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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서양의 실체론과 달리 불교는 우주 삼라만상을 연기로 바라본다. 근대를 지배한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과 달리, 온 생명과 불이(不二)의 공존을 하고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생태론과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는 불살생의 생명론을 펼친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패러다임이나 논리로 불교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불교학자나 활동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불교 담론은 대개 당위적, 선언적, 윤리적이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환원론이나 에코파시즘적 성향마저 보였다. 지속가능을 저해하는 모순 및 이를 강행하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없는 종교적, 윤리적 담론은 모순을 은폐하고 오히려 이들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이에 지속과 변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장애 및 결정 요인을 인간의 본성, 죽임의 문화, 기계론적 세계관/인간중심주의, 성장신화/에너지 문제, 국가, 자본주의 체제, 4차 산업혁명으로 나누어 불교의 틀에서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별이 폭발하며 형성된 물질이 모여 태양계와 지구를 만들고, 그 지구에 38억 년 전에 생명이 탄생하고 그 뒤 5~6억 년 뒤에 진핵세포가 출현하고 이것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수천만 종의 생명으로 진화하였다. 600만 년 전에 인류는 침팬지에서 분리되어 오늘 우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든 생명이 나고 죽는 것을 되풀이하고 수백만 종의 생명이 모두 사라지는 대멸종도 5차례나 있었다. 너와 나도 머지않아 죽어 4대-흙, 물, 불, 바람-로 돌아갔다가 언제인가 지구나 태양이 폭발하면 우주의 먼지로 흩어지고 그중 일부는 또 어디선가 별이 되리라. 만물이 나고 머물고 사라진다고 하지만, 머무른다고 하는 기간조차 찰나의 순간에도 변한다. 사람들은 어제 본 나와 오늘 본 나를 같다고 생각하지만, 단 1초의 순간에도 내 얼굴엔 수천 개의 세포가 바뀐다. 몸만이 아니다. 그 순간에 머릿속의 신경세포와 시냅스(synapse)가 새로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며, 내 마음과 나의 정체성에 변화를 준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물질이라도 그 원자를 들여다보면,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으며 찰나의 순간에도 소립자들은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한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곳으로 알려진 조그만 허공조차 요동친다. 인류라는 종과 인류 문명, 더 나아가 지구의 사라짐은 당연한 우주의 순리다. 이런 영겁의 변화 속에서 138억 년을 1년으로 환산하면 인류 문명사는 12월 31일 12시 59분의 단 몇 초도 되지 않는다. 우주의 시공간에서 보면, 몇 만 년에 걸친 인류 문명의 생성과 소멸은 풀잎의 이슬이 맺혔다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좁쌀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잠시 파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우주의 시공간관에서 보면, 인류 문명의 지속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을 사유하고 노래했다. 인간의 수명은 백 년을 넘기 힘들어도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영원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승의 삶은 하루살이처럼 짧지만, 내세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우주와 생명, 인간의 기원을 밝히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설혹 인류에게 멸망의 위험이 도래하더라도 인간의 지혜, 도구와 테크놀로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 중심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해와 목적대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고 다른 생명을 학살하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는 바람에 지구는 온난화로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고 있으며, 슈퍼재앙 또한 곧 닥치리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38%가 멸종위기에 놓였다. 석탄과 석유는 100년 치도 채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하고 생명을 복제하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유전자가위, 크리스퍼가 표적 이탈을 하여 전혀 새로운 인간 종이나 생명이 인류 문명이나 지구 생태계에 임계점이 넘는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유럽인이 가져온 병균이 마야족을 멸망시킨 것처럼 실험실에서 합성한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처럼 신의 경지에 이른 과학기술은 신의 경지의 혼란과 파국을 야기할 것이다. 