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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 열정과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구룡사를 자세히 소개하는 글을 여기에 올려 놓겠습니다. 正覺山 龜龍寺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 2동 442-1번지 (금곡대로 66-19)에 위치한 龜龍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대각회 소속 사찰로써, 서기 680년(문무왕 2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千年古刹이다. 창건 당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仙人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仙休寺라고 하였다가 후에 龜龍寺로 改稱하였다. 壬辰倭亂 때 완전 소실 된 사찰을 1603년(선조 36년) 善修大師가 重建하고, 1612년(광해군 5년) 覺性禪師가 重修하였으며, 그후 수 차에 걸쳐 부분적인 改修와 衰落을 거듭하다가 1981년에 부임한 주지 禪曉스님이 도량을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중창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었다. 이 사찰에는 조성년대가 불분명한 石造佛菩薩像이 유난히 많은데, 彫刻技法이 다소 거친 점으로 미루어 재정이 넉넉치 못한 地方 百姓들의 信心과 스님들의 노력으로 造成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金井山의 지맥인 正覺山 기슭 중턱 숲속에 자리 잡은 도량의 主佛殿인 千佛聖殿은 남향, 三聖閣,藥師殿,地藏殿,觀音殿은 서향이며, 낙동강과 멀리 김해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였다. 사찰 뒷산 약 200미터 지점의 넓은 공터에 5층 석탑과 거대한 석조약사여래대불입상이 장엄한 위용을 보인다. 약사여래대불 입상 뒷편으로 약 100미터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倭將 고바야카와 등이 쌓은 龜浦倭城이 있다. 구포왜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는 바람에 사찰의 전각배치나 개발에 큰 지장을 받고 있으며, 비록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람의 배치 형식과는 동떨어지긴 했어도 나름대로의 격식을 갖추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며, 모든 불자들이 성심을 다해 수행하는도량으로 뿐만 아니라 신도회관에 1만권 가량의 도서를 비치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붕이 없는 특이한 형태의 일주문>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건물이지만, 구룡사 일주문은 사진과 같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 안은 진계(眞界)라고 한다.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세워진 것이다. 우측 돌 기둥위에 義城山이라 쓰인 글씨가 있는데, 산의 정식 명칭은 아니고 이는 신라시대 黃龍장군이 휘하군사들과 함께 침략한 왜구와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전멸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도량이 위치한 산을 '의성산'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하며 가람이 위치한 산은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의 ‘정각산’(正覺山)이라 부르며, 동고서저 (東高西底) 북고남저(北高南底)의 지형 위에 도량이 펼쳐져 있다. 일주문 안쪽 우측 편으로 신도회관과 요사채가 있는 마당이 있다. 도서관에는 약 1만여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신도들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무료 개방하여 독서와 서예교실로도 활용하고 있으며 좌측편의 요사채는 단조로운 현대식 원룸 형태로 지어졌지만, 실내에는 화장실을 겸한 샤워시설까지 있다. 법당으로 오르는 입구 좌측에 있는 석조 다문천왕(좌)과 지국천왕상(우) (높이 약 4m) ※ 우리나라에서는 방위를 말할 때 동, 서, 남, 북 순서이지만,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동, 남, 서, 북 순서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천왕의 배치도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순서로 정리하는데, 사찰마다 좌우 협칸에 2구씩 봉안하는 위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배열순서의 원칙은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석굴암 본존불이 있는 주실 앞 비도에 새겨져 있는 것이 시초라고 볼 수 있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법당을 떠나 불이문과 일주문 사이에 천왕문 또는 옹호문 등의 이름으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사천왕은 욕계의 제1천인 사천왕천(수미산)에 머물며 수하에 각각 8명의 대장들을 거느리고 세간의 동서남북을 수호하므로 護世 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의 지물은 경전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배치 또한 사찰마다 약간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증장천왕은 남방을 수호하며 몸은 청색, 갑옷을 입고 손에 보검을 쥐고 있다. 중생의 복덕과 선근을 증장시키며 손에 보검으로 사마외도로부터 불법을 수호하며 구반다와 프레타를 권속으로 거느린다. 광목천왕은 서방을 수호하며 몸은 백색, 갑옷을 입고 손에 용을 잡고 있다. 큰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여 다문천왕은 북방을 수호하며 몸은 녹색,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보배우산 혹은 보배깃발을 들었으며 사천왕상을 지나면 눈앞에 나타나는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체 높이 138cm(좌대 30, 佛身 108,)의 석조여래좌상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좌대 둘레에는 모두 7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우견편단의 가사를 입고 계신다. 佛乳閣(龍王閣)과 좌측편의 三神할매 碑 삼신할매의 좌우측 어깨 아래 위에 천진한 아기들이 기대고, 할매의 품에는 갓난 아기가 안겨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菩薩을 送子觀音이라 하는데, 이 비석상은 불교가 우리나라 三神할매와 관련된 토속신앙을 흡수한 것이다. 佛乳閣에 奉安된 龍王圖를 중심으로 좌측의 堂山大神圖(우), 우측의 龜王大神圖 (좌) 천불성전
천불성전 우측 편으로 삼성각, 약사불전, 지장전이 각각의 건물로 나란히 서 있다. 地藏殿 외벽에 그려진 십우도(심우도) ① 尋牛 ②見跡 ③見牛 ④得牛 ⑤牧牛 ⑥騎牛歸家 ⑦忘牛在人 ⑧人牛俱忘(○) ⑨返本還源(산수자연) ⑩入纏垂手 (행각승) --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데 비유하여 그린 禪畵로 宋나라 곽암선사나 보명선사의 작품이 대표적임. 천불성전 서쪽 외벽 벽화 천불성전 서쪽 외벽에 그려진 팔상성도
線刻으로 그린 雙林涅槃相과 初傳法輪相(우측상단), 三處傳心(靈山會上擧염花, 多子塔前半分座, 범종각 천불성전 佛壇 (석가여래, 보현보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아미타여래, 미륵존불)
석조 삼존비 (보존을 위해 유리 속에 봉안함) 관음전에 봉안된 석조관세음보살 입상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33응신으로, 〈능엄경〉에서는 32응신으로 나타나며, 중생의 처지에 따라 여러 변화신을 보이는 것을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그 모든 위난에 처했을 때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威神力을 갖추신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초명안첩기황주(樵螟眼睫起皇州) : 사마귀 속눈썹에 황제국을 세우니 석조 약사여래대불입상 5층석탑 (신라말 혹은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
2중기단 (하대 갑석 163*163*16, 상대 갑석 116*116*15, 상대 기단 높이 85, 가로세로 116), 탑신 옥개 층급받침 각 4개씩 있고, 상대 기단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상대 면석 중앙에 1개의 탱주가 조각되었고, 1층 탑신괴임이 3중으로 만들어 졌으며 탑신 각층에는 탱주가 생략되고, 우주만 조각 되었으며, 하대 기단부는 2개의 큰 돌로 만들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