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조스님은 증오(證悟)를 부정했던가 ?
김호성 교수의 이른바 ‘돈오의 새로운 해석’주1에 대하여(1)
글/ 박성배(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대학 비교학과 종교학 교수)
주1김교수가 최근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들이 모두 그의 이른바 새로운 돈오해석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필자의 논문도 거기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번에 필자가 참고한 김교수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① 보조의 삼문정혜에 대한 사상사적 고찰, 「한국불교학』 제14집 (한국불교학회, 1989년 12월) Pp. 405-432
② 보조의 정토수용에 대한 재고찰, 여산 류병덕박사 화갑기념 「한국철학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 종교문제 연구소, 1990년 9월) PP. 441-461
③ 보조선의 실재론적 경향과 그 극복, 「한국동서철학연구』, 한국동서철학연구회 논문집 제7호 (한국동서철학연구회, 1990년 11월) pp. 111-131
④ 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 돈오를 중심으로 . 「한국불교학』 제15집 (한국불교학회, 1990년) Pp. 423- 446
⑤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 장봉 김지견박사 갑기념사우록, 「동과 서의 사유세계」 (장봉 김지견박사 화갑기념사우록간행회, 1991년) Pp. 459-479
본지 19,20호에 김호성교수가 박성배교수의 글을 비판한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을 김지견박사의 화갑기념 논문집 에서 옮겨 실었었다. 이 글은 박교수가 김호성교수의 "돈오 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을 포 함한 일련의 돈오해석에 대한 글들을 읽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한글이다. 이 글은 지난 1991년 5월 민족사에서 "깨달음 돈오점수인 가, 돈오돈수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데 본지에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김호성교수가 발표한 보조사상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읽고 필자는 적지않게 놀랐다. 김교수의 돈오 해석은 너무도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漸修 이후에 證悟가 다시 없는 것은 解悟와 證悟가 다른 차원임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해오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의미하고…..”
(頓悟頓修的 漸修說의 問題点,金知見博士華甲記念論文集,P. 469) 주2)
“보조가 증오를 문제 삼지않고, 해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하나의 문증(文證)을 우리는 원돈성불론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위와같은 책, P. 471) "궁극적인 깨달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깨달음의 획득이라는 것도 실재가 아니라 그저 이름일 뿐 「唯名」 이다.•
(돈오점수의 새로운 解釋-----頓悟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제15 집, p. 430) 주3)
여러가지 인연으로 필자는 오랫동안 보조어록을 옆에 놓고 가까이 지내왔다. 처음에는 배우기 위해서, 다음에는 가르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비판하기 위해서, 그리고 요즈음에는 비판을 다시 비판하기 위해서 보조어록을 다시 읽고 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김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보조스님이 해오만으 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거나 또 는 그가 증오를 문제삼지 않았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이 세상에 증오를 부정하는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다. 불교인이라고 해서 다 증오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화두를 들고 참선방에서 용맹정진하는 도중에도 증오가 정말 있는 것인지 믿어지지 않아서 머리를 흔들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보조스님 자신의 사상 속에 이미 그런 요소가 있었다는 주장은 일찌기 들어 보지 못했다. 이것은 분명히 일종의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주(2) 이 논문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필자가 보조스님의 해오를 지해로 오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쓰여진 것 같 다. 김교수가 이 논문에서 제기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다 답변한 도리가 없지만 대강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끝에 있는 부록에서 간단 간단히 응답하였다.
주(3) 1990년에 발표된 이 논문의 오관(悟觀)은 그 다음 해에 발표한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교수의 오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김교수의 논문을 읽어본 사람이 면 누구나 그가 보조사상을 새롭게 해석해 보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는 것을 곧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필자의 "돈오점수적 점수설(頓悟頓修的 漸修說)이 김교수의 이른바 <돈오의 새로운 해석>과 적지 않게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4) 시대가 바뀌 고 세상이 변했으나 역사를 보는 눈도 바뀌고 따라서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 서 김교수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야 할 것이다.
주(4) 첫째 김교수는 필자가 보조스님의 해오를 지해로 오해라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으며, 둘째 그는 보조사상을 해오만으로 충분하고 증오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단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돈오돈수적인 표현들과 심한 충돌현상을 보이고 있다.
