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브랑쿠시 · Constantin Brancusi, · 탄생 135주년 |
콘스탄틴 브랑쿠시 · Constantin Brancusi (Feb. 19, 1876 ~ Mar. 16, 1957) | |
- 그의 작품이 기계 부품으로 판정 받은 까닭은?
- 나의 일생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 브랑쿠시
1926년 뉴욕 세관에서 어떤 금속 물건이 세관원에 의해 기계 부품으로 판정 되어 일반 기계와 같은 관세가 붙은 적이 있다. 그것은 반짝 반짝 윤을 낸 금속으로 만든 프로펠러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의 주인은 그것을 끝까지 조각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에 올려진 이 물건은 결국 예술품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콘스탄틴 브랑쿠시였고, 그 작품은 바로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란 작품이었다. (1926년 브랑쿠시는 뉴욕의 브루머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중요한 작품전람회 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선박을 통해 들여온 화물 때문에 미국 세관과 2년에 걸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구리로 만든 <공간 속의 새>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세관원들이 그것을 조각품이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미국에 산업부품을 몰래 들여온 혐의로 고발했던 것이다. 1928년 그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호응을 얻었고 재판에서도 이겼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뉴욕 세관원은 그 물건(Object)을 실용적 관점이나 대상의 용도라는 측면으로만 보았겠지만 브랑쿠시는 정신적 필요성을 가지고 작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떨까? 변기를 벽에 거꾸로 붙여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가도 있고,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회화 작품들과 설치 미술의 난해함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그 뉴욕 세관원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불가사의에 가까운 예술 작품들을 흔히 만나야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부분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지만 문학이 기본적 으로 언어의 낭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자면 조금 이해가 쉬워질 것 같다. - 이 부분에서 문학이 어째서 언어의 낭비냐고 따지실 분이 있을 것 같아 조금 부연을 하자면 여기에서 '낭비'란 물질의 소비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필요에 의한 언어의 사용(실용적인 차원)이 아니란 점에서 감정이나 의미를 지시할 수 있는 간단한 말이 있음에도 우리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다. 그것은 '혼돈의 시대'니 '절망의 시대'하는 식으로 간단히 지시해 버릴 수 있는 시대의 의미를 숱한 언어를 소비하면서 그려내기 때문에 '언어의 낭비'라고 하는 것이다. - 바라보는 이에 따라 브랑쿠시의 작품들은 구체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로댕이나 부르델의 그것처럼 바라보면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 하는지 명확히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배척받은 현대성 - 브랑쿠시
브랑쿠시의 작품은 아무런 실용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공상이나 상상 혹은 마음속에 그려진 상을 어떤 수단을 통하여 눈에 보이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는 방법이나 소재에 변화를 주어 표현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화의 틀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기계의 금속 제품과는 다르다. 이것이 현대 조각의 특징이고 바로 이러한 점들이 고전 조각의 붕괴를 야기하는 새로운 조각들을 이끌어 냈다. 브랑쿠시의 작품은 풍성하고 창의적인 것이었다. 그의 작품 <키스>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게으른 급우가 석고를 대충 깎아 만든 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돌덩어리를 크게 변조시키지는 않았다. 이 작품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로댕의 <키스>와 비교해 보면 브랑쿠시의 것은 토속적이고 아주 단순한 형태인데 반해 로댕의 작품은 보다 구체적이고 복잡한 근육의 움직임과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두 작품 모두 매우 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브랑쿠시는 원숙기에 이르러 달걀 형태로 조각된 자신의 조각을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이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맹인들을 위해 만져서 쉽게 감상 할 수 있는 형태인 달걀 모형을 사용하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단지 간단한 모형들의 가치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온 결과이다. 몬드리안처럼 그는 모든 생명은 그 본질로 축소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으로 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은 심지어 초상화의 전통적인 개별성까지를 부인하게 하였다. 그는 머리와 눈을 표현하는데 달걀형을 사용 하면서 무용가 포가니(Pogany)의 머리를 여러 형태로 변형시켜 표현하였다. 브랑쿠시를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구체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추상의 세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랑쿠시의 작품세계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1913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 출품된 그의 작품들이 순회 전시에 나섰을 때 시카고 미술대학의 학생들은 그의 초상에 불을 지르기 까지 했다. 1920년 그는 살롱전에서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프린세스 X>라는 남성 페니스 형태의 인물상을 제작하여 전시했는데 이것은 당시 근엄한 살롱계의 평자들에게는 커다란 스캔들이 되어 결국 경찰이 개입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작품은 치워지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더욱더 단순화되고 추상화 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 이 때 제작된 작품들이 대리석상인 <물고기>와 목상인 <청년 토르소 Torso of a Young man>의 원형들이었으며 곧이어 미국에서 <공간 속의 새>가 예술인지 아닌지를 묻는 재판의 주인공이 된다. 결국 재판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게 되고 그는 고향 루마니아로 돌아와 티르구지우 공원에 <입맞춤의 문>, <침묵의 탁자>, 30m 높이의 강철로 <무한주>를 제작하고 그 개막식에 참석한다.
