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耘谷詩史 (운곡 원천석 선생의 1144수)
Ⅰ-001) 1351년(신묘) 3월. 금강산(金剛山) 가는 길에 횡천(橫川)에 이르러
풀 보드랍고 꽃 붉어 천리가 봄이기에
채찍 내리고 말 가는 대로 성문을 나섰네.
가고 또 가다가 화전(花田) 땅에 가까워져
나무꾼 만날 적마다 친구 소식을 자주 묻네.
辛卯三月。向金剛山到橫川。
草軟花紅千里春 垂鞭信馬出城闉
行行漸近花田境 頻向樵蘇問友人
Ⅰ-002) 갈풍역(葛豊驛)을 지나면서
말을 채찍질하며 유유히 갈풍역(葛豊驛)을 지나노라니
산천 모습은 예나 이제나 같구나.
사람 드물어 고요한 강가 길에는
철쭉꽃만 층층이 물에 붉게 비치네.
過葛豊驛
策馬悠悠過葛豊 山川形勢古今同
人稀境靜江邊路 躑躅千層映水紅
Ⅰ-003) 창봉역(蒼峯驛) 길 위에서
왼쪽에는 시냇물 오른쪽엔 푸른 산
기이한 경치 다 보려니 눈길 바쁘구나.
시냇가 풀 바위틈 꽃이 서로 비추는 곳에
나그네 발길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네.
蒼峯驛路上
左邊溪水右靑山 考閱奇觀目不閒
澗草巖花相映處 行裝如入畵圖間
Ⅰ-004) 원양역(原壤驛)
말먹이는 역 마을에 해는 벌써 석양인데
옛이야기 나눌 사람 없고 까마귀만 우짖네.
주민들이여! 싫어하지 마소. 말달리는 일을
이 세상 슬픔과 기쁨이 모두 운명이라오.
原壤驛
秣馬郵亭日正晡 人無話舊有啼鳥
居民莫厭奔馳役 世上悲歡命矣夫
Ⅰ-005) 춘주(春州)
다시 와보니 성곽이 내 고향 같고
눈에 가득한 강산이 내 놀던 곳일세.
다행히 늦봄 삼월 좋은 철을 만나
꽃과 달에 의지해 이 시름을 푸네.
春州
重來城郭似吾州 滿眼江山是舊遊
幸値芳菲三月暮 好憑花月解閑愁
Ⅰ-006) 원천역(原川驛)
붉은 복숭아 두어 그루가 엉성한 울타리 위로 솟았는데
문 밖의 봄바람에 가는 버들이 늘어졌네.
옛 역 마을은 썰렁해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비둘기만 살구꽃 가지 위로 날아오르네.
原川驛
紅桃數樹出疎籬 門外東風細柳垂
古驛荒凉人語少 鶉鳩飛上杏花枝
Ⅰ-007) 학을 탄 신선
학 타고 구름에 오른 신선 흰 도포 입고
예사롭게 바다 위에서 반도(蟠桃) 먹고 취하네.
삼산(三山)에 오가면서 어찌 멀다고 하랴
흰 날개 탄 저 기상 절로 높구나.
鶴上仙
鶴上雲仙白錦袍 尋常海上醉蟠桃
三山往返何論遠 駕彼霜翎意自高
Ⅰ-008) 매화가지 끝에 걸린 달
눈썹 같은 초승달이 차가운 밤을 알려주니
매화 가지의 밝은 바탕이 더더욱 어여뻐라.
밤 고요하고 바람도 멎은 데다 사람들 흩어지자
차가운 빛 비추는 곳에 그윽한 향기만 맑구나.
梅梢月
一眉新月報寒更 偏愛梅梢素質明
夜靜風停人正散 冷光相照暗香淸
Ⅰ-009) 그림 속의 산
그림 속에 늘어선 산들이 누구의 솜씨인지
늙은 잣나무 푸른 소나무가 붓끝에 생생하네.
그 중에 암자가 있건만 스님은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선정(禪定)에 들어 남은 봄을 보내는 게지.
畵山
圖成列峀是何人 古栢蒼松筆下新
中有菴僧呼不出 却疑參定遏殘春
Ⅰ-010) 칼잎 부들
두어 줄기 나란히 늘어섰는데
푸른 칼날에 물 위 바람이 모여드네.
풀무를 빌지 않고도 잘 단련되었으니
조물주의 기이한 솜씨를 이제 알겠네.
蒲釰
數行羅列勢相同 翠刃相攢水面風
不假烘爐能鍛鍊 方知造化有奇功
Ⅰ-011) 사냥 구경
휜 새가 갑자기 후리 속으로 떨어지고
이따금 보라매가 늦바람을 잡아채네.
옥 굴레 금 안장에 푸른 창 잡고서
박달나무 곤봉에 깃 화살, 붉은 활까지 둘러멨네.
짐승들은 갈 길 막혀 어쩔 줄 모르고
씩씩한 사냥꾼들은 기세 당차구나.
노루 사슴 가득 싣고 저물 녁에 돌아오니
가을 하늘에 풍악 소리 흘러 넘치네.
觀獵
霜翎忽落四圍中 時見蒼鷹掠晩風
玉勒金鞍兼翠戟 檀槍羽箭與彤弓
豺狼遇窘趍蹌急 士卒生獰勢氣雄
滿載麕麚廻日暮 樂聲洋溢殷秋空
Ⅰ-012) 폭포
물방울 흩날리는 소리에 서늘한 기운 이어지고
뿜어내는 구슬 부서지는 가루가 바위 앞에 흩어지네.
한 줄기가 높이 걸려 천 길이나 뻗쳤으니
이게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은하수일세.
瀑布
奮沫聲中爽氣連 噴珠碎玉翠巖前
一條高揭彊千丈 眞是銀河落半天
Ⅰ-013) 베개에 달린 방울
이른 아침 베개에 달린 방울 소리에 임금께서 일어나시어
나라 걱정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여러 신하에게 보이시네.
아침 내내 그 소리 귓가에 잇달아 들려
(定應難○○○○)
枕鈴
枕鈴明主御淸晨 憂國誠心示衆臣
達旦聲連頭側畔 定應難○○○○
Ⅰ-014) 남만(南蠻)에서 들어온 종이
한원(翰苑)에 값진 종이 많기도 하건만
남만(南蠻)에서 진상한 것이 가장 으뜸일세.
창을 바르자 머리 옆에 눈빛 비치고
벽에 붙이자 눈앞에 은빛 번쩍이네.
가난한 양속(羊續)은 이불 만들어 추위 견디고
명필 우군(右軍)은 붓 잡아 먹물 적셨지.
희고도 미끄러워 티 하나 없으니
글 하는 사람 벗되어 몇 년을 지내왔던가.
蠻牋
翰苑珍奇紙最先 南蠻貢進九重天
糊窓雪色明頭側 帖壁銀光眩眼前
裁被禦寒羊續窶 揮毫洒墨右軍賢
敝然平滑無織累 長伴詞人幾許年
Ⅰ-015) 지남거(指南車)
무지개 같은 깃발들이 사면에 둘러싸고
붉은 바퀴 화려한 바퀴통이 빛나는구나.
바람 따르는 술법으론 정인(鄭人)이 부끄럽고
길 찾아 돌아갔다고 월(越)나라 사신 자랑했네.
멍에 앞의 방향은 남쪽 끝까지 가리키고
멍에 채의 모형은 북두의 기틀일세.
헌원씨(軒轅氏)가 치우(蚩尤)를 치려던 그날
이 기계를 만들어 위엄을 떨쳤네.
指南車
霧旆霓㫌四面圍 彤輪華轂有光輝
鄭人應愧奔風術 越使堪誇得路歸
輗軏正當离表極 梁輈栢法斗星機
軒轅欲伐蚩尤日 作此奇權奮虎威
Ⅰ-016) 어진 이를 불러들인 이불 (맹종 孟宗의 어머니가 열두 폭 이불을 만들어 두고
어진 이들을 불러들여 아들과 함께 공부하게 했다)
바르게 아들 가르치려는 마음이 초연해
이불 만들어 세상 인재를 널리 불러들였네.
번쩍이는 무늬가 베개마다 빛나고
훌륭한 벗들이 머리 나란히 하고 잠들었네.
따스하고도 찬란한 빛이 환하게 비치니
길쌈도 바느질도 모두 아름다워라.
그대 집안의 아름다운 이름이 만고에 전해 오니
그 당시 참예치 못한 내가 한스러워라.
招賢被(孟宗母作十二幅 招諸賢與子共學)
循循敎子意超然 作被旁招間世賢
的的奇紋連枕煥 明明善友共頭眠
氤氳燦爛光輝映 紡績裁縫巧並全
赫爾家聲傳萬古 愧予難與出當年
Ⅰ-017) 조(趙) 목감(牧監)의 외진 집에 대해 씀 (두 수)
Ⅰ-017-01)
좋은 산 많은 곳에 외진 집 마련해 두고
높은 다락에 올라 피리 부니 흥이 넘치네.
술잔 들고 꽃 아래서 취하다
약초 밭 찾아 비속에서 김 매네.
오두막 사랑은 일찍이 도원량(陶元亮)에게 본받고
학문에 힘쓰기는 동중서(董仲舒)에게 배웠네.
성긴 발 말아 올리곤 아무런 일도 없어
솔숲 행랑에 온종일 누워서 책만 본다네.
Ⅰ-017-02)
한 평생 즐거움이라곤 한가롭게 지내는 것
맑은 바람에 베개 하나로 낮잠 실컷 주무시네.
달구경하는 밤에는 다락 주렴 거둬 올리고
꽃 가꾸는 봄 동산엔 호미를 가지고 다니네.
낚시터 시냇가에 뜬 구름 흩어지고
손님 보내는 정자 앞에는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길에 가득한 푸른 이끼에 티끌 하나 없는데
추녀 끝 비낀 햇살이 거문고와 책을 비추네.
題趙牧監幽居(二首)
好山多處卜幽居 長笛高樓興有餘
每把酒樽花下醉 常尋藥圃雨中鋤
愛廬早効陶元亮 勉學曾傳董仲舒
靜捲疎簾無一事 松廊盡日臥看書
平生滋味在閑居 一枕淸風午睡餘
愛月夜樓頻捲箔 養花春圃每携鋤
釣魚臺上溪雲散 送客亭前樹影舒
滿路蒼苔塵不到 半軒斜照映琴書
Ⅰ-018) 나라에 금주령이 내렸는데 제호조(提壺鳥) 소리를 듣다
도연명(陶淵明)을 다객(茶客)이 되게 했으니
다시는 고양(高陽)의 술꾼 모일 일이 없건만,
산새는 금주령이 내린 것도 모르고
술 너머서 이따금 술잔 들라고 권하네.
國有禁酒之令聞提壺鳥
已敎元亮爲茶客 無復高陽會酒徒
山鳥不知邦國令 隔林時復勸提壺
Ⅰ-019) 이(李) 상서(尙書)가 보낸 시에 차운하다 (두 수)
Ⅰ-019-01)
그대처럼 뛰어난 재주는
옛날에도 드물고 지금도 드무니,
달 밝고 바람 맑은 글귀인데다
금 두드리고 옥 떨치는 소리일세.
책상에는 온 나라 역사가 쌓여 있고
벽에는 거문고 하나가 걸려 있네.
이미 지란지계를 맺었으니
얕고 깊은걸 따지지 마세나.
Ⅰ-019-02)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인 것을
내 이미 그대에게서 보았으니,
은혜 물결이 넓고 넓게 흐르고
덕스런 말씀이 밝고 밝게 퍼지네.
언제나 술잔으로 정성 바치고
거문고 매달아 마음을 경계하네.
숲 아래라고 어찌 선비가 없으랴
꿈속에서도 대궐 깊이 찾아간다네.
次李尙書所示詩韻(順天, 二首)
才華似吾子 罕古亦稀今
月白風淸句 金舂玉振音
堆床千國史 掛壁一張琴
已結芝蘭契 不須論淺深
君臣咸一道 我已見方今
浩浩流恩渥 明明播德音
獻誠常以酒 爲戒每懸琴
林下豈無士 夢尋銀闕深
Ⅰ-020) 1354년(갑오) 10월. 회양(淮陽) 가는 길에 횡천(橫川)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함
북쪽 오랑캐가 압록강 건너지 못하는 것은
우리 훌륭한 장수의 전략 덕분일세.
요즘 두만강 어구가 시끄럽다니
벽에 걸린 새로운 시 읽으며 두 장군이 그립네.
甲午十月。向淮陽到橫川。次板上韻
北寇難侵鴨綠東 賴吾賢帥轉籌功
近聞豆口妖烟起 讀徹新詩憶二公
Ⅰ-021) 초나흗날. 횡천(橫川)을 떠나면서 (두 수)
Ⅰ-021-01)
잠자던 까마귀 막 일어나고 먼 산이 밝아오기에
새벽 일찍 행장 차려 눈 맞으며 떠나네.
나무꾼 영감은 나그네 뜻도 모르고
머리 돌려 앞길 묻는 걸 이상스레 여기네.
Ⅰ-021-02)
구름 쌓이고 바람 찬데다 눈까지 하늘에 가득해서
산천도 알아볼 수 없게 캄캄하기만 하네.
들밭에서 굶주린 까마귀 우는 걸 보고
양양의 맹호연이 문득 생각나네.
初四日發橫川(二首)
棲鴉初起遠山明 蓐食催裝冒雪行
樵叟不知征客意 却嫌回首問前程
雲重風寒雪滿天 昏昏未可辨山川
野田行見飢烏噪 忽憶襄陽孟浩然
Ⅰ-022) 홍천(洪川) 현판 시에 차운함
하늘과 땅에 감사드리며 시 한 수를 읊으니
이곳 백성들도 풍년이 든다고 기뻐들 하네.
난간에 기대보니 마을 가까운 줄 알겠구나.
베 짜는 소리가 숲 너머에서 들려오네.
次洪川板上韻
上謝乾坤偶一吟 居民聊喜順陽陰
倚欄認得人家近 機杼聲來隔一林
Ⅰ-023) 말흘촌(末訖村)에 묵으면서
저물어 가는 산 마을에 흥겹게 찾아드니
가시나무 숲 아래 길이 구부러졌네.
말머리 앞에 이따금 주민들이 절하고는
멀리 시냇가 가리키며 저희 집이라네.
宿末訖村
暮向山村得得過 棘荊林下路橫斜
馬頭時有居民拜 遙指溪邊是我家
Ⅰ-024) 초닷새. 마노역(馬奴驛).
인간 만사에 어찌 떳떳함이 없을손가
명실(名實)이 어긋나면 세상이 미워하네.
맡은 일이란 게 파발마 따라 달리는 신세니
마노(馬奴)라는 역 이름이 제대로 어울리네.
初五日馬奴驛
人間萬事豈無恒 名實相違世所憎
役是奔馳隨馹騎 驛名端合馬奴稱
Ⅰ-025) 인제현(麟蹄縣)
강 건너 고개 넘어 향성(鄕城)에 이르고 보니
사방 둘러싸인 산 가운데 들판이 평평하네.
밭이며 논들이 물난리 겪었다더니
나무 끝에 걸린 뗏목 가지가 길가다 보이네.
사람이 드무니 달아난 집 많은 걸 알겠구나.
땅이 좁아서 훌륭한 이름 얻기 어렵네.
임금께서 보살필 마음 깊이 품으셨으니
백성들아! 다시는 걱정하지 말게나.
麟蹄縣
渡江穿嶺到鄕城 四擁山中一野平
聞道水災田畝盪 行看樹杪海査橫
人稀始覺多逋戶 地窄終難得盛名
聖主深懷完護意 吏民休復有愁情
Ⅰ-026) 초이렛날. 서화현(瑞和縣)에 묵으면서
아침에 인제현을 떠나
가고 또 가서 서화현에 이르렀네.
두어 집 모여 살며 닭도 개도 조용하고
한 마을 물과 구름이 아름답더니,
차가운 북녘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질펀한 저녁 눈이 많기도 해라.
난간에 기대어 마음 정하지 못했네.
갈까 말까. 어쩌면 좋을까.
初七日。宿瑞和縣。
朝發麟蹄縣 行行到瑞和
數家鷄犬靜 一洞水雲嘉
冽冽朔風緊 漫漫暮雪多
倚欄心未決 去住欲如何
Ⅰ-027) 초여드렛날. 길 위에서 지음
두어 간 갈대집들이
눈 내리는 산 앞에 비스듬하네.
천 그루 나무 다 베어내고
손바닥만한 밭을 갈고 김 매네.
금잔(金盞)의 바닥 같이 고요하고
옥호천(玉壺天) 같이 깊숙하구나.
양 창자같이 구불구불한 길이
바위 앞에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네.
八日道中作
數間蘆葦屋 斜傍雪山前
伐盡千株木 耕耘一片田
靜如金盞地 深似玉壺天
屈折羊腸路 巖頭斷復連
Ⅰ-028) 초아흐렛날. 장양(長陽)을 떠나 천마령(天磨嶺)에 올라서서 금강산(金剛山)을 바라보다
일만 이천 봉우리가 반은 구름에 잠겨
상서로운 기운이 이따금 천문(天門)을 감싸네.
둘 없이 귀의할 마음을 다시금 지니고
자비하신 법기 보살께 머리 숙이네.
初九日。發長陽。登天磨嶺望金剛山。
萬二千峯半入雲 時看瑞氣擁天門
更將無二歸依念 稽首慈悲法起尊
Ⅰ-029) 통포현(通浦縣)의 현판 시에 차운함 (회양 淮陽 자사 刺史 강영순 康永珣이 중수기 重修記를 지었다, 두 수)
Ⅰ-029-01)
커다란 집을 관아로 새로 중수해
그 모습 날아갈 듯 우뚝 솟았네.
