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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과 들뢰즈 대 프로이트와 라깡 사이에서 차히를, 내재의식을 다루는 방식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56NMF)>
『물질과 기억 (1896)』 제3장
벩송(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990 (1919, origine. 1896), 147-
제3장 이마쥬의 잔존 - 기억과 정신 [정신 -> 영혼]
Ch. 3 De la survivance des images - La mémoire et l'esprit 147.
§01 순수 추억 (Le souvenir pur 147-152)
§02 현재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En quoi consiste le présent 15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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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무의식에 대해(De l'inconscient, 156-165)
: 내재의식에 대해(De l'inconscient, 156-165)
순수 추억어떻게 잠재적 상태로보존되는가(se conserver)하는 것은 그것의 근본적인 무력함을 볼 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직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는 다음을 주목하는데 그치자: 즉 무의식적 심리 상태들을 생각하는데서 갖는 혐오감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의식을 심리학적 상태들의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심리학적 상태가 의식적이기를 그치는 것은 아마도 현존하기를 그치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단지 현재의 특징적인 표시일 뿐이라면, 즉 현실적으로 체험된 것의 표시(margque), 즉 작동하는(l’agissant)것의 특징적인 표시일 뿐이라면, 그 때 작동하지 않는 것은 의식에 속하기를 그친 것이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현존하기를 필연적으로 그칠 것이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심리학적 영역 안에서 [157] 의식은 현존과 동의어가 아닐 것이리라, 단지 실재적 행동과 또는 무매개적 효율성(efficacité)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 항의 외연(l’extension)이 이와 같이 제한된다면, 무의식적인 심리학적 상태, 말하자면 결국에는 무력한 심리학적 상태를 표상[재현] 하는데 수고를 덜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식(conscience en soi)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자기의식이 장애 없이 실행될 경우에 그 자기의식이 나타나는 그대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신체적 기능들을 완수하는 존재(un être)에게서 그 의식은 특히 행동을 주재하는 역할을 하고, 또 선택(choix)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의식은, 결단에 대해 무매개적으로 앞선 것들 위에, 그리고 이 앞선 것들과 함께 유용하게 조직될 수 있는 과거 추억들 중에 모든 앞선 것들 위에, 자신의 빛을 투사한다. 그 나머지는 그늘(l’ombre) 속에 머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가 이 작업의 시초부터 추적하고 있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착각을 다시 발견한다.사람들은 의식이, 신체적 기능들과 결합한 다음에도, 우발적으로는 실천적 능력(une faculté)이며 본질적으로는 사변을 향하는 능력(une faculté)이기를 바란다.이 때에 사람들은 이 능력이 자기가 지닌 인식들을 빠져나가게 내버려두려는 데서 오는 이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게다가 이 능력이 능력 자체에게 순수 인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길 지라도, 사람들은 능력 자신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을 밝히기를 그 능력이 포기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이로부터 다음의 결과가 나올 것인데, 즉 그러한 것은 그 능력이 사실상 소유하는 것을 능력에게 권리상 속한다고 하고, 또한 의식의 영역 안에서 실재적인 것 전체가 현실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식에게 진실한 역할을 돌려주시오. 일단 지각되었던 과거가 사라진다고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내가 물질적 대상들을 지각하기를 멈출 때 그 대상들도 현존하기를 그친다고 가정할 이유도 없다.
이 마지막 점을 강조하도록 하자.왜냐하면 내재[무]의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난점들의 중심과 애매함들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널리 퍼져 있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표상[재현]의에 대한 생각은 분명하다. [158] 심지어 사람들은 우리가 무의식적 표상을 항구적 용도로 만들고, 상식에 보다 더 친밀한 개념작업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로 [한편] 모든 사람들은 우리 지각작용에 현실적으로 현재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이 물질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각되지 않은 물질적 대상이, 즉 상상되지 않은 이미지가 일종의 무의식적 심성적 상태가 아니라면 무엇이 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 찰나에 지각하고 있는 당신의 방의 너머에는 이웃하고 있는 방들이 있고, 그 다음에 집의 나머지 부분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당신이 거주하는 거리와 마을이 있다. 당신이 동맹을 맺고 있는 물질에 대한 이론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실재론자이건 관념론자이건 간에, 당신이 마을과 길과 집의 다른 방들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의식에는 없지만, 당신의 의식 밖에서 주어지는, 많은 지각작용들을 분명하게 생각한다. 방, 거리 마을의 지각작용들은 당신의 의식이 이것들을 받아들임에 따라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 있었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가정에 의해서당신의 의식이 이것들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것들이 무의식의 상태로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현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다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즉 의식 밖의현존이, 대상들이 문제될 때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나고, 우리가 주체에 말할 때는 모호하게 나타나는가?