브랑쿠시, 새로운 세상을 보다.
- 루마니아 호비타에서 출생하고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조각가 브랑쿠시 - 1876. 2. 21 루마니아 호비타~1957. 3. 16 파리.
브랑쿠시의 부모인 니콜라스와 마리아 브랑쿠시는 가난한 시골사람들이었다. 당시의 문명의 최선봉을 달리던 유럽이었지만 낙후된 농업국가인 루마니아에서도 시골에 태어난 브랑쿠시는 여느 시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규적인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7살 때부터 목동으로 일해야 했던 브랑쿠시는 그 뒤에 카르파치아 산에서 우리말로 머슴살이같은 것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 목각을 배우게 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루마니아하면 떠오르는 사람을 들라고 하면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 의해 재창조된 드라큘라 백작이 떠오른다. 가끔 TV에서 여름철이면 심야 교양 프로그램이나 해외 관광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드라큘라 마을이라는 부제를 달고 루마니아의 전형적인 시골 농가들을 보여주곤 한다. 그 농가의 창틀이나 기둥들을 보면 브랑쿠시의 조각과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식들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역시 그가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루마니아의 민속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랑쿠시는 나이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게 되었는데 올테니아주의 티르구지우에서 염색공으로도 일했다. 크라이오바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에도 뛰어난 목각 재주로 포장용 나무 상자에서 나온 판재를 이용해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이런 손재주를 눈여겨 본 한 제조업자가 그를 후원하여 크라이오바 미술 공예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여기서 목공예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물론이고 혼자 힘으로 브람 스토커읽고 쓰기를 배워 나갈 수 있었다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 로댕의 권유를 거절한 브랑쿠시
1896년 20세에 이르러 그는 처음으로 일자리를 구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빈에 가서 체류하는 동안 그는 체류 비용을 벌기 위해 목세공인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이제 본격적인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 돌아와서 1898년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전통적인 양식의 작품보다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최초로 의뢰받았던 조각은 루마니아 의학교육의 창시자인 카롤 다빌라 장군의 흉상이었는데 이것을 제작한 것은 1903년의 일이었다. 이 해는 그가 군에서 제대하던 해이기도 했다. 부쿠레슈티로 돌아온 브랑쿠시의 귀에 들려온 것은 파리에서 한창 명성을 날리던 오귀스트 로댕의 이름이었다. 로댕의 대담한 예술들은 당대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열광과 전통주의자들의 분개 속에 화려하게 꽃피고 있었다.
루마니아 밖의 세계가 궁금해진 브랑쿠시는 먼저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1904년 봄까지 머물다가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으나 경비가 없었던 그는 거의 두 다리만을 이용해 파리까지 가야만 했다. 1904년 7월 드디어 당시 유럽의 문화 수도였던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했다. 그는 이곳에서 전통주의 예술가였던 앙토냉 메르시에의 작업실에 들어가 2년 동안 함께 일했지만 밤에는 생계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이를 해야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의 그를 도와준 이들은 같은 루마니아 동포들이었는데 그는 동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활의 도움을 구했다.
1906년에 이르러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브랑쿠시는 프랑스 미술협회가 개최한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게 되고 뒤이어 가을 살롱전에도 출품하게 된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오귀스트 로댕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브랑쿠시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하였다 고 한다.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는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가, 브랑쿠시.
