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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1절 외디푸스 제국주의
2절 프로이트의 세 원문들
3절 생산의 연결적 종합 [참조, 1장 1절] 편집증 기계 – 과정, ...과 ...과
4절 등록의 이접적 종합 [참조, 1장 2절] 기적 기계 – 전유, 이거나 이거나
5절 소비의 연접적 종합 [참조, 1장 3절] 독신 기계 – 적용, 그러므로 ..이다
외디푸스 문제거리를 ‘저넘어’ 가는 길은 가족주의(가부장제)가 아니라 인류애(공산사회)로 넘어가야 할 것인데 왜 5절에서 종족[인종]으로 넘어갔을까? 언어학적으로 기표(상징)이, 형이상학적으로 상층사고, 현실정치에서 국가주의가 외디푸스에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적인 분화에서 외디푸스의 해석 등장은 인종[종족]에 관한 것인가? 절대적인 참주(황제)의 권한에 관한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에 관한 것인가? - 현실적으로 순서로 나열과 평면상의 배열은 삶의 터전의 필요(수요와 소비)의 생산물이다. 그럼에도 욕망하는 기계는 흐름을 우선으로 과정상 배열과 배치를 바꾸며 나아갈 것이다.
그 변화와 생성을 배제하고 필요와 소비를 우선으로 하여, 일반적인 사람들(논리)은 안정성(체제와 제도)을 유지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일반적인 자들(감화)은 흐르고, 산보하고 여행하면서 접속하고 절단하면서 터전에 변화를 일으킨다. 별종 또는 노마드 취급은 가족주의 들어가지 않지만 인간 종의 종족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깊이 넓게 보면 생명은 종족으로보다 생명종의 연관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흐르는 생산하는 기계는 온생명 속에서 흐르는 것을 먼저 또는 깊이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깊이에서 보아 온생명과 더불어 인간종의 삶은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할까? 이런 문제거리를 들/가는 여기서는 아직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56VMB)
5. 소비의 연접적 종합 La synthèse conjonctive de consomation 100, 133
[분리적이고 대응적 사용은 유목적이고 다의적인 사용과 대비된다. 무의식적 자아는 요소적이거나 형상적으로 또는 상징적 기호로 대입시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다양체이며, 유목적이고 다의적이다. 무의식이 유목적이란 탈영토화되어 있으면서, 지배자에 코드에 따르지 않는 인민을 뜻한다. 확장하여 해석하면 권력을 양도하지 않은 인민이 노마드인 셈이다.(40QKF)]
2.5.1. 그 두 가지 사용, 분리적 사용과 일대일 대응의 일의적 사용, 유목적 사용과 다의적인 사용 Ses deux usages, ségrégatif et bi-univoque, nomadique et polyvoque. 100-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고 하는 셋째 종합에서는 어떻게 기관들 없는 신체가 정녕 하나의 알(oeuf)이었던가를 보았다. 이 경우에 알이란 축들이 가로지고, 여러 지대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마당과 밭들이 자리잡고 지형골로 측정되며, 잠재력으로 차 있고, 턱[접경]들로 구획되어 있다.(100) - [지구의 생성 변화 과정을 또는 생명의 형성과정을 생각하자.(42MLB)]
레잉(Laing, 1927–1989)이 분열과정을 입교의식의 여행, 자아 상실의 선험적 경험이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일리 있다. .. “나는 이를테면 생명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에서 출발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기관없는 신체), “나는 내 앞에 하나의 무서운 여행을 눈여겨 보아왔다. 아니, 느꼈다.” (100)
렌쯔(Lenz 1751-1792)의 산책, 니진스키(Nijinsky, 1890-1950)의 산책, 베케트(Becket, 1906-1989)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산책들은 효과적인 실재성들이다. 그러나 질료의 실재적인 것은 모든 외연을 떠났다. (100)
그래서 밖에서나 안에서나 이제 유목 주체가 체험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짝지어진 순수한 강도들만이 눈에 띈다. 이것은 환각적 경험도 망상적 사유도 아니라 하나의 느낌, 즉 강도량의 소비로서 일련의 감동들과 정서들이다.(100-101)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이 생성들, 강도있는 이행들과 이동들 속에 뒤섞여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시간을 오르내리는 모든 표류(dérive)가 그렇다. - 나라들, 인종들, 가족들, 부모의 호칭들, 신의 호칭들, 역사의 인명들, 지명들, 심지어 갖가지 사실들이 뒤섞여 있다. 나는 신이 되고, 나는 여자가 되고, 나는 잔다크 였고,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e, 204-222)이고, ...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내 아들이었다(고 나는느낀다). (101)
프로이트와 그의 외디푸스라기보다 오히려 손디(Lipot Szondi, 1893-1986)의 경우가 그렇다. “아마도 벌레이기를 원하면서도 나는 거인(Mahood)가 될 거야! 그러면 나는 벌레이어야 할 것이야. 나는 아무개(Tartempion)가 되려고 노력함으로써 아마도 나는 내가 되고자할 무엇이 될 것야. 그러게 되면 나는 아무개(Tartempion)가 되기만 하면 될거야” (101)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면(mélanger), 그것은 강도에서이다. 여기에서 장소들과 형태들의 혼동(confusion)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장소와 형태)은 새로운 질서, 즉 강한 강도적 질서를 위하여 해체되어(défaits) 있기 때문이다.(101) [고른 평명위에 새로운 배치를 생각하자]
2.5.2.기관들 없는 신체와 강도들 Le corps sans organes et les intensités -