강(强)인공지능을 결합한 인조인간이 출현할 경우, 인간보다 영리하면서 수명의 제한이 거의 없고 중금속 등 환경오염 물질로부터도 사멸되지 않는 이들이 인류마저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공룡의 대멸종을 부른 것처럼 일정 크기 이상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 전체의 생명을 순식간에 사멸시킬 수도 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인류는 수백 년이나마 더 지속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일신론과 이신론, 성선설과 성악설로 논쟁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주장이며 반증이 불가능한 비과학적 진술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38억 년 동안의 생물 진화를 일반화하여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기계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을 짜 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물론 오류도 많고 비판도 받으며, 도킨스의 의도와 달리 천박한 유전자 결정론처럼 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만, 이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속성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그의 지적대로, 98.8%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일치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는 자식과 집단의 유전자를 늘리기 위하여 타자를 약탈해 왔고 이는 지금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우리 안에서도 이기적 유전자들은 경쟁, 이기심, 탐욕, 거짓말, 성욕, 폭력의 동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며 협력을 하였다. 한 원시인이 홀로 사냥하여 한 달에 사슴 3마리를 잡았는데, 10명이 짝을 지어 사냥하여 40마리를 잡았다면, 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확대하는 데 더 유리하다. 인간은 사회와 문명을 수용하는 대가로 이기적 본능과 욕구를 유보하고 이타적 협력을 했다. 아기는 엄마에 의존하며 이타성을 배운다. 인간은 이타적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형성하면서 “혈연 이타성(kin altruism),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집단 이타성(group altruism)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하였다.” 협력을 잘하는 자가 진화에도 유리한 탓에 몸도 변해, 인간의 두뇌신경세포에 타인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거울신경체제(mirror neuron system)가 형성되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거울신경체계는 언어 학습과 소통에 관여하고 도움을 주면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현격하게 다르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데 관여한다.” 페라리 등은 거울신경체제가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기인한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인간다울 수 있는 최상의 특성은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의 선악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의 선을 서로 증장하게 하느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 실존적 존재, 사회적 존재, 미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에서 의미를 구성하고 진리, 선, 정의 등 더 나은 의미와 가치를 찾아 성찰하고 결단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구현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노동과 소통을 통해 타인과 공감하고 상호작용하고 협력하면서 자기를 실현하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미적 존재로서 인간은 물질과 현실을 초월하여 더 새롭고 더 아름답고 더 생명적인 것에 감동하고 이를 추구한다.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은 과거에서 미래, 비속한 것에서 성스러운 것, 현실에서 이상과 유토피아, 과거에서 미래, 인간에서 신을 지향한다. 지극히 선한 자에게도 타인을 해하여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악이 있고, 악마와 같은 이에게도 자신을 희생하여 타자를 구원하려는 선이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종합하여 추론하면,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선과 악의 비율을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① 노동과 생산의 분배를 관장하는 체제, ② 타자에 대한 공감, ③ 의미의 창조와 공유, ④ 사회 시스템과 제도, ⑤ 종교와 이데올로기, ⑥ 의례와 문화, ⑦ 집단학습, ⑧ 타자의 시선 및 행위, ⑨ 수행, ⑩ 법과 규정, ⑪ 지도자 등 대략 열한 가지다.” 이 가운데 불교는 ②, ③, ⑤, ⑥, ⑦, ⑧, ⑨, ⑩에서 다른 종의 생명과 공존하는 삶 내지 지속가능발전을 도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이 세상은 불난 집이다.