문득 강공이 남긴 필적을 쳐다보니
줄줄이 취한 글씨가 빽빽하고도 성기구나.
Ⅰ-029-02)
석숭(石崇)의 부귀도 마음에 없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문장도 원치를 않네.
산 높고 물 맑은 곳을 찾아가
한가롭게 노닐며 이소(二疏)를 배우리라.
次通浦縣板上韻(淮陽刺史康永珣作重營記, 二首)
重營厦屋作官居 勢似翬飛起凡如
忽見康公留盛製 行行醉墨密還疎
富貴無心石氏居 文章不願馬相如
要尋山水淸高處 更退閒遊學二疏
Ⅰ-030) 회양(淮陽) 땅에서 동지를 쇠다
나그네길에 잠시도 걸음 멈추기 어려워
총총히 세월 가는 줄 몰랐네.
타향에서 갑자기 동지 아침을 맞고는
푸른 산 마주앉아 책력을 뒤적이네.
淮陽過冬至
客裏誠難暫駐驢 忽忽未暇計居諸
異鄕忽遇陽生旦 坐對靑山檢曆書
Ⅰ-031) 열 이튿날. 교주(交州)를 떠나 금성(金城)에 이르러
저녁 해가 가물가물 서산에 지는데
시냇가 사립문은 아직 닫지 않았네.
어디선가 나무꾼들이 달빛 받으며 돌아오는지
푸른 그늘에 피리 소리가 흩어지네.
十二日。發交州到金城。
夕陽明滅隱西山 溪岸柴門尙未關
何處樵童乘月返 笛聲搖落翠微間
Ⅰ-032) 청양(靑陽) 가는 길 위에서
산길 이십리에
다니는 사람 없어 고즈넉하네.
시냇물은 얼어붙어 소리도 끊어졌는데
구름 흩어지니 산 빛이 더욱 밝구나.
기이한 경치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상한 모습들을 말하기 어려워라.
나는 두 번째 오는 나그네라서
남 모르게 옛정이 가슴속에 느껴지네.
靑陽路上
山程二十里 寂寂無人行
凍合溪聲斷 雲收岳色明
奇觀何更說 異狀固難名
我是重遊客 潛生感舊情
Ⅰ-033) 열 나흗날. 일찍 청양(靑陽)을 떠나며
첫 닭 우는 소리에 청양을 떠나니
밝아오는 하늘빛이 푸르고도 쓸쓸하네.
잠자던 새들은 사람 피해 숲으로 들고
굶주린 사슴은 언덕 너머서 소리 지르네.
북두칠성은 은하수 북쪽으로 차츰 희미해지고
달은 이제 눈 덮인 산 서쪽에 지네.
깊은 생각이 어찌 끝나랴
시 읊다보니 골짜기 지나는 것도 몰랐네.
十四日。早發靑陽。
曉發靑陽第一鷄 欲明天色碧凄迷
避人棲鳥穿林去 爭穴飢麕隔岸啼
星斗漸稀銀漢北 月輪初入雪山西
却將何限冥搜意 不覺沈吟過一溪
Ⅰ-034) 방산(方山) 길 위에서
가는 말 잠시 멈추고 시 한 수 읊노라니
뽕나무에 연기 어린 마을이 호젓하구나.
아름답게 내리는 눈이 버들개지 같건만
사방 먹구름에 하늘이 어두워지네.
方山路上
暫停歸騎久沈吟 桑柘烟村深復深
雪意嬌多若飛絮 黑雲四合天陰陰
Ⅰ-035) 열 닷새. 방산(方山)을 떠나 양구군(楊口郡)에 이르렀는데, 아전이나 백성들의 집이 모두 기울어지거나 땅바닥에 쓰러졌으며, (온 마을이) 텅 비어 연기 나는 집이 없었다. 길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고을은 낭천군(狼川郡)에서 아울러 다스리는 곳인데, 옛부터 땅이 좁고 척박해서 백성이나 산물이 쇠잔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밭마저 권세가에게 빼앗기고 인민들을 못살게 하는 데다 세금마저 굉장히 많아,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겨울철만 되면 세금을 독촉하는 무리들이 문이 메어지도록 잇달아, 한번이라도 명을 어기면 손과 발을 높이 매달고, 심지어는 곤장까지 때려서 살과 뼈가 해어지게 하니, 살던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마을이 이같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오언시 여덟 구를 지어 마을이 쇠망해 가는 실정을 적어둔다.
十五日。發方山到楊口郡。吏民家戶欹斜倒地。寂無烟火。問諸行路。答曰。此邑乃狼川郡之兼領官也。自古地窄田磽。民物凋殘。比來權勢之家奪有其田土。擾亂其人民。租稅至多。雖容足立錐之地。無有空閑。每當冬月。收租徵斂之輩。塡門不已。一有不能則高懸手足。加之以杖。剝及肌骨。居民不堪。流移失所。故如斯也。予聞其語。作五言八句。以著衰亡之實云。
무너진 집에는 새들만 지저귀고
백성들은 달아난 데다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민폐만 더해가니
어느 날에야 즐겁게 지내랴.
땅은 모두 권세가에게 빼앗겼는데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잇달았네.
남아 있는 사람들만 더욱 가엾으니
이러한 고생이 누구의 잘못이던가.
破屋鳥相呼 民逃吏亦無
每年加弊瘼 何日得歡娛
田屬權豪宅 門連暴虐徒
孑遺殊可惜 辛苦竟何辜
Ⅰ-036) 춘주(春州) 신(辛) 대학(大學)의 교외 별장에 씀
함부로 나가지 않는 것도 세상 길 험난해서일세.
벼슬 떠나 돌아오니 그 뜻이 한가롭구나.
구름과 바람 달빛 속에 살아가면서
영욕과 명리에 마음이 없네.
시냇가 바윗돌에 고요히 앉아 낚시질하고
맑은 날에는 집 뒤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네.
이 가운데 어느 게 들사람 흥취에 맞나 묻는다면
청려장 짚고 얼근히 취해 석양에 돌아오는 거라네.
寄題春州辛大學郊居
不曾浪出世途艱 歸去來兮適意閑
寄跡雲烟風月裏 無心榮辱利名間
釣魚靜坐溪邊石 採藥晴登屋上山
若問箇中多野興 杖藜乘醉夕陽還
Ⅰ-037) 1355년(을미) 7월 어느 날. 춘성(春城)의 두 서생 김생(金生)과 안생(安生)이 공부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여러 서생들이 시를 지어 송별하는데 추(秋)자 운을 얻음.
춘성의 두 서생은 오래된 지음(知音)인데
소양강 강 마을에서 날 찾아왔었지.
소양은 내가 옛날에 놀던 곳
버들 둑 꽃 핀 언덕에 풍류가 많았지.
지난 일 연기처럼 세월이 변했지만
푸르른 산수에는 가을 구름 떠돌겠지.
수업이 한창인데 두 사람 떠난다니
돌아가려는 그 뜻을 붙잡을 길이 없네.
그대들 보내는 내 마음도 아득하니
이별주 한 잔을 그대들은 사양치 말게.
소양강 물이 잘 있는지 안부나 전해주어
그리운 내 시름을 달래나 주게.
乙未秋七月有日。春城金․安二生罷課還鄕。諸生作詩送別。得秋字。
春城二子舊知音 來自昭陽江水頭
佋陽乃我舊游地 柳堤花塢多風流
往事如烟歲月變 山水蒼茫雲正秋
講席將闌二子去 浩然歸志難挽留
送君此行意無極 別酒一盃君勿休
佋陽江水好在否 說我相思千斛愁
Ⅰ-038) 형님께서 보내 주신 시에 차운함 (이때 선군 先君께서 억울하게 못난 자들에게 비방을 얻은 일이 있었다, 네 수)
Ⅰ-038-01)
남 따라 비방하는 자들 역시 남에게 속히는 짓이니
불 붙여 하늘을 살라봐야 어리석은 짓일세.
이 부끄러움을 멀리할 좋은 꾀가 떠오르지 않아
밤 깊도록 우두커니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네.
Ⅰ-038-02)
저 푸른 하늘만은 속이지 못할 테니
그들의 사악한 망발 미친 짓으로 여길 밖에.
네 몸 살피라는 훈계를 전해 받았으니
우리들에게 세 번 다시 생각하라고 알려 주시는 걸세.
Ⅰ-038-03)
영무(寗武)보다도 어리석으니 꾸짖은들 무엇하랴.
백옥(伯玉)처럼 그릇됨을 알아야 그 뜻이 더욱 흘륭하네.
주나라 때에 입 꿰맨 이야기를 배웠더라면
한퇴지(韓退之)도 조주(潮州)에 좌천되지는 않았겠지.
Ⅰ-038-04)
걱정 잊고 노닐며 남을 탓하지 않으니
얼근히 취해 저녁바람까지 사랑스럽네.
오호(五湖)의 풍월을 항상 염원했으니
묻노라! 가는 길에 몇 고을이나 거치던가.
次家兄所示詩韻(時先君謬被庸夫甚謗, 四首)
從他謗亦任他欺 把火燒天却是癡
遠恥良謀難自辨 夜深危坐萬般思
早識蒼天不可欺 任他邪侫發狂癡
省躬譏誡言堪託 爲報吾儕三復思
愚添寗虎有何尤 伯玉知非意轉遒
若學周家緘口事 退之應免貶潮州
散慮逍遙事不尤 醉來偏愛晩風遒
五湖烟月平生念 且問歸程隔幾州
Ⅰ-039) 이른 봄 비
한 차례 비가 봄빛을 재촉하며
부슬부슬 두루 뿌리네.
살구꽃은 이제 막 예쁜 모습 드러내고
원추리도 벌써 움이 트려고 하네.
마디가 있어 뜸하다 다시 쏟아지고
가까운 곳 먼 곳까지 골고루 나눠 주네.
풍년의 징조를 먼저 전하니
기쁜 기운이 집집마다 흡족하구나.
早春雨
一雨催春色 濛濛遍灑多
杏花將吐艶 萱草欲生芽
有節疎還密 無私邇及遐
豊祥先有應 喜氣洽家家
Ⅰ-040) 활(弓)
초승달이 하늘에 걸린 모습으로
여섯 가지 재료를 그 가운데 갖추었네.
공들여 만든 위력 삼균(三鈞)이나 되니
적군의 간담이 한 화살에 없어지네.
변경을 쳐들어오는 도적이나 엿보고
편지 전하는 기러기는 쏘지 마시게.
술잔에 뜬 뱀 그림자 벽에 없으니
내 이제 활을 잡고서 오랑캐 진압하려네.
弓
勢似初三月掛空 六材俱備在其中
工成恩最三鈞美 賊膽渾無一箭功
挾矢但窺侵境盜 鳴弦莫向寄書鴻
已無壁上杯蛇影 我欲提撕制遠戎
Ⅰ-041) 말(斗)
옛 성인이 그 당시 모양 따서 만들기를
속은 비고 밖은 튼튼한데다 네 귀가 평평하게 했지.
곡식을 헤아리는 그 공로가 가장 크고
공사(公私)를 재는 쓰임새도 가볍지 않아,
크고 작은 일에 중용을 얻어 속임수 없고
예나 지금이나 표준이 분명하네.
이 제도 무엇을 상징했던가
위로는 하늘이고 아래로는 땅의 모양이라네.
斗
古聖當年像物成 中虛外實四隅平
槩量米粟功惟重 較定公私用不輕
大小得中欺詐絶 古今無別準繩明
要知制度從何處 上表宸居下地形
Ⅰ-042) 솥
주(周) 나라가 흥하고 한(漢) 나라가 번성했던 태평성대에
옮겨가는 신기한 자취를 그 누가 알았으랴.
분음(汾陰)에서 나왔으니 성인의 덕을 나타내고
사수(泗水)에서 구했으니 번창할 때를 열었네.
팔진(八珍)를 갖춰 놓으면 사람을 늙지 않게 할 수 있고
구전(九轉)을 고아 만든다면 세상도 옮길 수 없네.
매실과 소금 같은 신하가 많아진다면
이제부터 나라의 터전이 튼튼해지리.
鼎
周興漢盛太平時 遷徙奇蹤未可知
出自汾陰彰聖德 求於泗水啓昌期
八珍羞備人難老 九轉丹成世不移
調得鹽梅臣庶衆 定應從此固邦基
Ⅰ-043) 물가의 정자(水亭)
물가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너무나 흥겨워
천금이라도 얻은 듯 자리가 서늘하구나.
짧은 모자 가벼운 소매에 상쾌한 기운 통하고
아름다운 꽃 그윽한 풀이 맑은 향내를 뿜어내네.
검푸른 나무그늘에서 아지랑이를 맞아드니
일렁이는 물결이 햇빛을 살찌우네.
눈 앞의 값진 경치를 그리고 싶은데
동강난 무지개와 비낀 햇살 사이로 부슬비 내리네.
水亭
臨流靜坐興偏長 快得千金日榻凉
短帽輕衫通爽氣 好花幽草噀淸香
蔥蔥樹影迎嵐翠 漾漾波流沃日光
欲畵望中無價景 斷虹斜照雨微茫
Ⅰ-044) 내가 젊었을 때부터 선비로 이름낼 뜻을 둔지가 오래 되었는데, 이제 관찰사께서 내 이름을 군적(軍籍)에 기록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살아오면서 학문에만 힘쓰고
마음으로는 항상 요로에 나가길 바랐는데,
재주와 학문이 기둥에 이름 쓴 나그네에 미치지 못해
내 이름이 훈련받는 병사 명부로 옮겨졌구나.
행단의 풍월과는 인연이 끊어지고
변방의 연기 티끌이 꿈에 자주 나타나네.
옛부터 출세하거나 숨어사는 것도 다 분수 있으니
천명대로 살아가리라고 말할 뿐일세.
余自少有志於儒名者久矣。今按部公幷錄於軍籍。作詩以自寬。
生來只學兎如新 方寸常希據要津
才業未同題柱客 姓名移屬鍊兵人
杏壇風月魂空斷 楡塞烟塵夢已頻
自古行藏皆有分 但將天命語諸隣
Ⅰ-045) 중국(中原)에 가는 춘주(春州) 소경(少卿) 박윤진(朴允珍)을 배웅하다.
옛부터 중원(中原)은 경치가 좋았지.
오늘 맘껏 노닐러 가는 그대가 부럽네.
배에 달빛 가득한 금휴포(琴休浦)에서
술 싣고 조용히 밤새도록 놀아보세.
送春州朴少卿遊中原(允珍兩遊字)
自古中原形勝地 羨君今日飽淸遊
滿船明月琴休浦 載酒從容盡夜遊
Ⅰ-046)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Ⅰ-046-01)
온 땅에 덮인 풍진이 지난해보다 더하니
사방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우리나라 터전이 반석처럼 견고하다면
하늘이 이 백성을 편히 잠자게 하련만.
Ⅰ-046-02)
사람들이 모두들 새해 온 것을 모르니
일에 취해 애쓰는 것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세상 따라 살아가는 게 남자의 일이라면
편히 잠들 곳 없을까봐 걱정하지 않으련만.
卽事(紅亂始起)
匝地風塵勝去年 四方何處不騷然
我邦若固盤安業 天使斯民奠枕眠
人皆不覺到新年 醉事劬勞幾悵然
與世推移男子事 莫憂無地可安眠
Ⅰ-047) 회포를 써서 조(趙) 목감(牧監)에게 부침
뭇 사람들의 시끄러운 비방을 피하려
띠 띠고 단정히 앉아 위태한 때를 넘기네.
자유(子由)의 거짓 행동은 우리 편이 아니고
안회(顔回)의 어리석음이 나의 스승일세.
세상을 따라가는 것도 깊은 뜻 있어
남의 잘잘못은 생각하지도 않네.
누구와 더불어 마음속 일을 말하랴
부질없이 푸른 산 마주앉아 옛 친구를 생각하네.
書懷寄趙牧監
爲避紛然衆所譏 束身端坐過危時
由之行詐非吾儻 回也如愚是我師
與世升沈深有意 較人長短獨無思
憑誰共話心中事 空對靑山憶舊知
Ⅰ-048) 버들개지
늘어진 가지 흔들리는 그림자가 언제나 사랑스럽건만
바람 따라 흩날리는 솜꽃은 가엾기만 하구나.
우리 집의 가고 머무는 것은 원래 정함이 없어
동서남북 어딘들 막힘이 없네.
柳絮
長愛柔條弄影微 飜嗟亂絮逐風飛
自家行止元無定 南北東西竟不違
Ⅰ-049) 초여름에 교외로 나가다
뽕나무 오디가 익고 보리도 거두는데
모내기는 여태껏 끝내지 못했네.
부드러운 바람 맑은 날씨 서쪽 들길에서
흐르는 물에 멱감는 새들이 이따금 뵈네.
首夏郊行
椹熟桑林麥已秋 揷秧猶未遍原頭
軟風晴日西郊路 時見幽禽浴淸流
Ⅰ-050) 1360년(경자) 정월 19일 딸아이를 낳았다. 예쁘고 영리했는데, 금년 5월 17일 병으로 죽어 시를 지어 곡한다.
번뇌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이고
씨앗은 은애로부터 생겨나는 것일세.
불쌍히 여기는 내 마음이야 누그러질 수 있지만
슬피 우는 어미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참된 이치라면
함께 죽으려 하는 것은 망녕된 말일세.
숱하게 남은 슬픔을 다 말할 곳이 없어
아직도 눈물 흘리며 지나간 자취를 기억하네.