이 질서란 어떤 것인가? 기관없는 신체 위에 맨 먼저 배치되는 것은 인종들, 문화들 및 그 신들이다.사람들은 어느 점에까지 분열증자가 역사를 행했고, 보편사를 환각했고 망상했으며, 인종들을 분봉했는가를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모든 망상은 인종적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필연적으로 인종주의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101)
이와 반대로 인종들과 문화들이 이 신체 위에 지역들, 즉 강도들의 지대들, 잠재력들의 터전들을 지시한다. 이 터전의 내부에서 개인화, 남녀의 성별의 현상들이 생산된다. 한 터전에서 다른 터전으로 넘어가려면 문턱같은 경계선들을 타고 넘어가야 한다. (101)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 곳에는 기관없는 신체가 사람들이 떠난 장소에 다시 갇힌다. 우리는 잔혹성의 극장을, 우리들의 문화에 대항하는 투쟁, “인종”들 간의 대결, 멕시코 및 그 권력들과 종교들을 향한 아르또(Artaud 1896-1948)의 대이동과 분리시킬 수 없다. 개체화 작업들은 강렬한 진동들에 의해 명백하게 규정되는 힘들의 터전에서만이요, 또 이 터전이 잔인한 인물들을 부추기는 것은 그들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유도기관(마네킹들)인 한에서 이다. (102)
[아르또의 분열자(schizo)는 잔인성의 극장이다] “나는 가정의 아들들 모두 사귀었다…. 나는 절대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크리스트교인적이 결코 없었다… 그래 나는 당신들의 비체 눈을 감았다. 나는 짐승이요 검동이다.” (102)
2.5.3. 여행, 이행: 나는 ...이 된다. Voyages, passages: je deviens. 102 -
그런데 자라투스트라를 거대정치 및 인종들의 활기(animation)와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인종들의 활기는 니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나는 독일인이 아니다, 나는 폴란드인이다. 여기서 개체화는 힘들의 복합체들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힘들의 복합체란 인물들을 한 죄인 속에 체현되는 그 수만큼의 강도의 상태들로서 규정하는 것이요, 가족과 ‘나’의 인위적 통일을 파괴하여 줄곧 경계선을 타고 넘기를 마지않는 것이다. (102)
“나는 프라도(prado)이다. 나는 프라도의 아버지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나는 레셉스(Lesseps)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파리사람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용어를, 정직한 죄인이라는 것을 주고자 한다. 나는 샴비쥬(Chambige), 즉 또다른 정직한 죄인….내가 나의 겸손함을 괴롭히고 불쾌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사의 모든 이름이 다름 아닌 나라고 하는 것이다.” (102)
[표상의 무대에서는 하나의 ‘나’가 자기를] 인종들, 민족들,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일이 없지만, 강도 있는 양들의 생산 속에서는 고유명사들이 인종들, 민족들 및 인물들을 지역들 경계선들 또는 효과들과 동일시하는 일이 더러 있다. (102-103)
효과들은 한갓 원인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역을 채우는 것, 기호들의 체계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학에서 잘 볼 수 있다. 물리학에서는 고유명사들이 잠재력들의 영역에서 그러한 효과들을 지시한다(줄Joule 효과, 제베크Seebeck 효과, 캘빈Kevin 효과). 역사에서도 물리학에서와 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잔 다크 효과 헬리오가발루스 효과 – 역사상 모든 이름들이 그러하고,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지 않다…. (103)
2.5.4. 모든 망상을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이다. Tout délire est social, historique, politique. 103 -
빈약한 실재성, 실재성의 상실, 삶과의 접촉의 결여, 즉 자폐증(l’autisme)과 감정 둔화(l’athymie)에 관하여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말하였다. (103)
분열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하여, 즉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는 어디에나, 또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었고 도 생산될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하여 이 거리를 뛰어넘는다.(103)
분열자에게는 원리들이 없다. 그가 어떤 것이라면 이것은 오직 그가 다른 것임으로써 이다. 그가 거인인 것은 오직 버러지임으로써 만이요, 또 버러지인 것은 오직 그 아무개입으로써 이다. (103)
수에톤(Suetone, Caius Suetonius Tranquillus v. 70-128)가 전하는 열두 편집증자들의 전적으로 동방식 기법이다. (104)
베스(Jacques Besse, 1921-1999)의 놀라운 저서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정신분열증자의 이중의 산책을 볼 수 있다. (104)
콜럼버스(Colomb, 1451-1506)는 춤추는 창녀인 체하는 가짜 제독인체 함으로써만 그 배의 승무원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다시 제독이 될 수 있었다. (104)
콜로소프스키(Klossowski, 1905-2001)의 정식에 따르면, 정신분열증환자의 어리광대짓(histrionisme)이다 ..(104)
라이히(Reich 1897-1957) .. “정신분열증의 특징은 생명적 요소의 경험이다‥… 생명의 감정에 관해서 말하면, 신경증환자와 도착자가 정신분열증자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치사한 소매상인이 위대한 탐험가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104-105) ... 현실과 단절된 자폐증의 입원환자의 모습 ... [분열증은 여분의 주체이다. 그 주체는 유목적이고 새로운 질서의 생성자이기 때문이다.(42MLB)]