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여 모든 탐욕을 소멸하고 불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에 의하면, 내가 지극한 정성으로 수행하고 정진을 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그를 부처로 만드는 순간 내가 부처가 된다. 이를 인지과학적으로 말하면, 타자와 나의 연기적 관계, 곧 상호생성자(inter-becoming)로서 ‘눈부처 주체’임을 깨닫고 거울신경체제를 작동시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를 구제하는 것이 바로 불성을 보는 것이다. 이를 의례로 집약하여 집단적으로 참여하면서 서로 선의 의미를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다. 나태해지고 탐욕에 이끌릴지라도 도반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계율을 떠올리며 금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하여 내 안의 불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고 이를 집단학습을 통하여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는 ①, ④, ⑪의 면에서는, 환멸문(還滅門)의 노동이나 전륜성왕처럼 경전에 이를 활용할 개념이 담겨 있지만, 아직 선을 증장하는 것으로 활용되고 있지는 않다. 죽음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다. 물고기가 죽으면 게나 고동이 그 살을 파먹고 새끼를 낳고, 남은 뼈에도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깃들며, 그 미생물을 먹고 다시 물고기가 자란다. 물고기는 사멸한 것이 아니라 게와 고동과 미생물로 전이한 것이다. 죽음에 다가갈 때 인간은 비로소 유한성을 인식하고 삶에 대한 실존적 성찰을 한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기 앞의 세계와 타인에 대해 의미를 찾고 실천하도록 이끈다. 에코 시스템 속에서 개체별로 죽는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그것은 불멸한다. 죽음은 영겁의 순환 과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폭력에 의하여 이 에코 시스템의 질서를 깨고 순환에 제동을 걸고 죽음이 생에 부정적 의미를 던져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도살을 통해 동물은 부재의 지시대상이 된다.” 고기는 죽은 동물을 지시하기보다는 음식물만을 지시하게 된다. 식탁엔 미각을 자극하는 고깃덩이가 있을 뿐이다. 그 동물이 살려고 하고 다른 동물을 살린 생명성, 태어나서 자라면서 겪은 서사, 육식과 폭력을 자행하고 조장하는 국가, 자본, 세계 체제의 부조리와 야만은 부재한다. 폭력에 의한 살인이 때로 공감과 성찰을 낳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드문 경우다. 폭력은 폭력을 조장하고 복수나 대응을 부른다. 죽임의 문화는 죽음이 순환을 통한 지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차단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강력하게 아힘사를 펼친다. “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서로를 말미암아 생명이 활동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사실의 판단’이라면, 필연적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은 ‘가치의 판단이다.” 이런 지혜를 깨달은 순간, 우리는 나와 연기관계에 있는 모든 생명과 물질들과 공존을 해야 함을 깨닫는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니, 늘 방생을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는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도 방생하도록 권해야 한다.” 승려들은 물속의 작은 생물도 죽이지 않고자 이를 거르는 여수낭을 가지고 다니며 물을 걸러 마셨다. 신라 시대의 법흥왕(514∼540 재위), 성덕왕(702∼737 재위), 백제 시대의 법왕(599∼600 재위)은 모든 생명, 가축까지도 죽이지 말라는 교서를 내렸다.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으려는 이 정신은 지극히 숭고한 것으로 철저히 계승해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불살생은 가능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 더 큰 죽음을 낳는다. 이에 필자는 자비심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개체적 불살생’에서 ‘연기적 불살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모든 동물은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취하여 물질대사를 통하여 이를 에너지로 전환해야만 삶이 유지되기에, 물질대사는 생명의 조건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식물 또한 뇌는 아니지만,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인지하고 반응하며 동물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실제 호흡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찰나의 순간에도 수많은 미생물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자연의 순환 속에서 한 생명의 죽음은 다른 생명의 탄생과 생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체는 자연 및 다른 생명체와 깊은 연관관계 속에 있기에 개별적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이 더 많은 생명을 죽이는 ‘카이바브(Kaibab)의 역설’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 포기 풀에서 미생물로 가득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생명성이 발현되는 소리와 움직임에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모든 생명이 나의 삶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으면서 역동적으로 서로 생성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생명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다른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을 가지고 연기적 공존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다른 생명의 삶과 죽음에 관여해야 한다. 