우리의 지각작용은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 두 선들을 따라 펼쳐진다. 하나는 AB라는 수평선인데, 그것은 공간 속에서 동시적인 모든 대상들을 포함하며, 다른 하나는 CI라는 수직선인데, 시간 속에서 간격을 지니면서 배열된 우리 추억들이 그 위에 놓인다. 두 선들의 교차점인 I는 우리 의식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유일한 점이다.그런데 수평선 AB 전체의 실재성이 비록 지각되지 않은 채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실재성을 상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반대로 수직선 CI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지각된 현 I만이 우리에게 진실로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디서 비롯되는가?[159]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두 계열들 사이에 있는 이 근본적인 구별의 토대에는, 혼란되거나 윤곽이 잘못 잡힌 많은 관념들이, 모든 사변적 가치를 결여한 많은 가정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의 분석을 갑자기 소진할 수 없으리라. 이 착각(l'illusion)을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착각의 기원을 찾으러 가야하며, 착각의 모든 우회로들을 가로질러 이중적 운동을 따라가야만 할지 모른다. 그 이중 운동에 의해 우리는 의식에 연관 없는 객관적 실재성들과 객관적 실재성이 없는 의식의 상태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림 3>
.. C
.. |
.. |
.. |
... A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B
I
이 때 공간은 거기서 서로 병렬되는 사물들을(choses) 무한정하게 보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시간은 그 안에서 잇따르는 상태들을(états) 나타나는 족족 파괴할지 모른다. 이 작업의 일부는 제1장에서 우리가 객관성 일반을 다루었을 때 이미 완성되었고, 다른 부분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물질의 관념에 대해 말할 때 완성될 것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본질적인 점들을 알리는데 그치자.
우선 AB라는 선을 따라 배열된 대상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가 곧 지각할 것을 표상[재현]한다. 반면에 선 CI는 이미 지각된 것만을 포함한다. 그런데 과거는 우리에게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과거는 자신의 가능한 작용을 소진해 버렸거나, 아니면 현재적 지각작용의 생명성을 빌려 옴으로써만 영향을 재발견할 것이다. 반대로 무매개적 미래는 긴박한 행동으로, 아직은 소비되지 않은 에너지로 이루어진다. 물질적 우주에서 아직 지각되지 않은 부분은 약속(promesse)과 위협(menace)으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그 부분은 우리에게는 어떤 실재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재성은 우리 과거의 현존에서 현실적으로 지각되지 않은 기간들(les périodes)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다. [160] 그러나 이 구별은 삶의 실천적 유용성과 물질적 필요들에 아주 상대적이며, 우리의 정신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한 [형상]형이상학적 구별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을 제시했는데, 우리 주위에 위치한 대상들이 우리에게 다양한 정도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완수할 수 있는 행동을, 또는 사물들로부터 겪어야만 하는 행동을 표상한다고 했다. 이 가능적 행동의 지불기한은 바로 상응하는 대상으로부터 다소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시되며, 따라서 공간 속에서 거리는 시간 속에서 위협(menace) 또는 약속(promesse)의 인접성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공간은 이처럼 우리의 근접 미래의 도식을 우리에게 단번에 제공한다. 그리고 이 미래는 무한정하게 흐르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에, 미래를 상징하는 공간은 무한정하게 열린 채로 그[공간의] 부동성 속에 머무는 속성을 갖는다.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우리 지각작용에 주어진 무매개적 수평은 우리에게 비록 지각되지 않고 현존하지만, 필연적으로 더 넓은 원에 의해서 둘러 싸여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 원은 자신을 둘러싸는 다른 원을 포함하면서,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따라서 너비인 한에서 우리의 현실적 지각작용의 본질로부터, 보다 넓은 경험에 연관해서 심지어는 무한정한 경험에 연관해서 하나의 내용이 항상 있다는 것이고, 그 내용은 경험을 포함한다. 이 경험이 자각된(aperçu) 수평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 경험은 우리 의식에 부재하지만, 그래도 역시 현실적으로 우리 의식으로부터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처럼 현재적 실재성들로 세운 이 물질적 대상들에 매달려 있다고 느끼는 반면에, 과거로서 우리 추억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함께 이끌고 가면서도 차라리 치워버린 척하고 싶어 하는 그런 쓸모없는 것과 같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공간을 무한정하게 열어 놓게 하는 그 동일한 본능이 [161]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 뒤에서 시간을 닫아버리게 한다.그리고 실재성이 부피[너비]인 한에서 우리 지각작용을 무한히넘어서는 것처럼 우리에게 나타나는 반면에, 반대로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현재적 찰나와 함께 시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처럼보인다. 