庚子正月十九日生女。頎然且異。至今年五月十七日病亡。筆以哭之。
曾知煩惱本無根 種子生從恩愛門
惻惻我懷猶可緩 哀哀母哭不堪聞
須臾便滅是眞語 欲與俱亡爲妄言
萬種餘傷無處說 涕零尙記剜舟痕
Ⅰ-051) 조(趙) 목감(牧監)을 곡(哭)함 (두 수)
Ⅰ-051-01)
젊은 시절의 재기는 온 고을에 으뜸이었고
늙은 시절의 청빈은 숨어사는 이보다 뛰어났네.
명리 때문에 허망함을 따르지 않고
선교(禪敎)에 의지해 진리 닦기를 즐겼네.
슬프게도 북망산에 나비 되어 날아가니
아마도 서방 세계에 머물며 주인이 되시겠지.
눈물 흘리며 무덤 풀을 내 어찌 보랴
뒷날 찾아와서도 다시 수건 적시리.
Ⅰ-051-02)
병 속의 새가 갑자기 날아가니
석화(石火)가 빛이 없고 풀잎의 이슬도 말랐네.
모였다 흩어지고 났다 죽는 것이 원래 정함 없으니
부귀와 공명이 다 부질없네.
산도 슬픈 빛을 머금어 소나무 난간에 이어지고
시냇물 목 메인 소리가 대 사립을 둘러 흐르네.
황천길 막지 못함을 일찍이 알았건만
우리에게 끼친 정으로 눈물이 옷을 적시네.
哭趙牧監(二首)
少年才氣冠鄕隣 晩節淸貧押隱倫
不以利名常逐妄 且憑禪敎好修眞
悲凉北枕飛蝴蝶 留滯西方作主人
淚葉豈應看宿草 尋蹤異日更沾巾
縠穿甁雀忽驚飛 石火無光草露晞
聚散生亡元不定 功名富貴盡爲非
山舍慘色連松檻 溪送愁聲遶竹扉
早識九原難可作 情鍾我輩共沾衣
Ⅰ-052) 스스로 읊음
전생의 습기(習氣)가 아직 가시지 않아
세상 깔보는 마음이 갈수록 더하네.
이 잡던 이야기들을 땐 쓰라렸고
소먹이며 부르던 노래 생각할 땐 서글펐지.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연명(陶淵明)이 그립고
애써 공 이루던 복파장군(伏波將軍)이 우습구나.
시비를 잊으려면 역시 술이 있어야 해
구름과 달 더불어 맘껏 취하고 싶네.
自詠
生生習氣未消磨 傲世心懷日更多
聞道悲辛捫蝨話 追思轗軻飯牛歌
歸來適意希元亮 勤苦成功笑伏波
攻破是非猶有酒 欲將雲月醉無何
Ⅰ-053) 남쪽 계곡 버드나무 아래 시원한 곳을 찾아 자고천(鷓鴣天)을 지으니, 계모임의 장공(張公)과 이공(李公)이 생각났다 (두 수)
Ⅰ-053-01)
양쪽 언덕 늘어진 버들 그림자 바라보다
온종일 서늘함 따라 돌아갈 줄 모르네.
한가한 몸 즐거운 곳이 바로 지금이니
명리(名利)의 땅에 살던 것이 그릇됨을 알겠네.
Ⅰ-053-02)
아지랑이 막 걷히고 해도 기울었는데
지팡이에 기대어 이따금 한숨 쉬네.
옛 친구들 솔숲의 흙이 되었으니
세상과 어긋난 나를 그 누가 알아 주랴.
南谿柳下追凉。作鷓鴣天。憶契內張趙二公(二首)。
夾岸垂楊弄影微 追凉盡日却忘歸
身閒樂土知今是 跡寄名場悟昨非
初收暮靄轉斜暉 倚筇時復一悽悕
故人化作松間土 誰識吾行與世違
Ⅰ-054) 풀벌레
명아주 평상에 벌레 우니 벌써 가을인가.
초당에 밤기운이 청명하구나.
찍찍 울음소리 홀연히 들려오니
당당하게 흘러가는 세월만 탄식하네.
오동나무 우물가에 벌레소리 들리자
창가 외로운 베개에 수심 깊어지네.
푸른 등불 서재에 비바람 뿌리자
벌레 소리에 시인은 다락에 기대었네.
草虫
虫弔藜床序已秋 草堂良夜氣淸幽
忽聞【口則․口則】聲音急 却歎堂堂歲月流
聲緊孤梧金井畔 愁深隻枕玉窓頭
一軒風雨靑燈火 爲爾騷人獨倚樓
Ⅰ-055) 칠석(七夕)
견우 직녀 오래 못 만났다고 아쉬워 말게나.
이날의 약속만은 만고에 끝이 없네.
달나라 궁전 구름 누각에서 만나
금 북과 옥 가마를 함께 멈추었네.
구슬 계단 밤 빛은 즐거움을 바치는데
은하수 새벽빛은 이별을 재촉하니,
실 꺼내어 바늘 꿴 사람이 그 얼마던가
맑은 길 쳐다보며 다시금 기뻐하네.
七夕
莫嫌牛女久相違 萬古無窮此日期
月殿雲樓相會處 金梭玉輦共停時
瑤階夜色供歡樂 銀漢晨光促別離
披縷貫針人幾許 俾看淸路更軒眉
Ⅰ-056) 앞의 운(韻)으로 시 두 수를 지어 송(宋) 목백(牧伯)에게 올렸다.
Ⅰ-056-01)
아! 내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아
출처(出處)와 희비를 예측할 수가 없네.
갑자기 병들어 몇 달을 지내고 보니
찬 물에 자라같이 오그라들었네.
온갖 쓰라림을 말할 수 없고
만 가지 걱정이 잠시도 떠나질 않네.
어제도 세금 내라 독촉받으니
가난한 살림살이에 눈썹 펼 틈도 없네.
Ⅰ-056-02)
스스로 저지른 잘못은 피할 길도 없으니
화복(禍福)이 기약 없음을 이제 알겠네.
뜻밖의 재앙이 갈수록 많아지고
경치 좋은 시절도 다 놓쳤구나.
본래 마음이 게으르고 옹졸한데
이제는 두 다리마저 비틀거리니,
아침 저녁으로 은혜만 바라는 구구한 마음
마치 못난 여인이 억지 눈썹 그리는 것 같네.
用前韻作二詩呈宋牧伯
却嗟身事與心違 出處悲歡豈預期
忽作病夫經數月 有如寒鼈縮多時
百般辛苦難能釋 萬種憂愁不暫離
昨日差人催納布 何當白屋可伸眉
自孼由來不可違 方知禍福本無期
偶逢災厄尤多日 辜負風烟正好時
從此片心成懶拙 至今雙脚尙支離
望恩朝暮區區意 還似無鹽强畵眉
Ⅰ-057) 송(宋) 목백(牧伯)의 화답을 받고 다시 차운함 (세 수)
Ⅰ-057-01)
인자한 성품에 청백하게 다스려
재상의 남다른 은총을 지금 받으시네.
다니는 곳마다 바지가 다섯이라 노래 부르니
칼 세 자루 꿈을 비로소 믿게 되었네.
덕에 감화된 사람마다 아름답다 일컬으니
은혜를 입고서야 그 누가 떠돌 걱정을 하랴.
선정한다는 소리가 궁전까지 들리면
겹눈동자와 아름다운 눈썹에 기쁨이 넘치시리.
Ⅰ-057-02)
참되게 살아가자니 세상과 맞지를 않아
창해에 가서 안기생(安期生)을 만나고 싶네.
젊은 시절 행세가 이러하니
장성한들 공명을 언제 이루려나.
일에 부딪치면 백주(柏舟)편을 생각하고
정을 느끼면 서리(黍離)편만 읊는다네.
저 의지할 곳 없는 무리들을 보게나
눈썹에 뜸을 떠도 병 고치기는 어렵구나.
Ⅰ-057-03)
어린 시절의 소원을 장성해서 못 이뤘으니
궁달(窮達)은 원래부터 바라지도 않았네.
기이한 재주 없으니 쓰일 곳도 없지만
마음 바르면 때를 만나기 마련일세.
흰 구름 흐르는 물에 숨어 지내니
밝은 달 맑은 바람도 함께 떠나질 않네.
온갖 생각을 누구와 말할 수 있나
한 잔 술에 잠시라도 눈썹을 펴볼까 하네.
牧伯見和。復次韻(三首)。
慈愛淸平共莫違 黃扉異寵已當期
行看五袴歌騰處 始信三刀夢破時
感德人皆稱成美 飽恩誰復歎流離
政聲傳聞承明殿 喜溢重瞳八彩眉
悃愊無華與世違 欲尋倉海訪安期
早年行止由斯道 壯歲功名在那時
觸事每思舟汎汎 含情空詠黍離離
請看無告無扶類 刺舌猶難兎灸眉
幼年心願壯年違 窮達由來未敢期
才本無奇無用處 心如有道有逢時
白雲流水還堪隱 皎月淸風共不離
百爾所思誰與說 且憑盃酒暫開眉
Ⅰ-058) 도경선사(道境禪師)의 시에 차운함
스님께서는 조계(曹溪)의 원로신데
법희식(法喜食) 자시길 좋아하시네.
고칠 것도 닦을 것도 없어
선인(善因)을 일찍이 심으셨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바른 생각 잠시도 쉬지를 않고,
단정히 앉아 진여(眞如)를 깨달으니
육식(六識)이 모두 비어버렸네.
아! 나는 무엇 하느라고
이 이치를 익히지 못했던가.
괴로움 바다에 돌아다니면서
지리한 생활만 계속해 왔지.
언제나 눈과 귀에 따라
소리와 빛에만 얽매였었지.
스님께 한 말씀 얻기 바라노니
실상(實相)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리까.
次道境詩韻(禪師之鑑)
師本曹溪翁 好湌法喜食
無訂亦無修 善因曾所植
於四威儀中 正念不消息
端坐悟眞如 虛閑是六識
差予欲何爲 此理未純熟
役役苦河中 瀾漫且狼藉
常隨眼耳根 局於聲與色
願師垂一言 實相從何得
Ⅰ-059) 신(辛) 사주(社主)를 곡(哭)함
인생이 허깨비 같음을 일찍이 알아
마침내 조사(祖師)의 선(禪)을 닦아 얻었으니,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은 빙호(氷壺)의 달이고
세상을 피해 한가로운 몸은 설악(雪岳)의 하늘일세.
절 아래 눈과 바람 일어나고
유루(庾樓) 앞에 거문고 꿈이 끊어졌으니,
지난 일 생각해봐야 이미 묵은 자취라
흰 구름 푸른 산도 함께 슬퍼하네.
哭辛社主
早識浮生夢幻緣 晩年參得祖師禪
出塵心淨氷壺月 遯世身閑雪岳天
玉麈風輕祇樹下 瑤琴夢斷庾樓前
回頭往事成陳跡 雲白山靑共慘然
Ⅰ-060) 유곡(幽谷) 굉(宏) 스님이 상원사(上院寺) 주사굴(朱砂窟) 서쪽 봉우리에 암자를 새로 짓고 이름을 무주암(無住庵)이라고 했는데, 그 높고 뛰어난 경치를 아름답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 굉(宏) 스님에게 올렸다.
새 암자 지어 놓고 도 닦는 대사께서
오가는 흰 구름 내려보며 다니네.
눈은 위 아래 머나먼 허공과 통하고
마음은 삼천 세계가 활짝 트였네.
바람 고요한 찻마루엔 연기만 자욱하고
밤 깊은 선탑엔 달빛 길이 밝구나.
스님 말없이 앉아 무주(無住)를 관하시니
무주의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시나.
幽谷宏師於上院寺朱砂窟之西峰。新搆一菴。名之曰無住。嘉其高絶。作一首呈于宏上人。
締搆新菴養道情 俯看來往白雲行
眼通上下虛空遠 心豁三千世界平
風定茶軒烟自鎖 夜深禪榻月長明
上人燕坐觀無住 無住心從甚處生
Ⅰ-061) 12월 17일. 동년(同年) 정도전(鄭道傳)이 찾아와서 지어준 시에 차운함
◎ 정도전
동년인 원군이 원주에 숨어사니
다니는 길 험한데다 산골도 깊구나.
멀리서 온 나그네 말에서 내리자
겨울 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반갑게 한번 웃으니 그윽한 뜻이 있어
술잔 앞에서 다시 마음을 털어놓았네.
나는 높이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었으니
이 세상 영욕을 이미 잊었네.
十二月十七日。同年鄭道傳到此贈予詩云。
同年元君在原州 行路不平山谷深
客子遠來已下馬 朔風蕭蕭西日沈
一笑欣然有幽意 尊酒亦復論是心
我唱高歌君且舞 榮辱自我已難諶
次韻以謝
그대와 함께 급제한 지가 몇 해 되었나
사귄 도리가 얕은지 깊은지 따질 것도 없게 되었네.
제각기 일에 끌려 두 곳에 있지만
사람 만나면 상세히 안부 물었지.
오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마시고 웃으며 마음을 털어놓세나.
그대여! 돌아갈 길을 재촉 마시게
우리의 이 뜻을 자중하시게나.
與君同榜如隔晨 交道不復論淺深
各以事牽在兩地 逢人細問浮與沈
今朝邂逅天攸使 開尊且喜細論心
公乎公乎莫催轡 此意自重誠之諶
Ⅰ-062)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는 송(宋) 목백(牧伯)을 전송함 (두 수)
Ⅰ-062-01)
어지러운 시절에 우리 백성을 잘 다스리어
밥 짓는 연기가 여염집에 오르며 은혜와 사랑이 새로웠네.
임기도 끝나기 전에 은총 받고 불려 가시니
수레채 잡고 울부짖는 백성이 많기도 하네.
Ⅰ-062-02)
정치란 본래 백성을 잘 기르는 것
공의 맑은 덕에 날이 갈수록 감화가 새로워라.
오늘 아침 깃발 돌려 서울로 돌아가신다니
축수하는 이 심정 남보다 갑절일세.
奉送宋牧伯政滿如京(二首)
時當世亂撫吾民 烟火閭閻惠愛新
不待瓜期承寵喚 攀轅號泣幾家人
政㝡由來在養民 感公淸德日惟新
今朝返旆朝天路 祝壽深情倍衆人
Ⅰ-063) 동년(同年) 김비(金費)가 보내 준 시에 차운함
Ⅰ-063-01)
숨어사는데 뜻을 둔 지가 이제 겨우 십 년
우물 속에서 하늘 보는 게 늘 부끄러웠지.
오늘 아침 홀연히 어진 동방(同榜)을 만나니
분수 밖의 하늘과 땅이 정말 넓기도 하구나.
Ⅰ-063-02)
바위 골짜기에 살아온 지가 몇 해 되었나
초파리를 없애며 독 속의 하늘을 쳐다보았네.
한 잔 술 밖에는 영욕이 없으니
분수 따라 한 평생을 즐겁게 살리라.
次同年金費所贈詩韻
有意遐窮僅十年 常嫌眼界井觀天
今朝忽遇賢同榜 分外乾坤政豁然
巖谷棲遲度幾年 醯鷄烹割瓮中天
一尊酒外無榮辱 隨分生涯獨快然
Ⅰ-064) 동년(同年) 안중온(安仲溫)이 보내준 시에 차운함 (세 수)
Ⅰ-064-01)
재주가 뛰어난데다 글 솜씨까지 민첩해
일찍이 임금 앞에서 칙서를 받들었지.
원컨대 공거(公車)를 향해 한 번 천거해 주기를
산림에도 세상 구제할 선비가 또한 있으니.
Ⅰ-064-02)
지팡이 짚고 그윽한 곳 찾다가 언덕에 오르니
눈 앞의 봄빛이 모두 새 단장일세.
꽃다운 봄빛도 날이 많지 않으니
석양 멈춘 곳이 어딘지 물어보네.
Ⅰ-064-03)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 낚시를 거두게 했고
촉나라 임금도 공명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았지.
가시나무 숲이라고 지란(芝蘭)의 향기가 없을손가.
산길이 싫다 말고 내 집을 찾아주소.
次安同年仲溫見贈詩韻(三首)
尤能吏幹捷文材 曾是君門受勅廻
願向公車煩一薦 山林亦有濟時才
策杖尋幽陟彼崗 眼前春色摠新粧
十分芳意無多子 且問何方駐夕陽
周后一收姜叟釣 蜀君三顧孔明廬
棘林豈欠芝蘭馥 莫厭山程訪我居
Ⅰ-065) 동년(同年) 안중온(安仲溫)의 희우시(喜雨詩)에 차운함
가뭄을 씻어 멀리까지 뿌리고
바람에 섞여 가는 먼지를 적시다가,
주룩주룩 내리며 기름진 젖줄 흡족케 하니
구름 같은 벼이삭이 산뜻해졌네.
솔길엔 푸른 이끼가 돋아나고
연못엔 하얀 마름이 자라는데,
그 누가 알아주랴! 우산 쓴 나그네를
무너진 집안에서 청빈을 즐기네.
次安同年喜雨詩
濯旱連遙塞 和風浥細塵
淋漓膏乳洽 薈鬱稼雲新
松逕生蒼蘚 荷塘長白蘋
誰知持傘客 破屋樂淸貧
Ⅰ-066) 병중에 회포를 적음
문 닫고 늘 앉아서 무슨 일을 했던가
들판의 스님같이 한적하게 지내네.
게을러서 언제나 세속의 웃음거리 되고
병 잦아 친구 드문 게 한스럽긴 해도,
샘과 바위 즐기니 그 밖엔 마음에 없어
한 바구니 밥 한 바가지 국에 즐거움을 부쳤네.
베개 맡에 시원한 바람 불고 난간에 달이 밝아
임금 덕을 노래하며 누워서 책을 읽네.
