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 온 나룻배조차 버려야 하는 구도자 같은 눈빛
-안도섭 원로시인의 등단50주년 기념시집 『파고다의 비둘기와 색소폰』을 읽고
이시환
시인・문학평론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서 잘 사는 길인가? 어떻게 살아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질곡(桎梏)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엇이 인간을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참다운 진리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얻는 과정이 도(道)를 구하는 길이라 한다면 그 길은 실로 험난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는 평탄한 길만이 놓여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험준한 산을 넘고, 때로는 사막을 가로지르고, 때로는 거친 물길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부득불 지팡이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겠고, 부득불 나룻배에 몸을 옮겨 싣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도(道)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곳에 이르렀으면 그동안 고맙게도 내 몸을 지탱해주고 실어다준 지팡이와 나룻배조차 버려야 하고, 마땅히 잊어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지팡이와 그 나룻배의 고마움을 기억하며 연연한다면 여전히 인간으로서 생로병사의 인연에 매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맙기 그지없는 그들조차 다 버려야 한다고, 다 잊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부처님은 강조했던 것이리라.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詩作)의 모티브를 제공받은 것으로 추론되는, 한용운 시인은「나룻배와 행인」이라는 그 유명한 시를 남겼다. 물론, 작품의 주제가 부처님 말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구도자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나룻배의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입장에 전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나 태도가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지만 어쨌든, 부처님 말씀과는 상충되는 입장임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구도(求道) 역시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70일 동안에 쌓인 여독(旅毒)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불현듯 찾아오신 원로시인님으로부터 곧 발행되어 나올 시집의 편집 원고를 건네받고, 먼저 일독하면서, 나룻배와 관련된 부처님 말씀을 떠올렸다. 왜일까? 원로시인님의 등단50주년을 기념한다는 이 시집『파고다의 비둘기와 색소폰』에는 전체 97편의 작품이 6부로 나뉘어 실려 있고, 그들은 말(言)조차 버리는 과정에 있는 듯 극도로 감정이 제어되고 있고, 불필요한 너스레를 용납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정서적 언어로써 그 ‘나룻배’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100여 편 가까이 되는 시작품들 속에는, 아니 행인들을 실어 나르는 그의 나룻배에는, ①자연현상을 바라보는 정감어린 눈빛과 ②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가슴과 ③무념(無念)・무욕(無慾)・무상(無常)을 자각(自覺)・체득(體得)해가는 구도자적 발걸음 등이 가득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정감어린 눈빛과 그의 따뜻한 가슴은 그 나룻배를 기억하고, 그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이요, 그것의 표현이지만, 구도자적 발걸음은 그 나룻배조차 잊어버리고, 끝내는 그것을 온전히 버려야 하는 길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나의 이 비유적인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부득불 덧붙이고 싶다. 곧, 시인께서 한반도 남북분단의 원인과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나, 국보 제1호였던 숭례문이 불에 타 없어져 버린 사건을 기억하고 아파하는 일이나,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사람들의 책략과 망언에 대한 분개나,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당한 무고한 백성들의 고통을 아파하는 일이나, 한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등이 다 동시대를 사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 나룻배의 고마움을 느끼고 기억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듯, 시인께서 하늘의 높고 푸름과 깊음을 노래하거나, 바다의 생명력을 찬미하거나, 매화와 소나무의 절개를 노래하거나,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구절절이 노래하는 것도 다 인간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그 나룻배에 대한 추억일 뿐이다. 그렇듯, 시인께서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몰래한 사랑이든, 온갖 빛깔의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을 아파하는 인간사조차도 그 나룻배에 대한 추억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인께서 자신을 건네다 준 그 나룻배조차 잊어버리고, 끝내는 버려야할 일임을 알면서도 그 나룻배를 추억하는 것은 선대(先代)의 한용운 시인이 그랬듯이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가슴과,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는 눈을 가진, 각별히 느끼는 이[感人]요, 보는 이[視人]이기 때문이리라. 보고 느낀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과 다를 바 없지만 문제는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았느냐 일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 시인만의 진정한 능력이 반영되리라 믿으며, 그 점에 관해서는 시인님의 작품들이 알몸으로써 보여주리라 믿는다.
