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2편
부르짖는 기도와 신뢰의 고백
(찬송 360장)
2023-4-29, 토
맥락과 의미
142편은 다윗의 시편이고, 그가 굴에 있을 때에 드린 기도입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이 굴로 피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먼저 사무엘상 22장에서는 아둘람 굴에서 피하여 숨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든지 다윗을 도와주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4절에서 ‘나를 알아보는 이 하나도 없고 피할 곳이 모두 없어졌고 생명을 돌보는 자가 없다’ 하고 고백한 것을 이러한 배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는 다윗이 엔게디 굴에 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용변을 보러 굴에 들어온 사울을 살려줍니다. 이러한 장면은 “나를 뒤쫓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저의 생명을 감옥에서 건져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6-7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142편은 호소와 확신을 여러 겹으로 교차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선 1-2절에서 어려움을 호소하고 3절에서는 ‘주님께서 아신다’ 하고 노래합니다. 그리고는 3절 하반절과 4절에서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다시 5절에서는 주님께서 산 자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 되신다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6-7절에서는 다시금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시인은 장차 의인들이 자기를 두르게 될 것을 기대면서 시를 마칩니다.
1. 부르짖는 기도 (1-2절)
2. 하나님의 아심과 사람들의 모름 (3-4절)
3. 신뢰의 고백 (5절)
4. 간구와 소망 (6-7절)
1. 부르짖는 기도 (1-2절)
1절에서는 주님께 직접 구하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2절에서는 자기의 원통함과 고통을 그분 앞에 쏟아 내고 아뢴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단순하고 비슷한 말을 두 번씩 반복하여서, 자기의 다급한 형편을 아주 명확하게 밝힙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원수에게서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원수를 바라보면서 말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찾습니다. 원수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하지도,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도 않고, 다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자기가 좋은 상황일 때에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통함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나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심과 사람들의 모름 (3-4절)
3절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한다”는 직역하면 ‘숨결이 아득해진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끈을 놓고 죽음으로 들어가는 상태를 묘사한 말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인내할 수 있는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정신이 아득해질 뿐 아니라 숨을 쉬는 것도 서서히 가늘어지고 불규칙적으로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친히 나의 길을 아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주님(=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부르면서, 자기의 길을 온전히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자기를 맡깁니다.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시인은 자기의 길을 아시는 주님을 부릅니다.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시인은 우선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자기의 가는 길에 덫을 숨겨 두었다고 합니다. 3절에 ‘길’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아시는 시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이 방해하려는 시인의 길입니다.
시인이 가는 길은 하나이지만, 그 길에 대하여서는 서로 이해가 엇갈립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여호와께서 아시는 길입니다. 따라서 악인이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악인의 반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시인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오른편을 살피시고 둘러보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성경에서 ‘오른편’은 도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순례자의 오른편에서 도움이 되시고(시 121:5), 여호와께서 왕 오른편에 계시면서 왕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합니다(시 110:5).
시인이 “오른편을 살피시고 둘러 보십시오” 하고 구하는 것은 그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계시면서 도와주셔야 하는데 지금 그곳에 계시지 않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시인에게 도와줄 분이 필요한 자기의 모습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 자기를 알아보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사회에서 단절되었음을 뜻하고, 실제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피할 곳이 모두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어디에 숨든지 사람들이 밀고할 것이므로 그는 이제 숨을 곳이 없어졌습니다.
셋째, 자기의 생명을 돌아보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명을 돌보면 자기의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윗을 모른 체하고 피할 곳도 사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되십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모른 체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길을 아셨습니다’(3절). 따라서 자기의 길을 아시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피할 곳이 되시고 생명을 돌보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3. 신뢰의 고백 (5절)
2절에서도 하나님을 2인칭 “주님”으로 부르면서 “주님께서 친히 나의 길을 아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는데, 5절에서도 여호와를 주님이라고2인칭으로 친근히 부릅니다.
시인은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울 이도 없고 피하여 숨을 곳도 없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친근히 나아갔습니다. 외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시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윗은 숨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을 가리켜 “산 사람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자신의 생명을 돌보셔서 결국 자신이 여호와로 인해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에 레위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분깃’이라고 하셨습니다(민 18:20; 신 10:9; 수 13:4). 사람의 생명이 땅에서 나오는 소산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서 유지되는 것임을 이러한 제도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인도 같은 심정으로, 자기의 피난처가 되신 여호와께서 자기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자기도 죽지 않고 살아서 장차 산 자들의 땅에서 한 자리를 얻게 될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4. 간구와 소망 (6-7절)
시인은 계속하여서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큰 소리로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자기를 뒤쫓는 자들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참조. 삼하 22:18). 시인은 자기가 매우 비천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에 비유하였던 것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삼상 24:14).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근거가 “자기의 비천함”입니다. 자신의 어떤 좋은 것을 내세우면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그대로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가 이렇게 낮게 된 처지에서 주님께 호소하고 나아오면 그 기도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또 다른 근거는 ‘주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동굴과 같은 현실에서 구원하여 주시면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하겠다고 하면서 주님의 구원하심을 구하였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것이 구원을 구하는 근거가 됩니다.
동굴이라는 말은 다윗의 구체적인 도피생활 뿐 아니라 신자가 개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표시할 수 있고, 혹은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참조. 시 88:8; 사 42:7).
우리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에 우리의 비천한 상태를 주님께 그대로 아뢰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낮게 된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장차 주께서 시인을 후대하실 것과 그때에 의인들이 시인을 둘러쌀 것을 이야기합니다. 시인이 자기를 낮추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려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자,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때에 시인은 의인들이 자기를 둘러싸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악인들이 자기를 둘러싸서 해악을 끼치려 하였는데, 이제는 의인들의 무리 안에서 함께 주님을 찬송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시편은 개인적인 신앙의 투쟁을 묘사한 시편일 뿐 아니라 종말의 승리와 완성을 소망하게 하는 시편입니다(참조. 시 22:22; 계 7:9).
믿고 복종할 일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목자가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그리고는 목자가 앞서서 나아가면서 양 무리를 인도해 나아가십니다. 교회 안에서는 회중 한 사람의 신앙의 투쟁을 귀하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함께 찬송하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고 항상 기쁨이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한 때에 신자들은 주님께 피하면서 주님을 ‘나의 분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낮은 처지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또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기 위하여 도와 달라고 구합시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친히 영광받아 주십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기뻐하며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내가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유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찬송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5절, 주는 나의 피난처시며 나의 기업
시인이 여호와를 이렇게 ‘나의 피난처’와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하였는데, 시편 16편이나 73편, 예레미야애가 3장을 보면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옵니다.
시편 16편에서는 다른 신에게 제사를 하면서 세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시인은 여호와께 피하고 그분이 자기의 기업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시편 73편에서도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실족할 뻔하였던 시인이 여호와께 피하고, 동시에 여호와를 영원한 분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이 멸망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이라고 하면서 그분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 여호와를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평안할 때에 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 죽음과 같은 어려운 현실에서 여호와께 피하고, 생명이 되신 여호와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새로운 땅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을 소망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