주(5) 이 글은 김교수가 동 논문의 주 45에서 밝힌 것처럼 보조전서(보조사상연구소, 1989년) p.84에 있다.
김교수는 그가 최근에 발표한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이라는 논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조가 증오를 문제삼지 않고 해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하나의 文證을 우리는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에서 살펴 볼 수 있다. “ 初心凡夫가 緣을 만나 바야흐로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了解하는 것이요, 점수로 인하여 功이 이른 연후에 깨치는 것이 아니다. 주5) (初心凡夫會錄 放了自心根本普光明智 非由漸修功至然後 悟也)” (김지견박사 화 갑기념논문집, P. 471)
이 글의 어디에 〈보조스님이 해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든가 <그가 증오를 문제삼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가? 보조스님은 여기에서 初心凡夫가 갖는 해오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김교수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고 우리들이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읽고 있는 것일까?
보조스님이 원불성불론을 저술한 목적은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논증하자는 데에 있었다. 생사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는 無明衆生인 縛地凡夫(박지범부)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견성성불할 수 있다는 선가(禪家)의 주장은 그 당시의 교가 (敎家) 적인 상식으로는 얼핏 받아 들일 수 없
받아 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조스님은 이통현의 成起的인 화엄사상을 가지고 선가의 주장을 보통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게끔 설명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원돈성불론의 독자로서 우리들이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책의 촛점이<信解〉라는 두 글자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다. 보조사상의 체계적인 전개를 꾀할 때, 三門을 나열하고 그 가운데 원돈신해문 (圓頓信解門)을 포함 시키는 것도 수행 중심의 보조사상 속에서 차지하는 <信解〉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화엄적인 신해의 핵심은 깨친이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깨친 이의 증언은 구경각(究竟覺)을 떠나서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돈성불론은 처음부터 깨친이의 증언에 근거한 증오사상에 입각하여 쓰여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의 증오라는 체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信解라는 말은 설 자리를 잃고 말기 때문이다. 스승의 증오는 인정하면서 나의 증오가능성을 부정한다면 대신심(大信心)과 대구심(大舊心)을 강조하는 수행중심의 불교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증오라는 두 글자를 빼버리면 보조스님의 원돈성불론은 알맹이 없는 빈 껍질이 되고 말것이다.
원돈성불론은 다섯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 느 것 하나도 초심범부의 해오와 불조(佛祖)가 증득한 구경의 관계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밝히는 열쇠는 초심자가 지녀야 할 <신해(信解)>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 있다. 김교수가 그의 < 해오절대 증오무용 론>의 근거로 내세우는 문장은 원돈성불론의 마지막 다섯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에 들어 있다.
그럼 먼저 그 질문부터 살펴보자.
問:今日凡夫 悟心成佛者 是究竞耶 未究竞耶 若是究竟何名初心若未究竟 何名正覺(보조전서. P.83)
질문 : 오늘날 (선종에서) 범부 증 들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님이 된다 다고 말할 때, 이 깨달음이 구경의 깨달음인가 또는 아직 구경에는 미치지 못한 것인가? 만약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이라면 어째서 초심자 의 깨달음이라 이름 붙이며, 만약 구경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것을 올바른 깨달음이라 부르는가? (필자의 意譯)
원돈성불론의 다섯 가지 질문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질문의 초점은 선종에서 말하는 초심범부들의 깨달음이 과연 어떤 것인가 를 밝히는 일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질문의 핵심은 <해오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달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말하면 초심범부들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불교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구경과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먼 거리임에 틀림없다.
