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뿌리
-시는 신성(神性)을 지향한다.
이언 김동수
1. 시인과 신성
신(神)은 왜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였을까? 그리고 시인들이 창작하는 시의 뿌리는 어디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신의 천지창조와 시의 뿌리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시의 지향성과 그 가치도 확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 인간과 사랑을 나누고자 천지만물과 인간을 함께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시인 또한 신이 창조한 천지만물과 교감을 통해 신의 창조의도와 그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작품 또한 그러한 신의 구상과 합치 되어 나타났을 때, 시인은 비로소 창작의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열과 행복의 근거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세계가 신의 성품으로 창조되었기에, 이러한 신의 섭리를 깨달아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그것과 일치되었을 때,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시인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것은 신성(神性)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솟구쳐오는 희로애락도, 오욕칠정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주 자연의 본성인 신성(god, 空性,道)과 닿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신성의 뿌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과 도가(道家)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이 아닐까 한다.
우리들은 흔히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곧 우주의 실체상(實體相)이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이 인간과 함께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그 만물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생의 희열을 느끼며 즐겁게 살아가는 게 바람직한 삶의 길이라 하겠다. 인간에게는 우주의 모든 소성(素性)이 잠재되어 있기에 시인들 또한 그 생명체의 본성과 상호 교감을 통해 파동이 일치될 때 거기에서 오는 찰나적 견성과 감동의 세계가 시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연두 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 잎 하나가 내려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 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에 먼지를 닦아 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 세상은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문덕수, 「인연설」 전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경으로 생(生)과 사(死)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꽃과 내가 하나가 되고, 또 나비가 되어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는’ 초월 사유가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나비인가. 꽃나무인가. 그것은 은유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이런 시는 독자의 감상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독자에 따라 상상의 진폭이 다르기 때문이다.” (황송문의 『문예창작 강의』, ‘종교적 상상력’에서- 참조)
2. 시인과 영성
시(詩)는 언어(言)로 절(寺)을 짓는 일이라고 한다. 시인은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한다(휠덜린), 시인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을 꿈꾸는 자다(단테), 시인은 무당이다. 시를 써서 살풀이를 해주는 무당이다.(신현수, 김언희, 고영서 등), 시인은 리듬과 비유를 통해 압축된 영혼의 순간적인 극화이다. 시인은 눈물 흘리는 일을 대행하는 곡비(哭婢)다.(최광임), 시인은 초월적인 견자에 해당한다(랭보), 시인은 우주적 리듬을 호흡하고 존재의 궁극에 도달하고자 시간을 창조적으로 변용할 줄 아는 존재다.(고재종) 등등. 이렇게 본다면 시와 영성은 상통하는 관계다.
신(神)과 시인은 마이다스의 손을 지닌 창조자. 시인은 감히 신(神)만이 알 수 있는 인생과 우주의 섭리와 비의(秘義)를 그의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고양된 감정과 관찰의 어떤 지점에서 인생의 비의를 체험하는 순간에 시와 영성은 필연처럼 만난다. 이처럼 영성과 시 정신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하고 인생의 본성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공통점을 추려보면
◾시와 영성은 생명의 '신비함‘과 사랑의 '절절함'을 '간절하게' 추구gksek.
◾불경이나 성경도 시적 표현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신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만나는 지점은 매우 시적 감수성으로 넘쳐흐른다.
◾시와 영성에는 일상의 범위를 뛰어넘는 특수하고 놀라운 새로운 감각이 존재한다. 영성과 묵도와 참선, 동안거의 경지는 힘들고 지난한 감성의 투쟁이어야 가능한 것이고, 시의 전위적인 감성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바다가 번쩍 들어 올린 홍련암,
바다는 왜 하필 절을 그 벼랑 위로 들어 올렸을까.
절 받으러 절을 들어 올렸을까.
넙죽넙죽 절을 하다가 파랑새를 보았다는
보살도 있다는데,
벼랑 아래 파랑 파도가 푸드득 깃을 달고 올라와
팔작지붕에 앉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
넌 절 받으면 되고, 난 절하면 되지.
-고진하, 「홍련암에서」 전문
고진하 목사 시인는 강원 원주 명봉산 자락의 낡은 한옥 ‘불편당(不便堂)’에 산다.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기꺼이 불편을 즐기자는 뜻에서 지은 당호다. 산과 들을 다니며 들풀과 잡초를 관찰하고, “지구 별을 살리는 식물들과 사귀며, 그 고요한 순례”(‘시인의 말’ 중)에 자주 동행한다. 그렇게 야생에서 들은 이야기가 시(詩)가 된다.
그의 이번 생은 사람의 ‘영’을 닦는 일. 너나 나나 개구리나 고라니나 봄철 처마 아래 집을 짓는 제비들까지도 시인의 눈에는 귀한 손님이다. 진짜 손님을 대접하듯 배고픈 고라니에게 먹이를 나눠주기도 하며, 집 앞을 오가는 수많은 동식물의 걸음걸이와 야생의 소리를 매일 마중하고 배웅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시와 영성의 상관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시심’은 ‘영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를 종종 자문하곤 했다.
깊은 헛간 구석으로 들어가
죽은 고양이 새끼를 킁킁 후각으로 겨우 찾아
뒤란 앵두나무 아래 묻어주었는데
바람이 불어
버슨분홍* 앵두꽃 후두두둑 떨어져
슬퍼할 새도 없이
금세 꽃무덤을 지었네
저 불룩한 꽃무덤에서
돌담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꽃잎 밟고 다니던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천연덕스레
종말을 노래하는 시절
지구별 조율사처럼
꽃무덤에서 고양이든 사람이든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고진하, 「꽃무덤」 전문 *버슨분홍: 연분홍
고양이는 죽었지만 버슨분홍 앵두꽃이 후두둑 떨어져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음유시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양이는 음유시인이 될 것이다. 시를 읊으며 집 주변, 헛간, 사람 주변을 떠도는 동물 시인으로 살다가 영성을 지닌 진짜 음유시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고진하 시인은 진흙 시인이다. 인간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신의 찬연한 빛을 품고 있기에 ‘진흙 등불’이라고 말하는 진흙 시인이다. 그는 나이를 먹어도 영원히 자연의 유치원생이다. 고진하 시인은 촉각의 시인이다. 인간과 자연과 생명을 영성과 마음의 눈으로 살피는 견성의 시인이었다.
(장인수 시인의 ‘시와 영성은 어떤 관계일까?’에서-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