겨울 산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명상의 시 쓰다가 지우다가
나무 우듬지
까치 재재기면
산수유 열매는 저리 익어
언 여울은
번뇌 삼매에 들었는지
첫눈에도 살갗 하나 접지 않으니
옷깃 스치는
저 솔바람 소리
피리 구멍인 듯 매암 돌고
고즈넉한 산
이 한철 움쭉 않는 여래如來인가
목탁 소리 젖는 산울림……
-작품 「겨울 산」전문
이 시 한 편이면 원로시인님의 시세계를 족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특히, “말조차 버리는 과정에 있는 듯 극도로 감정이 제어되고 있고, 불필요한 너스레를 용납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정서적 언어로써 그 ‘나룻배’를 노래하고 있다.”고 이미 서둘러 말했지만, 그리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바로 그 점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그것이 이 시집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위 작품의 중심 소재는 물론 ‘겨울 산’이다. 시인은 표현의 대상인 그 겨울 산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으며, 그 결과를 어떻게 표현해냈는가? 겨울 산하면 우리는 통상 헐벗은 나무를 떠올리고, 이따금 그 나무 가지나 꼭대기에 앉아 우짖는 검은 까마귀나 까치를 떠올리고, 계곡에 얼음장 밑으로는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듣는 듯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나무 가지 끝마다 맴도는 매서운 바람소리도 듣지만 머지않아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먼저 터뜨리고, 조금 있으면 양지 바른 곳에서부터 새움이 트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모습이야 우리의 겨울 산자락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정경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의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첫눈 내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울물을 보고 번뇌삼매에 빠진 이를 떠올렸으며,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품어 아우르고 있는 가슴 깊은 겨울 산 전체의 모습을 통해서 깨달아 흔들림 없는 여래[如來=부처]를 떠올리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문장으로써 표현해 내는 일인데, 그것을 위해서 시인은 전체에서 분분으로, 다시 부분에서 전체로 자신의 시선을 옮겨가며 그것의 겉과 속의 이미지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정신적 지향점인 이상세계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작(詩作)의 요체(要諦)인데 이 부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면 성급한 평가일까. 솔직히 말해, 타인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면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원로시인께서는 자신의 시작품들에 대해서 시집의‘머리말’에서 스스로 언급하시기를 “내 삶의 작은 숨결이요, 못다 이룬 것들에 대한 갈망이며, 꿈의 여린 송이 같은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내 개인적인 열망인 동시에 시대를 같이 아파하는 이들의 소망”이라 했다. 분명, 그렇다. 시인은 꿈을 꾸는 자이며, 그 꿈을 자신의 눈과 자신의 가슴에 비친 대상(對象)들에게 투사시켜서 새로운 꽃을 피우는 생명의 불꽃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도를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의 영토[彼岸]에 자신을 실어다준 나룻배조차 버려야하듯이, 시인으로서의 도를 깨달았다면 이제 그 시(詩)조차 다 버려야 할 것이다. 마치, 부처가 자신의 가르침을 온전히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었듯이, 원로시인께서도 시를 버리고 말을 버림으로써 시(詩)의 도(道)에 이르도록 문을 여시는 몸짓으로서, 나는 바람 부는 봄날에 ‘파고다 공원의 비둘기와 색소폰 소리의 어울림’을 꿈결처럼 들었나이다.
일독(一讀)의 기쁨을 주신 안도섭 원로시인님께 감사드리며, 등단50주년기념시집 상재(上梓)를 마음으로부터 축원해마지 않는 바이다.
2009년 03월 24일
충무로 사무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