아울러 살해와 폭력의 뿌리에 대한 성찰, 욕망을 지멸하는 참된 존재의 회복, 대립적인 것을 내 안에 품어 하나로 아우르는 대대(待對)의 참구를 통한 아만(我慢)의 제거와 무아의 깨달음,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에 바탕을 둔 명상과 수행을 통하여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 대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내고 실천해야 한다. “(기계론과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은) ‘빈틈’을 사고하는 자체를 봉쇄한다.(……) 불교는 기계론과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서로 상생하고 조화를 이루는 생태론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모든 자연과 생명을 개별적인 실체로 보는 서양 근대의 주류 세계관과 달리 서로 의지하고 작용하고 생성하는 연기적 세계관을 연다.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 자연현상을 지배하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서 자연과 인간, 우주 삼라만상을 그물코로 연결된 하나로 바라보는 유기체적이고 전일적인 세계관을 제안한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한 동일성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공하다고 하여 인간과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중도와 공의 세계관을 펼친다.” “(……)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종이 멸종위기에 있으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인류 또한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이에 맞서서 인류는 성장의 한계를 직시하고 지속가능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 1972년 로마클럽에 제출된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에서 처음으로 (……) ‘지속가능발전’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1992년 리우선언을 통하여 이를 전 세계의 임무 및 인류의 행동지침으로 규정하였다. 1992년에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가 설립되고 2001년에 새천년개발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 MDGs), 2015년에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이하 SDGs)를 합의하였다. (……) 불교는 공업(共業)과 중도(中道)를 결합하여 성장신화를 해체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삶,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생활을 제시한다.” 4대강 사업에서 보듯, 실질적으로 폭력을 독점하고 힘과 법의 강제를 통하여 지속가능발전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는 국가다. “장아함의 《전륜성왕수행경》에 근거할 때, 불교가 개인의 고(苦)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苦)에도 관심을 두었으며 열반이 개인의 수행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보시와 같은 선행을 종합하여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국가는 ‘다른 생명과 약자들에 대한 자비가 모든 행동과 정책의 추진력이 되고 정법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모두를 위한 행복을 추구하는 생태복지국가’일 것이다. “이제 모두가 탐욕보다 자비, 양적 발전보다 삶의 질,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무역량보다 이 땅의 강과 숲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이 살고 있는지, GDP보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얼마나 미소를 짓고 있는지, 국부를 늘리기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공평하게 가치를 분배하고 있는지, 기업 이윤을 늘리기보다 얼마나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자기실현으로서 노동하는지,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기보다 못난 놈들이 얼마나 자신의 숨은 능력을 드러내는지, 내기하고 겨루기보다 얼마나 모두 함께 모여 신나게 마당에서 노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나라를 경영하고 정책을 구사하려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는 데 불교는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나와 너,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사이에 스며있는 권력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연기론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분석과 성찰을 종합해야 한다.” “오늘 생명체의 지속을 방해하고 생명위기를 자행하는 최고의 장애는 자본이다. (……) 불교의 교리는 무소유를 지향하고, 나눔을 장려하고, 탐욕을 없애고, 이타적 삶을 추구하기에 교리상 반자본주의적이다. 