2.5.5. 종족[인종]들 Les races 105 -
105 루이 17세 사건에 있어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여 가장 멋있게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리슈몽(Richemont)의 경우에 있어서,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의 욕망하는 기계 또는 독신기계이다. (105)
나는 루이 17세이지만, 나는 스스로 루이 17세라고 말한 에르바고(Jean-Marie Hervagault, 1781-1812)요 브뤼노(Mathurin Bruneau, 1784-1822) 이기도 하다. (105)
이접의 그물(réseau) 속에 일련의 특이성들, 또는 연접적 조직(tissu) 속의 강도있는 상태들, 그리고 원 전체 위에서 위치를 옮기는 주체(sujet transpositionnel)이외 아무 것도 없다.(105)
여기서 연접적 종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은 나다! 그러므로 왕국은 내 차지다. 그런데 이 나는 원을 빙빙 돌고, 그 진동의 결과로 생기는 잔여의 주체일 따름이다. (106)
2.5.6. 신원[신분] 확인이 의미하는 것 Ce que veut dire identifier -
[분열자에서 자기 신원의 확인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 그는 자기가 없고, 차라리 다른 인종, 다른 문화로 표현된다. 나아가 다른 종교로 표출된다면 그는 신이 된다. 신원확인이 심층인격과 동화작업이라면, 심층자아가 인격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현실의 개인은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확장될 것이다. - 외디푸스적 신원확인은 종족, 문화 속의 개인으로 환원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팔루스의 결여를 설명할 수 있다.]
모든 망상(délire)은 역사적-세계적, 정치적, 인종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종들, 문화들, 대륙들, 왕국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 긴 표류(dérive)가 외디푸스의 파생물만을 구성하는 것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가정의 질서는 깨지고 가족들은 아들, 아버지, 어머니, 누이 할 것 없이 모두 거부되고 있다. (106) [분열자의 망상은 외디푸스 속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열자는 자신을 가족밖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슈레버 망상을 고려해 보자. 확실히 인종의 사용[인종이 거론되고], 그리고 역사의 이름과 동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06)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인 것들을 무더기로 동원하지 않는 편집병적 망상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파시스트가 단순한 편집증환자라고 결론짓는 것은 잘 못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여, 이 잘못은 또한 사물의 현실적(actuel) 상태에서 망상[착란]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가족 내부의 결정에 다시 끌어갔기 때문이다. (107)
이 거대한 내용이 프로이트가 행한 정신분석학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어떠한 흔적도 존속하지 못하고, 모든 것은 외디푸스 속에 분쇄되고, 가루가 되고, 삼각형화 된다. 외디푸스적 정신분석의 불충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남에 따라서, 모든 것이 아버지 위에 포개진다. (107)
마노니(Maud Mannoni, 1923-1998))가 보고하고 있는 아주 정치적인 성격을 띤 편집증적 망상을 고찰해보자. ... 예 마르티니끄 섬[카리브해의 섬]에서 온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망상 속에서 아랍인들과는 알제리 전쟁으로, 백인들과는 68년 5월사건 등등으로 관련을 가진 처지에 자기를 둔다.. (107)
[이 사나이를 분석한 후] 그런데 마노니는 정신병 속에 함축된 “반항(révolte, 거역자)”의 성격과 “만인에 대한 진리”의 성격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환자가 스스로 정치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인종편견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주제들을 위하여, 가족관계를 폭파시키는 것은 자궁(matrice)인 한 가족관계 내부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마노니는 본다. (107)
배제(forclusion)라는 라깡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봉기자(rebelle, 반역자)를 억지로 외디푸스화하게 된다. 외디푸스의 부재는 아버지 측의 결여(manque), 즉 구조 속의 구멍(trou [빈상자])으로서 해석된다. 그fj고 나서 이 결여의 이름으로 외디푸스의 다른 극, 즉 어머니의 덜분화(indifférencié)상태에서 신원 확인하는 극에로 되돌려 보낸다. 이중구속의 법칙은 사정없이 작용한다. ... (107-108)
그러나 외디푸스 의존 하에서, 즉 외디푸스화 되기 위하여 환자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에 의존함에 따라서, 역사적 정치적 테마 전체가 상상적인 신원확인의 집합으로서 해석된다. (108)
2.5.7. 어떻게 정신분석학은 사회-정치적 내용들을 말살하는가 Comment la psychanalyse supprime les contenus socio-politiques 108 -
정신분열증적 알(l’oeuf)은 마치 생물학적 알(l’oeuf)과 같다. 이것들은 비슷한 역사(이야기)를 지니고 있고, 이것들의 인식은 동일한 난점과 동일한 착각에 부딪쳐왔다. (108-109) [무의식이라는 알 = 자연이라는 알 = 자기에 의한 자기 생산 이전의 덩어리(알).]
