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순례(12) - 노고산성지(서강대학교 뒷산) =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한 후
조선교회는 또 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고,
그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 샤스탕신부와 앵베르주교가 입국한다.
박해시대였으므로 제한적 전교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입국후 불과 1년만에 신자가 9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방인사제 양성을 위하여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한편 정하상 등 4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들 3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때 앵베르주교의 나이는 43세,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3일 동안 이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20여일 만에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수습하여 일단 여기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후 1843년 당시 유해를 훔쳐낸 교우 중의 하나인 박베드로는
복잡한 서울근교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시는 것이 불안하여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에 3명의 성직자 시신을 다시 옮겨 모시고,
후에 그 사실을 아들 박순집에게 알려 주었다.
노고산에 4년간 매장되었다가 삼성산으로 옮겨모신 세분의 성직자 유해가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박순집의 도움으로 발굴되어
10월 21일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일부가
로마와 파리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 순교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절두산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있다.
103위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것은 27위 뿐이다.
그 밖에 전장운 요한, 우세영, 정의배마르코, 이호영베드로, 최경환의 둘째아들 최의정 등이
노고산에 가매장 되었다고 전해진다.
노고산은 천주교박해시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깊은 사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