚴公圓岡書院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726-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영월엄씨충은공파
관리자(관리단체) 영월엄씨충은공파
상 세 문 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문화관광과 052-229-7633
증공조참판엄공원강서원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강서원 내에 서 있는 비로, 조선 단종·세조 때의 선비인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엄흥도는 어린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에 그 지역의 호장을 지내었던 자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그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자리에 몰래 장사지낸 후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 후 숙종은 그 충의를 거룩히 여겨 공조참의를 증직하였고, 영조는 그를 위한 정려문을 내려주었으며 훗날 공조판서에 다시 증직하였다. 정조 23년(1799) 울산의 후손들이 원강사를 세워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가, 사람들의 논의에 따라 순조 17년(1817) 원강사원으로 승격시켰으며, 뒤에 이 비를 세워놓았다.
비각안에 있는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순조 20년(1820) 세운 것으로, 비문은 홍문관제학을 지내던 조진관이 글을 지었으며, 동부승지 이익회가 글씨를 써 놓았다. 앞면에 새긴 비의 명칭은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이조판서 이조원이 쓴 것으로, 미술사적으로도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원강서원은 1994년 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이 고쳐지었는데, 이때 비도 옮겨와 함께 세워두었다.
출처 : 문화재청 홈
蔚山圓岡祠碑
莊陵之末。有終事之臣。是惟寧越戶長嚴興道。越 陵所寄也。公貫於是胥於是。樹忠節於是。歿而墓焉壇焉。若陪 陵而葬而從與享于舊君。皆不離乎越。今乃廟食於蔚山之圓岡者。以遺裔爲蔚人也。是禮也由人情起也。蔚與越奚擇焉。嗚呼。 端廟之遜越也。忠臣効命之秋也。及 王捐子䂓之樓。几席委棄。莫敢收之。苟非公蹈冒火色。號泣而營辦之。尤當有不忍言矣。或曰公嘗壽母而髹其器爲之椑。遂就其松楸之間藏焉。知其事者爲公懼。公曰爲善獲禍。無所恨。自是土人指點曰 魯陵。陵王者葬也。 魯山王降號也。以降號冠王禮。憐之也。人之登斯邱者。莫不咨嗟流涕曰萬歲一坏。此嚴戶長之忠也。及覽其山川拱護。龍飛鳳舞。自成帝王之宅。又太息曰此非公之所能及也天也。後二百有餘年。 陵始封。公從而彌彰。屢 贈至亞卿。表厥里腏享。曰彰節祠。曰配食壇。祠首六臣而次三士。公士之一也。壇自六宗三相已下三十二人。皆死事之臣。公雖無死。獨侈死事之例。我 先王義起也。錄後之議。自尤庵宋文正公發。後之掌禮者謁 陵回。輒申之至質言。公子孫流于嶺南而迄無聞。近於圓岡之設。蔚之言雲仍者。且百人。承旨嚴侯耆。著說立五證焉。侯於公爲同譜。其言有徵云。蓋嘗論之。公下邑之一鴈鶩班耳。樸質少文。非如唐謝諸君子遊於疊山之門。勵義也素。於故君也。則又未有壺飡之惠餂鵝之舊。而倉卒臨禍難。忠誠溢發。不顧其身與家。以當 王之大事。是則無所爲而爲之。其忠無間於身殉諸公而功反大。推此義也。雖家尸而戶祝可也。况於一氣相禪之地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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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圓岡祠碑 趙鎭寬
莊陵之末。
有終事之臣。
是惟寧越戶長嚴興道。
越陵所寄也。
公貫於是胥於是。
樹忠節於是。
歿而墓焉壇焉。
若陪陵而葬而從與享于舊君。
皆不離乎越。
今乃廟食於蔚山之圓岡者。
以遺裔爲蔚人也。
是禮也由人情起也。
蔚與越奚擇焉。
嗚呼。
端廟之遜越也。
忠臣効命之秋也。
及王捐子䂓之樓。
几席委棄。
莫敢收之。
苟非公蹈冒火色。
號泣而營辦之。
尤當有不忍言矣。
或曰公嘗壽母而髹其器爲之椑。
遂就其松楸之間藏焉。
知其事者爲公懼。
公曰爲善獲禍。
無所恨。
自是土人指點曰魯陵。
陵王者葬也。
魯山王降號也。
以降號冠王禮。
憐之也。
人之登斯邱者。
莫不咨嗟流涕曰萬歲一坏。
此嚴戶長之忠也。
及覽其山川拱護。
龍飛鳳舞。
自成帝王之宅。
又太息曰此非公之所能及也天也。
後二百有餘年。
陵始封。
公從而彌彰。
屢贈至亞卿。
表厥里腏享。
曰彰節祠。
曰配食壇。
祠首六臣而次三士。
公士之一也。
壇自六宗三相已下三十二人。
皆死事之臣。
公雖無死。
獨侈死事之例。
我先王義起也。
錄後之議。
自尤庵宋文正公發。
後之掌禮者謁陵回。
輒申之至質言。
公子孫流于嶺南而迄無聞。
近於圓岡之設。
蔚之言雲仍者。
且百人。
承旨嚴侯耆。
著說立五證焉。
侯於公爲同譜。
其言有徵云。
蓋嘗論之。
公下邑之一鴈鶩班耳。
樸質少文。
非如唐謝諸君子遊於疊山之門。
勵義也素。
於故君也。
則又未有壺飡之惠餂鵝之舊。
而倉卒臨禍難。
忠誠溢發。
不顧其身與家。
以當王之大事。
是則無所爲而爲之。
其忠無間於身殉諸公而功反大。
推此義也。
雖家尸而戶祝可也。
况於一氣相禪之地乎。
증공조참판엄공원강서원비 (贈工曹參判嚴公圓岡書院碑)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순조 20년(1820) 세운 것으로,
비문은 홍문관제학을 지내던 조진관(趙鎭寬)이 글을 지었으며,
동부승지 이익회가 글씨를 써 놓았다.