病中書懷
杜門長坐事何如 閒寂還同野衲居
懶重每逢時俗笑 病多深恨故人疎
分甘泉石心無外 樂寄簞瓢興有餘
一枕淸風一軒月 詠歌君德臥看書
Ⅰ-067) 1361년(신축) 11월 홍두적(紅頭賊)이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나라에서 임시로 도읍을 옮기고자 대가(大駕)가 남행하여 복주(福州)에 머무셨다. 명하여 평장사(平章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 평장사(平章事)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찬성사(贊成事) 이방실(李芳實)․동지밀직(同知密直) 민환(閔渙)․밀직부사(密直副使) 김림(金琳) 등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여러 장수와 양계(兩界) 육도(六道)의 마병(馬兵)․보병(步兵) 십만을 거느리게 하여. 1362년(임인) 정월 18일 바로 도성에 들어가 사면으로 협공하여 적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왕업(王業)을 다시 일으키게 했다. 이에 절구 두 수를 지어 태평성대를 축하한다.
Ⅰ-067-01)
북쪽 오랑캐의 간교한 꾀가 크지가 않아
우리 나라 융성한 왕업이 다시금 무궁해졌네.
피비린내 나던 칼과 창, 티끌까지 고요해지니
사해 백성 편안한 것이 한날의 공일세.
Ⅰ-067-02)
넘친 충성 뛰어난 의기 몇몇 영웅들이
도성에 진격하여 그 계책 끝없었네.
완고한 도적 쓸어 없애고 평정한 날에
칼과 창 거두어 놓고 논공행상이 한창일세.
辛丑十一月。紅頭賊兵。突入王京。國家播遷。大駕南巡。留住福州。命平章事鄭世雲爲摠兵官。平章事安祐爲上元帥。政堂文學金得培․贊成事李芳實․同知密直閔渙․密直副使金琳等爲副元帥。摠領諸將帥兩界六道之馬步十萬。於壬寅正月十八日。直至京城。四面合攻。掃蕩賊塵。使我三韓。復興王業。作二絶以賀太平云。
北寇奸謀未足雄 東韓盛業更無窮
腥膻釰戟風塵靜 四海民安一日功
輸忠奮義幾英雄 振旅京師計莫窮
掃盡頑兇平盪日 各收㫌戟竟論功
Ⅰ-068) 영친연(榮親宴)을 사례하여 김(金) 목백(牧伯)에게 올린 시와 짧은 서문(인 引)
【짧은 서문】외람되게 연방(蓮榜)에 올라서 분수에 넘치는 새 은혜를 받고 특별히 당음(棠陰)에 나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은총을 받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황송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우리 김목백께선) 위로 현명하신 임금을 받드시니 세간에 드문 보필(輔弼)이라, 일찍이 삼도(三刀)의 꿈을 꾸고 항상 “다섯 바지의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아전들의 횡포를 밝게 분별하시니 백성들이 소송하지 않았으며, 먼저 청백리의 도를 세우시니 아전들이 청렴한 위풍을 두려워했습니다. 송아지를 남긴 시묘(時苗)가 아니시면, 고기를 달아맨 양속(羊續)이십니다. 천고에 어깨를 견줄 자가 없으니, 천하에 그 누가 감히 흉내를 내겠습니까. 행차 머무는 곳에 천리 강산이 다 기뻐하고, 여염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 저녁 짓는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은혜가 가장 컸으니, 임금의 은총이 이미 재상의 문에 가까웠습니다.
백성을 걱정하느라 잔치도 소홀히 하니 반나절도 마음 터놓고 즐길 기회가 없었는데, 저를 위해 예의를 갖추어 일세의 성대한 잔치를 마련하셨습니다. 천금의 화려한 집을 열어 저의 늙은 어버이를 맞으시고, 하루의 비단 자리를 베풀어 높은 자리를 허용하시니, 옥잔과 구름항아리가 나열하고 흰 수염 흰 머리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온갖 놀이가 쉬지 않으니 모두 신선의 훌륭한 유희이고, 여덟 가지 소리가 차례로 울리니 모두 궁(宮)․우(羽)의 맑은 소리였습니다. 노래 소리 요란하고, 술잔도 낭자하게 벌어졌습니다. 즐거운 일과 좋은 날은 옛부터 자랑거리였으니, 지금의 이 성대한 잔치를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 학문이 몹시 황당하고 성품이 본래 우둔했는데, 이제 동곽(東郭)에서 피리 불던 재주로써 진번(陳蕃)이 맞이하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이 모두 만나기 어려운 승사(勝事)이니, 손이 춤추고 발이 덩실거리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깨끗한 즐거움이 어찌 끝나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즐거움이 세상의 즐거움과 다르고 보니 제 몸이 꿈속에 들어가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열 말의 좋은 술이 천리에 맛있고, 붉게 단장한 석 줄의 기생들이 일시에 돌아듭니다. 맘껏 취하는 때에 광간(狂簡)하다고 손가락질 당한들, 은혜와 영광은 끝이 없으니 이 감격이 어찌 다하겠습니까. 가득한 술잔을 사양할 수 없어, 지성으로 즐거워할 뿐입니다. 함께 일어나 은혜에 절하니 밤이 깊어지고, 은덕을 갚으려니 이 한 몸 다해도 가볍습니다. 지금의 이 정성으로 채찍이라도 잡고 싶으니, 뼈가루가 부서진들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마음을 어찌 잊겠습니까. 지극히 포용해 주시는 마음에 몹시 감격하여 웃음거리를 올릴 뿐입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Ⅰ-068-01)
하늘이 백성 위해 우리 님을 보내셨으니
북원(北原) 고을이 이제 이미 순박하게 바뀌었네.
거문고 타면서 누운 누각엔 구름이 북쪽에 솟아나고
고삐 잡고 돌아오는 관아엔 아침 해가 늦어지네.
산 속 고을에 어진 이 수고한다고 부끄러워 마오
나라의 은총 다가온 줄 이제야 알겠네.
목마른 백성 모두들 은혜 물결을 누려
마음껏 헤엄치며 기쁨이 그지없네.
Ⅰ-068-02)
구름 맑고 연기 짙어져 봄이 한창인데
아가위나무 그늘 아래 화려한 잔치 베푸셨네.
주고받는 노래 한 곡조에 사람은 그림 같고
오가는 술 천 잔에 하루가 한 해 같네.
자리마다 축하 인사에 모두들 경사스러우니
이 가운데 광채가 가장 어여쁘네.
한 문중의 영광을 어찌 다 말하랴
태산 같은 은혜를 짊어지니 두 어깨가 무겁네.
謝榮親宴詩幷引上金牧伯
竊以濫登蓮榜。優承分外之新恩。特詣棠陰。別荷世間之異寵。不勝【懽+薨】忭。無任兢惶。恭惟云云。上達英精。間生碩輔。會破三刀之夢。常聞五袴之辭。明分雀鼠之庭中。民無獄訟。先置薤水之門外。吏畏威淸。若非留犢之時苗。應是懸魚之羊續。千古來無可肩者。一天下誰敢齒哉。軒盖所臨。千里江山皆有喜。閭閻再活。萬家烟火共相望。恩最重白屋之中。寵已迫黃扉之上。憂民疎宴樂。雖無半日之開懷。遇我備禮義。以爲一時之勝事。闢千金之華搆。邀我老親。開一日之錦筵。許容高座。玉斝雲罍兮羅列。霜鬚鶴髮兮欣歡。百戱亦未休。盡是神仙之善戱。八音無相奪。皆爲宮羽之淸音。歌吹喧闐。盃槃狼藉。肆筵設席今玆盛。樂事良辰古所誇。伏念學甚荒唐性多癡鈍。以東郭吹竽之技。受陳蕃下榻而迎。目所見耳所聞。皆是難逢勝事。手之舞足之蹈。不勝何限淸歡。樂旣異於塵間。身恐入於夢裏。十斗香醪千里味。三行紅粉一時廻。當淋浪酩酊之辰。爭指點狂簡之態。恩榮無極。感荷何窮。雖滿酌而肯辭。以至誠而樂與。共起拜恩侵夜出。欲將酬德殺身輕。在此霞誠。奚啻執鞭之願。從當粉骨。敢忘結草之心。多感包容之至哉。聊呈撫掌之資耳。詩曰。
天爲吾民遣我公 北原今已變淳風
彈琴臥閣雲生北 按轡廻衙日晏東
莫愧賢勞山郡裏 方知寵迫廟堂中
涸鱗共得恩波闊 游泳洋洋喜不窮
雲淡烟濃二月天 召棠陰下設華筵
霖鈴一曲人如畵 霞醞千杯日似年
座上獻酬俱可慶 箇中先彩最堪憐
一門榮遇夫何說 荷擔恩山重兩肩
Ⅰ-069) 조카 식(湜)이 보내 온 시에 차운함
백성 대하기를 어찌 함부로 하랴
백성은 바로 하늘이 내신 백성이란다.
그들이 바라는 것 주어야 하고
괴로움 많게 해서는 안된단다.
은혜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사또라도) 길가는 사람처럼 보게 된단다.
너도 이제는 부모가 되었으니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거라.
마음 흩어진 지도 이젠 오래 되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하며 다스리거라.
공도(公道)에 합당한 인사라야
덕망이 남보다 뛰어나는 법.
이 마음으로 임금과 백성 대해야
내 할 일 하는 것으로 알거라.
우리 형님 이 세상 떠나신 지도
이제 벌써 열아홉번째 봄이니,
두어 자 높이 외로운 무덤에서
기쁜 마음이 저절로 넘치시겠지.
어두운 가운데서도 염원 있으니
어찌 천금 보배에다 비하랴.
나 이제 다행히도 여기 머물며
너의 경륜만을 빌고 있단다.
십 년 동안 운곡 골짜기에서
몸소 밭 갈며 자진(子眞)을 본받았지.
즐거움은 옛날 그대로인데
가난은 지난해보다 점점 더해지네.
네가 보내온 시 그 뜻이 두터워
읽고 나자 술에라도 취한 듯해라.
때때로 너를 좇는 꿈이
멀리 동쪽 바닷가를 둘러오지만,
두 곳이 너무나 떨어져 있어
소식마저 자주 듣기 어려웠지.
부디 소식이라도 자주 보내거라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
次姪湜所寄詩韻
臨民豈易忽 民是天生民
要須與所欲 毋使多艱辛
苟不施惠愛 視如行路人
爾今爲父母 保之如子身
散也今久矣 宜赦以循循
公道合人事 德望出于倫
以此致君民 是爲逢我辰
吾兄棄斯世 于今十九春
孤墳高數尺 喜氣應自新
冥冥間所念 奚啻千金珍
我今幸留滯 祝爾掌經綸
十年耘谷口 躬耕效子眞
樂猶昔時樂 貧甚去年貧
來詩意轉厚 讀之如飮醇
時時逐渠夢 遠繞東溟濱
所嗟兩懸隔 音問難頻頻
連連送書信 家有倚門親
Ⅰ-070) 김매는 늙은이의 노래
Ⅰ-070-01)
김 매는 이 늙은이 한 평생 가여워라.
겉치레 꾸미려하는 마음 없었지.
때때로 얼근히 취해 시나 읊으면
십리의 산과 시내가 동정하는 빛이었지.
Ⅰ-070-02)
김 매는 늙은이는 부질없이 나가지 않아
마음이 세상과 멀어졌네.
순박했던 옛 시대를 생각하면서
혼자 앉아서 허공에다 돌돌(咄咄) 두 글자만 쓰네.
Ⅰ-070-03)
김 매는 늙은이가 늙어가면서 병이 많아
귀밑머리도 드문드문 세어졌지만,
산을 마주하는 그 신세 유유해서
흰 구름 밝은 달을 한가롭게 즐기네.
Ⅰ-070-04)
김 매는 늙은이가 형 한 분을 잃어
황천에 가셨으니 다시는 만날 수 없네.
외로운 신세 그 누구가 어려움을 구해주랴
사마우(司馬牛)의 걱정보다도 더 많은데.
Ⅰ-070-05)
김 매는 늙은이가 올해 농사라곤
논밭 한 이랑도 갈지 않았네.
원래 내 배는 텅 비어 있어
채울 물건도 없고 보전할 물건도 없네.
Ⅰ-070-06)
김 매는 늙은이가 김 매지 않아
가라지만 어지럽게 우거져 있네.
하늘이 인물을 경계하지 않아
세속 교화시킬 현량이 아주 없구나.
Ⅰ-070-07)
김 매는 늙은이의 생애가 썰렁해
해마다 네 벽이 텅 비어 있네.
봄바람 가을달만 지니고 있어
모자람도 남음도 없네.
Ⅰ-070-08)
김 매는 늙은이가 하남(河南)에 처소를 얻었건만
게으르고 못난 탓에 시속에 맞지 않네.
세상을 깔보며 스스로 만족하니
세상이 비웃고 남들이 속인들 어찌하랴.
Ⅰ-070-09)
김 매는 늙은이가 권세와 이익을 생각지 않아
홀로 즐겁다가 불평하기도 하네.
본성에 따라 천성을 즐기는 일이야 어찌 하랴만
가진 것은 한 바구니 밥과 한 바가지 국뿐이라네.
Ⅰ-070-10)
김 매는 늙은이가 붓(管城子)을 잡기만 하면
미친 듯이 맘껏 흥겨움을 내쏟으니,
관성자(管城子) 또한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시루에 먼지 앉는 것 이상하다네.
耘老吟
耘老平生可憐 心無綵繪之飾
有時半醉高吟 十里溪山動色
耘老不曾浪出 心神與世疎闊
追思上古淳風 獨坐書空咄咄
耘老衰遲病多 蕭蕭兩鬢霜髮
對山身世悠悠 閑弄白雲明月
耘老曾離一兄 九原未可重作
孑然誰與急難 司馬牛憂不博
耘老今年農業 不耕一畝水田
由來我腹空洞 無物可容可全
耘老不耘禾穀 亂苗稂莠荒蕪
皇天不儆人物 化俗賢良絶無
耘老生涯廓落 年年四壁空虛
只有春風秋月 ○○無欠無余
耘老河南得所 疎慵不入于時
傲傲休休愚甚 任從世笑人欺
耘老全忘勢利 陶陶且或囂囂
導性樂天何敢 嗟嗟只有簞瓢
耘老聊將管城 發生十分狂興
管城且笑且言 怪爾一生塵甑
Ⅰ-071) 귀뚜라미를 읊다 (자고천 鷓鴣天)
바람 고요한 빈 뜰에 이슬방울이 맑은데
창 너머 우는 소리가 슬픔을 자아내네.
먼 길 떠난 나그네가 듣고는 시름 더하고
가난한 아낙네들은 어둠 속에 깜짝 놀라네.
초가을 밤이 벌써 삼경이나 되었는데
베틀 북 울리면서 먼동 트기를 기다리네.
슬프구나! 네 신세가 내 신세 같건만
이따금 하소연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네.
促織詞(鷓鴣天)
風靜空階玉露淸 隔窓啾喞動哀情
征夫一聽應添恨 寒婦初聞忽暗驚
秋七月夜三更○ 弄鳴機杼到天明
却嗟爾事如吾事 往往呌闐無助聲
Ⅰ-072) 갈매기를 읊음
봄날의 강과 바다는 끝이 없으니
물결 따라 하루 종일 마음대로 오가네.
정해진 곳이 없으니 뜬 구름 같고
언제나 깨끗하니 정신이 흰 눈 같네.
마음이 얽매이지 않아 티끌 세상을 떠났고
비와 연기에 젖어 사니 고기잡이와 친구 되었네.
나 또한 평생 욕심을 잊고 사니
전날의 약속 저버리지 말고 날마다 친하세나.
白鷗詞
江海無涯浩蕩春 隨波逐浪自由身
浮雲態度元無定 白雪精神固未馴
心絶累格離塵○ 淡烟疎雨伴漁人
平生我亦忘機者 莫負前盟日相親
【위 열 일곱 수는 원고에 빠진 것인데 연월일(年月日)의 순서에 따라 여기에 붙여 둠】
(右十七首 逸於原稿 而以年月第次 係之于此)
Ⅰ-073) 1364년(갑진) 정월 17일. 눈이 내리다
하늘빛이 흐리다가 쌀쌀해지니
눈꽃이 땅에 덮이고 언 구름이 드리웠네.
매화꽃이 버들개지 같아 아름다운 시구를 찾고
하얀 띠가 은 술잔으로 보여 옛일을 생각하네.
모습을 지으며 옆으로 흩날리자 원근이 이어지고
허공을 비추며 모여들어 동서에 가득하니,
모르겠구나! 오늘 밤 산음(山陰) 달빛에
흥겨워 섬계(剡谿)를 찾을 사람이 그 누구일지.
正月十七日雪(甲辰)
天色陰沈成慘淡 雪華鋪地凍雲低
梅花柳絮探佳句 縞帶銀盃見舊題
作態斜飛連遠近 映空先集滿東西
不知今夜山陰月 乘興何人訪剡谿
Ⅰ-074) 도경산재(道境山齋)에 놀다
멀리 산 암자를 향해 푸른 골짜기를 찾아드니
푸른 바위 뿌리에 물 부딪치는 소리 맑구나.
그윽한 산의 봄이 좋아 나그네 발길 멈추고
낡은 절에 해가 기울자 스님이 문을 닫네.
골짜기 가득 연기와 노을이 자욱하게 잠기고
추녀 끝 소나무 잣나무에 푸른 구름이 감도니,
물외(物外)의 경치가 모두 기이해
잠시 티끌 세상 시끄러움을 잊고 서 있네.