착각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발육의 발단이다. .. 유도되는 것과 유도하는 유도자 사이에 일종의 합치를 믿게 할 수 있었다.(109)
이러한 것이 외디푸스의 역사이다: 즉 부모의 모습들은 유기체화작용자(organisateur)가 아니라, 어떤 값어치를 지닌 유도자(inducteur) 또는 자극이다. 이 자극은 아주 다른 과정을 촉발한다. .. 발육의 시초에 자극, 즉 외디푸스의 유도자가 진실한 유기체화작용자라고 믿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의식 또는 전의식의 작동(opération)이고, 외현적 지각이지, 무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109)
프로이트는 자신의 근원적 환영의 이론 속에서, 매우 오래된 유전의 흔적 및 초자아의 내부 성장의 원천들에 관한 이론에서, 활동적인 인자들은 실재적 부모들이 아니로, 어린이가 상상하는 부모도 아니라고 줄곧 주장하다. 라깡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109-110)
그러한 아 프리오리를 끌어들인다 해도 정신분석 전체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가장 좁은 의미의 가족주의(familialisme)로부터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145)
사람들은 가족과 외디푸스의 자궁의 요소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만 가족을 초월적이게 하는 수단을 발견할 뿐이다.(110)
2.5.8. 완고한 가족주의 Un familialisme impénitent - 110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고칠 수 없는 가족주의이다. 이 가족주의는 무의식을 외디푸스의 틀 속에 집어넣고, 이 쪽 저쪽에서 동여매고, 욕망하는 생산을 분쇄하고 환자로 하여금 아빠-엄마라고 대답하게 하고, 밤낮 아빠-엄마를 소비하게끔 한다. (110)
그러므로 푸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정신분석은 19세기의 정신병원적 정신의학이 삐넬(Philippe Pinel, 1745-1826)과 튜크(Daniel Hack Tuke, 1827-1895)와 더불어 계획했던 것을 어느 모로는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의사의 도덕적 권위를 아버지이자 재판관, 가족이자 법률과 같은 것으로 확립하는 것 – 그리고 끝으로 다음과 같은 파라독사에 도달한다. “심성적 환자가 자기 의사의 실재적 인격 속에서 전적으로 소외되는 한편, 의사는 심정적 질병의 실재성을 광기의 비판적 개념 속에 흩어버린다.”
이 질서에서 각자가 자기의 삼각형을 다른 사람들의 삼각형과 어떻게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늘어난 가족 전체가 다음의 두 극, 즉 구조화하고 구별하는 건전한 삼각형화 극과 덜분화상태 속에서 융합하는 작용을 하는 도착된 형태들의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되었다. (111)
오슈망(Jacques Hochman, 1934-)은 정신병가족의 흥미있는 변양들(variétés)을 동일한 “융합 공준(postulat fusionnel)” 아래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소위 융합가족(la famille fusionnelle)인데 ... 둘째 분열가족(la famille scissionelle) ... 셋t째 관상가족(f. tubulaire) .. 넷째는 배제가족(la f. forcluante)인데, 여기서는 그 성원들 중 한 사람이 제거되고 말살되고 배제되는 데, 그런 중에 구별이 이 사람 속에 포함되는 동시에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 된다. (111-112) ..
