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급은 6.25 전쟁 당시 미 해군의 지원하에 Tacoma급 호위함을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총 4척을 인수하여 각각 61(두만), 62(압록), 63(대동), 65(낙동)함으로 명명되어 운용하게되며 6.25 전쟁에 많은 활약상을 펼치게됩니다.
1952년도에는 압록함이 미 해군 군수 지원함과 충돌로 인하여 심각한 파손으로 인하여 수리 불가 판정으로 미 해군에 반환되어 어뢰 표적함으로 생을 마감하게되며 같은 시기에 62(압록)함을 대신 할 66(임진)함을 인수 하게되며 이들 함정은 1973년도에 전량 퇴역및 폐선처리됩니다.
-제원-
건조사: -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Wilmington, California(PF-48,49)
-Kaiser Cargo, Inc., Richmond, California(PF-3,4,5)
배수량: -기준 1,430 tons
-만재 2,415 tons
크기: 92.63m/11.43m/4.17m
승조원: 190명
추진: -5,500 shp (4,101 kW) turbines x2
-3 boilers
-2축 추진
속도: 20 knots
무장: -MK-22 76mm/50 단장포 x3
-MK-1 40mm/60 2연장 x2
-Mk-4 20mm/70 단장 기관포 x9
-MK-10 헷지호그 x1
-'Y' Gun 폭뢰대 x2
-대잠 폭뢰용 랙 x2
보유함
PF 61(두만)함은 미 해군 타코마급 PF-49 USS Muskogee함은 1950년 10월 23일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서 인수하여 PF 61 두만함으로 명명되어 운용하게 됩니다.
한국전 당시 61함은 동,서,남해 기함으로 활약하게됩니다.
61함은 서해안 철수작전 1951년 01월서부터 02월까지 PF 62(압록), PC 701(백두산), 703(삼각산), 704(지리산), LST 801(용화), JMS 301(대전), 302(통영), 303(대구), 304(태백산), 306(단양), 307(단천), 308(토성), 309(대동강), 310(덕천), PG 313(충무공), YMS 501(강진), 506(강계), 507(강릉), 510(강경), 512(구월산), 514(길주), 518(영광), FS 단양, 평택, 김해와 함께 옹진 연백지구 작전에 참여하게되며 서해경비 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61함은 휴전 이후 각종 해군사관생도를 태우고 최초로 순항훈련에 참가하게되며 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다가 1972년 09월 15일에 퇴역을하게 되며 1973년 10월 01일 해군 목록에서 제외되며 최종 폐선처리 됩니다.
PF 62(압록)함은 미 해군 타코마급 호위함 PF-48 USS Rockford함을 1950년 10월 23일 미 해군으로부터 임대방식으로 인수하여 PF 62 압록함으로 변경되어 운용하게됩니다.
1951년 01월 적 후방을 교란하며 월남 피난민들을 수용하는 작전인 연백작전에 PF 61 두만함과 함께 참가하게되며 1951년 04월 15일 압록강 하류인 신미도 근해서 추락한 Mig-15 기체를 인양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수색작업중 북한의 Yak전투기 4대의 기습공격을 받게되나 1대격추 및 1대를 손상시키는 격퇴술을 보이게되며 전투 13분만에 적기는 철수 62함의 피해는 부상자 8명이었으며 이로인해 한국 해군의 우수한 함포사격술을 과시하는 전과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5개월 뒤인 1951년 09월 20일 동해 고성 앞바다 원산~청진 근해서 적 해안 봉쇄작전 중이던 62함은 해군본부로부터 새로운 작전명령 받게되며 고성 앞바다 난도에 주둔중이던 미 해군 첩보대 활동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받게됩니다.
임무는 적 해안 지역에 설치 된 포대등 방어시설 찾아내 함포로 파괴하는 일이었다.
09월 24일 정오가 지나 62함은 함포사격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해안 근처에 가까이 접근하게되며 이틀동안의 작전이 너무 일방적인 것이었기에 승조원들은 그 날도 ‘오후의 일미’(一味)라던 함포사격을 준비중이었으며 육지와의 거리르 1,450야드가지 좁히며 공격을 시작한 오후 01시 13분 갑작스러운 포성과 함게 배에 강한 진동이 일어났으며 숨겨진 적 포대에서 우박처럼 날아드는 포탄이 62함 우현 뒷부분과 갑판에 떨어졌으며 순식간에 기관실이 침수및 발전기가 먹통이 되었으며 침수를 막기위해 승조원들은 갖은 애를 다 써 보았지만, 손바닥으로 폭포수를 막는 격이었다.
적의 사격권에서 벗어나려고 물 속에 들어가 키를 떠받쳐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 설상가상으로 기관실에 불이 나 꼼짝달싹 못 할 형국이 됩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절체 절명의 순간 우렁찬 군가 바다로 가자 합창소리가 나오며 62함은 해류로 인해 육지쪽으로 밀려가게되며 당시 승조원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적의 포로가 되느니 애함과 함께 운명하자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노래였습니다.
62함의 구조 요청을 받은 미 해군 구조예인함 ATF-105 USS Moctobi함이 등장 105함은 도착하자마자 갑판을 열고 대형펌프를 이용하여 62함의 호스에 연결하여 응급 배수작업을 시작하면서 105함은 62함을 부산으로 예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인하는 동안 승조원들은 극심한 기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량은 있어지만 기관실 고장으로 밥을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식량도 침수 돼 생쌀조차 먹을 수 없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구명대에 저장 된 비상식량은 비스킷과 캐러멜 몇쪽에 볼과했습니다.