遊道境山齋
遠訪山菴尋碧洞 水聲激激蒼巖根
幽山春好客留屐 古寺日斜僧閉門
滿洞烟霞紫氣鏁 遶軒松栢蒼雲翻
異跡奇觀皆物外 適來忘却塵間喧
Ⅰ-075) 안(安) 사호(司戶) 집에 몇몇 사람이 모여 술잔을 나누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이을생(李乙生) 선생에게 보임
그대가 압록강을 건너간 뒤부터
술잔 들고 그대 생각 아니한 적이 없었지.
끊어진 줄 이어주자 거문고 소리 새로워지고
바퀴 비녀장을 뽑아 던지자 우물에 물결 솟아나네.
단지 속에 망우물이 떨어지지 않으니
자리에 어찌 해어화가 없을손가.
내가 노래 시작하자 그대는 춤을 추니
좋은 날 이 즐거움을 자랑할 만도 하이.
安司戶家。五六人成小酌。作一首示李先生(乙生)。
一從君去鴨江涯 擧酒思君日益多
已續斷絃琴有韻 宜投脫轄井生波
尊中不盡忘憂物 座上何稀解語花
我欲放歌君起舞 良辰樂事可堪誇
Ⅰ-076)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장실(丈室)에 보냄
뽕나무에 오디 많이 여물고
밤꽃도 이미 늘어졌네.
둥지의 제비새끼들은 모두 젖 떨어지고
박(箔)에 오른 누에들은 실 얽기를 시작하네.
물상(物像)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빠른 세월을 문득 탄식하니,
인간 세상에 마치 붙어사는 것 같아
우리네 인생이 참으로 슬프구나.
언제나 서글픔 느끼면서
사방으로 허덕이며 돌아다니니,
경치 좋은 곳에는 발 디디기 어렵건만
숨어 살다보니 눈썹 찌프릴 일이 없네.
티끌세상 얽매임을 벗어나지도 못하고서
부질없이 물과 구름을 찾아다니네.
가고 싶어도 아무런 계책이 없고
다시 놀러 가려다 기회를 놓쳤네.
하는 일 없이 긴 날을 보내고
좋은 시절을 어느새 지내버렸네.
춤추는 나비는 내 옹졸함을 비웃고
우는 매미는 내 어리석음을 호소하니,
모두들 천 섬이나 되는 한을 지녀
이 한 편의 시를 지었네.
선상(禪床) 앞에 받들어 올리노니
이 마음 모름지기 헤아려 주소서.
寄道境大禪翁丈室
桑林椹多熟 栗樹花已垂
巢鷰盡離乳 箔蠶初引絲
行看物像變 却嘆光陰移
人世恰如寄 吾生良可悲
悠悠長慘感 役役幾奔馳
勝地難容足 幽居欠蹙眉
未除塵土累 空懷水雲奇
欲往終無計 重遊早失期
徒然消永日 倏忽過良時
舞蝶欺予拙 鳴蜩訴我癡
相將千斛恨 題作一篇詩
奉寄禪床下 此心須細知
Ⅰ-077)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화운시를 받고 다시 차운함
도경(道境)이 바로 신선의 경지(仙境)이니
솔 그늘이 뜨락에 가득하네.
추녀 끝에는 차 연기 자욱하고
약초 밭에는 비가 부슬거리네.
한 골짜기가 넓고도 그윽하니
황홀한 삼청(三淸) 세계가 옮겨온 듯해,
길이 멀어서 티끌 세상과 끊어졌고
숲이 가까워 들새들만 슬피 우네.
다만 편히 쉬면 될 뿐이지
무엇하러 부질없이 돌아다니랴.
물 맑으니 귀 씻을 만하고
산 좋으니 눈썹 펼 게 기뻐라.
달은 구름과 함께 고요하고
사람도 지경 따라 기이하구나.
반드시 뒷날의 만남을 의논하세나
지난 약속을 이미 어겼으니.
가는 곳마다 경치 아름다우니
때 놓치지 말고 즐겁게 노세.
슬프구나! 내 본성이 성기고도 게을러
부질없이 어리석은 짓만 배웠으니,
아무런 계책 없음을 깊이 탄식하며
옹졸한 시나 바치는 게 부끄러워라.
앞으로는 명승지를 찾아가리다
한가한 맛을 옛날 일찍이 알았으니.
禪翁見和。復次韻。
道境眞仙境 松陰滿院垂
茶軒烟羃羃 藥圃雨絲絲
一洞寬平豁 三淸怳惚移
路遙塵俗絶 林近野禽悲
但可安棲息 何爲浪走馳
水淸思洗耳 山好喜伸眉
月與雲俱靜 人兼境㝡奇
必須謀後會 已過在前期
美景多隨處 歡遊要及時
嗟余本疎懶 徒自學愚癡
深歎無良策 空慙獻拙詩
擬將尋勝地 閑味昔曾知
Ⅰ-078) 늦가을 (두 수)
Ⅰ-078-01)
가을 산 짙은 빛이 언제나 좋아
참모습 그림으로 그리고 싶네.
곱게 물든 낙엽이 다 흩날려도
시냇가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네.
Ⅰ-078-02)
단풍 물든 고개는 붉은 노을에 잠기고
갈대꽃 물가엔 흰 눈이 덮였는데,
한 떨기 국화가 적막하게 꽃을 피워
동쪽 울타리에만 가을이 다하지 않았네.
秋晩(二首)
長愛秋山色更濃 擬將圖畵寫眞容
霜林落葉渾飛盡 依舊靑靑澗底松
深鎖赤霞楓葉嶺 平鋪白雪荻花洲
菊叢寂寞金葩嫩 唯有東籬獨未秋
Ⅰ-079) 마전사(麻田寺)에 가서
티끌 세상 바삐 달리다 견딜 수 없어
암자를 향하느라 솔길 찾아들었네.
창가 달빛에 나그네 혼은 깨어나고
골짜기 노을에 학의 꿈은 한창일세.
고개 구름 벗삼아 맑은 흥취 더하고
뜨락 잣나무 마주앉아 지난 이야기 물어보네.
골짜기와 산 따라다니며 얻은 시구를
노을 향해 유쾌히 두세번 읽어보네.
遊麻田寺
塵土驅馳也不堪 特尋松磴訪僧菴
客魂已醒涵窓月 鶴夢初酣滿洞嵐
好伴嶺雲添逸興 更將庭柏問眞談
適來偶得谿山句 快向烟霞讀再三
Ⅰ-080) 동년(同年) 허중원(許仲遠)이 시를 보내왔으므로 글자를 나누어서 운을 삼아 28수를 짓다
Ⅰ-080-01) 개똥벌레(螢)
그대가 서쪽 봉황성을 향할 적에
정처 없는 발길이 물위의 마름 같았지.
새벽에 강가 정자를 건널 때 선뜻한 물은 아주 파랬고
저녁에 촌집에 들리면 먼 산이 푸르게 보였지.
우뚝 높은 절개는 가을 소나무 같고
빛나는 이름은 여름 난초의 향내 같았지.
서울에서 글 읽던 자리를 멀리 생각해보니
흰 눈이 환히 비춰 반딧불은 필요 없었지.
許同年仲遠以詩見寄。分字爲韻二十八首。
螢字
記君西向鳳凰城 蹤跡猶如水上萍
曉過江亭寒水碧 晩依村舍遠山靑
挺然高節秋松茂 赫爾英名夏蕙馨
遙想京都讀書榻 雪華輝映不須螢
Ⅰ-080-02) 창(窓)
오랫동안 연촉(蓮燭) 없이 난강(蘭釭)을 마주했으니
여관방 창가에서 생각 끝이 없었겠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본래 일정치 않으니
짝 잃은 외기러기를 슬퍼하지 마시게.
窓字
久違蓮燭對蘭釭 無限思量在旅窓
聚散由來難自定 莫嗟孤鴈未成雙
Ⅰ-080-03) 괴로움(苦)
세상 밖에서 부침(浮沈)해보니
산 빛만 고금이 없네.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이 다르니
진실하고 허망함을 어찌 헤아리랴.
그대의 시 한 수를 읽어보니
말이 왜 그리 괴로운지,
그대의 뜻은 천금보다 무겁지만
아이들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다네.
원래는 피차(彼此)의 구분이 없으니
먼지 뒤를 따르는 개미 떼와 같다네.
겉모습만 보고 믿지는 말게나
행실을 취할 바 없으면 어찌하겠나.
내 인생은 풍류를 끊었으니
혼자 다니며 언제나 처량하건만,
술잔 들고 푸른 산을 대하면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도 춘다네.
苦
浮沉世間外 山色無今古
人心異朝昏 實虛那足數
看君一首詩 詞語何更苦
君意重千金 兒心輕一羽
元無彼此分 後塵如蟻聚
且莫信毛皮 所行無可取
我生絶風流 獨行常踽踽
把酒對靑山 陶然歌且舞
Ⅰ-080-04) 업(業, 금련 金蓮을 대신해 지음)
그대 보내고 그대 생각 아니한 날이 없어
맑은 눈물 줄줄이 붉은 뺨을 적셨지.
두 곳을 강과 산이 가로막았건만
밤마다 꿈과 혼이 산 넘고 물 건넜네.
아이와 집을 떠난 지가 몇 해나 되었던가
수심의 성은 몇 겹으로 둘러싸여,
난간에 기대어 머리 긁고 바라보며
근년에 겪은 악업(惡業)들을 탄식하네.
그대는 이제 오릉랑(五陵郞)이 되었으니
꽃과 달, 누대에 마음 흐뭇하겠지만,
새 사랑 생겼다고 옛 맹세 잊지 마시게
믿음을 어긴 사람은 후회한다네.
명심코 지난 허물을 돌아보시게
사람은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하는 법이라네.
바라건대 힘써서 용문(龍門)에 오르시어
만리 구름 길에 영화를 떨치시게.
業(代金蓮)
送君無日不懷君 淸淚涓涓滿紅頰
雖然兩地隔江山 夜夜夢魂能跋涉
兒家離別知幾何 此別愁城最重疊
倚欄搔首獨含情 却嘆年來多惡業
知君去作五陵郞 花月樓臺心自愜
休將新愛負前盟 背信人難可追榻
銘心歷歷省愆尤 人自不能見其睫
但願努力到龍門 萬里雲衢穩跨躡
Ⅰ-080-05) 일(一)
선생은 남달리 뛰어나서
본래 영인(郢人)의 자질을 지녔었지.
장차 가진 포부를 펼치려고
같이 다니며 시필(詩筆)을 휘둘렀지.
마음이 같으니 도(道)도 같아서
금슬(琴瑟)처럼 잘 어울리고,
서로 마음속이 맑아서
티 하나 없이 정일(精一) 했었지.
어찌 제향(帝鄕)을 향해 가면서
내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셨나.
한스러운 건 다른 마음이 아니라
떠나는 날도 몰랐기 때문일세.
떠나간 길을 바라보니
강물은 멀고 푸른 산이 싸였네.
천금 같은 몸을 잘 지녀
평안하게 만사가 잘 이뤄지길 비네.
서울에서 옛날 알던 친구들
몇 사람이나 그곳에 있는지,
그대에게 내 안부를 묻거든
그럭저럭 지낸다고 일러 주시게.
一
先生有魁奇 本自懷郢質
將欲轉吾介 相從弄詩筆
心同道亦同 好合如鼓瑟
湛然方寸間 無雜而精一
胡爲向帝鄕 與我無告出
所恨非他情 不覺發行日
回頭歸去程 水遠靑山密
願保千金軀 平安加萬吉
京洛舊知音 幾人在華秩
憑君問吾行 報道無得失
Ⅰ-080-06) 추위(寒)
새로 보내준 시 한 수 말이 씁쓸하니
그대의 마음 편치 않은 걸 알겠네.
내게 그 사연 말씀하셨기에
남 몰래 흐르는 눈물 씻어내었네.
寒
新詩一首語酸寒 看了知君意未安
卽與儂家說其故 諱人輕灑淚闌干
Ⅰ-080-07) 삶(生)
인간사를 자세히 생각해보니
처량하게 온갖 느낌이 나네.
떠오르고 잠기는 것이 날에 따라 다르고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구름이 가는 것 같네.
생전의 즐거움만 취하면 그만이지
세상의 영화가 어찌 필요하랴.
이 생각을 말할 곳 없어
시로 써서 참마음을 부치네.
生
細算人間事 悽然百感生
升沈隨日在 聚散似雲行
但取生前樂 何須世上榮
此懷無處說 聊寫寄眞情
Ⅰ-080-08) 굽힘(枉)
사내가 뜻을 얻어 출세하면
덕음(德音)에 순량(循良)한다고 모두 존경하건만,
옛부터 현인 달사가 몇 사람이던가
명예가 뒤따름이 그림자와 메아리 같네.
이제 허군을 보니 뛰어난 재주를 지녀
남다른 언행이 크고도 넓은데다,
두텁게 익힌 시례(詩禮)에 여유가 있어
반드시 바른 사람을 쓰고 굽은 사람은 버리네.
온갖 행실이 맑은 위의를 지녔으니
그대가 우리 향당(鄕黨)에 속한 것 기쁘기만 해라.
아아! 나는 학문이 가벼운데다
마음 밭이 거칠어 잡초가 묵었으니,
문에 나가도 길 없어 어디를 가랴
때에 따라 부질없이 물상(物像)을 살펴보네.
밤 깊도록 오똑 앉아 그대 있는 곳 생각하니
때마침 밝은 달이 내 책상을 비추네.
枉
男兒得意行於時 德音循良多敬仰
古來賢達知幾人 美譽相隨如影響
今看許子負雄才 言行離倫坦蕩蕩
敦詩厚禮有餘裕 必須擧直措諸枉
百爾所行盡淸儀 喜君已附吾鄕黨
嗟予小少學輕狂 心地茫然鏁榛莽
出門無路何所之 空自隨時觀物像
夜深危坐憶君居 時有皎月照書幌
Ⅰ-080-09) 점(占)
치악산(雉嶽山)은 높이 솟고
사천수(沙川水)는 철철 흘러,
물소리 언제나 그치지 않고
산 빛도 볼수록 싫지 않아라.
그 가운데 초가집 마주 서 있어
고즈넉하게 사립문이 언덕 위에 있네.
하루 아침에 주인이 궁궐로 뵈러 갔으니
산도 말없이 무언가 생각하네.
시내와 산들이 금의환향 원하리니
그대여! 계원(桂苑)의 봄빛을 일찍 차지하시게나.
占
雉嶽山形嵯峨 沙川水光瀲(氵+艶)
水聲長流不停 山色相看無厭
中有茅廬相對開 寂寂柴門臨古塹
一旦主人朝玉墀 山自無言如有念
溪山忙待衣錦還 願吾子 桂苑春光須早占
Ⅰ-080-10) 원(原)
헤어진 뒤에 그리워한 것이 몇 번이던가
꿈속의 혼이 밤마다 중원(中原)에 찾아가네.
곳곳마다 즐겁게 지낼 곳이야 있지만
만난다고 다 이야기할 사람 못되는 게 한스러워라.
그대는 날랜 솜씨 닦을 테니 부럽군.
오랫동안 산골에만 갇힌 내가 가여워라.
그대 생각하며 장안 가는 길을 돌아보니
비낀 해만 뉘엿뉘엿 먼 마을을 비추네.
原
別後思量發幾番 夢魂相覓到中原
雖逢處處堪行樂 却恨人人未與言
羨子方知修月斧 嗟余久載望天盆
爲君回首長安道 斜日溟濛照遠村
Ⅰ-080-11) 산(山)
도(道)가 곧으니 세상 길에 용납되기 어려워
한 평생 발자취를 물과 산에 맡겼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높이 읊고 크게 취하며
외로운 구름 한가롭지 못함을 웃어 보네.
山
道直難容世路間 一生蹤跡寄湖山
高吟大醉乾坤裏 笑看孤雲尙未閑
Ⅰ-080-12) 박(薄, 연아 演雅)
맑은 하늘에 새가 날고
깊은 못엔 고기가 뛰노네.
꾀꼬리는 높은 나무로 옮겨서 울고
매가 가을 허공을 주름잡네.
기러기는 천리길에 편지 전하고
학은 깊은 못에 소리 들리네.
거미는 그물 치느라 처마에 달려 있고
누에는 실 빼느라 잠박에 있네.
닭은 홰 위에서 때를 알리고
까치는 담장 머리에서 기쁨을 알리네.
반딧불도 어둠을 없앨 수 있고
개구리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참새는 지저귀며 숲에 모였네.
살을 무는 모기는 주둥이가 길고
이슬 마시는 매미는 날개가 얇구나.
오르내리며 우는 것은 어린 비둘기이고
꿈틀꿈틀 가는 것은 자벌레일세.
창고 뚫는 쥐는 이가 강한데
수레 막는 버마제비는 팔이 약하네.
말똥벌레도 덩어리를 굴릴 수 있고
나비는 꽃술만 찾아 다니네.
제호조(提壺鳥)는 맛있는 술을 찾고
포곡조(布穀鳥)는 농사 짓기를 재촉하네.
귀뚜라미는 구슬프게 우는데
할미새는 어찌 멀리 떨어져 있나.
붉은 봉황은 높은 언덕에 울고
저녁 까마귀는 깊은 골짜기를 찾네.
나는 꼬리 끄는 거북이를 배웠지만
그대는 바다를 주름잡는 악어와 같네.
고래 물결 사이에도 흰 갈매기는 있으니
그 한가로운 신세에 내 몸 붙이고 싶네.