그럼에도 (……) 자본의 착취와 확대재생산 방식, 개인과 자본, 노동과 자본의 역동적인 관계, 자본주의의 모순인 물화(物化, reification)와 소외, 착취, 불평등 등을 분석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이 한계를 직시하면서 불교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타자와 연기를 깨달아 자발적 가난과 소욕지족의 삶을 사는 것, 생명을 죽이는 생명관리정치에 맞서서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담론과 정치를 수행하는 것, 공유경제의 영역을 늘리는 것, 무엇보다도 곳곳에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 구성원이 서로 낮춤과 나눔과 섬김과 자비를 실천하는 불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제 생명은 최적화(optimization)를 매개로 현재를 관리하여 미래를 생산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세계 제약시장의 규모는 1,200조를 넘어선다. 1950년대에 폴리오 백신을 발견한 조나스 소크는 “특허요? 백신에 대해 어떻게 특허를 낼 수 있나요? 차라리 태양을 특허 낸다면 몰라도요.”라고 말했지만, “미 생명공학기업인 인사이트 게노믹스는 게놈 관련 특허 신청에 가장 앞장서 513개의 특허를 따냈으며 출원 중인 것만 5만여 건이며, 휴먼 게놈 사이언시즈는 112개의 특허권을 얻었으며 출원 건수는 7,500건, 셀레라 게노믹스는 6,500건을 출원한 상태다.”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문제, 인간의 수명과 건강, 질병의 문제는 자본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본이 야기한 불평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인공지능이나 4차 산업혁명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결정하는 가장 핵심 요인 또한 자본주의 체제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자본주의와 결합한다면, 자본의 이윤 축적을 위하여 이들 기술이 악용될 것이기에 그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50년 안에 붕괴 내지 주변화 가능성이 크다. 첫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의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지금 이윤율은 40%대에서 1930년 공황 때보다 낮은 10%대로 떨어졌으며 계속 하락하고 있다. 둘째, 사물인터넷과 3D 프린터를 연결하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한계비용 제로, 곧 무료로 서로 언제든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계비용 제로의 물품 교환체계에 토대를 둔 공유경제는 서서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대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개체를 창출했을 때 대변혁이 발생하였다. 셋째, 10년 안에 태양광 에너지는 화석연료보다 생산가가 하락할 것이다. 넷째, 세계 곳곳에서 공동생산하고 공동 분배하는 코뮌들이 세워지며 자본주의를 내파하고 있다. 다섯째, 불평등과 실업이 점점 심화하여 월스트리트 점거(occupy wall street) 운동 같은 대중 저항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촉발하여 세계혁명의 양상으로 표출될 모순과 잠재적 동력을 안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의 붕괴를 상쇄하는 요인들이 많다. 자본은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비정규직과 대량해고를 단행하면서 노동 착취도를 증가하고 임금을 인하하고 공간을 이전하고 대중을 포섭하여 대중의 저항을 미리 봉쇄하는 한편, 분출된 저항에 대해서는 강력히 탄압하면서 이윤을 높이려는 다양한 시도를 할 것이다. 노동자의 자리를 인공지능 기계나 로봇으로 대체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쇄가 붕괴하는 전체의 추세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독일의 녹색 에너지 생산 비율이 단지 23%인데도, 정부나 환경단체가 아니라 전력 및 공익사업 회사들이 ‘예비용’ 가스 및 석탄 연료 화력발전소에 투자하는 일을 꺼리고 있다. 지금은 재생에너지나 공유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이 5~10%에 남짓하지만, 곧 20~30%에 이를 것이고 이 지점만 돌파해도 자본주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며, 그 시점은 앞으로 30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2030년대 후반이면 G7의 GDP 대비 부채가 위험 수준인 100%를 넘어 200%에 근접하고 이자 상환 비용도 5%에서 10%를 상회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율이 0%에 이르는 시점이 2030년대 후반에서 2040년대 사이에 올 가능성이 크다.” “38억 년 동안 공존하며 진화해 온 생명체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아직 약(弱)인공지능(Weak Artificial Intelligence)에 머물고 있는 알파고를 넘어서서 자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고 작업하며 자아마저 갖춘 강인공지능(Strong Artificial Intelligence)을 응용한 안드로이드가 에너지마저 태양열로 취하면, 수명의 제한이 없고 무한한 복제가 가능하며 중금속 등 오염물질에도 강하다. 