외연화한 가족주의에서 가족은 소외와 탈소외의 고유한 능력을 받아들이며, 이 가족주의정신분석학의 어휘를 형식적으로 보존함에도 불구하고, 성관심에 관한 정신분석의 기초적 입장들을 포기하게 한다. (111)
오슈망의 슬로건: “가족에서 병원제도로, 병원제도에서 가족제도로 ... 가족으로 치료회귀!”(111)
그러나 한편 제도적 분석의, 다른 한편 반정신의학의, 진보주의적 내지 혁명적 분야에서도 외연을 지닌 이 가족주의의 위험이 존속하고 있다. 이 가족주의는 확장된 외디푸스의 이중 구속에 부합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사정은 가족 자체에서 병인의 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치료용의 유사가족의 구성에서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112)
제기될 문제는 기초적 집단이 어느 점에까지 인위적 가족에 닮는가, 또는 어느 점까지 이집단이 외디푸스화에 응하는가 이다. (113)
사람들은 가족을 하나의 자궁으로서 또는 좀 더 잘 말하면, 하나의 소우주로 다루기를 고집한다. (113)
이 문제들은 쟝 우리(Jean Oury, 1924-2014)에 의해 가장 깊이 분석되었다. 이 문제들은 혁명적인 정신의학이 공동체적 적응의 이상들과 관계를 끊으려 해도 소용이 없고, 모 마노니(Maud Mannoni, 1923-1998)가 적응경찰이라고 부른 모든 것과 관계를 끊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13)
우리에게는 이런 관점이 쿠퍼(David Cooper, 1931-1986)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 관해서 레잉(이 동방에 유래하는 흐름을 수탄으로 삼은 덕택으로 가족주의로부터 더 자유롭게 되어 있다.) 쿠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다. “가족들은 사회적 현실과 그들의 어린이들 사이를 매개한다. ....[긴 인용]” (113)
반정신의학(l’antipsychiatrie)의 본질적인 주장은 궁극에 있어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소외가 본성에 있어 동일하다는 것인데, 이 주장도 가족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주의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소우주-가족 즉 가족-지침(기계)이 사회적 소외를 표현하는 한, 가족이 가족의 성원들 또는 정신병에 걸린 성원들의 정신 속에 정신적 소외를 조직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원 중에 누가 온전한 사람인가?) (114)
[분열증이 가족적인지 사회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길다. 19세기 중반에 이성(raison)의 역할에 대한 부정은 가족주의에서 근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환자(주체)의 망상은 사회전체의 배분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0QLC)]
2.5.9. 가족과 사회터전 Famille et champ social. 114 -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들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 속에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나의 혁명을 도입하였다. ... 생물과 소우주를 동일시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1907)에서 이 둘(소우주와 대우주)을 모두 열어 놓음으로서 비교의 범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14)
외디푸스 삼각형은 없다. 외디푸스는 열려진 사회터전 안에 언제나 열려 있다. 외디푸스 모든 방향에, 또한 사회터전의 네 구석에 항상 열려진 체 있다.(3+1이 아니라, 4+n으로)삼각형은 단단히 닫혀 있지 않고, 구멍도 많고 물도 새고, 폭파되어, 욕망의 흐름들이 다른 장소들로 빠져나간다. (114)
파농(Franz Fanon 1925-1961)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박해망상의 정신병의 증상에 직면하여 먼저 자기가, “프로이트가 초상례와 멜랑꼴리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무의식적 죄책감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 자문하고 있다. ...한계상황 즉 전쟁에서 외상, 식민의 상태, 사회의 극심한 비참 등은 외디푸스를 만들어내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114-115)
정상적이거나 규범적으로 가정된 외디푸스의 안락한 조건들 속에 실제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 (115)
혁명가는 “외디푸스, 인정하지 마라(connais pas)”라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최초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115)
파농이 지적한 것은 동란의 시기에는 활동적인 투사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중립적인 사람들과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시대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115) [당연히 한 시대의 고른 평면위에는 감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향을 끼친다.]
가족은 자율적인 모습의 의미에서 소우주가 아니다. .. 가족은 본성상 중심을 떠나 있고, 중심을 잃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융합적, 분열적, 관상적, 배제적 가족에 관해 말한다. 그런데 그 가족을 하나의 ‘내부’이게끔 하는 것을 방해하는 절단과 배분은 어디서 오는가? (116) [무의식은 내부이며, 외부적 기표나 외연적 결합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파리꼬뮨, 프레쉬스 사건, 종교와 무신론, 스페인 전쟁, 파시즘의 대두, 스탈린주의, 월남전쟁, 68년 5월‥… 이 모든 것은 무의식의 콤플렉스들을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늙은 외디푸스보다 더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바로 무의식이 문제이다. (116)
