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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제148차(2024.11.14) 스크랩 정감록 십승지 마곡사 ?[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박영란♡ 추천 0 조회 37 13.11.21 14: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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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13)

 

 정감록 십승지 중 한 곳 백범이 숨었던 마곡사

 

고대로부터 인간세상의 큰 재앙은 세 가지로 꼽았다. 전쟁, 기근, 전염병이다.

전쟁이 나면 칼과 창에 찔려서 죽고, 기근이 들면 굶어 죽는다. 전염병이 한번 돌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 가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어디 없는가? 그 고민 끝에 우리 조상들이 찾아낸 곳이 바로 ‘정감록’에 나오는 10군데의 십승지(十勝地)다.

그런데 이 십승지를 뜯어보면 특이점이 하나 발견된다. 이북지역에는 이 십승지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모두 이남에 몰려 있다. 왜 그럴까? 정감록은 하루아침에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내용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다듬어서 내놓은 집단창작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편견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책인 것이다.

 

 

▲ 대광보전 뒤에 대웅전이 있는 공주 마곡사는 이중 대웅전이 아니었다면 그 명당터에 유생들의 묏자리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란 추측이다. / 사진 조선일보DB

 

 

그런데 이북 지역에 십승지가 한 군데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옛날부터 이북보다는 이남 지역이 안전하고 살기 편안한 곳이라는 인식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북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이 항상 있었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적었으므로 먹고 사는 불안이 이남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북 사람들은 십승지가 몰려 있는 이남 지역으로 이사 오고 싶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필자가 추측컨대 그 시기는 구한말쯤이 아니었나 싶다. 나라가 망할 조짐을 보이던 시기였다.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 무렵부터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엄청난 불안을 느낀 조선의 민초들은 십승지를 찾아 헤맸고, 특히 이북에서 정감록을 신봉하던 비결파(秘訣派)들은 이남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비결파’는 풍수지리를 절대적 신념체계로 신봉하던 방외지사(方外之士)를 말한다.

전국 어디에 명당이 있다는 수십 종류의 비결서(秘訣書)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전국의 명당을 찾아 떠돌던 아웃사이더 집단이 있었고, 이들을 가리켜 통상 비결파라고 필자는 부른다. 돈 떨어지고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던 소외된 지식인 그룹과, 머리 깎은 승려들, 그리고 도사가 되고 싶었던 체제 부적응자들이 이 비결파의 주요 멤버였다.

더군다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북은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이남 체제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이북 출신들은 고위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이남은 이북지역을 은근히 위험지역으로 간주하고 인재등용을 꺼렸던 것이다.

차별에 반발한 이북 중산층, 사주명리학 대가들 많아

여기에 반발한 이북의 식자층과 중산층들 가운데 상당수는 풍수와 사주, 그리고 한의학과 같은 실용학문에 집중을 했다. 풍수, 사주, 한의학의 대가들은 이북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상체질의 창시자이자 ‘동의수세보원’의 저자인 이제마도 이북 출신이고, 사주명리학계의 명저로 꼽히는 ‘사주첩경’을 쓴 이석영도 이북이고,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로서 수준 높은 음양오행서(陰陽五行書)인 ‘우주변화의 원리’를 쓴 한동석도 이북이다. 모두 이북사람들이다.

6·25 때 부산으로 피란 와 영도다리 밑에서 좌판 깔고 사주와 묏자리 봐주던 술사들의 대부분이 이북사람들이었다. 정감록도 같은 맥락이다. 이남보다 이북 사람들이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체제로부터 소외받고 차별받은 한을 이쪽에 대고 풀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마곡사 연못의 돌거북이가 마곡사를 지키는 듯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사진 마곡사 제공

 

 

1894년의 동학혁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조선 팔도에서 어디가 안전한가? 대략 이 시기부터 이북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이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물론 십승지가 1차 대상이었다. 경북 풍기(豊基)와 공주 유구 일대도 그 주요한 남하 루트였다. 풍기에는 금닭이 알을 품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공주 유구는 만인활지(萬人活地)가 있다고 여겼다. 이북의 정감록파들이 이남의 십승지로 이주를 시작한 시기는 동학 직후에 일차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무렵에 또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있었다. 6·25를 겪고 나서는 굳이 십승지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이남지역으로 피란 왔다. 이 가운데 풍기와 유구는 이북의 비결파들이 선호하던 지역이었다.

풍기의 인삼, 유구의 직물공장들은 이북 사람들이 내려와서 시작한 사업들이다. 타향에서 먹고 살려면 필수적인 생계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곡사 일대만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유구와 마곡사 일대는 산으로 첩첩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강원도에 가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데, 유구와 마곡사 일대는 강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산골 같은 감이 온다. 구절양장(九折羊腸) 같기도 하다. 충청도인데도 말이다.

깊은 산골의 지형을 가진 유구와 마곡사는 그래서 십승지에 포함된 것 같다. 일단 첩첩 산중이어야 난리에 숨기 좋은 것 아닌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과 미국에 대항해 끝까지 유격전을 펼치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험악한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동유럽의 유고도 산악지형이고, 한반도가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나라의 70%가 산악지형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본다. 충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산이 많지 않고, 농지가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유구, 마곡사 일대는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점이 독특하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2년 뒤인 1896년에 명성왕후가 일본 자객집단에 의해 살해된다. 이에 의분을 느낀 백범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 장교를 죽여 버린다.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다. 추적대가 따라올 수 없는 곳, 인적이 드물고 깊이 숨을 수 있는 산골은 어디인가? 백범은 마곡사로 숨었다.