이들이 스스로 복제하거나 인공지능 생명을 창조하면서 다른 생명과 공존 · 공진화를 거부하고 인류를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인류 문명은 지속을 멈출 것이며, 이들이 생명과 자연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관리할 수 있다. 기계처럼 차가운 냉혈한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반면에 따스한 인간은 모두가 좋아한다. 우리는 기계와 생명을 구분하고 생명성을 추구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계와 생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기계와 대립되는 생명의 의미, 생명의 가치, 생명성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강인공지능이 더 발달할 경우 이를 응용한 기계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물질대사를 하고 자기복제를 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한다면, 더 나아가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감정마저 가진다면, 그것은 생명인가, 기계인가. 그런 시대에서 생명의 의미, 가치, 생명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끊임없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다른 생명과 서로 작용하고 의지하고 생성하며 더불어 살아온 생명의 본성을 어디서 구현할 것인가.” 불교에서 볼 때 생명이란 “수정란에 전생의 업(業)에 따라 식(識, viññāņa)이 들면서 정신인 명(名, nāma)과 육체인 색(色, rūpa)의 복합체인 명색(名色, nāmarūpa)이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과학과 통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서양과학에서 보면, “생명은 DNA 사슬에 새겨진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복잡성과 조직체계를 가진 자율적인 개체로서 물질대사를 하면서 스스로 화학반응을 하면서 살아가고 자기복제를 하고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고 발달하면서 진화하는 유기체다.” 이를 비롯하여 서양의 근대적 생명관은 생명과 다른 생명과 물질 사이의 연기성, 생명성과 그 의미, 생명의 의지, 지향성 등을 간과하는 경향이 강하다. 불교와 현대과학을 결합해서 볼 때, “생명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반복 속에서 연기와 구세(九世)의 업(業)에 따라 기존의 경험과 기억과 업이 축적되어 DNA 사슬에 유전 정보가 새겨진 몸에 식(識)이 결합되어 가유(假有)의 가합태(假合態)인 오온(五蘊)으로서 복잡한 조직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에코 시스템 속에서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자연환경 및 다른 생명과 상호작용과 적응을 하는 가운데 자율적으로 자기결정을 하여 먹이를 취하여 대사(代謝)를 하고 여러 행위를 하면서 지은 업을 몸과 유전자에 담아 종족보존을 위한 자기복제를 하는 가운데 서서히 발달하고 진화하면서 차이를 만드는 상호생성자로서 공(空)이다.” “이를 간단히 하면, 생명을 ‘DNA 사슬로 이루어진 정보 덩이가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차이를 생성하는 공(空)’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차이란 ‘끊임없는 반복의 순환 속에서 앞의 반복과 뒤의 반복 사이에 겹치지 않는 모든 정보와 의미, 업의 다름, 동일성에 포섭되거나 이로 환원하지 않은 채 동일성의 배제와 폭력을 지양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정의하면, 강인공지능을 응용한 인조인간이나 인조생명체는 DNA 사슬로 이루어진 정보가 없음은 물론 자신이 살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지향성이 없으며 차이보다 동일성을 지향한다. 이렇게 생명을 정의하여 이에 맞는 생명철학과 윤리를 정립해야 한다.”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라 하더라도 결단하여 먹이를 잡고 도망가고 짝을 선택하여 알을 낳고 죽으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생명과 상호작용하면서 무진장의 생명을 생성시키면서 시공간에 주름을 빚고 허다한 차이와 의미를 남기고 달라진 미래를 구성한다. 그렇듯, 상호생성자로서 생명이 다른 생명과 연기적 관계 속에서 생성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차이, 그 차이들이 빚어내는 여러 층위의 시간과 공간의 주름들, 그 주름을 풀어내면서 해석되는 다채로운 존재의 의미, 가능성 · 잠재성 · 현실성, 몸에 담긴 기억들의 편린과 그 기억들이 지향하는 내재적 초월성과 미래까지 바라보면서 자기를 낮추며 대대(待對)적으로 상대방을 내 안에 들여 섬길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존재의 생명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류 600만 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간은 생명을 복제하고 뇌와 유전자를 조작하고 새로 생명을 창조하면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체세포 복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유전자가위 크리스퍼는 합법적인데, 이는 표적인 질병 유전자만이 아니라 표적을 이탈하여 표적 유전자 이외의 DNA에 예기치 않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이는 생태계를 혼란시킬 수 있다. 