그 나머지는 실천적으로 망각된다.따라서 하나의 추억이 의식에 다시 나타날 때는 그것의 불가사의한 출현을 특수한 원인들에 의해서 설명해야 하는 유령(revenant)의 효과를 우리에게 만들어 낸다. 실재성에서 추억과 우리의 현재 상태의 밀착은 깨닫지 못한 대상들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에 밀착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비교될 수 있다.그리고 무의식(l'inconscient, 내재의식)은 이 두 경우에서 같은 종류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사물들을 재현하는 데 많은 수고를 체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냐하면 우리는, 공간 속에서 동시적으로 배열된 대상들의 계열과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전개되는 상태들의 계열 사이에서, 이런 차이들을 강조하고 반대로 유사성들을 지워버리는 습관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첫째 계열에서 항들은 완전히 결정된 방식으로 조건지어 지기 때문에, 새로운 항의 출연을 예견될 수 있다.예들 들면, 내 방을 나온 후 [그 다음에] 어떤 방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나는 안다. 반대로 [둘째로] 나의 추억들은 외견상으로는 변덕스러운 순서로 나타난다. 따라서 표상들의 순서는 전자의 경우에 필연적(nécessire)이고 후자의 경우에 우연적(contingent)이다. 이 필연성은 내가실체화한(hypostasier) 것인데,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의식 전체의 바깥에 있는 대상들의 현존을 말할 때이다. 만일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대상들의 전체성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는데 있어서 내가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대상들의 엄밀하게 결정된 순서가 대상들에게 연쇄의 측면을 제공하기 때문이며, 나의 현재적 지각작용은 연쇄의 한 고리[찰나]에 불과하리라. 그러면 이 고리가 자신의 현실성을 나머지 연쇄에게 소통한다. [162] -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의 추억들도 동일한 종류의 연쇄를 형성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결단들에서 항상 현재적인 우리의 성격들(les caratères, 인격들)이 우리의 모든 과거 상태들의 현실적 종합이라는 것을 역시 보게 되리라. 이 응축된(condensée) 형식 하에서 우리의 앞선 심리학적 삶은 우리에게 있어서 외부세계 이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외부세계의 매우 작은 부분만을 지각할 뿐인데, 그 때는 반대로 살아온 경험의 전체성(la totalité)을 이용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전체성을 이처럼 축약된(abrégé, 응축된) 형태로만 소유하며, 우리의 옛 지각작용은 마치 구별된 개별성처럼 간주되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한 효과, 또는 그것들의 환상(fantasie) 덕분에만 다시 나타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처럼 완전한 파괴나 변덕스러운 소생으로 보이는 겉보기는 단순히 현실적 의식이 매순간 유용한(l'utile) 것을 받아들이고, 찰나적으로 잉여분(le superflu)을 물리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현실적 의식은 항상 행동을 향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지각작용들 중에서 최종 결정에 협조하기 위해 현재적 지각작용과 함께 조직화되는 것들만을 물질화[신체화]할 수 있다. 만일 나의 의지가 공간의 주어진 한 점 위에 나타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공간 속의 거리라고 일컫는 일체를 구성하는 매개적인 것들 또는 장애들을 나의 의식이 하나하나 건너뛰어야만 한다면, 반대로 이 행동을 밝히기 위하여, 현실적 상황을 유비적인 이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하는 시간의 간격 그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의식에게는 유용하다. 그리고 의식은 단번에 그리로 옮겨가지 때문에, 과거의 매개적인 부분 전체가 의식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우리의 지각작용들이 공간 속에서 엄밀한 연속성으로 배열되게 하는 그 동일한 이유들에 의해, 우리의 추억들은 시간 속의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밝혀지게 된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자각되지 않은 대상들과 시간 속에서 무의식적인 추억들이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현존(l'existence)의 근본적으로 다른 두 형식에 관여하지 않는다.그러나 전자의 경우에서 행동의 요구들은 후자의 경우에서 요구들인 무엇과는 전도되어(inverses)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현존(l'existence)이라는 주요한 문제에 접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형이상학의 중심으로 인도되는 어려움 인데 질문에서 질문으로 스쳐갈 수 있는 문제이다. 경험의 사물들 – 여기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것들 – 과 관련하여 현존은 두 개의 재통합된 조건들을 함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0. 의식에서 현시(présentation, [현시]), 20. 논리적 연결(connextion) 또는 인과적 연결, 즉 그렇게 제시된 것이 앞선 것과 뒤따르는 것과 맺는 연결, 두 가지이다. 우리에게서 한 심리학적 상태의 또는 한 물질적 대상의 실재성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 사실로 이루어진다. 