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시흥문학상> 동상 수상작
그는 모른다고 하였다 / 이은영
습기어린 창문에 긴 줄이 그려져 있다. 달팽이 한마리가 희뿌연 유리창을 가로질러 오르고 있었다. 빛도 없는 새벽 어디를 향해 오르는 것일까. 달팽이의 고독한 산책을 따라나섰다.
며칠 전 새로 사온 화분에 달팽이가 따라온 모양이다.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고 푸른 잎사귀 속에서 운둔자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맨살을 꿈틀거리며 화분 밖의 험난한 세상을 향해 홀연 길을 나섰을까. 한참을 움직이던 달팽이는 잠시 멈추고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몸을 내민다. 가고자 하는 곳으로 숨어 있는 주름의 폭을 펼쳐내 온몸을 늘려 움직였다.
가파른 유리벽을 오르고 있는 그에게 질문한다. 무슨 대단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 이른 새벽부터 고행을 시작했는지. 말없는 달팽이는 어떤 거부의 몸짓도 없이 그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말랑한 살을 밀어내 육체의 고통으로 거두어들이는 그는 수도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 힘이 들어도 짐 된 집을 내려놓지 못하고, 몸을 낮춰 엎드려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낮춤으로 과거에 대한 참회와 절대자에게 존경을 표하는지도 모르겠다.
티벳 사원을 향해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아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늙은 아버지는 수레를 끌었다. 젊은 아들이 무거운 수레를 끌지 않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은 아들이 더 많은 복을 쌓기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순례는 참선이고 라마로서 경전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인이 수레를 끄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언제나 고물상 같았다. 할머니는 버려진 쓸 만한 물건은 모조리 다 주워오셨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 빈손인 적이 없었다. 집안은 언제나 파지와 빈 박스, 고철과 찌그러진 깡통이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이웃들 시선 때문에 제발 그만하시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고물을 팔아 생긴 돈은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불전에 시주를 했다.
어느 날 마당에서 파지를 정리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응급실에서 진찰을 하려 옷을 들추던 의사는 민망한 표정으로 속옷만 남기고 모두 벗기라고 했다. 한두 벌도 아니고 겹겹으로 껴입은 옷을 모두 벗기고 나니 덩치 큰 할머니는 간데없고 여윈 체구의 조그마한 노파가 누워 있었다. 할머니 모습이 마치 집을 벗어놓은 달팽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에는 아래 위 할 것도 없이 옷마다 몇 개씩 되는 주머니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새 옷만 사면, 어떤 옷이건 소매 길이나 품을 잘라 주머니를 달았다. 그런데 그 주머니에는 잡동사니와 함께 십 원짜리 동전들이 흰 종이에 곱게 쌓여 가득 차 있었다. 이유를 묻지 않고도 한 눈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이 서른에 혼자되신 할머니는 세상 풍파를 온 몸으로 겪으셨다. 물정에 어두운 할머니는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지 못했고, 난리 통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생활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억척스럽지 못한 성격 때문에 어린 다섯 남매는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오로지 자식들이 잘 되기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물려준 가난에서 벗어나 자식들 주머니마다 재물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며, 대신 할머니 주머니에 정성을 싸서 무거운 짐으로 지고 다녔던 것이다. 치매를 앓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후에도 할머니의 동전 싸는 일은 계속 되었다. 희생만으로 채울 수 없었던 빈 주머니를 그렇게 채우신 것이다.
나의 사랑 법은 어떤 식이었을까. 곤히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레를 돌아본다. 어찌된 일인지 나의 수레가 비어 있다. 화들짝 놀라 내 짐의 행방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내 등에 있어야 할 짐이 아이의 등짐으로 얹혀 있다. 더구나 고삐를 잡은 내가 빨리 가자고 채근해 댄다. 남편에게 견인되고 있는 수레를 타고 못이기는 척 시침을 떼고 있다.
이른 새벽 달팽이를 따라나선 내 걸음이 지루해 진다. 얼마 가지 않아 게으른 욕망이 적당히 쉬기를 유혹한다. 달팽이에 대한 부질없는 내 물음에 회의가 온다. 내 마음속에는 할머니처럼 겸손과 순종이 자리할 여유가 없다. 성급하게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면 그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절대자의 탓이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맞서 극복하기 보다는 돌아갈 길을 찾는다. 때에 따라선 무리한 기대치를 세워 놓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수레를 부탁하기도 했다. 견디기 힘들다고 투정 부리던, 발목을 잡는 고행의 무게가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의 이기심 무게가 아닌지 모르겠다.
잰 걸음으로 다시 달팽이를 따라 간다. 내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나의 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남편이 소망하는 진정한 삶은 어떤 모습이며, 아이들이 꿈꾸고 바라는 세상은 어떤 것일지 몹시 궁금해진다. 어쩌면 마음을 다해 나아가는 달팽이 한 마리를 평생 따라 잡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욕심을 버리고 소용없는 짐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무거운 수레는 쉽게 끌려오지 않는다.
저만치 앞서가는 달팽이에게 물었다. 좀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아니면 집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 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목을 길게 빼고 더듬이 세운 달팽이가 싱긋 웃는다.
그는 다만 모른다고 하였다.
첫댓글 무울님께서 이 글들을 올린 의도를 알겠네요. 좋은 글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수상작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수식이 별로 없는 간결한 일상어로 된 문장이라 할 수 있겠네요.
개성적인 문체의 개발도 좋지만, 우선은 간결하고 평이하고 정확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