교종에서는 흔히들 삼아승지겁이라 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표현되는 길고도 긴 세월을 두고 세세생생 오래 오래 닦아야만 구경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응당 제기 될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분명히 지금 우리들이 문제삼고 있는 해오와 증오의 관계를 밝히라는 요구가 들어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초심범부의 깨달음이 왜 구경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단 말이냐?> 〈초심범부의 깨달음이 만일 구경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면 어째서 깨달은 다음에도 여전히 닦아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원돈성불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전제하고 있는 의문들이다. 불교수행의 신해행증(信解行證)적인 구조를 이통현의 性起的 입장과 징관(澄觀) 연기적 입장을 번갈아 가면서 조명해 보고 때로는 원융문(圓融門)과 행보문(行布門)으로 나누어 함께 조명해보는 원돈성불론은 禪敎合一을 말할때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라고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보조스님은 어떻게 답변했는가? 김교수가 말한 것처럼 〈해오만으로 충분하다. 증오는 필요 없다. 증오는 이름뿐이다>라고
답변했는가? 만일 보조스님이 그렇게 답변했다면 보조스님은 당신이 평생 쌓아올린 학문의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요, 뿐만 아니라 당신이 몸으로 살아 온 평생의 수행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 밖엔 안될 것이다. 필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선불교가 부처님의 정각을 근거로 한 수행중심의 불교사상이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말하는 한, 그들의 증오사상은 부처님의 정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느끼기엔 보조사상에서 증오를 부정하는 것은 보조사상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무엇보다도 먼저 김교수가 인용한 문장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다. 과연 보조스님에게 김교수가 주장하듯 증오는 이름뿐 이라는 사상이 추호라도 있었던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루하지만 김교수가 인용한 글귀가 들어 있는 전후 문장 전부를 다음에 인용하고 철저하게 분석해 보자.
是知 此一乘圓頓門假者 十信心初得根本智果海 非由十千劫歷修然後 至十信滿心 明矣 論中 但明一生功終 本無十干劫之文也 但初心凡夫會緣 方了自心根本普光明智 非由漸修功至然後悟也 故 理智雖現 而多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作 色心未殄 是謂十信凡夫 為解碍處也(보조전서
P. 84, 5행부터 9행까지)
이상의 증언으로 이제 분명히 알겠노라. '이 일승원돈문(一乘圓頓門)에 의지하여 수도하는 사람은 십신심(十信心)의 처음에 根本智라는 果海를 얻는 것이요 절대로 십천겁이라는 긴 세월을 닦은 다음에 십신심이 원만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통현의) 화엄경 가운데에도 다만 사람의 한 평생안에 공부를 마친다는 것만을 밝혔을 뿐, 십천겁을 닦아야 한다는 따위는 아예 없었다. 초심범부라도 인연만 닿으면 곧장 자기의 마음이 보광명지임을 깨닫는 것이요 절대로 오랜 공력을 들인 漸修 때문에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지(理智)가 비록 나타났다 할지라도 오랜 윤회의 생활 때문에 생긴 무서운 습관은 순간순간 여전히 침범하여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색심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를 가리켜 십신의 단계에 머무른 범부들의 解碍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의 의역)
위에 인용한 문단은 네 개의 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알아보기 쉽게 다시 배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 是知 此一乘圓頓門假者 十信心初 得根本智果海 非由十千劫歷 修然後 至十心滿心 明矣
( 2) 論中 但明一生功從 本無十千劫지門也
(3) 但 初心凡夫 會綠方了自心根 本普光明智 非由漸修功至然後 悟也
(4)故 理智雖現 而多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作 色心未殄 是謂十信凡夫 為解處也
이상 네개의 문장은 그 의미상 다시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 (1) 과 (2)는 한 덩어리가 되어 삼승(三乘)의 십천겁수행 사상을 부정하면서 일승원돈문에서는 십신의 체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3)과 (4)도 또한 한 덩어리가 되어 십신의 초에 얻는 깨달음의 성격을 밝힌다.
(1) 과 (2)의 관계는 한 주장과 그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經證의 관계요, (3)과(4)의 관계는 한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한 보충설명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과 (2)도 따로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되고 (3)과(4)도 서로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상 네개의 문장 가운데서 문장 (3)만을 따로 떼어내서 자기의 <해오절대 증오무용론)의 문증으로 내세웠다. 과연 보조스님의 글을 이렇게 읽어도 되는가? 解碍 이라는 가시밭(4)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꽃이 해오(3) 라면, 가시밭을 일구지(漸修) 않고, 잘 가꾸어 진 꽃밭(증오)을 전제하지 않는 사상체계가 보조사상일 수 있을까?