조금씩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하던 브랑쿠시는 고향 루마니아의 부유한 지주로부터 작품 제작을 의뢰받게 된다. 부자우 공동묘지에 기념상을 만들어달라는 제의였는데 그는 이때 <기도하는 사람>(1907)이란 무릎 꿇고 있는 어린 소녀의 상을 만들었다. 이 조각은 그가 로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징조를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양식이 서서이 단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08년이 되자 그는 지금 우리들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잠자는 뮤즈 Sleeping Muse>를 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가 당대를 휩쓸던 로댕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로소, 아폴리네르를 비롯한 당시의 전위 작가들과 사귀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순수한 동양적인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면서 독특한 조형세계를 펼쳐 나갔다. 같은 해에 제작한 작품 중 또 한 가지 널리 알려진 작품은 <키스> 였다. 그는 동물이나 물질의 근원적인 생명감에서 나오는 단순한 선을 통해 추상에 가까운 조각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잠자는 뮤즈>는 브랑쿠시가 1912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료와 형태를 동원하여 다양하게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그는 스스로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이라 이름 붙인 달걀 형태의 조각 양식을 확립한다. 이 때의 작품들이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탄생 The New Born>, <태초 The Beginning of the World> 등이다.
그의 작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주제는 새였다. <공간 속의 새>를 제작하기 전에 그는 <마이아스트라 Maiastra>(1912)를 제작했는데, 앞서 뉴욕 세관원에게 기계부품으로 오인 받았던 <공간 속의 새>는 루마니아의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기적의 새 <마이아스트라 Maiastra>를 상징화한 것이기도 하다. 브랑쿠시는 그 무엇보다도 조각 그 자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각이란 "조각가와 재료 사이의 가차없는 대결"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시대와의 대결을 강요받은 조각가.
1916년 10월 14일. 루마니아인들은 독일의 침공을 받아 지우강 연안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방어전에 나선 루마니아 민병대에는 루마니아 정규군이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까지 참여한 것이었다. 결국 만 하루의 전투 기간 동안 1,00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만다. 루마니아는 이 전투와 희생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티르구 지우(Tirgu-Jiu)에 전쟁기념공원을 건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기념 조형물들을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랑쿠시에게 의뢰했다. 브랑쿠시는 자신의 조국이 의뢰한 이 일을 흔쾌히 수락하고 무보수로 작업에 임했다. 그는 이후 수년간 숙고 끝에 1938년 마침내 <끝없는 기둥>과 <침묵의 테이블>, <입맞춤의 문>을 완성한다. 높이가 30미터에 이르는 <끝없는 기둥>과 일련의 작품들은 브랑쿠시 최고의 작품이자 20세기 조각의 최고작이기도 했다.
브랑쿠시는 작품의 모형을 중시해 때로 조수들의 손을 빌리던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언제나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1934년 그는 <끝없는 기둥>를 제작작했다. 이 <끝없는 기둥 Endless Column>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며 자란 루마니아 농가의 기둥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으로 단테가 보았다면 바벨탑을 능가하는 신에 대한 불경으로 몰아붙였을 만한 것이었다. 대칭이 되는 요소들을 무한히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브랑쿠시 자신의 숭고한 정신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된다. 시골 생활을 사랑한 그는 언제나 단순화된 양식을 통해 인간과 우주의 형이상학적인 관계를 나타내고자 했다. <끝없는 기둥>을 제작한 뒤로는 그의 열정을 모두 쏟아낸 탓인지 작품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 점령 하에서의 전시를 거부하고,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자신의 작업실에 숨겨주기도 했다.
1952년 6월 13일 그는 53년 동안 머물렀던 프랑스로 귀화했다. 일평생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그대로 미술관에 옮겨 원래의 상태로 복원한다는 조건부로 작업실에 있던 모든 것(80점이 조금 넘는 조각품과 그의 골프채 - 브랑쿠시는 일평생 골프를 치지 않았다.)을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 유증하기로 했다. 그리고 1957년 3월 16일(aged 81) 파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헨리 무어와 함께 20세기 추상 조각을 양분했던 거인이 사라졌다.