앞면에 새긴 비의 명칭은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이조판서 이조원이 쓴 것
원강사(圓岡祠)`원강서원(圓岡書院) 내력
1799년(정조 23) 기미(己未),
울산에 살던 엄흥도의 후손들이 울산에 원강사(圓岡祠)를 세워 엄흥도를 배향.
1817년(순조 17), 원강서원(圓岡書院)으로 승격.
趙鎭寬 조진관
이칭/별칭 유숙(裕叔), 가정(柯汀), 효문(孝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출생 시기/일시 1739년 - 조진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조진관 생원 진사시 합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8년 - 조진관 기로소 입소
몰년 시기/일시 1808년 윤5월 15일 - 조진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0년 3월 23일 - 조진관 효문 시호 받음
출생지 조진관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부임|활동지 광주 부윤 - 경기도 광주시
부임|활동지 개성 유수 -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부임|활동지 한성부 우윤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조진관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성격 문신
성별 남
본관 풍양
대표 관직 의정부 좌참찬
[정의]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유숙(裕叔), 호는 가정(柯汀). 증조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조도보(趙道輔)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尙絅)이며, 아버지는 역시 이조 판서를 지낸 조엄(趙曮)이다. 어머니는 홍현보(洪鉉輔)의 딸인 풍산 홍씨(豊山洪氏)이고, 부인은 홍익빈(洪益彬)의 딸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익종 비인 신정 왕후(神貞王后)이다.
[활동 사항]
조진관(趙鎭寬)[1739~1808]은 1762년(영조 3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775년(영조 52) 세자익위사 시직이 되었는데, 이때 영조가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구현시(求賢試)를 실시하였으나 몇 번의 시사(試士)에도 마땅한 인재가 없자 음서(蔭敍)[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공로로 관직에 진출함] 출신자 중에서 직접 가려 조진관을 선발하였다. 이후 내직, 외직을 두루 거친 뒤 동부승지에 특별히 발탁되었고, 곧 이어 광주 부윤에 제수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버지 조엄이 당시 권력을 좌우하던 홍국영(洪國榮)과 갈등을 보이자 이를 변명하기 위해 신문고를 치거나 칼로 몸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의금부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 조엄이 김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홍국영이 권력을 잃은 뒤 아버지에게 직첩(職牒)이 환급되었고, 조진관에게도 군직(軍職)이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돈령부 도정에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면서 한성부 우윤과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이때 조진관은 이전에 있었던 일이 억울하다며 몇 차례 재조사를 요구하였고, 정조가 특별히 어사 이상황(李相璜)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1794년(정조 18) 한성부 우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 형조와 병조의 참판, 대사간을 지냈고, 1795년(정조 19)에는 형조 참판과 동지춘추관사를 거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을 맞아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올릴 때 승지로 공을 세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하였다. 이후 도승지를 지낸 뒤 1796년(정조 20)에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서는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역 인재를 추천하였다.
1797년(정조 21)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였다. 이어 1798년(정조 29) 지춘추관사와 도총부 도총관, 지의금부사,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뒤 호조판서에 제수되었고, 1800년(정조 24)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 당상으로 차출되었고,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과 주교사 당상을 역임하였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급되었다.
1801년(순조 1) 지돈령부사를 거쳐 형조 판서와 의정부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서는 정조가 친위 부대로 창설한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 1802년(순조 2) 호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이어 숭정대부로 승급하였다. 1803년(순조 3)에는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비롯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1804년(순조 4)에 의정부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호조판서 재직 시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의 보수에 공이 있어 숭록대부로 승급하였고, 1805년(순조 5)에는 정순 왕후(貞純王后) 옥책문(玉冊文)을 찬술해서 올린 공으로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1808년(순조 8) 신하로서는 영광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다가 같은 해 윤5월 15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진관은 평소 『주역(周易)』 연구에 주력하여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며, 『역문(易問)』을 저술하기도 할 정도로 평생을 주역 연구에 매달렸다. 『역문』은 『주역』의 각종 문제를 도합 18개 항목으로 분류, 여러 모로 논증하고 토의한 글로, 아들 조인영(趙寅永)이 쓴 발문(跋文)에 따르면 당대까지 역학(易學)을 말하는 학자들이 흔히 언급하지 아니한 부분을 많이 해명해 놓은 글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천문과 율(律)·수(數)에도 해박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 『가정유고(柯汀遺稿)』가 있다. 『가정유고』는 10권 5책으로, 권1과 권2는 시(詩)가 수록되었고, 권3은 「사한성우윤소(辭漢城右尹疏)」 등 소(疏) 18편, 권4는 상소와 계(啓), 의(議) 등이 수록되었다. 권5는 개성 숭절사에 모셔진 임진왜란 때의 삼충위(三忠位)에 관한 기록의 「삼충록서(三忠錄序)」와 같은 서(序)나 기(記)·사(辭) 등 8종의 문장을 수록하였다. 권6부터 권7까지는 인물에 대한 묘표(墓表)와 묘갈문(墓碣文), 신도비명(神道碑銘), 시장(諡狀), 전(傳) 등을 수록하였고, 권9와 권10은 『역문』으로 구성되었다.
[묘소]묘는 사망 직후에는 아버지 묘가 있는 강원도 원주에 있었으나, 후에 이장해서 영평현 광석리로 옮겼다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로 다시 옮겼다.
[상훈과 추모]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