薄(演雅)
淸漢鳥飛行 深淵魚戱躍
鶯遷喬木啼 鷹向秋空掠
傳書千里鴻 聲聞九皐鶴
結網蛛掛簷 引絲蠶在箔
知時竿上鷄 報喜墻頭鵲
螢光可除冥 蛙樂堪爲樂
戾天有飛鳶 棲林多噪雀
噬膚蚊觜長 飮露蟬翼薄
低昻鳴乳鳩 屈伸行尺蠖
偸倉鼠齒剛 拒轍螗臂弱
蛣蜣能轉丸 蛺蝶尋花萼
提壺呼美酒 布穀催東作
蟋蟀苦呻吟 鷦鷯何落魄
丹鳳戾高崗 暮鴉投遠壑
我學曳尾龜 君如橫海鰐
唯有鯨波間 白鷗閑可託
Ⅰ-080-13) 행동(行)
그대여! 이 세상의 부귀와 현우(賢愚)를 보시게
출세와 은둔, 기쁨과 슬픔이 다 숙명일세.
대체로 악한 자는 그 재앙을 받고
선을 쌓은 자는 후손까지 복을 받는다네.
큰 집을 지니고 복록이 가득해도
그 본성을 끝까지 지니기 어려워라.
어질구나! 안회(顔回)는 어떤 사람이기에
누항(陋巷)에 살며 도시락 표주박에도 덕행이 온전했던가.
세상 사람들 다투어 권력가에게 미끼를 먹여
이익과 명예를 얻느라 서로 날뛰는데,
그 누가 알아주랴! 십 년 동안 등불 아래 가난한 선비가
홀로 경서(經書)를 붙들고 공맹(孔孟)을 바라는 줄이야.
다락에 기대어 때로 행장(行藏)을 탄식하다가
고요히 산과 물을 바라보며 길게 시를 읊네.
行
君看貧富與賢愚 出處悲歡皆宿命
大都爲惡受其殃 積善應當有餘慶
渠渠厦屋食千鍾 畢竟誠難保其性
賢哉回也是何人 陋巷簞瓢全德行
世人爭欲餌權豪 逐利求名競馳騁
誰得知十年燈下 一寒生 獨把經書希孔孟
倚樓時復嘆行藏 靜對湖山發長詠
Ⅰ-080-14) 이름(名, 완랑귀 阮郞歸)
한 구석 산 고을에 물과 구름이 맑아
시냇물 소리가 옛 성을 에워싸네.
흐르는 물에 먼지에 찌든 갓끈을 씻으니
이름 모를 산새들이 서로들 맞아주네.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는 허군을 그리워하다
훌륭한 이름 전해 듣고 기뻐하네.
부디 잘 있다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노니
숲과 샘물도 변함없이 기다린다오.
名(阮郞歸)
一區山郡水雲淸 溪聲遶古城
臨流可以濯塵纓 幽禽相送迎
○思許子久留京 喜聞傳美名
願君安好速廻程 林泉無變更
Ⅰ-080-15) 부(不)
인생 백년은 시비(是非)의 한 판이니
내 마음 알아주는 그대가 친구일세.
흰 망아지는 내 마당에서 풀을 뜯어먹고
노란 꾀꼬리는 높은 버드나무에서 지저귀었지.
그 당시 즐겁던 일들이 이젠 다시 없으니
그 옛날 벗들이 지금은 어디 있나.
그윽한 회포를 누구에게 털어 놓으랴
자리 한 구석에 수염 허연 늙은이만 남아 있으니.
不
人生百歲是非間 知我何心是朋友
皎皎白駒食我場 喈喈黃鳥囀高柳
當年樂事更能無 往日交遊今在不
且問幽懷誰與開 座隅唯有蒼髥叟
Ⅰ-080-16) 식(識)
발걸음에 맡겨 작은 시냇가에 이르니
숲과 언덕이 저녁 빛으로 보이네.
새가 날아도 하늘 끝까진 못 가는데
사람 멀리 있으니 그 생각 그지없네.
지팡이에 기대 오랫동안 말 없으니
이 깊은 회포를 그 누가 알아 주랴.
집에 돌아와 짧은 노래를 지어
나의 한가한 소식을 대신 부치네.
識
信步小溪邊 林原看暮色
鳥飛天不窮 人遠思無極
倚杖久無言 幽抱誰能識
歸來成短歌 以寄閑消息
Ⅰ-080-17) 금(金)
고요히 서창(書窓)에 기대 두세 번 읊으니
이 맑은 시를 천금엔들 비하랴.
거룩한 임금께서 국 끓이는 솜씨를 내리신다면
재주와 덕이 이한림(李翰林)보다 뛰어나련만.
金
靜倚書窓三復吟 淸詩可以比南金
聖君若下調羹手 才德超於李翰林
Ⅰ-080-18) 연(蓮)
연못에 가득한 달빛 맑고도 곱고
나무에 얽힌 서리 깨끗도 하구나.
나그네길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시름 머금은 한 송이 가을 연꽃일세.
蓮
月滿錢塘淨麗 霜摧玉樹婢娟
客子遠遊不返 含愁一朶秋蓮
Ⅰ-080-19) 가(可)
깨어도 노래하고 취해도 노래하니
어설픈 내 행동이 세상과 등졌네.
굵은 베 누더기로 온 몸을 둘러싸고
십 년 동안 오막살이에 혼자 앉았네.
잠자코 지내자니 어리석은 듯하건만
출세나 은둔이나 어느 쪽도 좋아라.
궁달(窮達)은 본래 명(命)이 있는 법
소먹이며 노래한들 그 무엇하랴.
그대는 완사종(阮嗣宗)을 보지 못했던가!
좋고 나쁨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화를 피하는 길이라네.
이제부터 세상 밖에서 노니는 데다 뜻을 두노니
창주(滄洲)에 가서 낚싯배 한 척을 사고 싶어라.
可
醒亦歌醉亦歌○ 疎散吾行與時左
麤繒大布穩纏身 十載蝸廬常獨坐
沈沈黙黙凡如愚 出處無可無不可
由來窮達命之然 何用飯牛歌轗軻
君不見阮嗣宗臧否不掛口 所以能避禍
從今有志方外遊 欲向滄洲買得釣魚舸
Ⅰ-080-20) 연민(憐)
농사걷이 끝나고 한 해가 저무니
빠른 세월이 가장 가련하구나.
지난 일 생각하면 별별 생각 많건만
임금을 도우니 그대가 바로 어진 이일세.
구름 걷힌 곡령(鵠嶺)에서 아침 해를 맞으니
눈 쌓인 오산(蜈山)에도 섣달 그믐이 가까웠네.
여관방 춥고 긴 밤을 어이 견디시나
옛 집의 청전(靑氈)을 멀리서 그리워할 테지.
憐
農功已畢歲廻旋 鼎鼎流光最可憐
懷故意存吾有感 致君時至子爲賢
雲收鵠嶺迎朝日 雪擁蜈山近臘天
旅舍不堪寒夜永 定應遙憶舊靑氈
Ⅰ-080-21) 촛불(燭)
허군(許子)이 맑은 시를 읊으면
꽃바람이 빈 골짜기에 일었지.
여수(麗水)의 금처럼 빛을 숨겼고
형산(荊山)의 옥같이 값을 기다렸지.
칼을 보면서 깊은 술잔을 당기고
책을 뒤적이며 짧은 촛불을 태웠지.
우리의 사귐이 아교풀 같으니
끊어진 줄도 이을 수가 있으리.
燭
許子哦淸詩 英風起空谷
韜光麗水金 待價荊山玉
看釰引深盃 閱書燒短燭
交道似鸞膠 斷絃猶可續
Ⅰ-080-22) 비단(錦)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선비
시를 지으면 비단을 짠 것 같았지.
즐겁게 취해 한 번 읊으면
구름과 달이 높은 베개를 감돌았지.
錦
吾子眞賢儒 作詩如織錦
怡然發醉吟 雲月繞高枕
Ⅰ-080-23) 병풍(屛)
잔잔히 물 흐르는 소리가 언제나 음악 아뢰고
구름과 산이 둘러싸며 멀리 병풍 펼쳤네.
한가롭게 사는 맛을 묻는 이가 있다면
물소리와 산 빛에 취해 깨지 못한다고 하리라.
屛
流水潺湲常奏樂 雲山邐迤遠鋪屛
外人若問閒居味 聲色中間醉未醒
Ⅰ-080-24) 깊이(深)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두목(杜牧)이 호주(湖州)의 약속 못지켜
꽃 지고 녹음 우거진 것을 스스로 한탄했지.
또 보지 못했던가! 최호(崔顥)가 그 해 얼굴을 보지 못해
붉은 복숭아 문밖에서 부질없이 상심했었지.
선생의 경우는 이 두 사람과 달라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이름난 꽃숲이었지.
금 연못에 밤마다 연 캐러 가면
짙은 향내가 흰 옷자락에 젖어들었지.
평생 행락을 마음껏 즐겼으니
맑은 흥취가 얕고 깊고를 어찌 따지랴.
헤어진 뒤에 새로 지은 시가 문득 내 책상에 떨어지니
그리운 마음을 달랠 길 없네.
그대여! 말고삐를 빨리 돌리소.
나 혼자 차가운 이불에서 외롭게 만들지 마소.
深
君不見杜牧不及湖州約 自恨花殘成綠陰
又不見崔顥當年不見面 紅桃門外空傷心
先生所遇異於斯 到處皆是名花林
金塘夜夜採蓮去 苒苒濃香薰素襟
平生行樂盡適意 淸興何須論淺深
別後新詩忽然落吾案 相憶相思猶未禁
君乎君乎速廻轡 毋使儂家含憤守寒衾
Ⅰ-080-25) 처소(處, 나비가 꽃을 생각하는 격 蝶戀花)
나그네는 제 살 곳을 얻기 어려운 법
가을 연못가에서 몇 번이나 고향을 꿈꾸었던가.
날 저문 장안(長安)에서 얼마나 시름겨운지
높이 날아가는 외로운 새도 부러워했지.
나 또한 친구 없어 외로운 신세이니
고즈넉한 집에는 산새 소리만 들려오네.
옛 놀음이 문득 떠오르건만
지난 일 이제는 찾아볼 곳이 없네.
處(蝶戀花)
客裏應難爰得所 鄕思悽然夢繞秋蓮渚
日暮長安愁幾許 羨他孤鳥高飛去
我亦凉凉無伴侶 閒寂幽居只有山禽語
忽憶前遊多意緖 悠悠往事尋無處
Ⅰ-080-26) 비추임(照)
요즘 편지마저 드물고 보니
다시 만나 웃을 일만 기다려지네.
어느 날에야 부슬비 내리는 밤 평상에서
푸른 등불 마주하고 서로 바라볼거나.
照
邇來音信稀疎 竚待重遊一笑
何時細雨夜床 共看靑燈相照
Ⅰ-080-27) 어떠한지(何)
귀 씻고 몸 온전히 해 시끄러운 세상 피했던
영천(潁川)의 남긴 자취가 어떠한지 묻고 싶네.
표주박 버린 바위에는 그 당시 달이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
何
洗耳全身避世譁 穎川遺跡問如何
棄瓢巖畔當年月 尙至于今不屬他
Ⅰ-080-28) 정(情)
내 친구 허군(許夫子)은
형제같이 서로 친했지.
언제 술 한 통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정겹게 이야기하려나.
情
吾友許夫子 相親如弟兄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情
Ⅰ-081) 유종원(柳宗元)의 문집을 읽고 (두 수)
Ⅰ-081-01)
회사(懷沙)의 일을 오래도록 못 잊어
강과 바다를 오가며 십 년이나 방황했었지.
머나먼 만리 밖 영릉(零陵)의 꿈이
몇 번이나 봄바람 따라 고향을 찾았던가.
Ⅰ-081-02)
거친 땅 귀양살이를 한스럽게 잊지 못해
소상강(瀟湘江)에 눈물 흘리며 귀밑머리 희어졌네.
지금도 맑은 밤이면 우계(愚溪)의 달이
선생의 취향(醉鄕)에 비춰 들겠지.
讀柳宗元集(二首)
長自懷沙事不忘 往還江海十餘霜
悠悠萬里零陵夢 幾逐春風到故鄕
竄逐窮荒恨未忘 對湘垂淚鬢如霜
至今淸夜愚溪月 夢照先生入醉鄕
Ⅰ-082) 1365년(을사) 초여름 외진 집(幽居)에서
나무 그늘이 장막을 친 듯 짙은데
산새들은 철이 돌아왔다고 자주 알려주네.
해당화 꽃이 한창 피었고
살구 열매도 이제 막 굵어지는데,
마음이 멀어지자 구름처럼 정처 없고
몸이 한가로워 하루 해가 길구나.
맑게 개인 창가에서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
새로운 시를 다시 짓는다네.
首夏幽居(乙巳)
樹影濃加幄 幽禽屢報時
海棠花正發 山杏子初肥
心遠雲無定 身閑日更遲
晴窓覓佳句 聊復寫新詩
Ⅰ-083) 형님께서 원(元) 서곡(西谷)과 함께 시를 화답해 보내셨기에 다시 두 수를 씀
Ⅰ-083-01)
꽃 숲 너머로 꾀꼴새 지저귀고
비가 막 개어 날씨 화창하네.
정원을 에워싼 버들은 연기 속에 가느다란데
지붕에 달린 복숭아 이슬 맞아 실팍하네.
나고 들면서 걱정하고 즐거워할 것 없으니
공명이 이르건 늦건 무슨 상관이랴.
바람 맞으며 짧은 머리를 빗다가
술 불러 오고 또 시를 읊네.
Ⅰ-083-02)
서곡(西谷)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연못가 정자에 꽃다운 철이 지나가네.
못물이 줄어들어 연 줄기도 약해지고
바람이 훈훈해 약초 넝굴이 살찌네.
오가는 구름이 내 걸음을 가리고
산 빛은 자리 위를 비추는데,
무엇하며 노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차 다리고 또 시도 짓는다고 하겠네.
家兄與元西谷見。和復書二首。
鸎囀花林外 淸和雨霽時
遶園烟柳細 出屋露桃肥
行止無憂樂 功名任早遲
臨風梳短髮 喚酒且吟詩
卜居西谷裏 池舘過芳時
水減荷莖瘦 風熏藥蔓肥
雲光侵步武 山色照棲遲
若問逍遙處 煎茶且賦詩
Ⅰ-084) 춘성(春城) 향교(鄕校)의 여러 대학(大學)들에게 보냄
내가 떠나온 뒤에 세월이 너무나 빨라
예전에 놀던 자취 이제는 다 달라졌네.
즐거운 일은 해마다 더 줄어들고
갈수록 알아주는 이 없어 부끄러워라.
편지 끊긴 원천(原川)에게선 잉어도 오지 않고
꿈에나 광해를 찾으면 나비가 먼저 날아오네.
옛친구들이여. 모두들 평안하신지
석양 비치는 가을 산에 시름이 가득하네.
寄春城鄕校諸大學
烏兎相騰背我歸 舊遊蹤跡已爲非
共知樂事年來少 却愧知音日漸稀
信斷原川魚不到 夢尋光海蝶先飛
故人各各平安否 愁滿秋山照夕暉
Ⅰ-085) 나옹(懶翁) 화상(和尙)의 운산도(雲山圖)에 씀
푸른 산이 흰 구름 속에 은은히 비치며
멀고 가까운 경치가 낱낱이 다 보이네.
반 폭 화려한 종이에 마음은 만리이니
기묘한 붓이 신에 통한 줄 이제 알겠네.
題懶翁和尙雲山圖
靑山隱映白雲中 遠近奇觀一一窮
半幅華牋心萬里 方知妙筆卽神通
Ⅰ-086) 각림사(覺林寺) 당두(堂頭) 원통(圓通) 스님의 축상시(祝上詩)에 차운함
영롱한 서기(瑞氣)가 온 골에 가득하고
염불 소리가 멀리 흰 구름 가에 들리네.
산신령께서도 우리 임께 헌수(獻壽)했으니
덕화의 하루가 한 해처럼 길어지리.
次覺林堂頭圓通祝上詩韻
瑞氣蔥龍滿洞天 梵聲遙振白雲邊
岳靈已獻吾君壽 化日舒長政似年
Ⅰ-087) 꾀꼬리 소리를 듣고
새벽부터 푸른 나무에 꾀꼬리 소리
굽은 난간 가까이 차츰 들려오네.
푸른 누각 꿈에서 놀라 깨어나니
눈에 가득한 동산이 온통 봄빛일세.
붉은 꽃 반쯤 지고 봄은 저무는데
묵은 비가 막 개어 하늘 맑구나.
때마침 고운 햇빛에 날씨도 좋아
집 남쪽 골목 북쪽에 아지랑이 잠겼는데,
버들 그림자 옆을 뚫고 혀를 굴리니
규방 여인의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부끄럽구나! 나도 또한 푸른 산의 사람이라
푸른 산 두어 점을 이웃삼아 사노라니,
문 밖에 찾아오는 수레와 말이 적고
산새만 찾아와 서로 친하네.
포곡조(布穀鳥)가 처음으로 씨 뿌리라 알려주고
제호조(提壺鳥)도 자주 술 권하는데,
오늘 아침에 또 꾀꼴새 소리를 들으니
봄이 어디 갔는지 묻는 것 같네.
봄이 너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면
네가 나를 벗삼아 지내도 좋으련만,
가여운 네 울음이 고즈넉한 시름 깨뜨리고
가녀린 네 울음이 알맞은 곳 얻었구나.
골짜기에서 나와 교목(喬木)으로 옮기는 게 바로 내 마음이건만
높은 바람을 어디서 빌려야 하나.