인지과학과 사이보그공학이 결합하여 뇌의 생각을 기계화하는 일도 가능해져 인간의 뇌에 회로만 연결하면 뇌의 생각대로 기계와 로봇이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알코 생명연장 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은 훗날에 부활할 수 있도록 인간의 뇌나 신체를 액화질소 냉동시설에 영구 보관하고 있으며” 미국과 네덜란드의 연구소는 뇌를 디지털로 복제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러시아의 억만장자 드미트리 이츠코프는 2045년까지 자신의 뇌 속에 담긴 생각과 감정, 인격을 컴퓨터로 옮겨서 영생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원리를 이용한 양자전송이 짧은 구간에서는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더욱 발전하면 인간의 양자 이동도 가능해진다. 앞으로 인간의 뇌와 기계 신체, 디지털로 복제한 인간의 뇌를 가진 홀로그램 인간 등이 영생을 누리며 실제 인간과 공존할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마음이 유물론적인 동시에 유심론적이며, 뇌와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합작용이라는 점이다. 뇌에 도파민 등 특정 물질을 주입하면 기분이 변하고 확철대오의 깨달음 경지까지 만들 수 있으며, 거꾸로 선승들이 선수행을 하면 뇌파가 발생하고 꾸준히 하면 뇌의 특정 부위가 발달한다. 에커드 헤스(Eckhard Hess) 교수가 “눈동자 크기만 다르고 다른 부분은 똑같은 여성의 사진 두 벌 4장을 보여주고 실험을 했다. 누가 더 매력적인가, 누가 더 친근감을 느끼는가 등 긍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남자들은 동공이 확대된 여성을 더욱 많이 선택하였고, 누가 더 이기적으로 보이는가 등 부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동공이 작은 여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동공 확대의 이유는 컴컴한 곳에 들어갈 때, 복잡한 생각을 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와 성적 충동이 일 때도 확대된다.” 유사한 실험에서 단지 0.1초만 사진을 보여주고 누가 더 매력적인가 질문하면 남성들은 대개 동공이 더 확대된 여성을 선택하였다. 우리의 생각에 38억 년 동안 진화한 몸의 세포들이 참여하는 것이며, 몸이 뇌보다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뇌가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인지함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뇌 이전에 몸임을 의미한다. 이 실험을 통해 보듯, 인간의 마음이란 두뇌의 신경세포에 물질 형태로 저장된 기억이 감각적 이미지의 자극을 받아 방출하는 화학물질과 전기신호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는 물질적이지만, 수많은 신경세포들 사이의 네트워킹만이 아니라 몸의 세포들이 연합한 네트워킹이라는 점에서는 유심론적이다. 기억과 정보들의 총합인 점에서는 유물론적이지만, 단지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을 추론한다는 점에서는 유심론적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보름달’에서 ‘엄마 얼굴’을 연상하고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유사성(likeliness)의 유추(metaphor)를 하거나 ‘축구’에서 ‘박지성’을 연상하고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인접성(contiguity)의 유추(metonymy)를 하는 것은 유심론이다. 이처럼, 마음이란 뇌 속의 감각신경세포, 운동신경세포, 연합신경세포, 거울신경체계만이 아니라 우리 몸에 축적된 기억과 정보 사이의 네트워킹에 의하여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정보와 기억들의 연합작용이다. 뇌를 가진 기계나 디지털로 복제된 뇌는 몸에 새겨진 38억 년의 기억을 재현하지 못한다. 나의 뇌를 가진 기계, 나의 뇌를 그대로 복제하여 나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홀로그램, 양자 얽힘에 의해 만들어진 나는 나인가, 아닌가. 이는 정녕 내가 아니다. 비슷한 것일 뿐, 가짜다. 하지만, 나란 존재 자체도 오온의 결합체로 공이다. 하여튼, 이런 과학기술들이 가능해지면, 윤리적인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까지 혼란에 놓일 것이다. 다만, 모든 존재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온의 결합체로서 공(空)이며, 제법이 무상하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무아(無我)라는 불교적 교리가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데 유리한 원리로 부상할 것이다. 지금도 현실을 소설과 영화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모방하여 현실을 구성하는 재현의 전도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자신의 동생을 수십 번 칼로 찔러 죽이고서 오랜 기간이 지난 뒤까지 게임 속의 악마를 죽인 것으로 착각하는 아이처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가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있다. 앞으로 재현의 전도는 확대될 것이며, 더욱 일상화, 구조화할 것이다. 하지만, 가상공간에서 남북통일을 수천 번 하더라도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의 시대, ‘매트릭스적 실존’의 시대를 맞아 여실지견(如實知見)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은 좀 더 맑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시민들이 재현의 위기에 현혹되지 않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실제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며 권력과 자본에 올곧게 맞서야 한다. 