포항근해를 지나면서 연락받고 달려온 AKL 901 부산함과 조우했지만 예인항해에 지장이 될까 식량까지 전해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해 인 1952년 05월 21일 62함은 울들도 근해로가 미 해군 보급함 AOG-3 USS Rio Grande함을 호송작전에 투입됩니다.
그러나 당일 저녁 9시 15분 AOG-3함이 62함의 좌현을 들이받게 됩니다.
두 함선은 크게 손상돼 기능까지 마비되며 선실내에서는 부상자들의 비명소리와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됩니다.
62함은 보일러실 스팀 파이프가 파손되어 압력 220파운드,화씨 380도의 수증기가 맹렬히 분출되는 상태였습니다.
사고 원인은 통신장애로 침로 변경명령을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62함은 간신히 침몰에 면하고 부산항으로 예인되었지만 수리불가 판단이 내려지며 1952년 09월 03일 미국에 반환하게 됩니다.
1953년 05월 26일 PF-48 USS Rockford함은 미 해군 목록에서 삭제되며 1953년 09월 30일 어뢰 표적함으로 생을 마감하게됩니다.
62함은 미국에 보내지면서 52년도에 66함을 인수하게 됩니다.
PF 63(대동)함은 미 해군 타코마급 PF-3 USS Tacoma함을 1951년 10월 09일 요코스카 미 해군 기지서 임대방식으로 인수하여 PF 63 대동함으로 명명되어 운용하게됩니다.
한국전 당시 63함은 해상봉쇄작전등 참가하였으며 휴전후 이후에는 각종훈련및 순항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 03월 29일 북한의 간첩선을 나포하기도 하였으며 1972년 03월 28일 미국에 반환하게 되며 1973년 04월 02일 퇴역및 미 해군 목록제외 됩니다.
1973년 06월 01일 한국해군에 전시용및 훈련함으로 기증되었으며 대동함은 폐선되었는지 표적함이되었는지 아니면 해군기지내에 전시중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PF 65(낙동)함은 미 해군 타코마급 PF-5 USS Hoquiam함을 1950년 10월 05일 요코스카 미 해군 기지서 무상원조로 인수하여 PF 65 낙동함으로 명명되어 운용하게 됩니다.
한국전 당시 65함은 우리해군의 기함을 맡았으며 휴전까지 여러 해상작전에 투입되기도 하였습니다.
휴전 이후에는 1954년부터 우리해군 최초의 순항훈련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 01월 65함의 단정이 거센 풍랑에 의해 줄이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줄을 잡기 위해 서종록 수병이 급한 마음에 바로 바다에 뛰어들었으며 높은 파도와 낮은 수온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진 수병을 구하고자 故 김태원 중사가 바로 바다에 뛰어들었으며 그러나 故 김태원 중사마저 익수하기 위기에 처하자 당시 전기실장 故 이영우 중위도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10여분 사투 끝에 수병은 구조되었으나 두 故 이영우 중위와 故 김태원 중사는 점차 본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실종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후 일주일만에 시신을 찾게되며 01월 11일 현 작전 사령부의 전신인 한국함대 사령부 연병장에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정부는 故 이영우 중위와 故 김태원 중사에게 금성화랑무공훈장과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애도의 뜻과 함께 각각 10만환의 조의금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65함은 1967년 01월 17일 북괴에 피격되어 56(당포)함이 침몰하자 사고직 후 동해안 경비분대 71(경기)함, 53(한산)함과 공군소속 F-5A,F-86,헬리콥터등을 긴급동원 구조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1968년 02월 23일 해사 22기 졸업식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 참석하에 소위임관 때 예포를 발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낙동함은 1972년 08월 01일 해군목록에 기제되며 1973년 10월 01일에는 완전 구매하게되며 같은 시기에 퇴역및 폐선처리 됩니다.
그리고 48년만에 01월 22일 해군 교욱사령부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故 이영우 중위와 故 김태원 중사 흉상 제막식을 거행하기도 하였습니다.
PF 66(임진)함은 미 해군 타코마급 PF-4 USS Sausalito함을 1952년 09월 04일 요코스카 미 해군 기지서 무상원조로 인수하여 PF 66 임진함으로 명명되어 운용하게 됩니다.
66함은 1952년 05월 21일 사고당한 62함이 수리가 불가능하자 교체함으로 인수하게 됩니다.
66함은 한국전 당시 기함으로 활약하였으며 동해호송작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휴전이후 66함은 여러 훈련참가하였으며 1960년 05월 04일 66함은 동해상에서 북괴로부터 포위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08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이 승함하기도 하였으며 그로부터 9년후인 1969년 09월 14일 동해상 경비중이던 66함은 주문진 동북방 37마일 기관고장으로 태풍속에 표류중이던 어선 금성 3호를 예인하여 속초항에 예인하기도 하였으며 1972년 09월 01일에 미 해군으로부터 구매및 소유권이전 하게되며 1973년도에 퇴역및 해군목록에서 제외되며 최종 폐선처리하게됩니다.