즉 [하나] 우리의 의식이 상태와 대상을 지각한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 상태와 대상은 시간적 공간적 계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그 계열에서 항들이 서로 서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조건들은 몇몇 정도들을 인정하며,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들이 둘 다 필연적이면서도 불균등하게 채워진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현실적인 내적 상태들의 경우에 그 연결은 덜 밀접하고, 과거에 의한 현재의 결정은, 우연에 커다란 여지[자리]를 남기면서, 수학적 함수 도출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 거꾸로 의식에게 현시는 완전한데(parfaite), 왜냐하면 현실적 심리학적 상태는 우리에게 작동 자체에게 그 내용의 전체성을 넘겨주기 때문이며, 그 작동에 의해 우리는 상태를 자각한다. 반대로 만일 외적 대상들이 문제이라면, 연결(connextion)이 완전한데, 왜냐하면 이 대상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다른 조건이, 즉 의식의 현시는 부분적으로만 채워질 뿐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대상은, 그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들에게 연결하는 수많은 자각되지 않은 요소들 바로 그 때문에, [164] 우리에게는 물질적 대상[신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우리에게 보게끔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물질 뒤에 무한하게 숨기고 있는 것 같다. - 따라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현존(existence)이 그 단어의 경험적 의미에서, 의식적 이해(appréhension, 파악)[10]와 규칙적 연결[20]을 동시에, 그러나 다른 정도들[정도의 차이]로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오성은 선명한 구별작업들을 정립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서, 결코 사물들을 그와 같이 이해하지 않는다. 오성은 모든 경우에서 여러 비율로 혼합된 두 요소들의 현전(présence)을 인정하기보다, 오성은 이 두 요소를 분해하기를 좋아하며, 한편으로 외적 대상들에게[너비 속성] 다른 한편으로 내적 상태들에게[사유 속성]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현존 양태로 부여하기를 좋아한다.이 두 현존 양태들은, 각각이 단순히 우월하다고 선언해야 할 조건으로부터, 배타적 현전[출현]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 때에 심리학적 상태들의 현존은 의식에 의한 상태들의 파악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외적 현상들의 현존은 현상들의 동반(concomitance)과 계속(succession)의 엄격한 질서 속에 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로부터 현존하지만 지각되지 않는 물질적 대상들은 의식에게최소한 참여도 불가능하게 되고, 내적이지만 의식되지 않은 상태들은 현존에게 최소한의 참여도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첫째 착각의 귀결을 보여주었는데, 이 착각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거짓으로 이르게 한다. 둘째 착각은 첫째 착각을 보충하는 것인데, 무의식의 관념 위에 인위적인 모호성을 퍼뜨리면서 정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작업을 오염시킨다. 우리의 과거 심리학적 삶은 필연적 방식으로 그 삶을 규정하지 못하면서도, 전적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를 조건 짓는다. 또한 그 삶은 전적으로, 비록 과거 상태들 중에 어떠한 상태도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성격(caractère, 인격) 속에 드러난다. [165] 이 두 조건들은 재통합되어서, 과거의 심리학적 상태들의 각각에게 무의식적일지라도 실재적인 현존을 보증한다.
(6:25, 56NMC) (7:24, 56NME)
첫댓글 여기에서는 너비의 양태와 사고의 양태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둘 사이에는 데카르트처럼 이원론이 아니라, 현재에서 분열 즉 스키조를 드러내는 것이 생명현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 박홍규 선생님이 공간의 가로축과 시간의 세로축이라는 설명을 MM의 이 무의식 설명의 단락에서 찾았을 것이다. 들뢰즈가 벩송 작품에서 MM을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였고, 그의 “영화”에 관한 책에서 이 무의식에서 분열을 보았을 것이다. 현상에서 사물들의 집적으로 영화가 아니라,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이 화면에 투영되어 가상성으로서 보여주는 것은 상상작용을 넘어서 공상(환타지)에 이른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상상은 신체와 더불어 일어나지만, 공상(환영)은 환각(환청, 환시)과 비슷하게(상사) 달리 이미지를 창안한다. (뒤에 이어서)
이 환영의 이미지에는 삶에서 훌륭함, 성실함, 경건함 등의 태도 없이도 등장하는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의 극한은 파라노이아처럼 착각을 불러올 것이다. 공상작용의 다른 추리가 채GPT에서 언어적으로 나오는 서술일 것인데, 챗의 추론 작업은 무수히 많은 파라독스들 생산할 것이다. 파라독스들 중의 양극의 두 파라독스 중에서 어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그 선택자의 삶의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선택의 태도를 인격성(들뢰즈의 특이성)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56N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