앞에서도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문장-(3)은 〈해오>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자기의 마음이 곧 근본보광명지>라는 진리는 초심범부라 할지라도 인연만 닿으면 누구나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해오의 근본적인 성격이다. 이러한 해오는 점수 의 공을 들인 다음에 얻는 증오가 아니다. 해오와 증오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문장-(③)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보충문장인 문장-(4)와 함께 읽어야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문장- (4)는 말한다.• “그러므로 해오라는 경험을 통해 이지 (理智)가 비록 나타났다 할지라 도 이 경지에서는 다생의 習氣때문에 순간순간 잡념이 침범하여 인위도 조작도 여전하고 색심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십신범부의 해애(解碍)라 말하는 것이다." 해오를 말하면서 해애(解碍)를 말하지 않으면 보조사상이 아니다. 해애를 말하지 않고서는보조스님이 평생 강조한 점수의 불가피성과 필수성을 강조할 근거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해오의 오와 증오의 오가 두가지의 다른 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에는 해자가 붙고 하나에는 증자가 붙는 것은 순전히 사람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수행자의 근기가 다르고 경지가 다르기 때문에 해오의 경지에서는 해애가 있기 마련이고 해애를 극복하면 증오의 경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해오를 말하는 마당에 문장-(3) 만을
이야기하고 해애를 말하는 문장-(4)를 떼어내어 버린다면 이는 완전한 문장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행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김교수가 인용한 보조스님의 글은 김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해오만으로 충분하다고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해오만으로는 안 된다고 읽는것이 훨씬 더 보조스님의 뜻에 가
까울 것이다.
우리는 김교수의 보조해석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기에 甲이라는 사람이 있어 <사랑에 빠진 일〉과 〈아이를 낳는 일>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치자. 갑은 말하기를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원래 충만해 있는 사랑 때문에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곧장 사랑에 빠지는 것이요 결코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애써 노력한 결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런 경우, 乙이라는 사람이 있어 이를 해석하기를 "갑은 사랑에 빠진 것 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으며 아이를 낳는 것은 문제로도 삼지 않았으며 또한 부정했었다"고 말한다 면, 과연 이것이 갑을 올바로 해석한 것일까? 얼핏 들으면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이러한 해석에는 두가지의 오류가 있다. 첫째는 문제의 앞과 뒤를 모두 다루는 것이 아니라 뒷 절반은 잘라내 버리고 앞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 오류라고 말할 수 있고 둘째는 갑이 여기서 아직 아이 낳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하여 갑은 아예 아이 낳는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는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랑에 빠지는 일)과 (아이를 낳는 일)의 관계를 논하는 마당에서 뒤의 <아이를 낳는 일>은 잘라 내버리고 앞의 <사랑에 빠지는 일>만을 다루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주6)
주(6)비슷한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甲이라는 사람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면서 신랑신부는 아들 딸 낳고 잘 살라고 말했다 치자, 후일에 乙이라는 사람이 이를 해석하면서 갑은 오직 영원히 잘 살라고만 말했을 뿐, 신랑신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 갑은 죽음을 문제 삼지않았고, 죽음은 이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올바른 해석일까 ? 보조스님이 여기서 증오를 거론하지 않았다하여 증오는 이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올바른 보조 해석일까?
다시 김교수의 원돈성불론 해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김교수가 인용한 문장속에서 보조스님이 비록 초심범부의 해오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그가 증오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사랑에 빠지는 일>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여 이 를 <아이를 낳는 일>은 이름뿐이고 그런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음없다. 보조스님이 이 문장에서 증오를 본격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말이 곧 보조 스님의 사상체계 속에는 증오의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비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조스님이 해오를 말하면서 이것은 점수의 공을 들인 다음에 얻는 오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해오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도 대중적인 성격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런 해오를 증오와 혼동하면 안된다는 경계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조스님은 김교수가 주장한 것과는 반대로 원돈성불론의 도처에서 증오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너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며 일종의 비약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보조스님이 증오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었다는 증거를 하나 인용해 보자. 증거는 멀리갈 것도 없이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문장의 바로 뒤에 있다.