곰브로비츠(Gombrowicz 1904-1969)가 말하듯이 구조주의자들은 “구조를 문화 속에서 찾지만, 나는 무매개적 실재성 속에서 찾는다. 내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당시의 사건들, 즉 히틀러주의, 스탈린주의, 파시즘‥… 등등과 직접 관계하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 존경받아왔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인간들 사이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기괴하고 무서운 형상들에 매료되었다.”(116)
2.5.10.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공급
Production désirante et investissement de la production sociale. - 116
그리스 연구가들(les hellénistes)은 존경할 말한 외디푸스 속에도 이미 “정치적인 것”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일리가 있다. 리비도가 그때부터 존경할만한 외디푸스와 아무 상관없다고 결론 지우는 것은 잘못이다. (116)
분열분석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정치분석, 하나의 전투적인 정신분석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허용되어온 가소로운 조건들 아래 외디푸스를 문화 속에 일반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117)
프루스트는, 자기는 내폄파의 작품을 만드는 일과 거리가 멀고,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들 속에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대중예술 또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주장자들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는 말이다. (117)
분열분석은 언제나 인위적이고 억압하면서 파괴하고,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무의식에 도달하려한다. 그렇다. 가족은 자극(stimulus)이다. - 그런데 그것은 어떤 가치를 지닌 자극이요, 조직자도 아니고 탈조직자도 아닌 유도자(inducteur)이다. 반응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언제나 딴 곳에서 온다. (117)
외디푸스 정신분석은 반응을 생산자체의 무의식적 체계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즉 분석적 경제학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아직도 가족적 표현적 상징주의에서 출발하여 반응을 이해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117)
2.5.11. 어린시절[유년기]로부터 Dès l'enfance 118-
가족주의의 주된 논증은 “적어도 시작에서는 ...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논증은 명백하게 정식화 될 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발생의 관점을 거부하는 이론들 속에도 은연중에 존속하고 있다. (118) [중동의 전승도 태초에 .. 이라 라고 시작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작은 항상 둘[두 가지 방향으로]로 나아가며(이것이 바로 거기(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어머니와 관계에서 첫 번째 전외디푸스적 시작을 불러온다. 이 전외디푸스적 시작이란 “인격의 가장 미숙한 단계들의 원초적으로 덜 분화된 상태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작을 불러온다. 그 두 번째 시작이란 아버지의 법률과 더불어, 법률이 가족 안에 규정한 배타적 분화(différenciations)를 지닌, 외디푸스 자신이다. - 결국 [이 둘을 함께 지니고서] 잠재기, 즉 그 유명한 잠재기를 불러온다. 이 잠재기 그 다음에 ‘저 넘어(au-delà, 세상, 피안)’가 시작한다. (118)
유년기에 관한 세 가지 작품을 고려해보자. 발레스(Jules-Louis-Joseph Vallès 1832-1885)의 어린이(L'Enfant)(1879), 다리앙(Georges Adrien, Darien, 1862-1921)의 마음을 낮게(Bas les coeurs, 1889), 셀린느(Céline, Louis Ferdinand Destouches, 1894-1961)의 (Mort à crédit, 1936) (118)
쥐인간(l’Homme aux rats)은 그의 강박관념의 실재적 인자를 구성하고 있는 부유한 여인과 가난한 여인을 차지함에 있어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 “유아기 성욕 인정하는가 또는 성욕성립을 부정하는가?”라고 양자택일 강요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공갈(chantage)이다. (119)
라깡은 과학의 위기들과 단절들에 따라서 학자가 때로는 광기에까지 이르는 드라마가 생긴다는 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귀결을 통해서 “여기서 외디푸스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지만 않는다면, 그 자신이 외디푸스에 말려들지 않았을 것이다.”어린이는 누구나 이런 의미에서 작은 학자요, 작은 칸토르(Cantor)이다. (이러
전외디푸스적인 것은 없다는 것은 진실이며,(119) 외디푸스를 그 가장 어린 시기[나이]까지 추궁해야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을 억압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생산의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비외디푸스적이라 함은 그래도 진실이다. 비외디푸스적인 것은 외디푸스와 똑같이 일찍이 시작되고, 다른 종합들[연결종합과 등록종합]과 더불어 ... 다른 리듬 위에, 다른 체제하에서, ... 똑같이 나중까지 추적되는데.... 이 다른 종합의 용도(usage)는 무의식[내재의식]의 자동생산을 살찌게 하고, 이 무의식[내재의식]은 고아-무의식, 놀이하는 무의식, 명상적이고 사회적 무의식이다. (120)
2.5.12.정신분석학의 셋째 오류추리: 일대일 대응의 ‘적용’으로서 오이디푸스 Troisième paralogisme de la psychanalyse : Oedipe comme "application" biunivoque. -
[첫째 오류가 초월적사용, 둘째는 제한적사용이며, 셋째의 적용의 오류는 자연 생산과 사회생산을 일대 일대응시키려는 사용에 오류가 있다. 이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사용하는 오류이다.]