 

▲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본 마곡사 전경. 산지에 둘러싸인 지형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사진 마곡사 제공

 

 

우리나라에 수많은 절이 있는데 하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백범이 1876년생이니까 그가 마곡사에 온 시기는 21~22세 무렵이었다. 황해도 출신 20대 초반 청년의 머릿속에 입력된 피란지 정보는 어느 정도였을까? 십승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탈옥 후에 이북의 함경도 같은 곳도 오지인데, 그쪽으로 도망가지 않고 이남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마곡사가 십승지인 유구 근처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일단 절에 가면 밥은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절이라는 곳이 속세의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는 성소(聖所) 아닌가.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쫓기는 자의 불안함. 그 불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장소가 십승지인 유구 옆의 절 마곡사가 아니었을까. 마곡사가 있는 태화산(泰華山)은 공주시 사곡면, 신풍면, 유구읍의 3개 지역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줄기이다. 높이는 416m.

마곡사에서 눈여겨 볼 만한 풍수적인 요소는 물이다. 냇물이 대광보전을 활처럼 감아서 돈다. 물살이 너무 세면 좋지 않은데, 물살도 느긋하고 완만하게 돈다. 자세히 물길을 보면 마곡사 전체를 S자 형국으로 감아 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이상적인 물길의 형태는 S자다. 태극모양인 것이다.

대광보전 뒤 대웅전 없었다면 뫼로 채워졌을 수도

물이 태극모양이나 S자로 흐르는 곳은 거의 명당이다. 태극모양이면 물이 느리게 흐르면서 주변에 수기(水氣)를 충분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물이 없으면 그 터의 기운이 오래가지 못한다. 물이 있어야 불에서 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저장해 준다. 물로 기운 저장을 못 하면 속발(速發)했다가 속패(速敗)한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는 마곡사에 갈 때마다 이 냇물의 흐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고 감탄한다. 교과서적인 명당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에는 이 마곡사 경내에다가 유생들이 치고 들어와 자기들 조상 묏자리를 많이 썼다고 전해진다. 사찰 경내에 개인의 묘를 쓴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불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유교의 시대에는 그러한 불경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곡사는 냇물이 아름답게 감아 도는 대광보전(大光寶殿) 뒤로 또 대웅전이 있다. 이중(二重) 대웅전이다. 아마 이 대광보전 뒤로 대웅전이 없었더라면 유생들의 묏자리로 이 터가 가득 메워 졌을 것이다. 그만큼 풍수가에서 탐냈던 명당 터가 이 대광보전 뒷부분이다.

▲ 마곡사 대웅보전의 웅장한 모습. / 사진 조선일보DB

 

 

수백 년의 풍우를 버티며 서 있는 대광보전의 주련에는 두 개의 문구가 눈에 띈다.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돌아와서 세상을 바라보니, 모두 꿈속의 일과 같구나’ 하는 구절이다. 백범은 마곡사에 와서 1년 정도 머리 깎고 승려생활을 했다. ‘백범일지’에 그 내용이 나온다.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 백범의 자질이 비범한 것을 파악한 주지스님은 원종을 붙잡았다. “여기서 계속 승려 생활을 하거라.” 하지만 팔자가 그랬는지, 백범은 풍찬노숙의 험난한 항일독립의 길로 나갔다.

백범이 만약 마곡사에서 계속 승려로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를 통하여 고승이 되지 않았을까? 안전하고 재정적으로 풍족했던 절인 마곡사에서 고승으로 한평생을 보내는 것과, 임시정부에서 항일 투쟁의 험난한 삶을 사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인생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 인생의 길인지 단언할 수 없다. 자기 업보대로, 자기 팔자대로 길을 택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는 그 사람의 업보와 팔자가 선택하는 것 같다.

임시정부에서 수많은 고생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한 백범은 국내에 들어오자 마곡사부터 찾았다. 거의 50년 만의 방문이었으니 감회가 얼마나 깊었을까. 깊은 감회에 젖은 백범은 대광보전 앞에서 대중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대광보전 앞에 50년 만에 죽지 않고 다시 선 백범은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라는 구절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머리 깎고 승려가 된 20대 초반에도 아마 이 구절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어찌 혈기 방장한 스무 살짜리 청년이 ‘몽중사’(夢中事)를 알았겠는가. 그러나 50년의 만고풍상을 겪고 70세가 되어 다시 그 대광보전 앞에 서니 이 구절이 가슴을 강타했을 것이다. ‘그렇구나! 몽중사로구나!’

 

 

▲ 부자인 듯한 방문객이 대웅보전 아래에 앉아서 마곡사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 사진 마곡사 제공

 

 

인간은 자기가 겪어보아야 깨닫는 이치가 있다. 세월을 어느 정도 살아 보아야 아는 진리가 있다. 책이나 머리로만 알 수 없는 진리가 ‘몽중사’ 아닐까? 필자는 마곡사에 갈 때마다 대광보전 앞에서 50년 만에 다시 돌아와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를 보았을 때 밀려 왔을 백범의 감회를 더듬어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2011년 가을에 마곡사 법당에서 7일간 수불(修弗) 스님의 인도 하에 화두를 잡고 간화선 수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저녁 공양 후에는 백범이 머리를 깎은 삭발처의 냇물 줄기를 따라서 산책하곤 했다. 산세가 부드럽고 경내 전체를 냇물이 태극모양으로 감아 도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산세가 부드럽다는 것은 뾰족뾰족한 바위 절벽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위가 많은 강건하고, 육산으로 이루어지면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수기(水氣)가 풍부해서 상기되는 기운을 잡아 준다. 신경을 많이 써서 머리가 상기되고 복잡해진 사람은 마곡사에 와서 머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절 뒤쪽으로는 일반인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다.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산세와 분위기를 지닌 곳이 공주 마곡사이다.

 

 

글·조용헌 동양학박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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