然, 以本自無明, 本神本真, 無功大用, 恒然之法故, 自修十信中, 方偏止觀, 任運功成, 足慧圓明, 便名發心住. 梵行品云: “初發心時, 卽得阿耨菩提者.” 當此住也. 入十住之後, 以普光明智, 恒處世間, 随根普應, 教化衆生, 而無染着, 悲智漸明, 功行漸增, 畢竟成普賢行. 因滿果終, 報得無量相好, 無量莊嚴, 如光如影, 恒遍十方, 非有非無, 非常非斷, 以大用大智, 自在用故. 如是大用自在, 不離初悟根本普光明智中恒然之行. 以智體圆故, 時亦不移, 智亦不異. 於中, 鍊治習氣, 悲智漸圓, 昇進階級非無. 然, 從初發心, 以入無時智門故, 雖至究竟位, 初無移易也. 如王寶印, 一印文成, 無前後也. (보조전서, PP.84-85)
그러나 (해오를 터득한 사람은) 자기의 무명이 본래는 참되고 신령스러워 공을 들이지 않아도 위대하게 활동하고 또한 변함없이 항상 그렇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십신의 단계에 있으면서도 방편으로 지관(止觀)을 스스로 닦아서 모르는 가운데 공이 이루어져 정혜가 뚜렷하게 밝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發心住〉라고 부르는 것이니 화엄경의 범행품에서 <처음 발심할 때 바로 최고의 지혜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이 〈발심주)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십주(十住)의 단계에 들어간 다음, (자기 자신의) 보광명지를 가지고 항상 세간에서 살면서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어 두루 원만하게 행동하고 일체중생을 교화하되 조금도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면 지혜와 자비는 더욱 빛나고 부처님다운 행동이 더욱 늘어나 마침내는 보현 보살의 행원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되는 원인이 만족스럽게 갖추어지고 부처님되는 열매가 완전하게 무르익으면 (수행자는) 부처님이 갖추는 한량없는 상호와 한량없는 장엄을 모두 다 갖추게 되고 햇빛처럼 그림자처럼 항상 시방세계 모든 곳에 있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이런 경지는) 있다거나 하는 차원을 넘어선 경지일 것이다. 이런 경지는 부처님의 큰 소원과 큰 지혜가 자유자재하게 활동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능력에서 나오는 이와 같은 자유자재도 (초심범부가) 처음 깨달았을때 문득 자기 자신속에서 발견한 根本보광명지의 변함없이 항상 그러한 활동 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근본이 되는 우주적인 광명이라는 지혜의) 몸은 정말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흐르는 세월도 이를 변하게 못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 지혜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수행자가) 자기의 묵은 습기를 다스리면 자비와 지혜는 점점 뚜렷해지는 것이니 (이로 보면) 승진과 계급이 없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애당초 처음 발심할 때부터 바로 시간을 초월한 (부처님의 근본이 되는 우주적 광명의) 지혜에 턱 들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수행자가) 비록 구경의 지위에 올라 갔다 할지라도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임금이 도장을 찍을 때 한번 눌러 전체 문장이 일시 에 완성되는 것이요, 먼저 이루어지고 뒤에 이루어지고 하는 시간적인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 다. (필자의 해설적인 번역)
한문으로 된 보조스님의 원문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필자의 번역문은 상당히 길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해설적인 번역의 단점이다. 그러나 장점도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하고 있는 의사소통이 좀 더 잘 된다는 것이다. 인용문의 요점은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다. 해오를 얻은 사람은 수행을 통하여 〈발심주>라는 일종의 증오를 얻고 마침내는 구경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인용문을 통해서 보조스님이 십신 초심과 발심주와 구경위라는 계급(階級)과 승진(昇進)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수는 그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 이라는 논문에서 필자의 이 비슷한 발언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보조저술의 그 어디에서고 박교 수가 정리하고 있듯이
〈돈오점수설••• 해오-점수 :만행겸수 - 증오>의 공식은 나오지 않는다. (김지견 박사 화갑기념논 문집, p.469)
앞의 인용문에서 분명히 본 것처럼 보조스님의 〈해오-점수-증오>라 그는 사상적인 구조를 김교수는 어떻게 간과할 수 있는지 필자는 이해 할 길이 없다. 보조스님의 이러한 계급과 승진의 개념은 입장에 따라 가지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소승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화엄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격외선 도리로 말할 수도 있다.
|
그리고 보조스님은 어느 입장에 더 가깝느냐는 이론도 얼마든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처럼 보조스님은 아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면 : 위에 본 바와 같은 물적 증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계속)
1992년 6월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