120 외디푸스 조작은, 한쪽에는 사회적 생산, 재생산, 반생산의 동인들과 다른 한쪽에는 이른바 자연적 가족적 재생산의 동인들 사이에서, 일대 일로 대응하는 관계들 전체를 확립하는 데에 성립한다. 이 조작은 적용(application, 일치)이라 불린다. 모든 것은 마치 책상보가 접혀, 그 4(+n) 모퉁이가 3(접은 일을 조작하는 초월적 인자를 표시한다면, 3+1) 모퉁이에 접히는 것 같이 진행된다. (120)
마술적 정식.... 그러므로 이것(cela)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것(cela)이다. 모든 것을, 설명에 의해, 외디푸스로부터 확실하게 출발한 만큼이나, 적용에 의해, 그 만큼 확실하게 외디푸스로 귀착한다.(120)
출발의 집합들에는 사회조직체.... 인종들, 계급들, .... 도착 집합들에는 아빠, 엄마. 나만이 있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외디푸스에 대해서도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지막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 (121)
외디푸스는 부화뇌동하는[군중심리의] 조작에 비길 데 없는 도구이며, 유럽인의 순종적이고 사적인 최후의 영토성이다. (더구나, 옮겨지고, 멀리 쫓아냈던 경계선이 외디푸스의 내부에 두 극 사이에 이행한다.) (121)
2.5.13.역사 속에서 정신분석학의 [수치]실점 Honte de la psychanalyse en histoire 121-
[저자들은 상징과 리비도, 즉 위대한 인간과 군중의 이원적 구분에서 정신분석학은 부끄러움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외디푸스처럼 취급한 지도자, 히틀러와 루터의 경우를 들고 있다. 우리는 루터를 수치스런 부분으로 취급하는 데 별 놀라움은 없다. 대리자 역할은 주인의 마름의 역할이며,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의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와 정치 해석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이 불명예[수치]에 대해 한마디 하기로 한다. 그 절차는 잘 알려져 있다. 위대한 인간과 군중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두 실재물(entités, 본징들), 두 꼭두각시, 즉 위대한 갑각류와 미친 무척추동물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전자들에] 위인.. 외디푸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후자들에] 군중... 16세기 크리스트교인, 20세기 독일국민... (히틀러는 여성군중과 관련하여 ... 아버지 역할을 하고, 루터는 크리스트교인의 신에 관련하여 여성의 역할을 한다) (122)
정신분석가들은 남근 중심주의에 갇혀있다. (122)
외디푸스는 겹침(rabattement, 포개짐 덮어씌움)이나 적용(application)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외디푸스 자신은 사회 터전의, 이 터전의 생산과 형성의, 리비도적 공급의 어떤 전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개인적 환영(fantasme)도 없듯이 개인적 외디푸스도 없다. (123)
그러므로 여기에는 무의식 속에서의 연접적 종합의 분리차별적(ségrégatif) 사용이 있다. 이 사용은 지배계급에게는 비길 데 없는 무기가 되지만, 계급분할(divisions)에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용은 “우리는 모두 한편이다”(être bien de chez nous, 우리나라 사람이다)라고 하는 감정, 즉 외부로부터 적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등 인종에 속해 있다고 하는 감정을 구성한다. (123) ... 외디푸스는 이러한 국가주의적, 종교적, 인종주의적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반대는 아니다. 우두머리(chef 지도자) 속에 투여되는(se projetter)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에 적용되는 것이 우두머리이다. (123)
라깡[의 분석]은 외디푸스와 분리차별과의 유대를 깊이 있게 밝혔다.
반대로 분리차별적 사용은 외디푸스의 조건이다. (123)
2.5.14.욕망과 하부구조 Désir et infra-structure 124-
그것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공급이 있다. (124)
“그들은 속았다, 대중은 속았다”... 이것은 오해와 착각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문제인데,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이다. 선의식적 공급은 적대 계급의 관심(intérêts)에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무의식적 공급은 욕망들의 위치와 종합의 사용에 따라 행해진다. (124)
무엇인가 유통되고 흐르는 곳에는 어디에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해에 밝은 주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취하거나 졸고있는 주체들까지도 치명적인 아가리에 몰아넣는다. (124)
2.5.15. 격리와 유목생활 Ségrégation et nomadisme 124
그러므로 이것이 분열분석의 목적이다. 즉, 경제와 정치의 리비도 공급(investissememts)들의 특수한 본성을 분석하는 것. 그리고 이에 따라서,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게끔 결정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 속에서(dans)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밑에서(dessous) 생긴다. (124-125)
연접적 종합의 분리차별 사용으로부터 외디푸스가 흘러나온다. 즉 나는 우등한 종족이다. (125) [분리차별은 사회체의 대립에서부터 나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연접의 종합, 그러므로 나는 우등하다고 느끼고, 또한 그래서 열등한 소수자들(분리되어 있는 대중)을 지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느낌이 생각을 지배한다고 말해도 될까?]」
무의식적 혁명적 공급은 다음과 같다. 즉 욕망이 또한 자기에게 고유한 양식으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재절단하며, 그리고 욕망이 모든 분리차별과 이들의 적용을 함께 깨부술 수 있는 흐름을 흐르게 한다. ... [이 흐름 속에서] 아뇨, 나는 당신들 편이 아니오, 나는 밖에 있으며, 탈영토화 되어 있소. (125)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무의식 속에 공급하고 반대 급부하는 강한 능력이다. 외디푸스는 비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조건들 자체가 비약했기 때문이다. 연접적 종합들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은 분리차별적이고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된다. (125)
인종의 테마는 문명의 테마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정신분열증자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몇 가지 시니피에들을 찾아 박식을 겨루는 것도 아니요, 시니피앙을 찾아 텍스트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는 훈련도 아니라, 문학기계의 생산적 사용이요, 욕망하는 기계들의 조립이요 텍스트에서 자기의 혁명적 능력을 끌어내는 정신분열증적 훈련이기 때문이다. 인종에 관한 한, “그러므로 이것은 ..이다” 또는 인종에 관한 이지뛰르(Igitur)의 사색은 광기와 본질적 관계가 있다.(126)
(옮김, 10:16, 56VKH) (12:23, 56V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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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수에톤(Suetone, Caius Suetonius Tranquillus v. 70-128), 로마의 공무원, 전기작가(시저부터 도미티아누스까지 12황제들)
204 헬리오가발(Heliogabale, Elagable, 204-222) 로마황제. 태양의 사제.