- 출처 : http://windshoes.new21.org/art-brancus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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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1876~1957) 1876년 루마니아 남부의 페스티사니 근처 호비차(Hobija)에서 니콜라에 브랑쿠시의 8남매의 배다른 형제 중 6남으로 출생 1883년 7세 첫 번째 가출. 티르구 지우에서 모친에게 붙잡혀 돌아옴. 1887년 11세 두 번째 가출 1889년 13세 세 번째 가출에 성공 1894년 18세 <크라이오바공예학교>에 입학 1898년 22세 <부카레스트예술학교>에 입학 1902년 26세 징집. 기술병으로 2년간 복무 1904년 28세 파리 도착 1905년 29세 루마니아 교육성의 장학금으로 ,프랑스국립예술학교> 입학 1907년 31세 로댕의 초대를 받아 그의 작업실에서 두 달 동안 작업 1910년 34세 <새>연작의 첫 작품, <마이아스트라>, <잠자는 여신> 제작 1912년 36세 <포가니양> 연작 시작 1913년 37세 미국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에 5점 출품. 1914년 38세 뉴욕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하는 <사진분리파 화랑>에서 첫 번 개인전 1920년 44세 <프린세스 X> 출품 1921년 45세 사진작가 만레이에게 사진 사사 1931년 55세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문화공론훈장> 받음 1935년 59세 루마니아 티구르지우 전쟁기념공원의 기념물 작업에 착수 1938년 62세 <침묵의 테이블>, <입맞춤의 문>, <끝없는 기둥> 1944년 68세 레지스탕스와 연대 1952년 76세 프랑스로 귀화 1955년 79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대규모 회고전 개최 1957년 81세의 나이로 사망,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1876년 루마니아 티르구 쥬우 호비자 마을의 농가에서 8남매의 배다른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남. ·12세에 가출하여 목동일을 함. ·1898~1902년 부카레스트의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움. ·1902년 고국을 떠나 뮌헨, 취리히, 바젤을 거쳐 파리 미술학교 입학. ·1906년 첫 개인전 이후 뉴욕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개인전. ·1955년 뉴욕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 ·1956년 80세 축하전람회가 부카레스트에서 열림. 스튜디오의 모든 작품을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고 프랑스인으로 귀화. ·1957년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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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 Muse endormie de Constantin Brancusi. 1910 |
 | Bird in space, 1927. 하늘을 날아 가는 자유 의지, 우리 삶 속 희망의 새. | |
|  | 브랑쿠시의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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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쿠시의 조각 '공간속의 새'는 새 자체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비상하고 싶은 자유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브랑쿠시는 말했다. "평생을 통해서 비상의 본질만큼 내가 추구한 것은 없다.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 |
새라는 형태가 아니라 '새가 있는 공간'을 말하고 있다.
LA 라크마에서 185.42㎝나 되는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 1927, 브론즈)를 보면서 나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황금빛 금속의 광택이 주는 가벼움에 마음을 얹었다. 내 삶의 무력감과 남루함도 광택나는 금속처럼 반짝거리도록 닦아내고 싶었다.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는 새의 형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거울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는 황금빛 브론즈 조각은 사실 새도 아니고 빨래방망이도 아니다. 그는 형태의 물질성보다는 그 물질성과 함께 존재하는 공간을 말하려고 했다. 조각은 공간 예술이다.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감과 질감, 형태의 긴박감이 나오는 것이다. '공간 속의 새'는 극단적인 공간감각의 산물이다.
'공간 속의 새'는 전후좌우가 따로 없다. 창공에 묻혀 새의 형태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대신 조각 전체에 흐르는 힘과 긴장만이 공간 속에 팽팽하게 남았다.
'공간 속의 새'에서 하단의 원뿔 형태는 안정적이다. 상단의 몸체는 적당히 팽팽하며, 긴장된 활선을 따라 수직으로 올라가서 늠름하게 상승하고 있다.
조각의 비례 균형이 가지는 이 공간성을 보라. 상단 끝은 경사진 면으로 몸체를 따라 연속되어 있으면서 한껏 상승하여 마치 하늘의 기와 통하는 것 같다.