聞鶯
凌晨碧樹黃鸝聲 漸近曲檻嚶嚶鳴
悠然驚斷翠樓夢 滿眼林園春意生
千紅半落春欲暮 宿雨初收天氣淸
此時風日姸且好 舍南巷北晴烟橫
斜穿柳影轉饒舌 惱殺粧閣幽人情
愧予本是靑山人 靑山數點爲四隣
門無車馬經過少 只有山鳥長常親
初聞布穀報耕種 亦有提壺呼酒頻
今朝又聞黃鳥語 似問東君歸去處
東君背汝不回頭 汝可與吾爲伴侶
憐渠啼破寂寥愁 却羨綿蠻爰得所
出谷遷喬吾有心 借便高風在何許
Ⅰ-088) 1366년(병오) 늦은 봄
비 그치고 꾀꼴새 소리 재잘거리니
개인 산이 사방에 더욱 푸르네.
나무 그늘은 풀 길까지 덮었고
버들 그림자가 사립문을 가렸네.
술 마실 기회야 많지만
정원의 꽃이 흩날릴까 염려되네.
누가 증점(曾點)의 옷을 마련해주면
나도 무우(舞雩)에서 놀다가 오고 싶네.
暮春(丙午)
雨過鸎啼滑 晴山碧四圍
樹陰連草徑 柳影掩柴扉
尊酒宜多辨 園花恐亂飛
誰成曾點服 吾與舞雩歸
Ⅰ-089) 여름 구름
천 가지 모습으로 변하며 눈앞을 가로막더니
다시 기이한 봉우리 되어 들쑥날쑥 피어나네.
비를 품고 천둥을 타며 자주 뒤집히다가
별을 토하고 달을 숨기며 자유롭게 다니네.
夏雲
變成千狀眼前橫 更作奇峯勢不平
拖雨駕雷翻覆頻 漏星藏月卷舒行
Ⅰ-090) 돈 무늬 같은 이끼(苔錢)
뜨락에 가득 고요한 자취를 남기고
파릇파릇 서재를 비추는 모습 사랑스럽네.
만약 네 둥근 무늬가 세상의 보배라면
어찌 내 문 앞에 자라나 있으랴.
苔錢
滿庭留得寂寥痕 偏愛蒼蒼映小軒
若使圓紋爲世寶 肯容生長在吾門
Ⅰ-091) 구름 같은 벼(稼雲)
구름 같은 벼이삭 두루 패어 하늘 끝까지 닿으니
풍성한 빛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구나.
이 구름이 가을 들판에 바람이나 일으키지
어찌 새벽 산에 비 내릴 줄 알랴.
넘실넘실 동서 언덕에 가득하고
널리 위 아래 논에 깔렸네.
느지막이 낫을 들고 다 거둬들이면
집집마다 즐거운 잔치 풍년을 노래하리.
稼雲
稼雲開遍際晴天 飽看油然氣色連
只解飜風秋野外 豈能含雨曉山邊
溶溶已滿東西陌 浩浩平分上下田
晩向鎌頭都捲盡 萬家相慶樂豊年
Ⅰ-092) 기와(瓦)
누런 진흙을 다지느라 힘도 많이 쓴데다
굳고 단단한 그 모습 불구덩이를 거쳤구나.
높고 낮은 차례가 줄줄이 가지런하고
깔고 덮은 고랑은 위 아래로 트였네.
햇볕 쬐고 바람 쐬어 빛도 나지만
구름 덮이고 빗줄기 때리는 게 무정하구나.
무안(武安)의 당일엔 모두 우뢰 되었으니
천고에 사람들의 온갖 느낌을 자아내네.
瓦
陶盡黃泥力靡輕 堅剛本自火坑成
高低序次夫何錯 仰覆開溝也不平
日爍風磨仍有色 雲埋雨打似無情
武安當日皆爲震 千古令人百感生
Ⅰ-093) 벼루(硯)
십 년 글방 공부를 너와 벗삼았으니
일상생활의 값어치가 백금보다도 중하네.
먹 이빨에 자주 갈려 본 모습을 잃었지만
몇 번이나 붓을 적셔 옛 글을 배웠던가.
이슬 떨어뜨려 문지를 땐 자던 새도 놀랐고
얼음 깨어 씻을 땐 숨은 고기 달아났지.
네 덕분에 평생 학업을 성취하는 날
그 은공을 다 쓴다면 수레에 가득 실으리.
硯
十載螢窓伴汝居 端居價重百金餘
累經墨齒虧新樣 幾沐毫頭學古書
滴露硏時驚宿鳥 和氷洗處東潛魚
憑渠若就平生業 寫得功恩可載車
Ⅰ-094) 칼(釰)
늠름한 칼날이 눈서리같이 차가와
번쩍이는 빛을 쳐다보기도 어렵네.
다행히 달인(達人)을 만나 옥을 파헤치고
훌륭한 장군 따라 일찍이 단에도 올랐지.
뱀을 벤 명예는 천하가 떠들썩했고
코끼리를 벤 이름에 세상이 다 놀랐네.
나 또한 널리 구한 지 오래 되었건만
배에 금 긋는 어리석음을 얻기 어렵네.
釰
鋒鋩凜凜雪霜寒 閃電浮光未易看
幸遇達人曾掘獄 好隨良將早登壇
斬蛇壯譽騰天下 斷象英名動世間
我亦旁求年已久 刻舟愚甚得爲難
Ⅰ-095) 이슬(露)
달 밝은 하늘에 이슬이 막 내려
뜨락 나무에 엉긴 모습이 시원하구나.
해맑은 풀잎이 어찌 그리 깨끗한지
아롱다롱 솔가지에 잠시 머물다 가네.
매미 잎에 맑게 엉겨 빨아 먹을 만하고
거미줄에 방울 달려 정말 어여쁘네.
이슬방울 떨어지는 소리 귀에 자주 들리니
몇 사람이나 낮잠 자다가 깨어났을까.
露
露華初下月明天 偏重庭柯氣灑然
湛湛草頭何皎潔 瀼瀼松頂乍留連
澄凝蟬葉還堪吸 點綴蛛絲最可憐
雨後滴聲頻到耳 幾人驚起午窓眠
Ⅰ-096) 묵언(黙言) 굉(宏) 스님에게 답함
오똑 앉아서 잠자코 말 없으니
이것이 유마(維摩)의 둘 아닌 문(不二門)일세.
밝은 구슬 한 알이 광명을 나타내니
거리낌없는 시방 세계의 태평스런 자취겠지.
答黙言宏上人
兀然端坐黙無言 此是維摩不二門
一顆明珠光始現 十方無礙大平痕
Ⅰ-097) 조(趙) 총랑(摠郞)이 누졸재(陋拙齋)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보고 다시 같은 운을 써서 바침
세월은 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언제나 청한(淸閑)한 것이 내 소망일세.
도에 통하기를 당나라 이백(李白)이 일찍이 바랐고
한나라 장량(張良)은 제후에 봉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네.
세상 인연도 가을 구름처럼 담담해지고
들사람 흥취가 설날 술 향기와 어울어졌네.
이 몸은 이미 늙었지만 태평성대를 만나
젊은 시절 되찾을 길 없어 한스럽기만 하네.
趙摠郞見和陋拙齋詩。復用前韻呈似。
從敎歲月去堂堂 長得淸閑我所望
通道早希唐李白 封侯不願漢張良
世緣淡似秋雲影 野興融如臘酒香
身已老來逢盛代 挽廻强壯恨無方
Ⅰ-098) 2월 어느 날. 조계(曹溪) 참학(參學) 윤주(允珠) 스님이 영남에서 돌아와 내게 들렸다가, 그의 스승인 인각(麟角) 대선사(大禪師)로부터 받은 시를 보여 주였는데, (이 시를 보고) 상서(尙書) 화지원(華之元)이 차운하여 짓고, 나도 차운하여 시 두 편을 지었다.
◎ 인각(麟角) 대선사(大禪師)
한 알의 마니(摩尼) 구슬 그 빛이 번쩍여
둥근 빛은 형산(荊山)의 박옥(璞玉)에도 견주기 어렵네
하늘 끝 땅 끝까지 자유롭게 오가건만
옷 속에서만 찾았으니 큰 잘못을 저질렀네.
◎ 화지원(華之元)
오랫동안 진흙에 묻혀도 여전히 번쩍이건만
그 누가 돌 사이에서 박옥을 캐낼 줄 알랴.
대사께서 잘 다듬어 임금께 바치시면
백 번 바쳐도 단 한 번 그릇됨이 없으시리.
Ⅰ-098-01)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면서 항상 빛나니
원래 미옥(美玉)도 아니고 박옥(璞玉)도 아닐세.
삼천 세계를 환히 다 통했으니
어딜 돌아다닌들 잘못 있으랴.
Ⅰ-098-02)
다듬거나 갈지 않아도 그 빛이 그대로이니
이 구슬의 광채가 박옥보다 뛰어나네.
어찌 깊은 상자에 오래 감출건가.
제 값 받고 팔아도 잘못 없으리.
二月有日。曺溪參學允珠自嶺南來。過予因示師尊隣角大禪翁所贈詩曰。
一顆摩尼光爍爍 圜光難比荊山璞
天涯地角任縱橫 覓向衣中成大錯
華尙書之元次韻曰。
久混泥沙猶灼爍 何人解採石間璞
請師彫琢近承明 百獻吾知無一錯
次韻(二首)。
非色非空常炳爍 元非美玉亦非璞
廓然瑩澈大千中 動用周旋何有錯
不假磨礱輝景爍 此珠光彩勝良璞
何須韞櫝久深藏 待價沽哉眞不錯
Ⅰ-099)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편지에, “선생께서 불행히 지난해에 아들을 잃고 올해엔 또 부인을 잃는 등, 슬픈 일이 잇달아 일어나 그지없이 애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너무 상심하실까 염려되어 인과(因果)의 말을 빌려서 시를 지어 바치니, 바라건대 마음을 다스리시어 슬픔을 푸소서.” 라고 하면서 시 두 편을 보내 왔는데, 말씀이 간절하여 내 마음에 느낀 바 있으므로 차운하여 네 수를 바친다.
◎ 도경대선사(道境大禪師)
물질은 원래 허하여 모습도 이름도 없는데
덩어리가 이뤄지면 미생(微生)에 의탁하네.
예나 지금이나 갑자기 왔다 가버리니
어찌 날마다 슬퍼하며 마음 상하랴.
◎ 도경대선사(道境大禪師)
은혜와 사랑은 좋은 인연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에 서로 얽매여 있을 뿐,
달인(達人)은 텅 빈 세상에 홀로 거닐며
껍질 벗은 매미같이 살아 간다오.
Ⅰ-099-01)
세간의 소리와 빛이 모두 헛된 이름이니
사람의 일 그 누가 죽고 사는 것을 정했나.
온갖 슬픔이 잇달아 그치지 않아
몇 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네.
Ⅰ-099-02)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모양이고 이름이지만
쇠망해 가는 걸 볼 때마다 별생각이 다 나네.
진중하신 우리 대사께서 비밀을 여시어
인과(因果)의 말씀으로 친한 정을 보이셨네.
Ⅰ-099-03)
같이 살다가 함께 늙는 인연이 없어
나 버리고 먼저 갔으니 이것도 업(業)일세.
허망함을 깨닫고 눈물 그치려 하지만
매미같이 우는 아이들 소리는 견딜 수 없네.
Ⅰ-099-04)
대사께선 여러 겁(劫)에 좋은 인연 심어서
세속의 인연을 이미 벗으셨네.
시골 지아비가 고뇌에 걸렸으니
가을 매미같이 마른 모습을 이해해 주시겠지.
道境大禪翁寄書曰。先生不幸。去年哭子。今又失主婦。悲哀相繼。痛甚無極。予懼其傷也。推因果綴言爲詩以奉贈。庶亂思而紓哀也。詩曰。
一物元虛絶相名 塊然成質托微生
忽來倏去非今是 何用哀哀日損情
又曰
恩愛殊非結好緣 死生纏縛互相牽
達人獨步淸虛外 處世還如脫蛻蟬
詞語切懇。感於予心。次韻奉呈(四首)。
世間聲色摠虛名 人事誰能定死生
萬種悲哀連不絶 數年無日不含情
都將無實假形名 每見衰亡百感生
珍重吾師開秘密 發明因果示親情
同居偕老也無緣 背我先歸業所牽
已覺妄因休洒淚 不堪兒哭似蜩蟬
羨師多㥘種良緣 脫却塵勞世事牽
應念野夫罹苦惱 羸形也似九秋蟬
Ⅰ-100) 김(金) 목백(牧伯)의 천음정(川陰亭) 시에 차운함
흐르는 물 앞에 두고 떠날 줄을 모르니
나무 그늘 시내 그림자가 가을을 갈무리했네.
들새도 어진 원님 덕화에 감화되어
언덕 너머에서 우짖으며 오래 머무시라 권하네.
次金牧伯川陰亭詩韻
穩坐忘歸對水流 樹陰溪影別藏秋
野禽亦感賢侯德 隔岸相呼勸久留州)에 양전관(量田官)으로 부임하는 아우 부정(副正)을 보내면서
자네가 떠나갈 먼 길을 생각하니
시내와 산 곳곳에 또 봄이 오겠지.
가벼운 바람은 말고삐에 불고
빛나는 해가 오건(烏巾)을 비추겠지.
경계(經界)는 밭도랑부터 바르게 하고
공가(公家)의 부역(賦役)도 고르게 하라.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고
우리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
送弟副正赴春州量田
念子歸程遠 溪山又欲春
輕風吹馬轡 麗日照烏巾
經界溝塗正 公家賦役均
要須知此意 先使阜吾民
Ⅳ-003) 최(崔) 순흥(順興)에게 부침(이때 최순흥이 춘주 양전관으로 있었다)
춘성(春城)은 아득히 먼 곳이어서
다락에 기대 멀리서 그대를 바라보네.
백성 살림은 괴로움 면하게 하고
나라 일에는 부지런하길 사양치 말게.
치악(雉嶽)은 푸른 허공에 뜨고
아산(鵝山)은 흰 구름 너머 있으니,
언제나 그대 말고삐 돌려
술잔 들고 함께 문장을 이야기할까.
寄崔順興((時在春州量田)
杳杳春城遠 倚樓遙望君
民生應免苦 王事不辭勤
雉岳浮蒼翠 鵝山隔白雲
何時廻玉轡 把酒共論文
Ⅳ-004) 정초(正初) 서재에서 (네 수)
Ⅳ-004-01)
새해 정월이 반 넘어 지나가니
병에서 일어나 심기(心機)를 살펴보네.
발을 씻다가 몸 여윈 줄 알고
머리를 빗다가 털이 드문 걸 느꼈네.
풍광은 차츰 부드러운데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
머리를 돌려 먼 숲 석양을 바라보니
사람은 돌아가는데 구름은 돌아가질 않네.
Ⅳ-004-02)
두(斗)․소(筲)를 어찌 헤아리랴
종(鍾)․정(鼎)을 이미 잊어버렸네.
함께 이야기할 사람도 적은데
마음대로 되는 일도 또한 드무네.
시절이 맑아 찬 맛은 멀건만
날이 갈수록 세상 인정은 각박해지니,
하늘과 땅 은혜에 감사할 뿐일세
가난한 집에도 봄은 또 돌아왔네.
Ⅳ-004-03)
요로(要路)에 앉기를 바라지 않으리니
위기를 만날까 두려워서라네.
옛 법은 풍속 따라 변해 가는데
옛 사람 닮은 이는 드물구나.
도(道)의 정은 언제나 고요하고
시 지을 생각은 현묘한 경지에 들어가,
욕심 떠난 게 바로 참다운 즐거움인데
도연명(陶淵明)은 어찌 돌아오질 않나.
Ⅳ-004-04)
날씨가 따뜻해져 물성(物性)이 돌아오고
천기(天機)도 빠르게 돌아가니,
그윽한 골짜기에 새 소리 부드럽고
작은 서재엔 이야기 소리 드무네.
눈이 녹아 봄 물이 불어나고
구름이 머물자 저녁 바람 잠잠한데,
동쪽 봉우리 길을 앉아서 바라보니
해 기우는데 스님이 혼자 돌아가네.
正初齋居(四首)
新正將欲半 病起省心機
洗足知身瘦 梳頭感髮稀
風光初婉娧 寒色尙熹微
回首遠林晩 人歸雲未歸
斗筲何足筭 鍾鼎已忘機
可語人猶少 如心事亦稀
時淸寒味遠 日漸世情微
弟感乾坤惠 窮居春又歸
莫希當要路 還恐有危機
古法從今變 今人似古稀
道情恒寂靜 詩思入玄微
恬惔是眞樂 淵明何不歸
凞凞廻物性 冉冉轉天機
幽谷鳥聲軟 小齋人語稀
雲消春水漲 雲定晩風微
坐看東峯路 日斜僧獨歸
Ⅳ-005)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 장군이 사형 당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함 (세 수)
Ⅳ-005-01)
수경의 빛이 묻히고 기둥과 주춧돌이 무너져
사방의 백성과 만물이 모두 슬퍼하네.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고 말았지만
굳센 충성이야 죽었다고 사라지랴.
사적을 기록한 푸른 역사책이 일찍 가득했건만
가엾게도 누른 흙이 이미 무덤을 이뤘네.
생각컨대 아득한 황천 밑에서도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고 분을 풀지 못하시겠지.
Ⅳ-005-02)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 자 없었으나
충성과 의리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었네.
육도(六道) 백성들의 소망을 따라
삼한(三韓)의 사직을 편안케 했네.
동렬의 영웅들은 얼굴 더욱 두터워지고
아직 죽지 않은 간사한 자들은 뼈가 서늘해졌으리.
어지러운 때를 다시 만나면 누가 꾀를 내려는지
이 시대 사람들 간사하게 일하는 것이 가소롭기만 하네.
Ⅳ-005-03)
내 이제 부음 듣고 애도하는 시를 지었으니
공을 위해 슬픈 게 아니라 나라 위해 슬픈 거라오.