1412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열아홉] 프랑스 성녀. 조국을 구하고, 천사 만난 증명이가 없다고 마녀로서 산채로 화형 당했다.
1451 콜럼버스(Christophe Colomb, 1451-1506) 1492 8월 3일 팔로스(Palos)에서 출발하여 10월 12일(두 달 열흘만)에 과나하니(Guanahani, 토착민의 명칭)섬에 도착
1483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종교개혁가. 루터파 창설자.
1751 렌쯔(Jac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1832 발레스(Jules-Louis-Joseph Vallès 1832-1885), 프랑스 기자, 작가, 극좌파, L'Enfant(1879)
1842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 이지뛰르(Igitur, 1925)(ou La Folie Elbehnon):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의 산문으로 된 미완성 꽁트이다. 1869년 경에 무의 발견으로 구상한 것이며, ...[무는 무한이 아닐 것인데...]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독일의 철학자.
1859 베르그송(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2 다리앙(Georges Adrien, Darien, 1862-1921), 프랑스 작가, 아나키스트 경향, 마음을 낮게(Bas les coeurs)
1889 가르송(Maurice Garçon, 1889-1967) 프랑스 변호사, 법률고문, 수필가, 소설가, 역사가.
1889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독일정치가, 나찌즘.
1890 니진스키(Vaslav Nijinsky, Nizhinski, 1889-1950), 폴란드 출신 무용수, 1918년 광기 속으로 1919년 스위스 정신과의사 블뢰러(Eugen Bleuler)의 치료를 받다. 일기(Journal)(1953, fr. 1988) - 남성이면서도 셰헤라자드(Shéhérazade, chorégraphie de Fokine, 1910)를 맡았다.
1893 손디(Lipot/Léopold Szondi, 1893-1986) 헝가리 의사, 정신병리학자. « psychologie du destin » 창안자.
1894 셀린느(Céline, Louis Ferdinand Destouches, 1894-1961), 작가, 의사, 신용을 건 죽음(Mort à crédit, 1936)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극작가.
189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유대계 오스트리아-헝거리 의사,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1933년에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 덴마크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1904 곰브로비츠(Witold Gombrowicz, 1904-1969) 폴란드 작가.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Mercure de France, 1969.
1906 베케트(Samuel Becket, 1906-1989) 아일랜드 출신 작가.
1921 베스(Jacques Besse, 1921-1999) 영화음악과 연극 음악 작곡가. La Grand Pâque, Belfond, 1969.
1923 마노니(Maud Mannoni, née Magdalena Van der Spoel, 1923-1998) 네덜란드 출신 프랑스 여성 정신분석가. 교육자.
1924 우리(Jean Oury, 1924-2014) 프랑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제도적 정신치료의 주장자.
1925 파농(Franz Fanon 1925-1961) 카리브 지역 출신 정신과의사 혁명가. 지상의 저주받은 사람들 Les Damnés de la terre (1961)
1926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1961.
1928 젠티스(Roger Gentis, 1928–2019) 프랑스 정신과 의사. [쟝 우리와 작업?]
1927 레잉(Ronald David Laing, 1927–1989), 영국에서 반정신의학 운동(avec David Cooper, Aaron Esterson) La politique de l'expérience, 1967(tr.fr. Stock, p.106.)
1931 쿠퍼(David Cooper, 1931-1986)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신과의사.
1934 오슈망(Jacques Hochmann, 1934-)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자폐전문. 파리정신분석 회원이지만 라깡 계보는 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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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치 가계(La famille Cenci ou Cenci Bolognetti) 로마의 군주 가계, 부, 범죄, 불행으로 유명하다. 교황이 한명 추기경이 네명이다. [교황으로 첸시(Jean X Cenci, 860-928 (재위914-928) 122대 교황.)
루이 17세와 미스터리: 루이 17세 사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한 사람이 3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중의 하나가 리슈몽사건이다. 모두 가짜다. 루이 17세 부검 의사가 그의 심장을 보관했고, 그것을 마리앙트와네트의 머리카락 DNA의 일치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루이 17세(Louis XVII, Louis Charles de France, 1785-1795)
- 리쉬몽 백작(baron de Richemont) / 나운도르프(Karl Wilhelm Naundorf(f), 1787-1845)는 거짓 프랑스 황태자(리쉬몽 백작)의 재판에 증언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으나(1834) 추방되었다.
- 에르바고(Jean-Marie Hervagault, 1781-1812) 루이17라고 주장한자. 가짜.
- 브뤼노(Mathurin Bruneau, 1784-1822) 루이 17세라고 주장, 사기꾼.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 영국 물리학자. 1840년 줄 효과(열과 전도체에 흐르는 전류와 관계)
제백(Thomas Johann Seebeck 1770-1831) 독일 물리학자 (AO 103)
캘빈(Kevin, Lord Kelvin, William Thomson, 1824-1907) 아일랜드 출신 영국 물리학자. 열역학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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