'공간 속의 새'라는 주제는 대상의 의미나 형태를 초월하여 본질만 남아 있다. 그래서 완전한 예술 '공간 속의 새'만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조각의 예술적 밀도와 힘은 조각의 크기와 관계없이 무한하고 그 예술적 힘은 우리 삶 속에 희망의 새로 남았다.
16점에 이르는, 비상하고픈 '자유 의지'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한때 좋아했던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를 원 없이 보았다. LA 라크마뿐만 아니라 노튼 사이먼, 구겐하임, 모마, 게티 뮤지엄('걷는 사람'만 있음)까지, 대부분의 미술관들이 크기만 조금씩 다른 '걷는 사람'과 '공간 속의 새'를 전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실존을 응축시킨 것 같은 자코메티의 인체와 비상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새'로 표현한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는 여전히 현재적 주제였다.
브랑쿠시는 '새' 연작을 27점이나 만들었는데 그 중에 '공간 속의 새'가 16점이나 된다. 그가 왜 그토록 '새'를 줄창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브랑쿠시의 유년은 불행했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는 방랑벽이 있었고 이복형제들도 불화가 잦아서 그는 몇 번씩 가출했다가 어머니에게 잡혀오곤 했다. 그는 어릴 때,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비루한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그의 자유의지가 비상하는 꿈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가출에 성공하여 고향을 떠난 뒤에 그는 어린 시절 본 눈 덮인 고향의 산야와 창공을 나는 새들을 기억하고 향수에 젖었다는 이야기도 그가 진정 표현하고 싶은 것이 새였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가 만들려고 했던 것이 새 자체의 물성은 아니다. 그것은 새가 갖고 있는 자유의지 즉 비상이다.
루마니아 전설 속의 새를 형상화
비상을 위한 그의 첫 작업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루마니아 전설의 새인 마이아스트라(Maiastra)를 단순화시킨 형태로 만들었다. 단순성이 조각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사물의 실제 의미에 접근해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단순성에 이르게 된다. '마이아스트라'에서 '금의 새'로 나아가는 이 '새'라는 주제의 성격을 구분하고 점점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새' 조각은 형식과 내용의 차이를 두고 제작되었다. 처음부터 그의 비상의 꿈이 실현된 것은 아니다. 난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몸체가 더 날렵해야 했고 땅을 딛고선 다리는 가늘어야만 했다. 이런 완전한 상태로 가기 위해서 그는 그 많은 새의 연작을 만든 것이었다. 이 점이 그의 특별한 점이다.
"평생을 통해서 비상의 본질만큼 내가 추구한 것은 없다.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라는 브랑쿠시의 말은 평생 독신으로 예술의 비상만을 추구한 그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브랑쿠시 조각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그는 '입맞춤'과 '새'를 통해서 자신의 주제를 확장시켜나갔다. 입맞춤은 대지로, 새는 하늘로. 그는 이러한 주제를 전 생애를 통해 집중적으로 제작해나갔다.
그는 이러한 주제를 사물의 형태를 만들기보다는 사물에 내포된 우주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표현 했다. 그의 조각은 자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결과물이었다. 원초적 재료와 단순화된 기본 형상으로 자연의 뒤에 깃들어 있는 어떤 정신성 같은 걸 드러내었다. 로댕이 활동적이고 외향적이라면 그는 집중적이고 조용한 추상에 가까운 형상을 창조한 것이다.
"조각가에게 비상이란 상승하는 것을 말하고 종교에서 말하는 승천을 의미한다."
그는 구도자적이고 경건한 조각가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비상을 꿈꾼 그래서 마침내 삶과 예술에서 모두 창공으로 날아오른 지상에서 가장 높이 나는 알바스트로스 같은 사람이었다.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를 보면서 소박한 날갯짓을 해본다. 그동안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새장 문을 열고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다.
- 소설가 정우련의 미국LA뉴욕미술기행. 부산일보 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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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less Column" in Targu Jiu, Romania |
The Gate of Kiss, part of the Sculptural Ensemble in Targu Jiu, 1938. |
Brancusi's "sculptural ensemble" consists of three parts, The Gate of Ki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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