하늘 운수가 통할지 막힐지를 알기 어렵고
나라 터전이 편안할지 위태할지도 정해질 수가 없네.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랴
충성스러운 신하 항상 외롭다가 끝내 견디지 못했네.
홀로 산하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부르니
흰 구름과 흐르는 물도 모두들 슬퍼하네.
聞都統使崔公被刑。寓歎(三首)。
水鏡埋光柱石頹 四方民物盡悲哀
赫然功業終歸朽 確爾忠誠死不灰
紀事靑篇曾滿帙 可憐黃壤已成堆
想應杳杳重泉下 抉眼東門憤未開
獨立朝端無敢干 直將忠義試諸難
爲從六道黔黎望 能致三韓社稷安
同列英雄顔更厚 未亡邪侫骨猶寒
更逢亂日誰爲計 可笑時人用事姦
我今聞計作哀詩 不爲公悲爲國悲
天運難能知否泰 邦基未可定安危
銛鋒已折嗟何及 忠膽常孤恨不支
獨對山河歌此曲 白雲流水㧾噫嘻
Ⅳ-006) 외당형(外堂兄) 이(李) 부령(副令)이 선군(先君)을 추봉(追封)했기에 그 묘소에 참배하고 절구 두 수를 지어 드림
Ⅳ-006-01)
무덤이 푸른 기슭 앞에 석 자나 높아졌으니
아들이 일찍이 대부(大夫) 반렬에 뛰어올랐네.
추봉한 지위가 막중한 홍추사(鴻樞使)이니
아마도 이 영광이 구천(九泉)에서 빛나리라.
Ⅳ-006-02)
무덤 앞에다 정성껏 음식 차려 놓고
아들 손자들이 두어 줄 늘어섰네.
두 번 절하고 생전의 일 생각하니
부질없이 감격스런 눈물이 샘처럼 흘러나오네.
外堂兄李副令追封先君。拜其塋。作二節以呈似。
塚尺三高翠麓前 子曾超躡大夫聯
追封位重鴻樞使 應是榮旡耀九泉
庶羞羅列墓門前 子侄成行僅數聯
再拜忽思平昔事 空將感淚灑如泉
Ⅳ-007) 수은(袖隱) 추(椎) 스님의 시권에 씀
굳센 방망이의 오묘한 쓰임이 어떤 것인지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자취를 드러내지 않네.
조사(祖師)의 관문을 부수고도 아무 일 없었으니
사위의(四威儀) 안에 신기한 칼날 감추었으리.
書袖隱椎上人卷
剛槌妙用是何容 縮手多時不露蹤
打碎祖關無一事 四威儀內韞奇鋒
Ⅳ-008) 명암(鳴巖)의 시권에 쓰다
한 번 내려치는 방망이 소리가 멀리 떨치니
법고(法鼔)를 두드려 하늘까지 울리네.
맑은 우뢰가 손길 따라 일어나니
육합(六合)이 모두 화평하고 맑아지리라.
書鳴巖卷
一下槌聲遠 訇天法鼓鳴
晴雷隨手起 六合晏然淸
Ⅳ-009) 소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쓴 시와 서문
◎ 당인(唐人)
노인의 집을 지나면서도
노인의 마음은 알 수가 없네.
무엇 때문에 늙은 나이에
소나무 심어 그늘을 기다리나.
【서문】당나라의 어떤 사람이 이웃집 늙은이가 소나무 심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그 노인을 비웃으며 지은 것이다. 내 나이 올해 예순이 되었는데, 산 위의 정자 옆에 어린 소나무 수십 그루를 심다가 갑자기 당나라 사람의 그 마음을 생각하고, 절구 3수를 지어 응답한다.
Ⅳ-009-01)
살고 죽는 데에는 늙은이도 젊은이도 없으니
자라나는 것은 소나무의 마음에 있을 뿐이네.
혹시 백세의 수명을 기약할 수 있다면
푸른 그늘 기다리는 게 어찌 어려우랴.
Ⅳ-009-02)
이다지도 심하게 노쇠했으니
길게 바란다고 어찌 내 마음대로 되랴.
푸르고 푸른 빛을 사랑할 뿐이지
우거진 그늘이야 어찌 기대하랴.
Ⅳ-009-03)
대부라는 이름은 부끄럽지만
군자의 마음만은 굳게 지녔네.
내 뜻을 알고서 지켜준다면
뒷날 이 뜨락에 그늘이 가득하리라.
栽松(幷序)
唐人觀隣老栽松詩云
雖過老人宅 不解老人心
何事殘陽裏 栽松欲待陰
此給其老人而作也。我今年當六十。於山亭之畔。種稚松數十株。忽憶唐人之意。作三節以答之曰。
存亡無老少 生長在松心
倘保期頤壽 何難待綠陰
衰遲何大甚 長遠豈吾心
但愛靑靑色 何期鬱鬱陰
應耻大夫號 固特君子心
故人如見憶 他日滿庭陰
Ⅳ-010) 적음연사(寂音演師)의 시권에 씀
침묵으로 말씀한다고 일찍이 들었더니
그 사람을 이제 비로소 보게 되었네.
도(道)가 커지니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맑아지니 온 세상 티끌이 빛나네.
천룡(天龍)도 어렵게 귀를 기울이고
온갖 악마들도 이미 몸을 감추었네.
어느 곳에다 이 소식 전할까
영축산에서 봄날 한 번 웃네.
書寂音演師卷
曾聞說時黙 今得見其人
道大絶言語 心淸輝刹塵
天龍難側耳 魔衆已藏身
甚處傳消息 靈山一笑春
Ⅳ-011) 배웅
적음연(寂音演) 선사가 사립문을 찾아와
참방(參方)하러 떠난다고 하직을 알리네.
머리엔 채양 넓고 둥근 삿갓을 쓴데다
몸에는 긴 소매에 넓은 장삼을 입었네.
푸른 산이 걸음을 맞으니 행장이 평온하고
맑은 달이 마음을 비추니 도용(道用)이 미묘하겠지.
묻노니, 그 짚신 값이 얼마던가
높은 발자취 가볍게 고개 구름 따라 날아가네.
送行
寂音禪德到柴扉 意慾叅方告曰歸
頭戴廣簷圓頂笠 身披長袖濶腰衣
翠嵐迎步行裝穩 明月當心道用微
且問草鞋錢幾隻 高踪輕遂嶺雲飛
Ⅳ-012) 설암(說菴)의 시권에 쓰다
진종(眞宗)을 부연(敷演)할 때에 혀뿌리를 휘두르면.
우뢰 소리 진동하여 자비스런 구름 퍼뜨리네.
때로는 무생곡(無生曲)을 가리켜 보이니
천룡(天龍) 팔부(八部) 중생이 귀를 모아 듣네.
書說菴卷
敷演眞宗掉舌根 雷音振動布慈雲
有時指擧無生曲 八部天龍攝耳聞
Ⅳ-013) 선달(先達) 김초(金貂)의 시에 차운함 (다섯 수)
Ⅳ-013-01)
원래 닭과 학은 같이 살지 않으니
삼동(三冬) 내내 글만 읽는 그대가 부럽구려.
금방(金榜)의 아원(亞元)이라 이름 참으로 높았으니
아마도 언젠가는 금어(金魚)를 차시겠지.
Ⅳ-013-02)
십 년 동안 천석(泉石)에서 혼자 가난하게 사니
바둑판 하나에다 책이 한 권일세.
재주가 변변찮아 세상 쓰임에 어긋났을 뿐
동쪽으로 온 것이 농어 때문은 아닐세.
Ⅳ-013-03)
평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한가롭게 사는데 있어
날마다 도(道) 실린 책을 펼쳐 보았네.
이미 한 마음을 잡았으니 물아(物我)가 한가지라
자네는 나를 알고 나는 고기를 아네.
Ⅳ-013-04)
누추한 골목이라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는데
창가에 산속 햇빛이 도서를 비추네.
앉으면 꽃 층계에 벗 부르는 꾀꼴새 소리를 듣고
다니면 부들 시내에 수달이 물고기 좇는 걸 보네.
Ⅳ-013-05)
두어 이랑 쑥대밭 고즈넉한 집에서
병이 많아 시서(詩書)를 뒤적이지 않았네.
오늘 아침에야 임천(林泉)의 글귀를 보내려고
쌍잉어 흰 종이의 편지를 봉하네.
次金先達貂詩韻(五首)
由來鷄鶴不同居 羨子三冬苦讀書
金榜亞元名信美 定應明日佩金魚
十年泉石獨貧居 一局碁邊一卷書
但以才疎違世用 東來不是爲鱸魚
平生至樂在閑居 日日披看載道書
已把一心齊物我 子能知我我知魚
陋巷無人問起居 半窓山日映圖書
坐聞花塢鸎呼友 行見蒲溪獺趂魚
閒寂蓬蒿數畝居 病多元不考詩書
今朝欲寄林泉句 尺素裁封雙鯉魚
Ⅳ-014) 토산(兎山)으로 부임하는 승봉(承奉) 신성안(辛成安)을 보내면서(당시 감무 監務 임용은 참 參 이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
토산은 경기(京畿)에 가까운 산 고을이라
감무(監務)의 푸른 적삼을 자주 빛 옷으로 갈아입었네.
어진 임금 위해서 병폐를 제거할 뿐이지
가고 멈춤(行止)이 뜻대로 안 된다고 탄식하지는 마시게.
닭을 잡는다고 소 잡는 칼을 쓰지 않으랴
풍속을 어루만지면 조서(鳳詔)를 받들어 돌아가리라.
노래 마치고 술 얼근해지자 손잡고 헤어지니
방초 어울어진 강가에 말이 날아가는 것 같네.
送辛承奉(成安)赴兎山(時監務之任 用叅以上故云)
兎山山郡接京畿 監務靑衫換紫衣
但爲聖明除弊瘼 莫將行止嘆乖違
割鷄不是牛刀用 撫俗還承鳳詔歸
歌闋酒闌分袖去 草芳江路馬如飛
Ⅳ-015) 조대(措大) 원문질(元文質)을 곡(哭)함 (두 수)
Ⅳ-015-01)
어릴 적부터 글읽기에 마음 간절해
나도 그 당시 한 편을 가르쳤었지.
나보다 나중 온 사람이 먼저 가다니
슬픔을 이기지 못해 푸른 하늘에 하소연하네.
Ⅳ-015-02)
눈앞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물거품이니
백년의 사귐도 잠시에 지나지 않네.
가엽구나! 이십사년 동안의 일이야말로
꿈속 거품 중에도 꿈속 거품일세.
哭元措大(文質)(二首)
讀書心切自童年 我亦當時敎一聯
後我來人先我去 不勝怊悵籲蒼天
過眼榮枯水上爻 百年猶是暫時交
可憐四六年間事 夢幻泡中夢幻泡
Ⅳ-016) 단오날. 빙정(氷亭) 아우에게 (다섯 수)
Ⅳ-016-01)
산 속 서재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해가 참으로 길건만
한 잔 창포 술에는 향기가 남았네.
고을 사람들의 풍악 소리가 귀에 들리니
조상님 끼친 풍속이 우리 고향에 있네.
Ⅳ-016-02)
살구에 씨가 생기고 버들 실도 길어졌네.
물 건너 산다화(山茶花)가 그윽한 향내를 보내네.
산 바라보며 새로운 시구를 찾으려 하다
나도 모르게 가물가물 수향(睡鄕)에 들어가네.
Ⅳ-016-03)
잠 깨고 나니 시 생각이 더욱 그리운데
차 항아리 향기로우니 더욱 기뻐라.
내 평생 몇 번 째 단오날인가 손 꼽아보니
비단옷 한 번 못 입고 시골에서 늙었네.
Ⅳ-016-04)
아름다운 천중절(天中節)에 흥이 더욱 솟네.
소나무엔 맑은 그늘 풀에는 향기가 나네.
잎 우거진 버들 숲은 꾀꼴새 장막이고
꽃 활짝 핀 채소밭은 나비들의 고향일세.
Ⅳ-016-05)
사람은 노을 속에 늙어가고 세월은 길기만 한데
재주가 없는 데다 향기마저 모자라 탄식하네.
형제의 모임을 자주 마련하고
좋은 철 만날 때마다 취향(醉鄕)에 놀기를 바랄 뿐일세.
端午。贈氷亭弟(五首)。
靜坐山齋日正長 一巵菖歜有餘香
郡人鼓樂聲來耳 祖聖遺風在我鄕
杏子生人柳線(☆)長 酴醾(☆)隔水送幽香
對山擬欲搜新句 不覺昏昏入睡鄕
睡餘詩思轉悠長 且喜茶甌深更香
屈指吾生幾端午 身無綵縷老於鄕
天中佳節興偏長 松有淸陰草有香
葉密柳林鸎幕府 花繁菜圃蝶家鄕
人老烟霞歲月長 自嘆才薄乏馨香
但思屢辨鴒原會 每遇良辰樂醉鄕
Ⅳ-017) 육순을 맞아 (두 수)
Ⅳ-017-01)
내 생애는 흩날리고 또 미친 듯했지.
병 많은 몸이나마 쉰까지는 지나왔지.
이 세상의 바람과 천둥을 이미 면했건만
어찌 얼음과 숯불이 다시 마음을 괴롭히나.
끝없는 세월은 붙들기 어려우니
유한한 몸으로 다치지나 말아야지,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순(耳順)이 부끄러우니
요즘 들어 듣고 본 것을 다 잊어버리네.
Ⅳ-017-02)
도를 배웠건만 이루지 못하고 들은 것도 적으니
무슨 일을 빙자해 임금 은혜를 갚으려나.
한 평생 수석(水石)이 내 분수인 줄 알면서도
두 시대 티끌 속에 세상 어지러움을 겪었네.
내 기질을 어찌 거원(籧瑗)처럼 되기를 바라랴만
성정(性情)은 언제나 소옹(邵雍)의 말씀 본받으려 했네.
만사에 이미 통발을 잊은 지 오래이니
마음 편히 하면 흰 구름에 누울 만하네.
【강절집(康節集)에 성정음(性情吟)이 있음】
六十吟(二首)
我生飄蕩又疎狂 多病筋骸五紀强
已免風雷於世上 更何氷炭到心腸
無窮歲月難留滯 有限肥膚莫毁傷
但媿宣尼言耳順 邇來聞見摠相忘
學道無成寡所聞 欲憑何事報明君
一涯水石知涯分 二世塵埃混世紛
氣質敢希蘧瑗化 性情常效邵雍云
已於萬務忘筌久 足以安心臥白雲
(康節集。有性情吟)
Ⅳ-018)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춘교십영시(春郊十詠詩)에 차운한 시와 서문
【서문】옛사람의 시를 읽고 옛사람의 뜻을 보면,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 영고(榮枯)와 득실(得失)에 따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하고 답답하게 여기는데, 그 까닭은 정(情)이 감발(感發)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 안타깝구나, 정(情)이여! 어찌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드는가. 내가 선생의 격양집(擊壤集)을 읽다가 공성십음(共城十吟)에 이르러 보니, 그 자서(自序)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 몸이 궁하게 사는 것을 슬퍼하여 춘교시(春郊詩) 열 수를 지었는데, 비록 고상하지는 못하지만 정(情)을 끌어냈다고 할 만하다.” 그 시의 뜻이 내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렇다면 하늘이 준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풍미(風味)를 생각하며 각기 그 운에 차운하여 시 열 수를 지었다.
Ⅳ-018-01)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살다 春郊閑居
교외에 살다보니 고요하고도 한가로워
푸른 아지랑이가 산시(山市)에 이어졌네.
시냇물은 대밭을 꿰뚫고 흐르며
사립문은 지는 꽃을 마주하고 닫혔네.
붓을 들어 길게 읊조리다가
난간에 기대 얼핏 잠도 들었네.
누가 이 들나물을 캐어 왔나
잘게 씹을수록 봄 맛이 나네.
Ⅳ-018-02)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거닐다 春郊閑步
사심이 없는 천지의 봄이라
바람이 맑고 햇빛이 산뜻하네.
물 건너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고
다리 건너 들사람도 만났네.
풍성한 물상(物像)들을 가만히 살피다가
내 생애 가난함을 잊어버리고,
꽃다운 풀밭 위에 우연히 앉아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생각했네.
Ⅳ-018-03) 봄날 교외의 꽃다운 풀밭 春郊芳草
교외 들판에 비가 한 번 지나가
풀빛이 멀리까지 끊어지지 않았네.
누가 저 녹색 비단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솜씨있게 잘 마름질했나.
눈에 가득한 연기와 빛이 아득하니
봄날의 흥취가 유유히 일어나네.
그 옛날 선생께서도 맛있는 술이 있었으면
이 경치를 바라보며 술잔을 따르셨겠지.
Ⅳ-018-04) 봄날 교외에 꽃이 피다 春郊花開
교외에는 봄 그늘이 엷어
온갖 꽃이 이 초가집을 비추네.
무성한 가지는 꺾어도 되지만
부드러운 잎을 따면 안 되네.
해가 기울자 그림자도 바뀌어지고
부슬비 지난 뒤라 향기가 떠오르네.
이 아름다운 꽃이 열흘을 못 가다니
장차 마음 쓸쓸해질까 염려가 되네.
Ⅳ-018-05) 봄날 교외의 한식날 春郊寒食
아름다운 이 계절을 맘껏 즐겨야지
아름다운 이 계절을 놓치면 안 되네.
가는 곳마다 이름난 동산이 있어
철 따라 나는 산물에 깜짝 놀랍네.
꽃이 피려다 미처 못 피고
얼핏 따스하다가 어느새 추워지네.
성을 에워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준마들도 모두 한가롭게 나왔네.
Ⅳ-018-05) 봄날 교외에서 저녁에 바라보다 春郊晩望
그윽한 새들은 서로 지저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