둘째, 자본의 논리가 4차 산업혁명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법, 제도, 시스템을 만들거나 자본주의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셋째, 생명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정치에 맞서서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생명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인 동시에 생각과 실천, 타자와 연기적 관계를 통하여 본성을 구현하고 거듭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 곧 눈부처-주체다. 우리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추구하며 팔정도(八正道)를 행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서로 선을 증장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죽임의 문화에 맞서서 우리는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모든 생명이 나의 삶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으면서 역동적으로 서로 생성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과 생명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을 가지고 연기적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불교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서 자연과 인간, 우주 삼라만상을 그물코로 연결된 하나로 바라보는 연기적 생태론을 펼친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한 동일성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공하다고 하여 인간과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중도와 공의 세계관을 펼친다. 불교는 공업(共業)과 중도(中道)를 결합하여 성장신화를 해체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삶,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생활을 제시한다. 불교는 생명을 죽이고 ‘벌거벗은 자’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죽음의 정치를 생명정치로, 일부가 자본과 폭력, 정보를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국가를 자비롭고 정의로운 생태복지국가로 전환하는 지평을 연다. 불교의 교리는 무소유를 지향하고, 나눔을 장려하고, 탐욕을 지멸하라 하고, 이타적 삶을 추구하기에 교리상 반자본주의적이다. 인공지능 생명체의 출현을 맞아 생명을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차이를 생성하는 공(空)’으로 정의하고 이에 부합하는 생명철학과 윤리를 정립해야 하며, 4차 산업혁명에 맞서서 여실지견하게 실제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며 권력과 자본에 올곧게 맞서며, 자본을 해체하거나 견제하고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생명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모든 장애를 종합할 때,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대안은 비우고 나누는 것이다. 서로 눈동자에서 눈부처를 바라보고 자신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무아와 무상을 진정으로 깨달아 모든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그를 섬겨서 부처로 만들 때 비로소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삶의 목적, 지속의 목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무상하다. 무상하기에 우리는 영원한 실재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가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죽음을 수용하고서는 하루, 한 시간을 의미로 가득 채우고 사랑하는 이를 지성으로 대하듯, 죽음에 다가갈수록 삶은 의미로 반짝인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그에 연민하고 공감한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불성이다. 끊임없는 영겁의 반복 속에서 오로지 차이만이 소중하다. 차이의 기억이 문명이다. 138억 년의 시간 가운데 ‘지금’, 465억 광년에 달하는 무한한 공간 가운데 ‘여기’에, 함께 존재하는 너와 나, 우리 둘레의 자연과 생명들이 기적이다. 이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수천 년 전에 이미 폭발하여 사라졌음에도 그 별의 잔해들은 지금 새로운 별을 만들고 있으며 거리의 차이로 인하여 우리 머리 위의 하늘에서 밝게 빛나며 수많은 의미를 품게 한다. 그렇듯, 설혹 우리가 모두 사라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상대방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면서 차이를 빚는 것이야말로 이 광대한 우주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리라. ■
이도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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